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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억 저편에 깔려 있는 그리움…

2001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온 시인 윤성택은 데뷔 5년 만인 2006년 남다른 시각과 촘촘한 감성의 그물망으로 걸러낸 현실세계 속 각양각색의 풍경들을 담은 첫 시집`리트머스`를 펴냈다. “잘 빚어진 시에 대한 고전적인 예술 지향과 언어에 대한 외경심을 깊이 간직한, 최근 시단의 비주류(?)의 영토를 진중하게 답파하는 젊은 시인”(김수이)이라는 평을 받은 그 첫 시집은 요란스럽지 않게, 그렇지만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첫 시집이 나온 후 7년이 지난 지금, 윤성택 시인의 두번째 시집 `감(感)에 관한 사담들`(문학동네)이 출간됐다.첫 시집이 비정하고 삭막한 현실의 치부를 포착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주었다면, 두번째 시집이 독자들을 안내하는 곳은 `기억`이다. 기억은 과거의 일이지만, 존재의 의식과 무의식에 자리하며 현실에서 영향을 미친다. 시집의 문을 여는 서시에서, 우리는 그 기억의 실체에 조금 다가갈 수 있다.“한 사람이 나무로 떠났지만그 뒷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어느 날 나무가 되어 돌아온 그를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어쩌면 나는 그때 이미 떠난 그였고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른다떠난 그가 남긴 유품을 새벽에 깨어천천히 만져보는 기분,길을 돌아보면그를 어느 나무에선가 놓친 것도 같다나는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살아간다는 건 온 신경을 유목한다는 것이다그가 떠난 자리에 잠시 머물면서이렇게 한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기억 저편` 전문세상을 떠나 잊혀버린 한 사람과 그를 기억하는 또 한 사람인 `나`가 있다. 현실에 없는 `그`를 `기억`하는 `나`에게 “살아간다는 건 온 신경을 유목하는 것이”자 “그가 떠난 자리에 잠시 머물면서/ 이렇게 한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기억은 한없이 무겁고 우울하다. 사라진 것을 기억하는 일이란 그리움을 감각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윤성택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담아내고 있는 `기억`의 저편에는 이렇듯 `그리움`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다.“바람의 궤와 함께 이어지는 색감에서사위를 움켜쥔 채 회전하는 윤곽,신화의 조난 같은 새벽이 다가오는 사이빛은 여러 개의 가설을 파먹는다가지마다 행성을 밝히는 액정들지금도 불 밝은 몇몇 접속자들후둑 떨어지는 홍시의 여정을 귀에 들려주면불면의 시공간이 채집된다녹슨 자전거 바퀴 속을 항해하는 먼지들은이제 외계의 답신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아득히 계통에 없는 유기물로 스며든 후나선의 사다리를 올라가고 있을 때감나무에서 붉어지는 봉문이 있다핏빛 중력이 서서히 끌어당기던 언 땅 밑 항로를 가다보면나직이 어느 불행과 조우할 수 있을까새벽녘 얼굴만 비추는 액정에는파리한 안색이 걸려 있거나 주술처럼 손톱이 부딪쳐온다별들이 지독한 건 제 빛을 보내그 눈빛이 되기 때문이다인간은 붉은 탯줄에 매달려 양육되고고인은 외장 하드에 검은 시신경을 연결한다희뿌연 배경 붉은 화소의 감나무는광속의 주파수를 따라운명은 다만 서로 돌아다보는 거라고나뭇가지 갈래로 뻗어가고 있다감과 감의 경계는 응시이다”-`감(感)에 관한 사담들` 전문표제작 `감(感)에 관한 사담들`은 모니터 앞에 앉아, 중력의 법칙대로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공중의 전파체로 바뀌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신랄하게 보여준다. 이제 우리의 감각은 브라운관이나 액정화면을 읽어내는 눈만 남은 것은 아닌지(“감과 감의 경계는 응시이다”) 시인은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이 시집이 시종 기억과 그리움 사이에서 우울하게 부유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 것이다.▲ 시인 윤성택“밤하늘 속 탐사선이 가없이 떠가는 상상베개에 눌린 안구 안쪽에서 폭풍이 일고깊이 묻혀 있던 유적이 드러난다보이저2호에서 판독불능의 신호가 보내지면어느 꿈이 황금음반을 틀어주고 있다는 생각탐사선이 태양계 끝에 가 있는 것은방안에 떠 있는 어떤 입자 속 제국에내가 기류하고 있다는 것, 비 오는 밤막막한 공간에 음악이 퍼지면몇백억 킬로미터 밖 동체가 느껴진다나는, 이 우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내게서 온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기류(寄留)` 전문꿈의 생생한 체감을 아름답게 묘사한 이 마지막 시에서, 일종의 유체이탈(“몇백억 킬로미터 밖 동체가 느껴진다”)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분열 상태에 놓인 시적 자아는 황금음반이 들려주는 우주의 음악 속에 몸을 띄운다. 잊힌 기억의 유적을 더듬는 막막한 그리움을, 시인은 그렇게 이 세계에 기류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고 황금음반의 음악을 들으며 견디고 있는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7-12

