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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지속가능한 성장, 친환경 기업

장광일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매년 6월 5일은 ‘세계 환경의 날’이다. 이 날은 1972년 ‘유엔인간환경회의’에서 국제사회가 지구환경보전을 위해 공동노력을 다짐하며 제정한 날이다.환경과 관련하여 ‘핫’한 단어 중 하나가 바로 ‘기후정의’이다. 이 단어는 “기후 변화의 원인과 영향이 초래하는 비윤리적이고 정의롭지 못한 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줄이기 위한 사회 운동”이란 말로 아일랜드 첫 여성 대통령이었던 메리 로빈슨의 ‘기후 정의’책에서 유명해졌다.그는 인디언의 속담에 “자연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후손으로부터 잠시 빌려온 것이다”라는 말을 비유하면서 “이 지구 위 모든 사람이 환경 운동가가 되어야만 다음 세대인 어린이들에게 ‘잠시 빌려온’ 세상을 제대로 지켜서 돌려줄 수 있다”라고 했다.또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78억마리 꿀벌 집단 실종사건’이다. 이 사건은 2006년 미국에서 처음 보고된 이후 현재 전 세계 꿀벌의 1/3이 사라졌고, 미국에선 멸종위기종으로 지정할 정도로 그 심각성이 대두되고 있다.메릴랜드 주립대 교수 데니스 밴 엥겔스도프는 연구 논문에서 “벌, 우리 삶, 자연으로 이어지는 연속성이 인간의 이기심과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무너지고 있다”라고 하며 지구 온난화와 살충제 남용을 막고, 꿀벌 생태계 회복을 위해 사회의 관심과 동참을 호소했다.기업에서도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를 도모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기업이 포스코다. 이 기업은 저탄소·친환경제철소를 만들기 위해 선제적·능동적인 활동으로 세계 철강업계 관계자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석탄 사용량 저감으로 온실가스 감축, 집진 설비 구비로 미세먼지 저감, 철강 부산물의 재활용의 3대 환경과제에 대대적인 투자를 진행하여 가시적 성과가 나왔고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필자는 투자부분 보다도 매년 수만건의 QSS개선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작은 환경 변화들이 더 값진 성과라고 말하고 싶다. 이 활동으로 직원들의 환경 마인드가 바뀌었고, 나아가 환경을 바라보는 시각과 개선의 의지가 높아졌기에 더욱 값지다고 본다.또한 친환경 활동을 적극 추진하는 맥도널드를 소개하고자 한다. 빨대가 필요 없는 ‘뚜껑’ 사용, 플라스틱 뚜껑 없애기, 개인 컵 사용하기 등으로 11억개가 넘는 일회용컵 사용량 감소, 14톤이 넘는 플라스틱 사용 감축 등의 성과를 보여주었다.이 환경지킴 활동은 모든 사람의 참여가 절실하다. 기업은 저탄소·친환경활동에 앞장서야 하고, 사회 구성원은 물건을 아껴 쓰고, 보존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물이 바위를 뚫는 것은 물의 힘이 아니라 물이 바위를 두드린 횟수라는 말이 있다. 나부터 지금부터 생각을 바꾸고 꾸준히 행동으로 보여준다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기업은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반드시 가야할 미션이 바로 친환경 기업이고, 이를 위해 아낌없는 지원과 개선활동을 해야 하며, 개인은 생태계의 파수꾼인 꿀벌들의 힘찬 날갯짓 재현을 위해 힘을 합쳐 환경 문제를 발굴하고 개선해 나가는데 앞장서야 한다.

2022-06-06

노래하는 그릇, 소리명상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모내기를 마친 들녘의 저녁때는 귀가 먹먹할 정도로 개구리 소리가 왕왕거린다. 어둠이 깔리면 간간이 소쩍새 소리가 별빛처럼 내려앉고, 심심찮게 부엉이 소리도 드문드문 밤을 수놓고 있다. 자연은 이렇게 수시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온갖 새소리가 새벽을 열어주고 물소리 바람소리가 마음의 청량감을 더해주는가 하면, 시원한 파도소리는 바다처럼 늘 깨어 있으라 철썩이고, 맑게 흐르는 시냇물은 지침없이 부지런하라며 끊임없이 졸졸거린다.자연은 어쩌면 거대한 음악회장이다. 풀밭을 스쳐가며 잎새를 흔드는 바람은 부드러운 선율이 손끝에서 묻어나는 하프같고, 늦거나 빠르게 맴도는 듯 쉼없이 흐르는 물은 장엄하게 연주되는 첼로 같으며, 나는 듯 거침없이 떨어지며 수만 갈래로 부서지는 폭포수는 끝 모를 스토리가 담긴 피아노 소리같다. 거기에 플룻이나 대금 같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구성진 새소리와, 한가롭거나 무단히 울부짖는 짐승들의 어설픈 외침은 악보 없는 관현악의 합주소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자연의 소리는 그저 그렇게 시시각각 울리고 변주되며 곡조를 타지만, 전혀 싫거나 거북하지가 않다. 자연의 음률은 너무 시끄럽거나 거칠지 않고 부드럽고 우아하며 편안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집을 나서면 여지없이 듣게 되는 자동차 소리나 공사장의 소음, 공장의 기계음 등은 언짢거나 기피하고 싶지만, 많이 접하고 들을수록 자연음은 마음이 맑아지고 심신의 평온함을 가져다주기에 사람들은 자연을 즐겨 찾고 힐링의 시간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그런데 바쁜 현대생활 속에서 자연을 접하지 않고도 거의 자연에 가까운 소리를 들으며 공감과 치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떨까? 이른바 노래하는 그릇 ‘싱잉볼(Singing Bowl)’은 충분히 그것을 가능케한다. 히말라야에서 비롯된 명상 주발 ‘싱잉볼’은 독특한 소리와 깊은 울림으로 진동의 하모니를 느끼게 하여 몸과 마음의 안정과 힐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명상 치유법의 일종이다. 인간의 몸이 70%가 물로 되어 있고, 소리는 물을 통해 5배 이상 빠르게 이동하기에, 몸 전체를 자극하는 매우 효율적인 수단으로 울림의 파동과 진동의 파장으로 신체의 긴장이완과 스트레스를 줄이고 심신의 활력을 되찾게 하는 사운드 테라피 명상법이기도 하다.최근에 필자는 ‘부부 행복 명상캠프’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실제 싱잉볼을 체험하고 소리를 통한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싱잉볼의 고요한 소리가 주는 아늑함과 미세한 진동이 온몸에 전해지는 가슴떨림을 느끼면서 오묘한 울림의 세계에 흠뻑 빠져드는 것 같았다. 우주의 근원적인 어떤 소리같기도 하고, 깊은 메와 골에서 그윽하게 퍼지는 산명(山鳴)같은 울림을 몸소 느끼는 시간은 그야말로 무아경(無我境)이었다고나 할까?소리는 진동이고 울림이며 물결 같은 에너지다. 저마다 제 목소리를 크게 내며 살아가는 시대에 자연과 타인의 소리를 경청하고 공감하여, 배려와 존중이 공명(共鳴)하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2022-06-06

우리는 왜 뱅크시에게 열광하는가?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홍길동 같은 영국 미술가가 있다. 뱅크시(Banksy)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그는 브리스톨 출신으로 1974년 태어났다는 것 이외에 알려져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잠든 도시의 밤을 누비며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로 그림을 그리고 사라지는 그를 가리켜 그래피티 아티스트 혹은 스트리트 아티스트라고 부르지만 미술가 스스로는 자신을 ‘예술 테러리스트’라고 칭한다. 그를 부르는 명칭이 어떻든 간에 분명한 것은 그가 우리시대 대중들을 가장 열광시키는 미술가라는 사실이다.무엇보다 자유에 큰 가치를 두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은 규정되어 진 것에 대한 저항한다. 이들의 낙서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부정적이다. 공공기물을 훼손하고 도시 미관을 해치는 반달리즘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뱅크시의 작품만큼은 다르다. 상업주의 미술에 반대해 누구도 소유할 수 없도록 건물 벽면에 그렸지만 뱅크시의 바람과는 달리 그의 작품은 엄청난 가격에 거래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품이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자 뱅크시는 엉뚱한 일을 벌였다. 2013년 어느 날 뱅크시는 센트럴 파크에 노점을 깔고 자신의 그림을 팔기 위해 내놓았다. 이것이 뱅크시의 깜짝 이벤트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시카고에 사는 한 남성이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그림 4점을 60달러에 구입했다. 이것이 뱅크시의 원작인 것이 밝혀지자 그림 값이 순식간에 45만달러로 치솟았다. 또 이런 일을 벌이기도 했다.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을 찾아 아무도 모르게 자신의 그림을 걸었다. 영국박물관 전시실 벽면에 소를 사냥하고 쇼핑하는 원시인 그림이 그려진 돌을 전시했다. 며칠이 지났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한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현대미술관에서도 비슷한 장난을 쳤다. 이 일로 ‘뱅크시 당했다’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다. 뱅크시는 2017년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에 더 월드 오프(The walled off)라는 이름의 호텔을 열었다. 베들레헴은 가장 중요한 기독교 성지 중 하나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치열한 분쟁지역이기도 한 이곳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세워진 높은 장벽이 있다. 뱅크시는 장벽 바로 옆에 호텔을 세웠다. 내다보이는 유일한 풍경은 높은 장벽 뿐이고 하루 종일 해 드는 시간도 고작 25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호텔 벽면 곳곳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처한 힘든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뱅크시의 호텔 전체가 평화와 인권을 위한 기념비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지만 특히 3번 객실 벽면 장식 그림이 큰 울림을 준다.침대 머리와 맞닿은 벽면에 두 남자가 그려져 있다. 이스라엘 군인 복장의 한 남자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팔레스타인 남자가 깃털을 날리며 베개 싸움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복잡한 역사와 더 복잡한 정치적 갈등이 불러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을 함축하는 뱅크시의 그림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문구처럼 가슴에 확 와 닿는다.코로나가 창궐하던 2020년 뱅크시는 영국 남부 사우샘프턴 병원에 ‘게임 체인저’라는 그림을 기증했다. 가로 세로 1미터 크기의 흑백 그림에는 소년이 등장한다. 소년은 배트맨이나 스파이더맨을 선택하는 대신 마스크를 착용한 간호사 피규어를 높이 들고 있다. 코로나로 모든 희생을 감내하는 의료진이 진정한 영웅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기증된 그림은 경매를 통해 1천680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260억원에 판매되었고 수익금은 모두 의료진과 환자를 위해 사용되었다고 한다.뱅크시의 그림은 어렵지 않다. 아무리 심각한 문제도 뱅크시를 거치면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메시지는 약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해진다. 뱅크시의 메시지는 항상 가장 현실적이다. 뱅크시는 관념적이지 않다. 뱅크시에게 정의는 구호가 아니라 실천이다. 그리고 그런 뱅크시는 분명한 변화를 일으킨다. 미술이 이래야 하지 않는가? /김석모 미술사학자