인간존재의 불안·부조리 파헤쳐

인간 존재의 불안과 부조리를 파헤친 사데크 헤다야트의 대표작 `눈먼 부엉이`(문학과 지성사)가 출간됐다. 사데크 헤다야트(1903~1951)는 테헤란 명문가 출신으로 파리에서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이란의 전통에 서구의 문학 기법을 결합하여 발전시킨 현대 페르시아 문학의 대표 작가이다.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눈먼 부엉이`는 한 가난한 예술가가 자신의 영감의 원천이자 동시에 절망의 원천이 되는 한 여인의 시체를 암매장한 뒤 술과 아편의 힘을 빌려 생생하고 무시무시한 신기루의 세계로 빠져드는 초현실주의 소설로 억압의 시대와 그리고 인간 존재의 본질적 부조리와 화해하지 못한 작가의 고통과 고독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며 인간의 가장 어두운 내면 풍경을 그린 이 소설은 뛰어난 상징성과 눈부신 묘사, 예리한 통찰로 문학사에 남을 작품이 됐다. 잔혹성과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정작 이란에서는 금서로 지정됐으나 대중들 사이에서는 잊힌 적이 없는 이 책은 새롭고 신비한 페르시아 문학을 선보이는 수준을 넘어 세계문학의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받는다.주인공 `나`는 필통에 그림을 그리는 무명의 화가이다. 어느 날 나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삼촌이 찾아온다. 삼촌에게 술을 대접하려고 창고로 간 나는 벽 틈새로 하나의 광경을 목격한다. 검은 옷을 입은 한 소녀가 강가의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 앉은 노인에게 메꽃을 건네는 광경이다. 잊히지 않는 소녀의 모습은 나의 영혼을 깊은 전율로 뒤흔들어 놓고, 나는 오랫동안 그 소녀를 다시 만나게 되기를 바라면서 방황한다.헛되이 소녀를 찾아 헤매던 내 눈앞에 갑자기 소녀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나의 집 앞에서. 소녀는 몽유병자처럼 내 집으로 들어가고, 그리고 곧 내 침대에서 그대로 죽어버린다. 나는 소녀의 시체를 절단해 가방에 넣고 먼 황무지로 가져다 묻는다. 소녀의 죽음 이후 삶의 깊숙한 무의미 속으로 추락해버린 나는 아편과 술의 도움을 빌려 기나긴 일생의 환각 속으로 몰입하는데…./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7-12