2022-06-06

올림퍼스의 노예들 <Ⅳ>

노마는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소리 지르지 마. 창피하게.안나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노마에게 작게 말하라 시늉을 했다. 노마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쓸데없는 말 말고 제대로 말해봐. 너는 뭐라고 대답했는데?-그 사람이 나한테 직접 말한 것은 아니고 그 사람이 그 사람 아들에게 그렇게 약속했대. 그 사람 아들이 내게 이야기해줬어.-뭐라고? 그러면 회장 아들이 협박을 한 거야? 이거, 이거 딱 그림이 그려지네.안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알고 있어라 내게 귀띔을 해 준거야. 알아서 살 궁리를 하라 말해준다는 느낌이었어. 갑자기 당하고 나서 놀라지 말라는 그런 뉘앙스. 그리고 그 사람 아들 그 사람과 안 친해. 부자지간인데 잘 보면 무슨 원수 같아.-안 친하기는 뭘 안 친해.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부자지간이지. 가족끼리 싸우다가도 제삼자 앞에서는 달라지는 게 사람이야. 네가 아직 순진해서 잘 모르는 거야. 이것들이 교묘하게 말이야.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순진한 사람을 가지고 놀려고 하네. 그 자식이 뭣 하러 널 위해 그런 것을 말해주겠냐? 혹시나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시끄럽게 하지 말라. 그거잖아.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거지. 이런 나쁜 놈. 너, 그 자식 전화번호 알지? 전화번호 내게 보내. 내가 한 번 만나야겠어.안나는 그 자식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다시 물었고 노마는 인조인간 말고 인조인간의 아들을 말한 것이라 대답했다.-만나서 뭐라 할 건데?-걱정하지 마. 무턱대고 싸우지는 않을 테니까. 정확한 뜻과 의도를 확인해야지. 그 쪽에서 뭘 줄 수 있는지 확인도 하고 다짐도 받아야지. 지금까지는 그냥 있었는데 안 되겠어.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야겠어. 넌 모른 척하고 가만있어. 전화번호나 보내.노마는 자신을 바라보는 안나의 눈길, 여동생이 보내는 신뢰와 감사의 눈빛에 마음이 약간 누그러졌다. 화제를 돌렸다.-참, 인조인간 수술이 언제라고 했지? 벌써 병원도 다 정하고 그랬나?-아직 날을 정하지는 않았어. 출시 예정인 신제품이 있는데 그걸 기다리고 있대. 왜? 꽃이라도 보내시게?-꽃 같은 소리 하기는. 위험한 수술은 아닌 거지?-갑자기 걱정을 해주고 그래? 인조인간 어쩌고 하더니.-어찌 되었던 조카의 아버지가 될 사람이니 건강해야 하잖아. 의료사고 같은 것 생겨서도 안 되고. 혹시 너, 우현이 기억나? 내 친구. 우리 집에도 제법 놀러 왔었잖아. 같이 영화도 보러 가고 그랬는데.-기억하지. 그런데 왜?-그 녀석이 인공 장기 관련 사업을 하거든. 인조인간이 수술을 받는다기에 그 녀석 생각이 잠깐 났어. 그 녀석을 도와줄까 하고. 안 되겠지? 인조인간은 정품으로 들어온 최고급만 쓰겠지?-우현 오빠한테 내 이야기 한 거야? 오빠가 말한 거야? 여동생이 마이걸이 되었다고. 미쳤어?안나가 발끈했다. 노마는 손사래를 쳤다.-아니야, 아니야. 설마 내가. 그냥 한 번 해본 생각이야. 정말이야. 그 녀석은 아무것도 몰라.-절대로 말하면 안 돼. 그런 일 생기면 오빠하고 나 사이는 끝이야. 그리고 아무튼. 돈이 문제가 아니야. 이번에 이식받으려는 것은 인공 폐인데 신제품이야. 중고가 없어. 다른 곳에서는 구할 수도 없고. 그리고 오빠는, 오빠 조카의 아빠가 되는 사람 수술인데 중고를 권하려 했단 말이야?안나는 자신이 마이걸이 된 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노마를 다그쳤고 노마는 이전에도, 앞으로도 그런 일 없을 것이라 다짐했다. 노마는 문득 궁금했다.-안나, 너 우현이 중고를 취급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나는 중고라고 말한 적 없는데.안나는 예전에 노마가 이야기해준 적 있다며 벌써 깜빡깜빡하는 것이냐 놀렸다.그날 노마가 맡은 곳은 스무 군데였다. 점심시간을 포기하고 안나를 만났었다. 오전에 일곱 집을 돌았으니 오후에 열세 곳을 방문해야 했다. 오후 첫 방문 수리는 카페 근처의 아파트였다. 현관 벨을 누르고 한참을 기다렸다. 노인의 발걸음이다. 모니터로 노마를 확인하고 현관까지 걸어오는데 제법 시간이 걸린다. 방 안에 있었다면 더할 것이다. 노마는 기다리는데 익숙했다. 문이 열렸고 노마가 현관으로 들어섰다. 현관 입구에 서 있던 노인이 노마를 아래위로 살폈다.-기사 양반 기다리느라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노마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약속한 시간보다 십오 분 정도 빠른 방문이었다.-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일단 로봇부터 보겠습니다.노인은 노마를 가정용 로봇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로봇은 거실 한쪽에 세워져 있었다. 최근 출시된 신제품이었다.-바꾸신 지 얼마 안 되었군요.노인은 그걸 어떻게 아느냐 감탄을 했다.-제 일인데요. 어르신이 접수하실 때 말씀주시기도 했고요. 신제품은 원래 고장이 잦습니다. 다음부터는 신제품이 출시된 후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교체하십시오. 그래야 생산과정이나 개발과정에서 놓친, 뒤늦게 발견된 오류 같은 것들이 교정된 제품을 쓰실 수 있을 겁니다.노마가 로봇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로봇의 골격이나 외관에는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어르신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 하셨지요? /김강 소설가

2022-06-06

지방선거도 끝났다

윤영대수필가 6월이 시작되는 첫날, 그동안 3월의 대선과 더불어 국민의 관심을 끌었던 전국지방 선거가 끝났다. 선거법 34조에 임기종료일 전 30일 이후 첫 번째 수요일이 1일이었기 때문이다. 투표 마감 시간 조금 전에 아파트 내의 경로당 투표소로 가서 주민등록증을 보여주고 투표용지 3장을 받았다. 도지사, 시장, 교육감 난에 도장을 찍어 투표함에 넣고 나니 또 4장을 준다. 도의원, 시의원, 도·시의원 비례대표용이다. 색깔이 모두 다른 것은 아마도 개표할 때 쉽게 분류하기 위한 것 같다.밤 9시쯤 개표방송을 보니 전체 4천430여만 명 유권자 중 50%를 겨우 넘겨 약 2천215만 명이 투표했는데, 지난 대선 이후의 피로감과 함께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의 불화 등으로 인한 진보와 중도 유권자의 이탈 및 국민의 힘 보수층의 투표 포기가 원인일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지난 대선 때의 투표율 77.1%에 비하여 50% 정도로 떨어진 것은 약 1천만 명이 투표하지 않은 것이며, 특히 2030세대의 무관심이 중요 원인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제7회 지방선거 때의 60.2%보다 10% 적은 셈이다. 사전투표율은 전국 20.6%로 역대 최고였는데, 경북은 23.2%로 4위, 대구는 14.8%로 꼴찌여서 투표율에 비상이 걸리고 투표 참여를 권유하는 메시지가 날아오기도 했다.이번 선거의 핵심은 9개 도와 8개 광역시 등 모두 17개 단체장을 선출하는 것인데 현 여당인 국민의 힘이 12곳,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5곳을 차지했다.2018년 지방선거에서는 이와 반대로 2곳과 14곳이었고 지난 대선 때 지지율은 10곳과 7곳으로 바뀌었다가 이번에 더 많은 차이가 난 것을 보면 지난 정부의 실정 탓인지 새 정부에의 믿음 때문인지 민심을 다시 읽는 자세를 가져야겠다.연령대별 지지 후보를 보면 2030세대는 남자가 국민의 힘, 여자가 민주당을 더 지지하고 있어 같은 세대별 남녀 지지도에도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또 60대 이상은 국민의 힘에 60% 이상의 지지를 보이고 있다. 전국 당선자 상황을 중계하는 TV화면을 보면 지역별로 지지하는 당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갈려져 있어 지방선거는 역시 인물보다는 지지 정당의 선택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곳은 대선에 출마했던 두 후보가 나온 선거구이다. 두 후보 모두 자신이 뜻했던 바를 이루었으니 국민에게 언약한 바를 꼭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대구경북의 무투표 당선에는 기초단체장 3명, 광역의원 37명, 기초의원 11명이나 되며 거의 국민의 힘 후보이니 지역에 따른 편중이 너무 심하고, 당 차원의 공천을 받지 못하는 경우 무소속이 난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권자 과반이 국정의 안정을 택했고 정권에 대한 평가가 이번 지방선거의 표심을 갈랐다고 보여진다.이제 국민의 마음을 얻은 단체장과 지방 의원들이 선출되었으니 모두 뜻을 합쳐서 더욱더 살기 좋은 지방을 만들어 가길 바라는 바이다.

2022-06-02

그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세모시 옥색 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나가 구름 속에 나부낀다./ 제비도 놀란 양 나래 쉬고 보더라.// 한 번 구르니 나무 끝에 아련하고/ 두 번을 거듭 차니 사바가 발아래라/ 마음의 일만 근심은 바람이 실어가네”김말봉의 시에 금수현이 곡을 붙인 이 노래를 듣노라면 아리따운 처녀가 그네를 타는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요즘 놀이터에서 흔하게 보는 그런 그네가 아니라, 높다란 나뭇가지에 밧줄을 매어서 길게 늘어뜨린 그네라야 이런 정경이 된다.특별한 기술이나 훈련이 필요한 게 아니라서 누구라도 탈 수 있는 게 그네지만, 기왕지사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 여성이면 한결 멋스러울 것이다. 위의 노래가 그리는 장면은 아마도 단옷날 추천대회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체력이 좋고 간이 큰 여인들은 거의 수평으로 날아올라 나뭇가지를 발로 차기도 하는데, 그야말로 물 찬 제비처럼 날렵하고도 우아한 모습이었다. 그네라는 단순한 도구를 이용해서, 고도의 훈련을 쌓은 발레리나의 동작보다도 오히려 시원스럽고 짜릿한 쾌감을 주는 몸짓을 연출할 수 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가사를 쓴 김말봉 작가도 어린 시절 그네를 많이 타본 모양이다. 그래서 그네를 타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2절에는 그네를 타는 기분을 멋지게 표현하고 있다. 그네뛰기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사바세상을 발아래로 마음의 온갖 근심을 날려 보내는 초월적 유희처럼 그려낸 작가의 상상력이 통쾌하다. 조지훈 시인은 승무(僧舞)의 절제된 몸짓에서 종교적 법열을 보았다면, 그네를 타는 몸동작은 그보다 날것의 생동감으로 삶의 환희를 보여준다고 할까.그네뛰기는 ‘고려사’를 시작으로 여러 문헌에 단오절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로 기록돼 있다. ‘고려사 최충헌전’에는 “단오절에 충헌이 그네뛰기를 백정동궁(柏井洞宮)에 베풀고, 문무 4품 이상을 초청하여 연회를 사흘 동안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최이전’에도 “5월에…. 관원들을 초청하여 연회할 때에 채붕(彩棚)을 매어 산같이 만들고 수를 놓은 장막과 깁 휘장을 둘러치고 그 가운데는 그네를 매어 무늬 놓은 비단과 채색 꽃으로 꾸몄다”고 하였다. 그 밖에도 한림별곡, 열왕세기 등에 기록이 있어 그네뛰기 풍습이 성행해온 것을 알 수 있다.“오월이라 단옷날은 천중가절이 아니냐/ 수양청청 버들숲에 꾀꼬리는 노래하네/ 후여넝츨 버들가지 저 가지를 툭툭 차자/ 후여넝츨 버들가지 청실홍실 그네 매고/ 임과 나와 올려 뛰니 떨어질까 염려로다/ 한 번 굴러 앞이 솟고, 두 번 굴러 뒤가 솟아/ 허공중층 높이 뜨니 청산녹수 얼른얼른/ 어찌 보면 훨씬 멀고 얼른 보면 가까운 듯/ 올라갔다 내려온 양 신선선녀 하강일세/ 난초같은 고운머리 금박댕기 너울너울/ 외씨 같은 두 발길로 반공중에 노니누나/ 요문갑사 다홍치마 자락 들어 꽃을 매고/ 초록적삼 반호장에 자색고름도 너울너울….”민요에 담긴 그네뛰기 역시 흥겹고 멋스럽다. 그네를 타는 사람의 짜릿한 쾌감에 못지않게 보는 이를 즐겁게 하는 시각적인 멋도 있으니, 예술적인 요소를 겸비한 놀이라 할 것이다.

2022-06-02

지방선거 이대로 안된다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지방선거, 이대로 둬선 안되겠습니다. 특히 나라의 백년대계라 할 초·중등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감 후보는 누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지 조차 잘 알지 못한 채 찍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군·구의회 의원들 역시 이름 조차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이어서 누구를 지지해야 할 지 모를 지경이었습니다.”6·1지방선거를 치른 1일, 주민들의 투표소감은 개탄일색이었다. 주민자치권을 보장하기 위해 실시하는 지방선거가 오히려 주민들이 전혀 모르는 인물을 특정 정당의 후보라는 이유로 지지하게 되는 불합리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 주민들은 시·군·구의회 의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 지 잘 모르고 투표해야 했다고 말한다.특히 교육감 후보의 경우 정치적 중립을 보장한다며 정당공천을 없애는 바람에 보수와 진보진영 후보가 난립, 주민들에게 혼란만 주고 있다. 정당지원 없이 개인 돈을 많이 쓰게 만든 것도 문제다. 교육감 선거의 경우 광역자치단체장 선거비용제한액과 같다. 경북 교육감 선거의 경우 15억3천200만원, 대구 교육감선거는 11억7천300만원이 선거비용 한도액이다. 득표율 15%를 넘으면 선거비용을 전액보전받을 수 있다지만 보전받는 비용 외에 선거비용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지출까지 포함하면 실제 선거에 쓰이는 돈은 한도액을 훌쩍 넘긴다. 평생 교육행정에 몸담은 교육감 후보들에게 10억원이 넘는 선거비용은 큰 부담이다. 그러니 교육감 후보들은 막대한 선거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출판기념회를 활용한다. 책 정가는 1~2만원이지만 참석자 대부분은 5만원권 여러 장을 봉투에 넣고 책을 받아간다. 인사권자인 교육감이 출판기념회를 열면 직원들은 찾아가 눈도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선거에 쓴 개인 돈 수억원을 메꾸려고 당선 후 업자들에게 뒷돈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지난 2007년 교육감 직선제가 시작된 이후 뇌물수수, 정치자금법 위반, 횡령 등으로 유죄판결이 확정된 교육감만 11명에 이르는 게 그 방증이다.교육감 선거방식은 확 바꾸는 게 옳다. 껍데기만 정치중립인 선거를 치를 게 아니라 차라리 시도지사 임명제로 하거나 시도지사 선거에서 교육감 후보자를 러닝메이트로 지정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그래서 뇌물수수 등 각종 비리에 연루될 여지를 없애는 게 낫다. 개인후보자의 선거운동을 금지하고, 선거벽보·공보·현수막·TV토론 등 선거운동 일체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전담하는 선거공영제를 실시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다.기초의원 선출도 문제다. 정당공천제를 폐지해 중앙정치에 예속되는 폐해를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정치권은 오불관언이다. 지역구에서 총선을 치러야 하는 정치권은 시·군·구 기초의원들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일까. 기득권을 내려놓지 않으려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지방선거 제도를 이제는 바꿔야 한다. 기초의원과 교육감 선출방식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에 정치권은 귀기울여야 한다.