키워드 `엄마`… 7편 단편 묶어 출간

2000년 `동아일보`신춘문예에 단편 바늘이 당선돼 등단한 이래 섬뜩하면서도 관능적인 미학적 단편들과 면밀한 취재를 바탕으로 강렬한 서사와 탄탄한 문장의 장편들을 발표해온 작가 천운영의 네번째 소설집 `엄마도 아시다시피`(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두번째 장편소설 `생강`(2011) 이후 2년 만에,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2008)을 펴낸 지 5년 만에 선봬는 작품으로 2012년 이상문학상 우수작으로 선정된 `엄마도 아시다시피`를 비롯한 총 7편의 단편을 묶었다.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엄마(모성)`로 명쾌하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엄마와 여자들의 이야기를 비껴간다. 마음이 하는 일이 매양 그러하듯, 모성 그리고 감정의 복잡다단한 면들을 표출하는 천운영 소설의 인물들은 복잡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내면을 바닥끝까지 치밀하고 집요하게 파고든다. 욕망, 결핍과 분리불안, 질투와 배신에서 비롯된 일그러진 모녀, 모자, 유사 자매, 반려동물과의 관계 탐색은 곧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학관계를 상기하고 상처의 극복과 치유, 회복과 성장의 열쇠를 쥔 트라우마 들을 들쑤시며 소설을 읽는 내내 오랜 여운과 깊은 멍울을 남긴다.소설 `남은 교육`은 삼십대 중반의 싱글이자 작가인 딸이 사사건건 간섭하고 조정하려드는 엄마와 불편한 동거에 들어간 순간 꽃무늬 접시 세트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딸을 향한 엄마의 매몰차고 새된 비난과 질타, 욕설과 저주는 일순간 이들 모녀의 관계를 피도 눈물도 없는 대결의 구도로 몰아간다.결정적인 순간에 드라마틱한 발작 증세를 보이며 종국엔 승리자로 자임하는 엄마 앞에서 딸이 고개를 수그리는 것처럼 여자의 연애 역시 순탄치 않다. 모멸감과 배신감으로 몸서리치는 여자가 결국 돌아가는 곳은 천박하고 심술과 억지로 가득 찬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집, 여자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엄마의 품안이다.반면 어린 시절 생존을 위해 핫도그 먹기 대회 챔피언을 갱신하다 죽은 엄마에 대한 죄책감을 노년이 될 때까지 떨쳐내지 못하고 동물 해부에 관심을 갖게 된 한 어류 전문 박제사의 이야기인 `유리입술`과 팔십오 세의 노모를 잃은 늙은 장남의 강한 애착과 사모곡을 그린 `엄마도 아시다시피`도 함께 수록돼 있다.이 두 작품은 “모든 인간이 부모로서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식으로 태어나 자식으로 죽어간다는 명백한 사실”(조연정, 문학평론가)을 우리에게 환기하는 한편 “다양한 형태로 엄마가 되지 않은 여자들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7-12

신라장군 이사부, 우산국 정벌전쟁 전모

1500년 전부터 시작된 일본의 독도침탈, 그에 맞서 우리 땅 독도를 지켜내고 고대사에서 홀연히 사라졌던 신라영웅 이사부. 역사의 그림자에 가려졌던 우산국 정벌 전쟁의 전모가 밝혀진다.`동해영웅 이사부(북랩)`는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역사상 최초의 사건인 신라 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정벌` 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장편소설이다. 저자 안휘씨는 기자로서의 탐구정신을 발휘해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해지는 많은 사료들 뿐만 아니라 울릉도 현지와 동해안 일대에 전해지는 전설들을 뼈대로 생동감 있는 묘사와 상상력을 가미하며 흥미로운 역사소설로 탄생시켰다. 1500여년 전, 강력한 해상왕국인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세우고 통치한 우해왕은 대마도까지 벌벌 떨게 할 정도로 초인적인 힘을 지닌 왕이었다. 그러나 512년, 우해왕은 우산국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신라장수 이사부에게 무릎을 꿇게 된다. 해전에 익숙하지 않았던 신라가 왜 그렇게 우산국 정벌에 큰 공을 들였던 것일까? 그리고 왜인(倭人)들은 우산국을 발판삼아 무슨 음모를 꾸몄던 것일까? 이사부 장군은 독도(우산도·于山島)를 지켜내기 위해 어떤 일들을 했을까? 전쟁이 끝난 뒤 서라벌에서 `대영웅(大英雄)`, `신(神)`으로까지 칭송받던 이사부가 홀연 역사에서 사라졌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이 책은 계속되는 일본의 망언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지금, 그 이름만 듣고도 왜인들이 동해에 얼씬도 하지 못했던 이사부 장군의 이야기다.저자 안휘씨는 후기에서 “이 소설이 독도를 강고히 지켜내려는 정정당당한 대한민국의 큰길 모퉁이에 세워 밝힌 작은 촛불이라도 되어주길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한다./이창형기자 chlee@kbmaeil.com

2013-07-05

사랑과 폭력 주제로 매혹적인 서사

청소년은 물론 모든 세대에게 큰사랑을 받은 화제작 `완득이`의 김려령 작가가 놀랍도록 강렬한 소설로 돌아왔다. `완득이`에 이어 영화화가 진행 중인 `우아한 거짓말`과 호평받은 근작 `가시고백`에 이르기까지 김려령 작가는 특유의 위트와 밀도 있는 문장, 녹록지 않은 사유로 단숨에 우리 출판계에서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잡는 데 성공했다.`너를 봤어`(창비)는 사랑과 폭력을 주제로 벼린 매혹적인 서사를 담고 있다. 한번 손에 들면 쉽게 멈출 수 없는 탁월한 흡인력으로 다가온다. “비범한 이야기꾼”으로서 “생동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의 이 작품은 한국문학 전체에 “새로운 활력”(한기욱 문학평론가)을 불어넣을 것이다. “문장이 당신의 심장을 두드리는 최고의 소설”(변영주 영화감독)이라는 찬사가 무색하지 않을, 올해 문학계 최대의 화두가 될 역작이다.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정수현`은 대중과 평단으로부터 공히 인정받는 중견 소설가이자 유수한 출판사의 편집자이다. 모자랄 것 없어 보이는 삶이지만 그에겐 지옥과도 같은 과거들이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아내는 주위의 모든 이들을 숨 막히게 만드는 섬뜩한 차가움을 가졌다. 그녀는 오로지 수현의 애정만을 갈구하지만 그것을 몰랐던 수현은 아내를 은연중에 자살로 내몬다. 또한 수현은 어릴 적 극심한 가정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의 의문사에 일조한다.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자기 안의 괴물을 품은 수현에겐 아버지의 폭력을 대물림해서 쓰레기 같은 삶을 살아가는 형과, 수현과 아내에게 끊임없이 돈을 뜯어내려 하는 치욕스러운 어머니만이 남아 있다.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가족과의 끈질긴 악연과 자신의 이중성으로 나락에 빠져들게 되는 수현에게 어느날 마주한 후배 작가 `서영재`의 존재는 유일한 희망과 설렘으로 다가온다. 뜨겁고도 발랄하고 애틋한 수현과 영재의 사랑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 중의 하나다.작가가 “지리멸렬한 삶일지라도 끝내 버릴 수 없는, 그러면 안되는 사랑, 그것으로 이제 독자를 만난다”(작가의 말)고 말한 것처럼 이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사랑 이야기는 읽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너를 봤어`는 큰 줄기로서의 이야기 바깥에서도 다양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문단과 출판계의 소소한 에피소드나 소설가의 일상을 맛깔나게 그려낸다. 전작들에서 볼 수 있었던 작가만의 위트도 반갑게 만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독자들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소설로 단숨에 읽어내리게 되는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7-05