2022-06-02

경산 자인단오제

오늘이 음력으로 5월 5일 단오날이다. 단오날을 맞아 경북 경산시 자인면 계정숲에서 열리는 경산 자인단오제는 지역행사로서는 독특한 면이 있어 관심이 쏠린다.신라시대 때부터 전승돼온 민속행사라는 것만으로 주목되는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단위 민속축제며, 축제 내용이 비교적 온전하게 전수돼 지역성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것도 볼거리다. 또 자인면 주민들이 잘 단합해 지금까지 축제를 이끌어왔다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단오행사는 지역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특성이 있다. 단일행사로 가장 큰 규모는 강릉단오제다. 강릉단오제는 국가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돼 있으며, 2005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경산 자인단오제도 국가무형문화재 44호로 지정받아 지금은 단오제로서는 강릉단오제와 더불어 우리나라 대표 축제로 인정을 받는다.자인단오제는 신라시대 한장군을 섬기는 제례 행사에서 유래했다. 한 장군의 실존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오래전부터 한장군은 자인면의 수호신이다.신라시대 자인면 부근에 있던 왜구들이 자주 마을로 침범해 주민을 괴롭히자 한장군은 여동생 등과 함께 여장을 하고 춤을 추면서 그들을 유인한 뒤 모두 섬멸했다는 전설이 있다.한장군에 대한 고마움으로 마을 주민이 그의 사당을 짓고 제례를 올리면서 연 축제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 당시 왜구를 유인하기 위해 추었던 춤인 여원무를 비롯 한장군묘 제례와 창포물에 머리감기, 그네뛰기, 씨름, 단오굿 등 각종 민속 연희가 이날 단오제 행사에서 재현된다. 우리 지역서 열리는 축제도 이 정도면 볼만하다. 오늘부터 3일간 열린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6-02

선거, 이대로 좋을까

장규열 한동대 교수 대선, 총선, 그리고 지선. 선거, 선거, 그리고 선거. 민주주의의 꽃이라는데 국민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막 지나간 전국동시지방선거. 동네의 일꾼을 뽑는 잔치여야 할 터에, 온 나라 행사가 돼 사방이 확성기 소음으로 시끄러웠다. 지역이 바뀌고 살림이 나아질 기대는 저만치 가고 후보 간 표 싸움만 그득하였다. 도지사와 교육감, 시장과 시의원, 군수와 군의원을 한꺼번에 뽑아야 하니, 보통사람 유권자 입장에선 누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기도 버거운 판. 무엇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가늠도 하기 전에 표는 던져야 하니, 선거가 정말 시민과 지역을 위한 결과를 낳았는지 누구도 확인하기 어렵다.후보의 입장에서 보아도 정책이나 능력으로 승부하기 보다 인기몰이나 세를 과시하는 일이 최우선이었다. 새로운 일을 만들고 지역에 구체적인 변화를 앞당기며 마을과 동네에 미래비전을 세워야 했지만, 포퓰리즘과 표심몰이에만 집중하는 선거는 또다시 그렇고 그런 결과를 낳을 터이라 유권자는 선거에 특별한 기대를 걸지도 않았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기는커녕 제자리걸음만 반복하는 답습의 역사만 쌓을 뿐 아닌가. 우리는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확성기와 현수막, 허리인사와 악수세례로만 치르는 선거를 하염없이 거듭하는 선거판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비전과 희망을 실은 정책이 만들어지고 토론과 홍보를 통해 겨루어지며 언론이 정상 작동하면서 확인되고 검증되는 진짜 민주주의는 실현할 길이 없겠는지.정책 입안의 과정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홍보 전략의 진행이 체계적으로 정돈되며 언론 소통의 전달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일은 우리 민주주의에 불가능한 것일까. 정책은 지역의 현안을 치밀하게 분석한 결과로 토론과 조율을 거쳐 정교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홍보는 유권자의 생각과 의견을 반영하면서 진심을 담아 진행되어야 한다. 언론은 지역과 유권자의 현상을 가늠하고 후보자들의 정책을 비교하면서 균형있는 소통을 이끌어야 한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소란스럽고 현란하기만 할 뿐, 정책과 비전은 뒷전에 물리고 표심만 구걸하는 모습이 아닌가. 막걸리와 고무신이 판을 치던 그 옛적 선거와 무엇이 그리 다른지 알 길이 없다. 민주주의발전을 위한 미래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정책, 홍보, 언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전문교육기관이 필요하다.소란하였으나 알맹이는 없는 선거방식은 이제 막을 내려야 한다. 막대한 비용을 치르고도 구습만 반복하는 선출방식은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쳐 반드시 수정하여야 한다. 21세기에 제자리걸음은 사실상 퇴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민주주의의 허울을 쓰고 인기영합에만 집중하는 선거는 실패와 패착을 거듭할 뿐이다. 뽑아놓고 후회하는 습관이 어디서 왔을까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정책, 홍보, 언론이 선진화되지 않고는 선거가 제자리를 잡을 길이 없다.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발전하기 위하여도 정책, 홍보, 언론의 전문화가 시급하다. 오늘 선거는 우리가 바라는 결과를 빚고 있는가. 새로 뽑힌 일꾼들이 분발하길 바란다.

2022-06-01

검은 코끼리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검은 코끼리는 지구온난화를 불러일으키는 무분별한 환경파괴를 경고하기 위한 용어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을 알고있지만 모른 척하면서 해결하지 않는 문제를 의미한다. ‘검은 백조’와 ‘방 안의 코끼리’를 합쳐서 만든 말로,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이 기후변화를 검은 코끼리에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프리드먼은 자신의 저서 ‘늦어줘서 고마워요(Thank you for being late)’에서 무분별한 환경 파괴로 인한 기후 변화를 검은 코끼리에 빗댔다. 무분별한 환경파괴로 인한 기후변화가 큰 위기로 다가올 것을 알면서도 모두들 외면한다는 것이다.이 용어의 어원에 쓰인 ‘검은 백조(Black Swan)’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나 큰 충격을 주는 상황을 의미한다. 미국의 투자전문가 나심 탈레브의 저서 ‘The Black Swan’에서 처음 언급된 용어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대를 예언하면서 점차 다양한 분야에서 쓰이게 됐다. ‘방 안의 코끼리’란 용어 역시 비유적 표현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누구도 먼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크고 무거운 문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방 안에 코끼리가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 어느 누구도 코끼리를 보지 않은 척하며 이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명백한 문제 또는 위험으로 다수가 반대할 것 같은 상황에서 괜히 먼저 말을 꺼냈다가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일으킬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다. 환경파괴가 전지구적인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을 알면서도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경우를 가리킬 때 쓰인다. 지구온난화는 인류 모두가 함께 힘을 모아 대응책을 세워야 할 문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6-01

최고의 노인 복지는 취업이다

김규인수필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과 평균수명의 증가로 급속하게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고령화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세계의 대다수 국가에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늘어나는 수명에 사회제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회사의 정년은 60세이고 이마저도 다 채우고 퇴직하는 사람은 드물다. 자식들 뒷바라지 하느라 자신의 노후를 준비하지 못한 베이비붐 세대의 이른 퇴직은 준비되지 않은 노후를 맞는다. 베이비붐 세대의 퇴직에 맞추어 시작된 코로나는 그들의 자립을 더 어렵게 한다.코로나는 마지막 기대를 걸고 시작한 가게를 파산으로 몰고 간다. 중고 식당 용품을 취급하는 가게는 더는 물건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매장이 물건으로 가득하다. 문을 닫는 곳은 많아도 새로 시작하는 곳은 줄어든다. IMF 때보다 더 힘들다는 하소연이 빈말이 아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퇴직이 한꺼번에 이루어진다면 정부가 부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은 많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언론에서는 연일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의 고갈을 이야기한다. 대법원의 임금 피크제 판결은 그동안 정부 정책을 믿고 따른 기업이 배신감을 느끼게 한다. 이상만을 좇다가 남은 밥그릇마저 깨버리는 잘못을 범할까 두렵다.젊은이의 취업 문제도 해결되지 못하는 마당에 나이 든 사람들의 일자리를 말한다고 누구는 나무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적 비용 측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점을 고려한다면 노인들의 일자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구 비율이 높은 베이비붐 세대의 일시적 퇴직은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이들을 위한 연금 등 사회적 비용을 부담하는 것보다 임금 피크제로 그들에게 세금을 거두며 서서히 퇴직시키는 편이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사회적 활동에서 밀려난 몸이 병을 얻어 드러눕는다면 이를 치료하기 위한 비용은 더 늘어난다는 것을 정부 및 지자체는 명심해야 한다.세계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정년을 연장하는 추세에 있다. 일본은 65세에서 70세로 정년을 늘리고, 아일랜드는 66세에서 68세로, 미국은 68세부터 연금 수급이 시작되고 80세가 되어도 대학에서 강의한다. 부자 나라에서도 정년 연장으로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나이 든 사람의 직장은 단순한 일자리 하나가 아니다. 사회의 어른이 매일 아침 할 일 없이 등산으로 하루를 보내거나 어두운 표정으로 길거리를 배회하지 않아도 된다. 빠듯한 살림을 사는 자식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오래간만에 집을 찾은 손주에게 웃으면서 용돈을 건넬 수 있게 한다. 굽은 노인의 허리를 바로 펴게 하고 넘어진 자존심을 바로 세우는 일이고, 자식 세대의 부담과 갈등을 줄이는 일이다.정부는 큰돈을 들여 ‘노인 맞춤 돌봄 서비스’를 실시한다. 독거노인 가구를 지원하는 사업도 필요하다. 하지만 대중교통의 무임승차처럼 움직일 수 있게 하여 스스로 건강을 돌보게 하는 정책이 더 좋다. 최상의 복지는 개개인의 능력과 건강 상태에 따라 제대로 된 일자리를 노인들에게 마련해 주는 것이다.

2022-06-01

손을 마주잡고 문턱을 넘다

노승욱포스텍 교수·인문사회학부 “보여줘야죠, 법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가르쳐야죠, 사람을 해하면 어떤 대가가 따르는지.”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에서 심은석 판사(김혜수 분)가 부르짖듯 내뱉은 대사이다. 소년범을 혐오한다고 말하는 심 판사는 소년범에 의해 어린 아들을 잃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소년범죄자를 싫어하고 미워하면서도 그들의 재범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심 판사의 언행에는 애증의 감정이 서려 있다.소년 범죄와 관련된 기사가 보도될 때마다 제정된 지 69년째인 소년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대선 과정에서 ‘촉법소년’으로 불리는 소년범의 연령 상한을 14세에서 12세 미만으로 낮추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그렇지만 처벌이냐, 교화냐의 오래된 딜레마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최근 제주지방검찰청은 교화에 목적을 둔 새로운 방안을 제시했다. ‘손 심엉(손잡고) 올레’라는 소년범 선도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재범의 가능성을 줄이겠다는 것이다. 지역의 자원봉사자들이 소년범의 재활을 돕기 위해 그들과 올레길을 함께 걷겠다는 취지는 신선하면서도 숭고하다.손 심엉 올레를 제안한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프랑스 작가인 베르나르 올리비에가 만든 ‘쇠이유(Seuil·문턱)’에서 영감을 얻었다. 쇠이유에서는 ‘함께 걷기’를 통해 소년범죄자들의 재활을 돕고 있다. 멘토와 함께 2천㎞ 이상을 걷는 치유 프로그램은 소년범의 재범률을 15% 내외로 낮추면서 감옥의 대안이 되고 있다.제주 올레길을 개척했던 초대 탐사대장은 서명숙 이사장의 동생인 고(故) 서동철 대장이다. 서 이사장은 조폭 생활을 청산한 동생과 올레길을 답사하면서 쇠이유 프로그램을 떠올렸다고 한다. 성년인 동생에게 변화를 준 올레길 걷기가 청소년들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손 심엉 올레의 꿈을 품게 되었다는 것이다.프랑스의 철학자인 프레데리크 그로 교수는 ‘걷기, 두 발로 사유하는 철학’에서 “그냥 산책만 해도 멈춤의 자유를 얻게 된다”고 썼다. 목적지를 향한 발걸음의 규칙성은 걱정거리와 집착, 잘못된 습관들을 멈추게 할 수 있다. 걸으면서 느끼는 해방감과 자유는 길 위의 순례자를 변화시키고 치유하는 호르몬과도 같다.손 심엉 올레에서 앞으로 어떤 스토리가 만들어질지 사뭇 궁금하다. 쇠이유의 걷기 프로그램이 청소년 범죄의 재범률을 낮추었다고 해서, 장밋빛 희망을 성급히 가져서는 안 될 것이다. 당장 숫자로 증명하는 것에 조급해하기보다 소년범에게 치유와 변화의 삶을 찾아 주는 데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어린 나이에 범죄의 수렁에 빠진 소년범에게 교정이나 교화라는 말은 높은 허들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누군가 손을 마주잡고 함께 걸어 준다면, 새 삶의 문턱을 넘어서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소년에게 “손 심엉 가자”는 제주 사투리로 손을 내미는 ‘소년멘토’의 모습이 벌써부터 어른거리는 듯하다.

2022-06-01

체르노빌과 일본 원전 오염수

한 국가의 이미지는 종종 미디어를 통해 각인된다. 전쟁이나 대형재난사고 등 참혹한 현장이 언론에 그대로 노출되면서 많은 이들의 뇌리에 박힌다.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가 대표적이다. 우크라이나는 ‘체르노빌 원전사고’라는 대참사의 기억까지 더해져 비극의 이미지로 공전 중이다.2019년 미국의 케이블방송사 HBO가 고증해 낸 드라마 ‘체르노빌’은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고스란히 재현해냈다. 사고 축소와 은폐로 현장 수습이 더딘 상황에서, 사상자의 내밀한 말로까지 그려내며 원전의 위험성을 알렸다. 피폭 사실조차 몰랐던 소방관들의 죽음과 희생이 겹치면서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계기이기도 했다.한국에서 방사능의 공포로 떠오른 것은 일본의 원전 오염수다.일본은 2011년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발생한 오염수를 짧게는 10년, 길게는 30년에 걸쳐 인근 해양으로 방출한다고 발표했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태평양 바다로 흘려보낼 계획이다. 원전 오염수를 정화해 방사성 물질을 최대한 제거·희석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오롯이 믿을 국가는 없다.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 또한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전문가들은 원전 오염수가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4~5년이 걸릴 것으로 예측한다. ‘쿠로시오 난류’가 캄차카 반도에서 남하하는 ‘오야시오 한류’와 만나 북태평양으로 이동하는 흐름에 따른 것으로, 방사능의 직접적인 피해는 적다는 것이 중론이다.문제는 일본에서 수입되는 수산물의 안전성이다. 사고 발생 2년 후인 2013년 과학저널 ‘네이처’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후쿠시마 원전에서 반경 200km 내 민물고기에서 세슘이 검출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일대 대부분의 수중생물이 오염됐고, 많은 이들이 방사능 수산물을 섭취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수산물이력관리제’와 ‘원산지표시제’ 등의 제도를 통해 안전성을 관리하고 있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지만, 사실 이들의 신뢰도는 낮다. 수산물의 검역 자체가 전수조사가 아닌, 샘플조사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는 2013년 후쿠시마 등 8개 현의 모든 수산물에 대해 수입금지 조치를 내린 바 있다. 이 조치는 2019년 한·일간 수산물 수입금지분쟁(DS495) 승소로 국제적인 타당성을 인정받아 후쿠시마 원전의 완전한 폐로까지 유효할 수 있다.내부피폭 시 가장 문제가 되는 방사성 물질은 세슘과 스트론튬이다. 세슘의 생물학적 반감기는 70일이다. 체내원소들이 70일이 지나면 배출된다는 의미지만, 섭취가 계속되면 체내에 쌓이게 된다. 세슘은 골수암과 갑상선암, 유방암 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트론튬은 주로 뼈에 축적되며 뼈암과 불임 등을 유발할 수 있다.일본 원전 오염수 방출 외, 원전의 안전성 문제는 그동안 시민사회단체를 통해서 꾸준히 제기돼왔다. 전문가들은 한국에서는 후쿠시마와 같은 원전사고가 발생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일반인들의 시각은 이와 다르다. 핵폐기물 역시 고준위방사성 폐기물 문제로 방폐장 인근 주민들이 건강상의 문제를 계속 제기하고 있다.앞선 정부에서는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원전을 조기 폐쇄하고 원전건설을 중단하는 등 탈원전 정책을 추진한 바 있다. 정책의 추진 속도조절 실패로 특정 산업과 지역 경제에 악영향을 끼쳐, 결국 정권 말기 원전산업으로 회귀하는 듯한 인상을 보였다. 한편 경상북도는 전 정권의 탈원전 정책으로 28조원 규모의 경제적 피해가 발생했다는 용역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정현미 작가 원전의 안전성 여부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분야다. 원전 사고가 발생할 경우 최악의 시나리오가 가능하기에 원전 폐쇄만이 답이라는 급진적인 주장부터 안전한 운영 및 관리로 충분히 사고를 예방할 수 있다는 입장까지 다양하다. 원전을 주요 에너지원으로 삼느냐 대체에너지로 전환하느냐는 결국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다만 어떤 정책이든 연착륙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미 수십 년 간 이어온 원전정책으로 산업생태계가 조성된 상태인데, 그걸 갑자기 축소시킨다는 것은 엄청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이는 이미 우리가 목도한 바다.당장 내년부터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태평양으로 흘러갈 것이다. 일본산 수산물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원전오염수가 해양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확한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이는 수산물 소비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방사성 물질 피폭 중 음식물을 통한 피폭이 80%에 달했다고 한다. 성찰하지 않는 과거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지금이라도 수산물의 방사능 안전관리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고, 국제사회와 공조하는 등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이 절실하다.

2022-06-01

쓰레기 줍지 마세요

배문경 수필가 아침 운동을 하다 몇 명의 여성을 만났다. 손에는 집게와 종량제 봉투가 들려있었다. 밤새 지저분해진 거리를 정리하는 사람들이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크고 작은 공식적인 모임에서도 쓰레기청소를 하고 정화작업을 한 후 인증 샷을 남기곤 한다.출근하면서 보니 앳된 여성 청소부가 형광조끼를 입고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직장 앞 정류장에는 할머니 두 분이 걸레와 빗자루를 들고 거미줄을 제거하고 유리를 닦았다. 잠시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 청소를 하며 얘기를 나누곤 했다.누가 쓰레기를 거리에 함부로 버리는지. 그래서 애꿎은 노인네들 고생시키는지. 시민의식 실종이며 공중도덕 결여라고 비판할 일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쓰레기를 줍고 청소하는 일은 노인들 일자리면 좋겠다. 쓰레기 줍기는 중노동이 아니라 가벼운 일일 수 있다. 나이 드신 분들이 운동 삼아 할 일이라서 일석이조다. 그렇게 해서 받은 임금은 생활에 쓰거나 손자 손녀들에게 용돈을 준다고 한다.“전 아직도 하이패스를 설치하지 않았어요. 가능하면 아주 늦게 설치할 생각이에요.”후배의 친구가 톨게이트 수납원이었는데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직장을 잃었다고 했다. 남편과 함께 이동하면서 남편 차에도 하이패스가 없다는 걸 알았다. 수납원이 많던 예전과 달리 혼자서 반가운 모습으로 결제해 주었다. 몇 년 전 수납원들이 일자리를 잃고 시위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들은 어딘가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식사하러 들어간 식당에 주인 내외가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로봇이 나타나 메뉴판과 물 잔을 가져와서 주문을 독촉했다. 어쩌면 이곳도 2~3명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곳곳에서 사람이 아닌 무인기계가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문득 내 일자리는 안전할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햄버거 가게에도 아이스크림 판매점에도 키오스크가 메뉴를 선택하라고 떡하니 섰다. 순서를 누르다 잘못 눌러 처음부터 다시 한다. 모든 것이 이렇게 되면 나이 든 세대는 머지않아 주문하지 못 해 굶는 일이 다반사이겠다. 겨우 선택된 메뉴와 영수증을 챙겨 들고 전광판에 번호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 대화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제품을 조립, 포장하고 기계를 점검하는 전 과정이 자동으로 이뤄지는 공장들이 늘어나고 있다. 모든 설비와 장치가 무선통신으로 연결되어 있어 실시간으로 전 공정을 모니터링하고 분석할 수 있는 스마트 팩토리가 자리 잡았다. 사람들의 일자리가 점점 사라지는 현상은 시대적 조류이다. 어디로 갈지 몰라 출렁대는 변화라는 큰 배에 올라탄 것은 분명하다.팬데믹 사태의 코로나를 거치며 변화를 더 많이 경험한다. 재택근무와 화상채팅으로 하는 업무 보고시스템은 이전으로 돌아가기 힘듦을 느끼게 한다. 실직자는 늘고 오토바이 맨들이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질주한다. 택배차가 거리와 집 앞에서 끊임없이 물건을 나르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서 또 다른 일자리가 창출되긴 하는 것일까.일이 자동화되면 그로 인한 이익을 분배하는 문제가 생긴다. 큰 자본이 들어가는 자동화는 자본가들이 투자한다. 그러므로 이익은 자본가들이 챙긴다.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눠줄 리 없다. 낙수효과 또한 없는 셈이다. 그리하면 못 가진 사람은 더욱 빈곤에 빠지게 된다.커피를 살 때도 키오스크보다 아르바이트하는 청년에게 주문하자. 은행에 가서도 불편하더라도 번호표를 뽑아 직원과 대화를 하자. 고속도로가 조금 막혀도 하이패스 차선이 아니라 팔을 길게 뻗어 표를 뽑아 출구에서 사람에게 카드를 건네자. 이렇게 주장하면 억지일까?기계화를 막을 수는 없다. 다만 속도를 조금 늦추며 새 일자리를 만들자는 이야기다. 노인들이 거리를 배회하면 그 부담은 누가 질까. 결국 젊은이에게 돌아갈 몫이다. 평생 할 수 있는 안전한 직장을 꿈꾸지 못하는 젊은이에게…. 덤으로.