잃어버린 과거 찾아 떠난 순례의 여정

▲ 무라카미 하루키무라카미 하루키가 3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민음사)가 출간됐다.일본에서 50만부라는 파격적인 초판 부수로 기대를 모으고, 출간 이후에는 7일 만에 100만 부를 돌파하는 등 베스트셀러의 역사를 다시 쓴 세계적 화제작이다.철도 회사에서 근무하는 한 남자가 잃어버린 과거를 찾기 위해 떠나는 순례의 여정을 그린 이 작품은 개인 간의 거리, 과거와 현재의 관계, 상실과 회복의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프란츠 리스트 `순례의 해`의 간명하고 명상적인 음률을 배경으로 인파가 밀려드는 도쿄의 역에서 과거가 살아 숨 쉬는 나고야, 핀란드의 호반 도시 헤멘린나를 거쳐 다시 도쿄에 이르기까지, 망각된 시간과 장소를 찾아 다자키 쓰쿠루는 운명적인 여행을 떠난다. `색채`와 `순례`라는 소재를 통해 `반드시 되찾아야 하는 것`을 되돌아보게 하는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솔직하고 성찰적인 이야기로, “`노르웨이의 숲`이래 무라카미 하루키가 선보인 최초의 리얼리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적 귀환`이다.출간되기까지, 내용이나 배경 등 작품에 관련한 모든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 화제가 됐으며 출간 당일 자정에 도쿄 시내 유명 서점에 책을 사려는 독자의 행렬이 늘어서면서 팬들의 기대를 증명했다. 특히 소설의 주제와 연관하여 작품에 등장하는, 러시아 피아니스트 라자르 베르만이 연주한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는 절판된 음반이었음에도 복간되어 클래식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작품에 관련된 사회 현상들이 연일 주목을 끌었다.이 작품을 옮긴 전문 번역가 양억관은 단어 하나하나에 실린 철학적인 상징과 입체적인 인물의 심리를 선명하게 포착한 충실하고 유려한 번역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손꼽아 기다려 온 한국 팬들에게 잊지 못할 순례의 여정을 경험하게 한다.돌아가야 할 곳에 돌아가기 위해, 되찾아야 할 것을 찾아내기 위해, 오늘 시작되는 특별한 여행. 한 사람의 성인이 삶에서 겪은 상실을 돌아보는 여정, 고통스럽고 지난하지만 한편으로 그립고 소중한 그 시간을 다자키 쓰쿠루와 함께하며, 우리는 `다시` 삶을 향해 나아갈 희망을 얻게 될 것이다.“그 일이 일어난 것은 대학교 2학년 여름 방학이었다. 그리고 그 여름을 경계로 다자키 쓰쿠루의 인생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스무 살 다자키 쓰쿠루는 가장 친한 네 명의 친구들로부터 갑작스럽게 절교당한다.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따라서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완벽한 공동체에서 단절되는 절망을 겪은 다자키 쓰쿠루는 7월부터 다음 해 1월에 걸쳐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아간다. 혼자서 밤바다 속에 떠밀린 것만 같은 고독하고 가혹한 시간을 홀로 견뎌 낸 뒤, 그는 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린다.서른여섯 살, 다자키 쓰쿠루는 철도 회사에서 역을 설계한다. 역을 만든다는 행위는 그에게 세상과의 연결을 뜻한다. 과거의 상실을 덮어 두고 묵묵히 살아가는 그에게 어느 날, 처음으로 사랑이 찾아온다.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두 살 연상의 여행사 직원 기모토 사라는 고등학교 시절, 다자키 쓰쿠루가 속한 완벽한 공동체와 그 결말에 대해 듣고 불현듯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한 순례의 여정을 제안한다. 그리고 자신의 `색채`를, 한순간 속했던 `완전함`을 기억하기 위한 여행의 시작은, 언제나처럼 사람들로 붐비는 역에서 시작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7-05

눈속에 빛이 가득해 다른 것은 보지 못했다

특유의 초현실적 상상력으로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인 강성의 두번째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 두번째 시집에서 시인의 상상력은 아주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가 시간의 둘레와 겹 그리고 그 사이를 탐색한다. 잠 속에서 꿈꾸는 자아는 의식을 잠정적으로 중지시키고 기억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시간을 탄생시킨다. 무의식에서 생겨난 이 주체는 의식적 주체를 포기하고 다른 `자신-시간`을 만나 잠재적이고 근원적인 감각으로 자신을 관찰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된 나를 응시하고 기술한다.시인은 시집의 문을 `환상의 빛`이라는 제목의 시 속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라는 구절로 열었다. 이 싯구는 분명하게 확정하고 단언하지 않는 시인의 시들을 꿰주는 하나의 버팀목 같다는 느낌을 준다. `환상의 빛`이라는 제목의 시는 강성은의 첫 시집에도 수록돼 있고, 이번 시집에도 연작의 형태가 아닌 개별 시로 세 편이나 등장한다. 이 시들은 강성은의 시적 주체가 경험하는 어떤 기이한 시간들의 경험 혹은 계시의 순간들을 보여준다.“차를 세우려고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운전하는 것을 배운 적이 없다 면허증도 없는 내가 왜 핸들을 잡고 있는 것일까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곤하게 잠들어 있다 차는 우리를 싣고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다 집으로 가고 있다” -`환상의 빛`부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7-05