2022-06-01

우리 모두는 천천히 달려가야 한다

여름이 되면 손에 잡히는 소설이 하나 있다. SF소설인 천개의 파랑은 안락사가 확정된 경주마 ‘투데이’ 위에서 두 번째로 낙마하고 있는 휴머노이드 ‘콜리’의 독백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멀고도 가까운 2035년에는 인간보다 더 빠른 말의 경주 속도에 짜릿한 전율을 느끼고 선망하는 스포츠인, 경마가 유행하고 있다. ‘어느 무엇보다 더 빨라야 하는’ 인간의 욕심과 욕구가 점철되어 있는 공간은 지금과 변함이 없지만 2035년에는 말의 기수가 휴머노이드로 대체되었고, 경기장뿐만 아니라 세상 곳곳에는 인간 대신 휴머노이드로 대체 된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연재를 만나기 전까지 콜리는 휴머노이드 C-27로 불렸다. 인간의 실수로 탄생된 C-27은 세상의 채도가 높은 것에 놀랄 줄 알고, 노을을 감상하고 감탄하며 단어와 지식을 무작위로 학습한다. C-27은 어느 날 경주마 투데이와 민주를 만나게 된다. 투데이의 움직임을 따라하고 등에 앉아 주로를 질주하는 순간 누군가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기쁨’을 알게 된다.그러나 투데이는 최고의 기록을 세우기 위해 혹사당했고, 늘 1위를 유지했던 유망주에서 벗어나는 순간 많은 인간들이 질타를 받게 된다. 몸값이 떨어지고 인간의 관심이 사라지는 동안, C-27은 투데이가 점점 달릴 때 행복을 느끼지 않는 다는 걸 않고 고민에 빠진다.어느 늦여름의 경기에서 투데이가 쓰러질 듯 달리는 걸 깨달은 C-27은 투데이를 지키기 위해 낙마를 선택한다. 뒤따라오는 말발굽에 밟혀 골반과 하반신이 전부 부서지고 결국 자신의 존재 가치를 잃게 된다.곧 자신을 수거해올 하청업체를 기다리는 동안 연재를 만나게 된다. 하늘을 보기 위해 넋을 놓다 말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들은 연재는 C-27을 자신의 집으로 수거하여 돌본다. 그리고 ‘콜리’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연재의 동생인 은혜는 다리를 쓸 수 없는 하반신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모습과 비슷한 콜리에게서 연민과 동질의 감정을 느낀다. 연재와 은혜의 엄마 보경은 로봇 콜리를 만나며 죽은 남편의 모습을 회상하며, 자신의 멈춰버린 시간을 흐를 수 있도록 현재의 행복을 쌓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그렇게 촛불이 타오르듯 서서히, 그녀들의 평범한 서사가 빛을 발하며 반짝이기 시작한다.그녀들의 서사는 콜리를 만나며 더 이상 개인의 아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곧 안락사 위기에 처한 투데이를 다시 한 번 경마장 위에 달려보게 하는 공통된 목적을 갖게 된 그녀들은, 누군가는 타인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지나칠 법한 아주 작고 사소한 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응시한다. 자신 또한 아픔으로 점철되어 있는 인간일 뿐인데도 타인에게 섬세하면서도 정제된 언어를 건넨다. 동시에 자신의 아픔을 돌아보고 보살핀다. 그러한 시도와 용기는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의문을 가질 때 콜리는 “저는 실수로 만들어 진거라고 연재가 말했어요. 연재는 실수가 기회와 같은 말이래요.”라며 담담하게 말한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퇴사를 하고 난 뒤의 일상은 여유와 조급함을 오간다. 어느 날엔 새롭게 시작하는 일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도, 어느 날엔 사소한 일에도 쉽게 무력해지고 만다. 이 소설은 전체적으로 긴장감 있는 반전 서사나 놀라운 반전이 없다. 그저 평범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간다. 조금 심심하고 담백하지만 호흡하며 읽어나가는 동안 어느덧 책의 끝장에 다다른다.파랑을 떠올리면 하늘이 연상되고, 하늘은 아주 많은 것을 담는 그릇 같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 날씨를 담고, 새를 담고, 무지개도 담고, 수많은 인간의 그리움도 목소리도 담는다. 그래서인지 천 개의 파랑이라는 제목과 책의 이야기는 무척 넓은 품을 가지고 있는 듯 잘 어우러진다.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라는 문구를 휴대폰에 기록하여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 또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감정의 결을 포착해 하나씩 각자의 이름을 붙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조급함을 내려놓고 조금 더 천천히 숨을 고르다보면 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분명 선명히 보일 것이다. 그런 믿음과 함께 여름을 맞이하러 나가본다.

2022-05-31

딸배를 위한 변명

‘딸배’는 온라인상에서 배달 라이더들을 칭하는 은어다. ‘배달’이라는 단어를 거꾸로 뒤집은 건데, 딸딸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고 해서, 또는 ‘딸통(배달통)’을 달고 다닌다고 해서 ‘딸배’다. 배달 라이더들을 비하하거나 모멸감을 주려 할 때 사용하는 멸칭이다. 이런 단어가 생겨난 것은 전적으로 라이더들의 잘못이다.배달 라이더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없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이나 늦은 밤이나 내가 먹을 귀한 음식을 가져다주는 고마운 존재라고 여기는 사람들도 물론 많지만, 라이더들을 ‘딸배충’이라 부르며 사회의 안전과 평화를 해치는 암적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가장 큰 이유는 라이더들의 불법 주행이다. 머플러를 개조해 배기음을 키우거나 다른 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하는 LED 전구를 주렁주렁 단다거나 하는 불법 개조 역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일부 라이더들은 교통 법규를 밥 먹듯이 무시한다. 불법 좌회전, 불법 유턴, 버스 전용차선 달리기, 역주행, 인도 주행 등 타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른다. 그러면서 높은 수익을 올린다. 인터넷에 배달 라이더로 돈 벌었다는 자랑 글들이 종종 오는데, 당연히 고운 시선으로 보일 리 없다. 나도 배달 라이더지만 불법 주행하는 오토바이들을 보면 화가 난다.배달 라이더들이 인도 주행을 하거나 신호를 위반하면 사람들은 ‘저 딸배충 돈에 미쳐가지고 묶음 배달하느라 저런다’고, ‘콜 하나라도 더 잡으려고 난리친다’고 생각한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실제로 묶음 배달을 하면 빠른 시간 안에 여러 집을 가야 하기에 서두를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단건 배달을 해도 서둘러야 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구조적 문제가 있다.배달 라이더들의 교통 위반 행위는 분명한 잘못이다. 라이더들은 반드시 운행 습관을 고쳐야 한다. 하지만 라이더들이 불법 주행을 할 수밖에 없게 하는 시스템 역시 개선될 필요가 있다. 소비자는 빠른 배달을 원한다. 배달 주문 고객 요청 사항 중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최대한 빨리 갖다주세요’나 ‘빠른 배달 부탁합니다’다. 그만큼 ‘속도’가 생명인 배달인데, 속력을 낼 수 없게 하는 여러 장애물들이 있다. 음식점의 조리 대기 시간, 지나치게 높은 과속방지턱들, 꽉 막힌 도로 정체, 악천후, 이륜차가 달리기에 너무나도 위험한 노면 상태, 많아도 너무 많은 신호들, 차단기와 공동현관 비밀번호 등 아파트 출입의 까다로운 과정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지체되는 시간 등등이다. 하지만 소비자는 이런 사정을 모른다.내가 겪은 일이다. 스쿠터 주차 랙 쇠붙이가 부러져 아스팔트를 텅텅 때리느라 정상적인 주행을 할 수 없었다. 테이프로 칭칭 감아 겨우 응급처치를 하는 데 10분쯤 걸렸다. 예상 시간보다 5분 늦게 도착했는데, 손님은 묶음 배달을 의심하며 화를 냈고, 내 해명은 듣지 않았다. 다음날 내 라이더 평점이 깎여 있었다. 평점이 깎이면 배차 콜도 줄어들게 된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음식점도 손님도 배달 라이더도 모두 ‘빨리 빨리’를 욕망한다. 그리고 배달 어플은 그 ‘빨리 빨리’에 대한 욕망을 부추기고, 이용한다. 배달 도착 예정 시간을 산출하는 AI는 빅 데이터를 통해 스스로 학습하는데, 배달 라이더들이 원래 20분 걸리는 길을 15분 만에 가기 시작하면 AI는 그 경로를 이제 15분 코스로 인식한다. 교통 상황과 날씨 등 변수는 고려하지 않는다. 라이더들은 그렇게 AI가 단축시킨 시간 내에 배달을 완수해야만 한다. 라이더들이 빠르게 달릴수록 AI는 더 짧은 시간 안에 배달하라 명령하고, 결국 라이더들은 더 빨리, 더 더 빨리 달릴 수밖에 없다.이 사슬을 끊으려면 음식점, 손님, 라이더 모두 ‘빨리’ 대신 ‘천천히’와 ‘안전하게’를 지향해야 한다. 다행히 조금씩 변화하는 게 보인다. 음식을 받아 갈 때 종업원이 “안전운전하세요”라고 당부하고, 손님도 요청 사항에 ‘천천히, 조심히 와주세요’를 입력한다. 라이더들도 교통 법규를 준수해 배달 문화를 바꾸는 자정 노력을 하는 중이다. 그러니 ‘딸배’라고 너무 욕하지 말자. 비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쳐도 당신의 소중한 치킨과 피자를 싣고 열심히 달려가는 사람들이다.

2022-05-31

여성 장차관

유리천장(Glass ceiling)은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깨뜨릴 수 없는 장벽이란 뜻으로 사용되는 용어다. 충분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음에도 조직의 관행과 문화 등에 막혀 고위직으로 승진이 차단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표현한 말이다.원래는 여성의 고위직 진입을 막는 조직 내 장애라는 의미로 사용됐으나 이제는 여성뿐 아니라 흑인이나 소수민족에까지 확대 적용되는 상황에도 이 말을 사용한다. 유리천장 지수라는 게 있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가 2013년부터 OECD 국가를 대상으로 직장 내 여성차별 수준을 10가지 지표로 가중 평균해 발표한 수치다. 지수가 낮을수록 여성차별이 심하다는 뜻이다. 10가지 지수에는 간부직의 여성 비율, 성별 간 경제활동 참여율, 성별 간 임금격차, 남·여성의 육아휴직 등이 포함돼 있다.우리나라는 2013년부터 7년 연속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핀란드, 아이슬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국가가 상위권이다. 미국은 102년 전부터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나라다. 그럼에도 아직 여성 대통령이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는 아이러니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조 바이든의 대통령 당선으로 그가 부통령으로 지명한 카멀라 해리스는 백악관 내 유리천장을 깬 최고위직이 됐다. 여성이자 흑인이며 아시아계, 이민자의 딸이라는 장벽을 모두 넘어선 것이다.여성의 사회진출이 자유롭게 허용되는 나라가 당연히 선진국이다. 한미정상회담 때 “새 정부 내각에 남자가 많다”고 한 외신기자의 지적이 따갑게 들렸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를 의식한 지는 모르나 최근 4명의 장차관을 여성으로 발탁 인사했다. 외신에서 보는 눈총을 따갑게 느끼기 전에 여성 중용의 인사기조를 찾아가는 게 선진국으로 가는 길 아닐까./우정구(논설위원)

2022-05-31

찍을 후보 결정 못했으면 ‘公約’을 보라

심충택 논설위원 오늘은 6·1 지방선거일이다. 오늘 선거는 앞으로 4년간 대구와 경북의 지방정부 살림을 살 행정·교육기관 단체장과 집행부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대의기관을 뽑는 중요한 행사다. 유권자들의 주된 관심은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 시·도 교육감, 시장·군수·구청장 등 단체장을 고르는 일에 쏠려 있겠지만, 광역의원(대구시의원, 경북도의원)과 기초의원(시·군·구의원)을 선택하는데도 신경을 써야 한다. 지방정부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지방의원 수준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누구에게 표를 줘야 할지 아직 고민을 하는 유권자들에게는 후보들의 공약을 한번 확인해보라는 권유를 하고 싶다. 지난 13일간의 공식선거운동 기간 중 각 후보는 나름대로의 정책과 공약을 발표하면서 민심을 잡기 위해 총력을 쏟았다. 후보들의 공약에는 정치적 지향점과 수준 등이 종합적으로 녹아 있다.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대구시장과 경북도지사 후보들의 제1공약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한 서재헌 민주당 후보의 첫 번째 공약은 ‘대구형 기본의료제도 등 복지 강화’다. 그는 주기적 질병 진단 및 예방을 위한 ‘주치의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홍준표 국민의힘 후보는 ‘대구통합신공항 건설 및 동촌후적지 개발’이 제1공약이다.‘대구통합신공항 특별법’을 제정해 국비 지원을 받겠다는 약속이다. 한민정 정의당 후보는 ‘산업재해·저임금 노동 없는 대구’를 우선공약으로 내걸었다. ‘산업재해 예방 및 노동안전보건 지원 조례’를 제정하겠다고 했다. 신원호 기본소득당 후보 중요공약은 모든 대구 시민에게 연 120만원 기본소득을 지급하겠다는 것이다.경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한 임미애 민주당 후보는 ‘미래 산업의 수도 경북’이 제1 공약이다. 이를 위해 2차전지 소재산업 벨트와 친환경 자동차·로봇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고 했다. 이철우 국민의힘 후보는 ‘충분한 규모의 대구경북신공항 건설’을 공약했다. 연간 1천만명 항공수요를 반영한 3천200m 이상 중장거리 활주로를 조성하겠다고 약속했다. 대구시장·경북도지사 후보 외에도 교육감, 시장·군수, 광역·기초의원, 지방의원 비례대표 후보들의 공약도 각 가정에 배달된 선거공보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를 보면 상세히 알 수 있다.대구시내 주요 간선도로에는 투표독려와 함께 ‘헛된공약 선심공약 잘 살펴서 실현가능한 공약의 일꾼에게 투표합시다’라는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다. 후보들의 공약에 대한 불신이 높기 때문에 이러한 현수막이 게시되는 것이다. 사실 후보들의 공약을 분석해 보면 선심성 사업, 재탕·삼탕 사업, 졸속 사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눈길이 가는 공약이라도 막대한 예산과 시간이 소요돼 실현불가능한 것들이 많다.유권자들이 공약의 수준을 판별하는 방법은 자신이 먹고사는 문제와 연결시켜 보면 도움이 된다. 특정 후보의 대표 공약이 지역발전과 내 삶의 질 개선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구체적인 실현 방안은 있는지 정도만 따져봐도 엉터리 공약을 쉽게 고를 수 있다.

2022-05-31

동반합시다

조현태 수필가 ‘동반’이란 단어에 얼른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장님과 길잡이 관계다.어떤 장님이 길잡이 소년을 데리고 전국을 떠돌며 구걸하고 있었다. 그들이 어느 초가을에 포도밭을 지나는데 포도 농부가 장님 일행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농부는 뭔가 도와주고 싶은데 당장 줄 것이 포도 밖에 없어 포도라도 먹으라고 주었다.포도를 선물로 받은 두 사람은 적당한 그늘에 앉아서 나누어 먹기로 했다. 그런데 먹기 전에 한 가지 다짐을 했다. 한 번에 한 알씩 서로 번갈아가며 먹자고 말이다. 장님이 어른이니까 먼저 한 알 먹었다. 이어서 소년도 한 알 먹었다.한동안 그러다가 장님은 약속과 달리 두 알을 먹었다. 소년은 생각했다. 이 사람이 약속을 어기는구나. 그렇다면 나도 두 알을 먹어야지. 소년이 두 알을 따 먹어도 앞을 못 보는 장님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자 소년은 다시 생각을 바꿨다. 장님은 볼 수 없으니까 내가 세 알씩 네 알씩 먹어도 괜찮겠지.장님이 한 번에 두 알씩 먹는 동안 소년은 마음 놓고 세 알 네 알씩을 먹었다. 금방 포도는 없어졌다. 포도 먹기가 끝나자 장님이 말했다.“네가 나를 속였구나” 그러나 소년은 가슴이 뜨끔하면서도 아니라고 우겨댔다. 그러자 장님이 말했다.“내가 약속을 어기고 두 알을 먹었을 때 너는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래야 너도 나처럼 할 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나를 속인 증거다”이처럼 상대를 훤히 꿰뚫고 있는 관계이기도 하지만 더러는 쉽게 생각하고 마구 대해도 괜찮은 존재가 동반자라고 착각하는 수도 있다. 특히 배우자의 경우 실수나 낭패를 꼬집어 해치기보다는 은근슬쩍 덮어주는 모습이 더 아름답다. 부부가 서로의 약점이나 찾아보려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로 묶여졌다면 스파이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상대의 부족한 부분은 메우고 흠집은 덮어주는 파트너여야 비로소 한 가정이 온전해진다.야구 경기에서 목이 쉬도록 응원하고 격려하는 까닭은 ‘내편’이라는 팀이 마운드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듯이 가정에서 내편은 당연히 부부다. 그래서 ‘지아비’와 ‘지어미’로 칭하고 스스로 아비와 어미가 되어야만 한다. 살면서 반쪽의 어깨가 축 쳐질 때 나머지 반쪽이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해야 쓰러지지 않는 가정이 된다.동반자 관계는 결코 경쟁하는 여야 관계가 아니다. 서로에게 존재의 근거이며 말 그대로 일심동체다. 남편을 깎으면 아내도 깎이고 아내를 높이면 남편도 높아진다. 상대를 울게 하지 말고 웃게 하면 자신도 저절로 웃게 된다. 서로 돕고 응원하며 감싸주는 삶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고 나아가 자녀의 장래에 표본으로 가르쳐주기도 하지 않겠는가.가정의 달이 막 지났다. 포도를 더 먹기 위해 동반자를 속일 수도 없거니와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 자신만 이득을 취해도 상대가 눈감아주지 않으면 성사되지 못한다.우리의 미래는 청소년일 수밖에 없다. 자녀들에게 올바른 인간관을 전해주려면 동반자 관계를 몸으로 배워 익히도록 해야 한다.

2022-05-31

인문학위기 타령보다 대학구조개혁부터

이명균 창원대 명예교수 과학만능 사고가 중심이 된 기술개발과 편리함의 추구가 현대의 인간소외와 인류의 대형 재난재해를 일으키는 등 그 모순 현상들을 많이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런 현상들이 초래할 미래의 인간운명에 대한 인류공동의 가치관과 윤리적 판단 그리고 창의적 대처능력 함양을 위하여 인문교육의 역할이 중요함은 자명하다. 선도국가에서는 인문사회학술연구와 인문 사회적 통찰로 사회적 갈등비용을 줄이며 성숙한 국가를 만드는 힘을 얻는다고 한다. 인문사회를 단순한 교양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며, 미래의 성장과 혁신은 인문사회의 가치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고, 인문사회 분야는 가치생산의 가장 큰 원천이고 출발점이라는 언설들이 있다.이러한 현 상황에 맞추어 요즘 대학이나 인문학자들을 중심으로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한 담론들이 많다. 그 담론들은 대개 방치와 소외로 위기에 처한 인문학 육성을 위하여 국가나 정부의 ‘지원강화’, ‘특별 법률제정’, ‘인문정책연구원 설치’ 또는 ‘인문학술연구교수의 수적 확대’ 등의 필요성을 강조한다.그런데 인문학에 대한 지원강화를 얘기하기에 앞서 인문학이 현재의 위기를 맞게 된 이유가 무엇이며 그간 인문학이 어떤 노력과 역할을 해왔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할 것으로 본다. 당장에는 각 대학에서 인문학 관련 전공의 나눔과 학과설치 운영에 대한 냉철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외국 같으면 대학원에서나 전공으로 나눌 연구 분야나 영역을 학부의 학과로 쪼개는 등으로 해당 전공교수들의 안일을 보장하려는 경우가 없는지를 솔직하게 진단해봐야 한다. 학생들에게 정말 필요한 내용을 가르치기 보다는 교수 자신이 아는 내용이나 연구하는 분야를 활용하는 정도의 가르침은 없었는지, 학생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는 정도를 넘어 가르쳐선 안 될 과목이나 내용을 가르친 경우는 없는지 등을 분명하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인문학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교육부의 대학 구조조정 추진 방향을 보면서 학령인구 감소에 대비한 대학교육개혁이 친기업적 친자본적 실용적으로 치우친다고 비판한다. 한편으로는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에서는 모름지기 예술적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되게 하여 삶과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도록 그리고 그러한 필요성을 깊이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 말들이 옳기는 하나, 외람되지만, 필자 생각엔 인문학의 중요성 보다는 인문학자 자신들의 보호를 먼저 생각하는 위장전술 같은 주장으로 들린다. 인문학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회의 모든 곳에서 항상 필요로 하는 법인데, 인문학의 기능이나 역할이 그 필요성들에 부응하도록 인문학 전공자들이 제대로 노력을 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남는다. 인문학 교육의 강화는 좋으나 필요한 장소와 필요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내용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수용되게 하였는지에 대한 성찰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의 인문학위기는 외부적 여건들보다는 대학과 인문학자들이 자초한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2022-05-31

옛글을 읽으며 낯선 곳을 여행하기

경주를 여행한다면, 다른 어떤 글보다 1929년 현진건이 동아일보에 쓴 ‘고도순례 경주’ 한 편이 적절한 가이드가 될 수 있다. 사진은 1929년 7월 18일에 동아일보의 표제삽화이다. 어딘가 낯선 곳에 처음으로 여행을 하러 갈 때면 그 지역에 관련된 옛사람의 글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관동지방을 돌아다닐 때는 정철의 ‘관동별곡’을 꺼내어 읽는다던가, 지리산 근방을 여행할 때는 최남선의 ‘심춘순례’를 꺼내어 읽는다던가 하는 게 그런 것이고, 대구를 갈 때는 대구에서 서울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고향을 떠나온 사람과 만났던 이야기를 다룬 현진건의 소설 ‘고향’을 읽거나 군산에 갈 때는 개항장 군산에서 벌어진 일을 다룬 채만식의 ‘탁류’를 읽고 가는 식이다.물론 아직 옛사람들의 글에 대해서는 공부가 적어 여행하는 지역을 다룬 글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방문한 지역에 오래 계셨던 선생님들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도 있다.또, 옛글 속에 다뤄진 장소라야 작가가 다루고자 했던 서사의 맥락과 다소 맞게 다룬 협소한 기억일 뿐이라 아무래도 여행자를 위한 모든 정보를 모아둔 친절한 여행 가이드북과는 전혀 다르다.하지만, 그래도 생소한 공간의 문턱을 넘는 여행자의 입장에서라면 그 공간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작가가 쓴 작은 글조차 큰 의지가 된다.여행을 하면서 먹고 마시는 물질적인 세계 위에 작가의 기억이라는 또 다른 세계의 층위가 끼어들게 된다. 그러면, 낯선 곳에서의 삭막한 여행도 조금은 더 풍요로워진다.사실, 우리가 요즘 여행에서 볼 만한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어쩌면 그 대부분은 미디어에 재현되어 보고 들었던 대상을 실제로 보는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TV 같은 영상매체를 통해 보고 들었던 이집트의 피라밋의 광대한 크기 같은 것을 실제로 가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이나, 영화나 드라마 속 무대가 되었던 그곳에 실제로 가서 보는 것이 그러한 것에 해당한다. 그 주인공이 먹었던 음식을 실제로 먹어보거나 그 액티비티를 실제로 해보는 것도 이러한 경험에 포함된다. 즉 미디어의 간극을 넘어서는 실제 경험에 대한 욕망이다.우리의 여행이 대부분 이런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현재 경험이 얼마나 미디어로 매개되어 있는가, 그럼에도 아직 미디어를 넘어선 실제 경험을 바라는가 하는 것을 알려준다.“가봤더니 생각보다 별것 없던데?”라는 여행 뒤 우리가 내뱉는 말 속에는 미디어가 추동하는 여행의 경험이 가지고 있는 본질이 들어 있다. 물론 옛사람이 남긴 짧은 글에 의지해 어떤 곳을 여행하는 일이 특별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보고 글로 남겼던 대상을 실제로 보고 싶어 하는 경험적 충동에서 비롯된다.다만, 그 글이 너무 짧아서 그 경험을 공간에 펼치기 위해서는 다소간의 장소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언제나 그 곳에서 만나는 대상들은 별 것 없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감각적 풍부함으로 가득하다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시각적 미디어는 언제나 대상을 더 돋보이도록 만들어서, 실제의 대상을 왜소하게 만들지만, 말과 글은 실제의 대상에 대한 누군가의 기억과 관계되어 실제의 대상에 대한 경험을 방해하지 않으며, 그 경험에 통합된다. 적어도 여행에서만큼은 아는 만큼 보이고, 읽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야외활동이 조금씩 시작되고 있는 이 시점에, 아마도 주말을 이용해서, 휴가를 이용해서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을 것이다. 어제 본 영화에 나왔던 배경을 확인하러 가는 여행도 좋고, 지역의 맛집을 찾아가는 여행도 좋지만, 가끔은 책을 한 권 들고 가는 여행을 권한다. 그것이 그 지역에 관련된 옛사람의 글이라면 분명 충만한 의미로 가득 새로운 경험이 될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