남편·자식 잃은 슬픔, 문학으로 승화

▲ 故 박완서 작가작가 박완서가 타계한 지 2년의 시간이 흘렀다. 노대가가 남기고 간 수많은 단편소설 가운데 2001년 2월부터 2010년 2월까지 9년 동안 발표한 열두 편의 작품을 그녀를 향한 그리움으로 엮어 한 권으로 펴냈다. 2006년 문학동네에서 박완서 단편소설 전집을 발행한 뒤 다시 7년 만이다. 이로써 그녀의 단편소설 전체가 7권으로 마무리됐다. 그 마지막 권에 해당하는 `그리움을 위하여`(문학동네)에는 박완서 특유의 유려하고 생생한 문체로 녹여낸 노년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이 축복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표제작 `그리움을 위하여`에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이 깃들어 있다. `그리움을 위하여`에는 `나`와 사촌 간이지만 어려운 형편 때문에 `나`의 집에서 집안일을 해주며 옥탑방에서 살아가는 사촌동생이 나온다. 젊어서는 자식들 챙기느라 늙어서는 남편 병수발을 드느라 온몸을 혹사시킨 그녀의 삶은 일견 불행을 껴입은 듯하다. 그러나 그녀의 삶을 어루만져주는 것은 놀랍게도 `사랑`이다. `환갑을 지난 노인`이 하는 `사랑`이 불편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늙어간다는 것은 젊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멀어지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그리움을 위하여`의 그녀는 어떠한가. 그녀는 남편이 임종을 맞이하며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말 “사랑한다”라는 말 한마디에 충분히 가슴 설레하며, 친구를 도와주러 갔던 섬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노인과 사랑에 빠질 만큼 여전히 젊다. 사랑은 그것을 찾는 사람이 누구든 인색하지 않은 것이다.한편, `사랑`만으로는 그 관계를 규정하기 어려운 두 명의 노인이 있다. `대범한 밥상`의 그와 그녀는 사돈 간인데, 사고로 자식을 잃은 후 손자 손녀를 위해 한집에서 같이 살았다. 사정을 모르는, 남 이야기 하기 좋아하는 그녀의 동창들은 사돈과 같이 사는 그녀를 추잡한 스캔들 속으로 끌어당겨와 빈정대고 조롱한다. 소문의 실체가 궁금해진 동창 중 한 명이 그녀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깊은 속내는 말이 필요 없는 거 아니니? 같이 자는 것보다 더 깊은 속내 말야. 영감님은 먼 산이나 마당가에 핀 일년초를 바라보거나 아이들이 재잘대고 노는 양을 바라보다가도 느닷없이 아, 소리를 삼키며 가슴을 움켜쥘 적이 있었지. 뭐가 생각나서 그러는지 나는 알지. 나도 그럴 적이 있으니까. 무슨 생각이 가슴을 저미기에 그렇게 비명을 질러야 하는지.”-`대범한 밥상` 중에서말로 할 필요가 없는, 말로 전해지지 않는 서로의 마음속 고통을 가만히 들여다봐주는 것. 박완서는 고통과 상처로 흔들거리는 노년의 삶을 천천히 응시하며 그들의 마음자리를 짚어주고 위로한다. 그리고 박완서 역시 그녀의 지난했던 삶을 글을 통해 위로받는다. 박완서에게 1988년은 다시 돌아보기 힘든, 막막함으로 가득 찬 한 해였으리라. 잘 알려진 것처럼 그녀는 1988년 한 해에 암으로 남편을, 교통사고로 외아들을 연달아 잃었다. 그리고 한동안 글쓰기를 중단했다. 하지만 그녀를 다시 일으켜세운 것 또한 `글`이었다.`그리움을 위하여`의 마지막에 수록돼 있는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는 자전적 색채가 강한, 그녀의 마지막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남편과 아들을 잇따라 잃은 박완서 개인의 슬픔이 문학으로 승화되는 장면과 마주하게 된다.“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식지 않고 날로 깊어지는 건 사랑이었다. 내 붙이의 죽음을 몇백만 명의 희생자 중의 하나, 곧 몇백만 분의 일로 만들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생명은 아무하고나 바꿔치기할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우주였다는 게 보이고, 하나의 우주의 무의미한 소멸이 억울하고 통절했다. 그게 보인 게 사랑이 아니었을까.”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 중에서6·25전쟁에서 맞닥뜨린 오빠의 죽음에서부터 외아들의 죽음까지, 삶 굽이굽이마다 자리하고 있던 숱한 죽음들을 박완서는 기꺼이 감싸안는다. 자신과 가장 가까웠던 피붙이의 죽음을 많고많은 죽음들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녀는 그 죽음들과 정면으로 마주 보는 것이다.이렇듯 그녀의 마지막 소설집 `그리움을 위하여`에는 고유하고 유일했던 우주가 소멸한 뒤, 그것을 글로써 다시 생성시킨 저마다의 우주가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으며` 떠난 박완서라는 유일한 우주가 우리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느끼게 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6-28