2022-05-30

올림퍼스의 노예들 <Ⅲ>

노마는 아비의 인생이 부러웠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고 ‘언젠가’에 뛰어들어 본, 그럼에도 아이들은 알아서 컸고 아내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다달이 나오는 노년 기본 소득의 혜택으로 버티어 온 아비의 인생이 진정한 삶이라 여겼다.노인이 아닌 모든 세대가 합심하여 그의 여생을 등에 지고 어깨에 메어 줄 것이다. 물론 아비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먹을 수 있을 때까지는 열심히 먹어야 한다. 입을 수 있을 때까지는 열심히 입어야 하고 나다닐 수 있을 때까지는 열심히 나다녀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돌아가고 세상이 돌아가야 돈이 생기고 돈이 생겨야 아비를 업을 수 있으니까.하지만 아무도 걱정하지 않았다. 아비야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살 테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그게 사람이니까.그에 비하면 노마, 자신의 인생은 보잘 것 없었다. 예정대로라면 앞으로도 한동안 보잘 것 없을 인생이었다. 유망한 직업이라 해서 로봇공학을 전공했지만 유망한 직업은 그들, 세상의 방향을 정하고 세상을 움직이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직업을 뜻했다.떠오르는 산업이라 누군가 말했지만 그것은 그 누군가에게 돈이 되는 산업이라는 말이었다. 누군가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에게 돈이 되는 산업이라 말한 적 한 번도 없었다. 진실을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진실은 누가 말해주는 것이 아니니까. 진실을 들여다보지 못한 자, 스스로를 탓할 수밖에.학점 평점 3.9로 로봇공학과를 졸업한 노마의 직업은 로봇관리사였다. 로봇을 렌탈해서 사용하고 있는 가정을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관리하고 잔 고장을 수리하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열에 아홉은 노인들만 사는 집이거나 노인들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노마의 집에도 가정용 로봇이 하나 있었다. 안나의 아비 앞으로 지급된 로봇 보조금 덕분이었다. 노마의 급여는 입고 먹고 마시고 그리고 세금을 내기에 딱 적당했다.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독립할 여유는 없었다.노마는 결혼을 하더라도 노마 쪽이든 배우자 쪽이든 부모님과 함께 지낼 생각이었다. 동거하는 가족 중 노인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받을 수 있는 혜택이 많았다.자식들은 어떻게든 노인이 된 부모와 함께 있으려 했고 노인이 된 부모들은 자식들과 같은 집에 살아주는 것을 그들이 자식들에게 줄 수 있는 큰 선물 중 하나라 여겼다.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에 달렸다.결혼도 쉬운 과제는 아니다. 노마가 만났던 상대들은 노마와 연애는 하더라도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결혼이라는 이름을 씌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없었다. 같이 일어나 일하러 나가고 돌아와서는 몸을 섞는 그런 하루의 연속일 텐데. 그 이상의 것들, 늦은 아침에 일어나 발코니의 창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것, 허리를 감싸 안은 그 사람의 손과 팔에서 방금 내린 커피향이 나는 것, 아이가 깰까봐 까치발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 여행 가방을 싸는 것, 휴가지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이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는 것, 하루 대 여섯 시간의 노동으로 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없다면 굳이 결혼할 이유가 없었다. 아이를 가지는 것은 더더욱. 서른다섯 살이 되던 해 노마는 진정한 사랑이라 믿었던 한 여자에게 청혼을 했다. 노마가 출장 나갔던 어느 노인 부부의 집에서 만난 노인성 질환 관리사였다. 그 여자가 대답했다.-너랑? 왜?-그래서? 넌 왜 울었는데? 인조인간이 뭐라 했어?-그렇게 부르지 말라 했잖아.-인조인간 맞잖아. 인조인간 맞지. 내려놓을 때가 되면 내려놓기도 해야 하고 갈 때가 되면 갈 줄도 알아야지. 사람이 말이야. 그 모든 것 붙잡고, 그것도 모자라 손가락에 걸리는 모든 것들을 움켜쥐는 거잖아. 그건 됐고. 그래, 인조인간이 뭐래?노마는 안나가 만식의 집으로 들어갈 때부터 만식을 인조인간이라 불렀다. 아이의 아빠이니 그렇게 부르지 말라 안나가 부탁했지만 노마는 들은 척 만 척이었다.-결혼식도, 혼인 신고도 할 생각이 없데. 아이는 자기 아이라 인정하겠지만 그 이상을 바라지는 말래. 결혼식이니 혼인 신고니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막상 그 말을 듣고 나니 속상한 거야. 속으로는 기대를 했었나 봐. 섭섭하고 서러워지고. 그래서, 그래서 오빠한테 전화를 했지.안나는 천천히 한 마디씩 간격을 두어가며 말했다. 전날 울었던 탓인지 의외로 담담했다.-뭐? 그게 무슨 말이야? 전 마누라도 죽고 없다면서. 자기 자식까지 가졌으면 당연히 부인으로 인정해줘야지. 새파랗게 어린 여자를 데리고 가면서 결혼식도 안 한다고? 누가 동네방네 소문을 내래? 양가 가족들만이라도 불러서, 조용하게라도 말이야. 당신들의 딸이, 너의 여동생이 팔려 가는 것 아니라고. 강제로 끌려가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너를 사랑해서 데려간다고, 같이 살고 싶어서 그런다고 위로 아닌 위로라도 해줘야 하는 거잖아. 그게 우리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니야? 넌?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김강 소설가

2022-05-30

‘통합의 정치’를 위하여

변창구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국제정치학 윤석열 정부의 최우선 국정과제는 ‘통합의 정치’다. 나라는 빈부·이념·정당·학력·성별·세대 등 다차원적 갈등으로 갈기갈기 찢겨져 있다. 대선 결과 0.73% 차이로 갈라진 승패는 분열된 국민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분열의 극복을 위해서는 국가통합의 상징인 대통령이 ‘통합의 정치’를 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당선 직후 열린 대국민 기자회견에서 박빙의 승부를 의식한 듯 “국민을 편 가르지 말고 통합의 정치를 하라는 간절한 호소”라고 하면서 “진보와 보수, 영남과 호남이 따로 없을 것”이라고 통합을 약속했다.하지만 통합의 정치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가 통합을 약속했지만 하나같이 행동이 수반되지 못했다. 그들의 통합 약속은 취임사를 장식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했고, 대선·총선·지선 등 선거 때마다 편 가르기와 정치공학적 접근으로 오히려 갈등을 심화시켰다. 통합의 정치를 약속한 대통령이 실제로는 분열의 정치를 한 것이다.통합의 정치는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균형감각’과 ‘소통능력’이다. ‘대통령의 최대의 적은 바로 대통령 자신’이다.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자기 확신’은 독선과 오만을 초래하며, 확증편향의 덫에 걸려 비판과 고언(苦言)을 수용하지 못한다. 대통령에게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참모가 없으면 균형감각을 상실한다. 획일(劃一)은 통합이 아니라 독재다. 검찰총수였던 윤 대통령은 검찰 출신의 ‘예스맨(yes man)’들에 둘러싸여 ‘집단오류’에 빠질 수 있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통합의 정치를 위해서는 소통이 중요하고, 소통을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해야 한다. 대통령이 ‘집행권력’으로 야당을 압박하면 민주당은 ‘의회권력’으로 맞설 것이다. 대통령이 지지층을 의식하여 진영정치에 끌려 다니면 협치는 불가능하다. 여당과 야당의 생각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그 다른 점의 차이를 좁히려고 소통할 때 비로소 통합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통합의 정치는 완승 또는 완패의 정치가 아니다. 권력투쟁의 정치현실에서 타협 없이는 협치도 통합도 없다.통합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역대 대통령들의 통합 실패는 모두가 정치적 수사에 그쳤기 때문이다. 협치의 책임은 여야 모두에게 있지만, 집권여당이 먼저 행동으로 솔선수범해야 한다. 올해 5·18행사에 대통령과 여당의원들이 모두 참석한 것은 통합의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처럼 통합은 정치적 강자가 약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행동에 나설 때 시작된다.통합의 정치는 이념과 정당, 지역과 세대의 차이를 모두 뛰어 넘는 ‘포용의 정치’다. 내편만 보는 진영정치와 팬덤정치는 ‘분열의 정치’다. 통합과 분열, 어느 길로 갈 것인가는 제왕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의 인식과 정치행태에 달려 있다. 대통령의 일상(日常)이 소통과 협치로 통합을 진전시키는 ‘고뇌의 날들’이 되기를 바란다.

2022-05-30

신용카드 할부항변권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최근 신용카드 할부항변권 민원이 늘고 있으나 행사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않다.할부항변권은 할부거래업자가 재화·서비스 등을 계약 내용대로 제공하지 않는 경우 잔여 할부금의 지급을 거절할 수 있는 소비자의 권리를 말한다. 신용카드 할부거래 시 △할부금이 20만원 미만인 거래 △할부기간이 3개월 미만인 거래 △상행위를 위한 거래 △할부금을 이미 완납한 거래 등에 대해서는 할부항변권을 주장할 수 없다.특히 상행위를 위한 거래는 수익금 배당 등 영리를 목적으로 한 거래도 포함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재화·용역거래를 가장해 신용카드 할부결제를 유도하는 유사수신 사기가 성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영리(상행위) 목적 거래라는 이유로 항변권 행사가 제한될 수 있다. 해외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할 때 유의사항도 알아두는 게 좋다. 해외여행·직구 시에는 카드사에서 제공하는 해외결제 방지서비스를 활용해 부정사용을 사전예방할 필요가 있다. 출입국정보 활용동의 서비스를 신청하면 카드사가 회원의 출입국정보를 제공받아 귀국 이후의 해외결제 승인을 제한해 부정사용 피해를 막을 수 있다. 가상카드 발급서비스의 경우 해외직구 시 소비자가 정하는 기간 또는 횟수만큼만 유효한 카드로 결제를 진행해 실물카드 정보 유출을 방지한다.또 해외에서 신용카드 거래할 때에는 원화가 아닌 현지 통화로 결제를 진행해야 한다. 원화로 결제하면 원화결제서비스 이용수수료(결제금액의 약 3~8%)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슬기로운 경제생활을 위해선 해외에서 신용카드 사용하는 법에 대해서는 꼭 알아두는 게 좋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5-30

지나침의 폐해(弊害)

강성태시조시인·서예가 강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는 기분은 상쾌하기만 하다. 강둑 언저리에 줄지어 핀 금계국이 노란 웃음으로 손 흔들어 반기고, 듬성듬성 키 자랑하듯 빨간 나팔처럼 흔들리는 접시꽃의 환호를 받으며 강변을 달리다 보면, 바람마저 등 뒤에서 불어와 정말 자전거 바퀴가 저절로 굴러가는 듯하다. 윤슬로 얼비치는 잔잔한 수면엔 오리떼가 한가로이 유영하고, 간간이 왜가리가 끼룩대며 날아오르는 풍경을 접하는 자전거 출퇴근길은 언제나 가뿐하고 넉넉하기만 하다.그렇게 8km 정도를 달리다가 나머지 2.3km 구간은 최소한 도보나 뜀박질로 사무실 위치까지 가야 하다 보니 거의 ‘철인 2종’이나 다름없는 출퇴근길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몇 달간 자전거를 타다가 걷거나 뛰어서 출퇴근을 하다 보니 동료들은 필자더러 아예 형산강까지 헤엄쳐서 건너 ‘철인3종 출퇴근’을 하는게 어떻겠냐며 부러움반 시기 반(?)으로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필자는 전혀 그에 개의치 않고 나름의 보법으로 완급을 조절하며 적당히 생활 속의 운동을 실천하고 있었다.그런데 정말 문제가 생겼다. 자전거 통행이 안되는 구간을 걷거나 뛰어서 가다가 하루는 몸의 컨디션이 마냥 좋은 듯해 퇴근길에 거의 단번에 주파했었는데, 자고 일어나니 왼쪽 무릎부위가 통통 붓고 걸음을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진 것이다. 병원의 진찰은 좌슬부의 좌상, 염좌 증상으로 5주 이상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마음은 청춘이지만 몸이 따라주지 못함을 짐짓 깨달으며 치료와 안정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본의 아니게 부상상태로 근 2개월간 가료하면서 새삼 깨우친 것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었다. 아침의 출근길부터 무리하지 않고 살살 걸어서 간다거나 퇴근길의 여유로움으로 무한질주(?)를 피했어야 했는데, 어느 순간 넘치는 자신감과 과도한 움직임으로 몸이 여지없이 반응한 것이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말은 익히 알고 들었지만, 실천하기가 만만찮은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공인이나 위정자의 언행 등에 이르기까지 실로 지나침의 폐단이 빚은 피해와 망신은 부지기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개인의 욕심이나 욕망에서 비롯되는 욕구의 과잉현상은 적당한 제어나 조절이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사람 사는 세상에는 자연의 이치나 순리가 당연하면서도 철저하게 적용되게 마련이다.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는 말처럼, 높이 올라갈수록 내려올 것을 생각하고(居高思墜), 가득 찰수록 넘치는 것을 경계하라(持滿戒溢)는 구절도 있다. 높은 곳에 있을 때 더욱 겸손하고 조심하라는 가르침으로, 무엇이든지 지나치거나 가득 차서 넘치게 되면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40여년 전 필자의 서예 입문시절에 당(唐) 해서의 전범으로 즐겨 쓰던 구성궁예천명의 글귀가 마침 전국지방동시선거에 즈음해서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지나친 과욕으로 마음이 동요되어 정신마저 피곤하게 되는(心動神疲)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2022-05-30

생산현장의 3現의 실천 그리고 개선

엄주선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최근 스마트 기기와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면서 현장을 직접 가지 않고도 실시간으로 현장 상황을 모니터를 통해 알 수 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멀리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상황까지도 인터넷에 접속만 하면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화면에 보이는 것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 뿐 그 너머에 있는 진실까지는 알 수 없다.개선은 진정한 사실 파악이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가공의 사실을 진실로 착각할 때가 많다. 대표적인 가공의 사실에는 추측이 있다. 추측이란 경험의 연장선상에서 사실을 상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현장에서 오래 근무하고 경험이 많아지면 과거 경험의 연장선상에서 사실이 있다고 생각하고 추측하게 된다. 그리고 그 추측의 적중 확률이 실험에 의하면 80% 이상으로 우리는 점차 추측을 신뢰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추측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20% 확률은 적중하지 않는다.특히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생산현장은 화면에 보이는 사실만으로 그 너머에 있는 진실을 더욱 파악하기 어렵다. 그래서 제조현장(現場)에서는 현물(現物)을 보고 현실(現實)을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3현(現)이 꼭 필요하다. 3현은 일본 혼다자동차의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가 회사의 기본이념으로 채택하면서 유명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포스코를 비롯하여 현대자동차와 LG디스플레이 등 많은 제조 현장에서 활용하고 있다.제조현장은 고객의 주문량에 따라 이를 생산하기 위한 재료, 설비, 인력, 생산 및 운전 방법 등 주변 여건이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현장에서 현물로 변화를 확인하지 않으면 사실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이 많아지면 현장에 가지 않고 상황을 경험에 비추어 추측하여 판단하는 경향이 있으며 큰 실수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3현이 제대로 제조현장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첫째 경영진이 현장에서 현물로 보고받는 문화를 강조하고 실천하여야 하며 둘째는 현장에서 현물을 보고 이상 증상을 판단할 수 있도록 눈으로 보는 관리를 추진하고, 셋째는 이를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어느 회사든 좋은 제도나 방법을 한시적으로 도입은 잘 하지만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꾸준하게 실행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최근 많은 회사의 인력구조를 보면 퇴직이 임박한 고근속 직원들과 경험이 적은 젊은 직원들로 구성되어 중간층이 부족한 인력구조가 많다. 이런 구조에서는 3현을 실천하기 더욱 어려울 수 있다.퇴직이 임박한 선배들은 ‘이 나이에 내가 하리’하면서 몸을 사리고 젊은 층은 영상을 보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3현을 소홀히 하기 쉽다. 3현을 실행하지 않으면 현장의 변화는 없으며 결과는 생산성과 품질의 저하로 나타나고 조치에 더 많은 자원과 노력이 필요하게 되므로 꾸준한 3현의 실행이 꼭 필요한 시점이다.

2022-05-30

학교급식

홍택정 문명중·고등학교 이사장 학교는 학생들에 대해 교육을 하는 곳이다. 교육이라면 그 범위가 광범위해 어디까지 라고 구분하기가 어렵다.하지만 교사가 교과서를 위주로 한 학습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는 정도로 규정해야 될 것 같다. 말하자면 공교육이다.그런데 옛날부터 가정교육이라 하여 부모나 가족들로부터 배우게 되는 언어나 습관 등 각종 행실을 종합한 것을 말한다.보통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교육을 받게 되지만, 요즘은 유아 적부터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거쳐 한글은 물론 외국어인 영어까지 깨쳐서 오기도 한다.이렇게 지식습득에는 열광인 부모들이 가정교육에는 자못 소홀한 점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자식들에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이 직접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것도 저것도 부모가 대신해 준다. 자식이 원하는 건 거의 들어준다.애들은 원하기만 하면 거의 다 가질 수 있다는 보호본능에 젖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그 중 밥 먹는 일이다. 학교급식으로 밥까지 학교에서 먹여야 한다. 초등은 하루 한 끼지만, 중·고등학교는 2끼가 기본이다. 기숙사라도 있으면 세끼를 다 챙겨야 한다.한데 아이들은 이미 가정의 식습관에 길들여진 상태다. 극심한 편식습관으로 학교의 식사교육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공부는 다음에 보충해서 할 수 있지만, 식사는 매끼로서 끝난다. 어릴 적 부터의 편식이나 인스턴트 선호로 인해 소아비만에서부터 각종 소아 성인병까지 다양한 질병을 앓고 있는 애들이 많다.학교는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서 식습관을 고치려고 노력하지만, 아이들의 입맛은 바뀌기가 어렵다.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충돌과 부적응 등 문제가 발생한다. 그래도 평생의 건강을 좌우하는 건전한 식습관 즉 골고루 먹고, 꼭꼭 씹어서 먹기, 잔반 남기지 말기 등을 가르친다.부모로부터 배우게 되는 가정교육은 좀 더 엄격해야 한다. 그중 식습관은 평생의 건강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버릇이자 습관이다.학교의 노력에 적극적인 이해와 협조로 건전하고 균형 있는 학교급식 문화가 정착될 것이다.

2022-05-30

독주하려는 게 아니라면 합의 지켜야

김진국 고문 어제 박병석 국회의장 임기가 끝났다. 지난주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의장단을 초청해 위로 만찬을 베풀었다. 전반기 의장단의 역할이 끝났다는 말이다. 그러나 후반기 원 구성은 보류다. 여야 협상에 진전이 없다. 민주당은 지난 24일 김진표 의원과 김영주 의원을 국회의장과 부의장 후보로 선출했다. 그러나 여야 합의는 쉽지 않아 보인다. 민주당이 합의를 번복해 법사위원장을 넘기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 전반기 원 구성을 하던 행태를 보면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수도 있다. 국회의장이 되면 민주당 당적을 버려야 하는 김진표 의원은 “내 몸에는 민주당 피가 흐른다”라고 주장했다. 중립성을 지키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지방 선거에서 역풍을 맞을까 두려워 미뤄두고 있을 뿐, 선거만 끝나면 큰 소리가 날 수 있다.1988년 13대 원 구성부터 국회 상임위는 여야가 의석 비례로 나누어왔다. 그 이전에는 제1당이 모두 가졌다. 노태우 정부 때 처음으로 여소야대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다수결로 하면 야 3당이 국회의장과 상임위원장을 모두 가져갈 형편이었다. 이 바람에 의석 비례로 의장단과 상임위원장을 나누어 맡기로 합의한 것이다. 김대중 당시 평민당 총재가 적극적으로 주장한 대로다.국회 법사위원장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 소추되면서 주목받았다. 탄핵소추의 검사 역할을 김기춘 법사위원장이 맡았다. 법사위는 그 밖에도 법원·헌법재판소와 법무부·법제처·감사원·공수처 등 사법 관련 정부 기관은 물론 다른 상임위에서 만든 법률의 체계·형식·자구를 심사하는 권한도 갖고 있다. 다른 상임위에서 통과한 법안을 법사위에서 붙들고 있거나, 수정하는 일도 빈번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상임위의 상전, 상원 역할을 해왔다.2004년 총선에서는 탄핵 후폭풍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국회의장과 법사위원장을 제1당과 제2당이 나누어 맡는 관행을 만들어 다수당의 입법 폭주를 막을 최소한의 장치를 보장했다. 행정부 견제가 아니라 다수당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문제는 2020년 4월, 21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176석의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생겼다. 민주당이 ‘검수완박’ 법안 등을 국민의힘과 합의 없이 처리할 수 있도록 법사위원장까지 차지하겠다고 버텼다. 이 바람에 합의가 어려워졌고, 민주당은 그 핑계로 국회의장과 18개 상임위원장을 몽땅 독식해버렸다.지난해 7월에서야 국민의힘에 7개 상임위원장을 넘겨주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법사위원장은 올해 후반기 원 구성할 때 넘겨주겠다고 미뤘다. 이제 그 약속마저 뒤집겠다는 것이다.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기 일주일 전 2차 ‘검수완박’ 관련 법률을 민주당이 단독 처리했다. 법사위원장을 넘겨주지 않으려는 의도가 드러난 셈이다. 후반기도 의장과 법사위원장을 모두 차지해 합의와 상관없이 국회를 운영하려는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법사위원장은 검찰 수사와 대통령의 탄핵소추까지 담당하고 있다.윤 대통령의 독주를 견제하려면 국회의장으로 충분하다. 민주당이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어 국민의힘이 국회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법사위원장을 가져봐야 다수당의 전횡에 저항하는 방어적 역할이다. 법사위원장이 국회의장의 직권 상정까지 막을 수는 없다. 결국 대통령 견제보다 국회 독주를 위한 독식이라고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다.국회에서 다수결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말도 옳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합의제 운영의 전통을 쌓아왔다. 민주당의 대부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앞장서 세운 전통이다. 모든 책임을 제1당이 지는 완전 다수결로 돌아가려는 게 아니라면 중요 길목을 나누어 맡는 전통은 살려야 한다. 다수결로 밀어붙이면 협상이 필요 없다. 소수 의견은 무시되고, 다수의 독재가 된다. 독주에는 역풍이 따른다. 대선 결과에 불복하고 대통령 탄핵을 도모하려는 게 아니라면 법사위원장을 넘기겠다는 합의는 지키는 게 옳다. /본사 고문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2-05-29

삶을 바꾸는 가족정책 기대한다

도근희 구미시가족센터장 시대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예능 프로그램의 트랜드일 것이다. 국민 다수의 관심사가 아니라면 냉혹한 시청률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족의 변화도 예외 없이 프로그램으로 변환되어 왔다. 핵가족이 일반화되고 맞벌이 가족이 증가하면서 가정 내 돌봄 기능의 약화에 대한 우려와 남성의 양육 참여가 이슈가 되던 시기 아버지의 육아 참여 또는 자녀와의 여행 등이 국민 예능으로 떠올랐다. 뒤를 이어 1인 가구에 대한 관찰 예능, 이혼 가족 등 다양한 가족들의 이야기들이 등장하더니 최근에는 한 케이블 채널에서 ‘조립식 가족’이라는 예능을 선보였다.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가족이란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한다. 건강가정기본법에서 ‘가족이라 함은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로, 가정은 가족 구성원이 생계 또는 주거를 함께 하는 생활공동체’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혈연관계가 아닌 사람들이 혼자의 삶도 결혼이라는 방식도 채택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는 예능이 ‘조립식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족도 장난감처럼 끼웠다 뺐다 조립이 가능하다는 설정은 전통적·법적인 개념에서는 파격적이지만 예능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설정은 아니다. 이미 국민들의 인식에서는 일반화된 가족의 모습이기 때문에 예능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가족의 변화는 산업화 이후 꾸준히 얘기되었지만 최근 가족의 형태와 가치관의 변화는 이전과는 다른 속도를 보이고 있다.우리나라 1인 가구는 2010년 23.9%에서 2019년에는 30.2%로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는 반면 전형적 가족으로 인식되었던 부부와 미혼자녀 가구는 2010년 37.0%에서 2019년 29.8%로 감소했다. 가족 규모의 축소도 눈에 띄는 변화로 2인 이하인 가구는 2019년 58.0%이며 만혼이 보편화되어 평균 초혼은 남녀 모두 30세를 넘어섰다.구조적 변화 뿐만 아니라 가치관의 변화도 두드러지고 있다. 여성가족부에서 시행한 제 4차 가족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약 65%는 혼인과 혈연 관계가 아니더라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조립식 가족이라는 예능은 이런 국민들의 공감대 속에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변화는 가족 중심의 문화에서 개인의 권리와 행복이 매우 중요한 가치로 부각되었다는 점이다. 노부모에 대한 부양과 돌봄에 대한 동의는 지속적으로 낮아지고 있으며 자녀 양육에 대해서는 경제적·신체적 부담 인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으며 가정 내 전통적인 성역할에 대한 인식은 낮아지고 있지만 평등한 가족 문화에 대한 요구는 높아지고 있다.현재 가족의 모습을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것에서 가족 정책의 방향성을 찾아볼 수 있다.우선 보편적 복지라는 관점에서 가족 정책의 확대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가족에 대해서 사적 영역으로 인식해서 가족의 약화된 돌봄기능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정책 방향이 제한되거나 소관없이 가족소득수준을 반영한 선별적 가족을 대상으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가족의 삶은 소득 수준, 구성원의 수나 형태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며 삶의 영역도 경제 활동과 주거 문화, 양육과 교육, 문화, 일 생활 균형, 가족 구성원의 생애주기, 가족 형태 등을 모두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포괄적이고 보편적인 측면에서 가족 정책이 수립될 필요가 있다.두 번째 일반적 가족 형태로 자리 잡은 1인 가구에 대한 정책적 지원이다. 1인 가구로 통칭되지만 연령, 형성 배경, 자발적 또는 비자발적인지 등에 따라 필요로 하는 정책은 매우 다르다. 생애 주기별로 1인 가구에 대한 체계적 정책을 개발함으로써 1인 가구의 사회적 고립감을 예방하고 지역 사회와 소통하는 통로를 제공하여야 한다.세 번째 다양한 가족에 대한 맞춤형 지원과 다양한 가족에 대한 감수성이 우리 사회에 확산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부모 가족, 맞벌이 가족, 조손가족, 장애인 가족, 다문화가족에 대한 맞춤형 지원과 더불어 차별받지 않는 여건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네 번째는 다양한 돌봄이 실현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돌봄이 필요한 아동들이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하나의 축이라면 노부모 대한 공적 부양 체계를 강화하는 것이 또 다른 축이다.다섯 번째는 가족 정책도 개별화 또는 개인화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 가족의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지만 개별 구성원의 욕구도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규모 교육보다 개별 컨설팅, 상담 등으로 개인의 욕구가 잘 실현될 수 있고 접근하기 쉽고 참여하고 싶은 정책이어야 한다.새롭게 출발한 중앙정부, 그리고 다가오는 6월 선출될 새로운 지방정부에서 가족 정책은 선언이나 선포가 아니라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서 삶이 바뀌는 정책이 되기를 기대한다.

2022-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