한국 단편소설 英文번역 `문학 한류` 이끈다

한·영대역 문예지 계간 `ASIA`를 발행해온 도서출판 아시아는 한국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해 한글과 영어로 동시에 읽을 수 있는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현대 소설`시리즈(이하 `바이링궐 에디션`)의 두 번째 세트를 출간했다. 분단, 산업화, 여성이라는 주제로 지난해 7월 첫 선을 보인 아시아 출판사의 `바이링궐 에디션`은 그간 해외 명작을 한국어로 번역해 대역으로 출판하던 출판계의 선례와 달리, 한국 문학을 영어로 번역해 이중 언어로 읽을 수 있게 했다는 데서 신선함을 줬다.특히, 영어 번역의 질을 최우선으로 삼고 브루스 풀턴(브리티시 컬럼비아대), 테오도르 휴즈(컬럼비아 대학교), 안선재(서강대학교 영문학 명예교수), 전승희(하버드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연구원) 등 한국 문학 번역 권위자들은 물론 현지 내러티브 감수자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그간 한국 문학을 영어로 번역했을 때 느껴지는 외국 문학이라는 어색함을 벗어던진, 영어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는 텍스트로 인정받았다.“그동안 영어로 번역된 한국 문학작품들 가운데에는 번역투라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번 시리즈의 작품들은 내가 구사하는 것보다 수준 높은 영어로 되어 있어 번역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브래드(브래들리 레이 무어), 밴드 버스커버스커 드러머, 상명대 영어영문학부 교수세트 1번의 1~15권을 출간한 이후 `바이링궐 에디션`은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한국과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평을 받았다. 과거 한국 독자들이 한국어로 번역된 영미문학을 통해 유럽과 미국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왔듯이 이제 외국인들이 `바이링궐 에디션`을 통해 한국 문화 속에서 상상력을 자극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 중심에 수준 높은 영어 번역의 질을 자랑하는 `바이링궐 에디션`이 있다.미국 현지 법인을 통해 아마존에서 판매하는 `바이링궐 에디션`은 별도의 프로모션 없이도 미국 독자들에게 판매돼 한국과 한국 문학을 알리고 있고, 미국 하버드대학교와 컬럼비아대 동아시아학과, 보스턴 칼리지, 워싱턴대학교,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아시아학과 등의 교재로 사용되면서, 벌써 이후 발간될 시리즈를 기다리는 독자들을 확보했다.이문열의 `필론의 대지`를 비롯해 이대환의 `슬로우 불릿`, 임철우의 `직선과 독가스`, 홍희담의 `깃발`, 방현석의 `새벽 출정`, 윤후명의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승우의 `목련 공원`, 김인숙의 `칼레 찔린 자 국`, 한강의 `회복하는 인간`, 정이현의 `트렁크`, 이호철의 `판문점`, 하근찬의 `수난시대`, 남정현의 `분지`, 정도상의 `봄 실상사`, 김하기의 `은행나무 사랑`등 총 15권이 4×6판으로 손에 들고 읽기 편하도록 만들어 졌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6-28

임신·중절 민감한 스토리 독자들에 깊은 메시지 던져

지난해 `제노사이드`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야마다후타로상을 석권하고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 `일본 서점 대상` 2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해 내며 국내 파워블로거가 뽑은 올해의 책 1위, 인터넷 서점 올해의 책에 오르는 등의 저력을 발휘한 다카노 가즈아키의 장편 소설 `KN의 비극`(황금가지)이 출간됐다. 사형 제도를 다룬 `13계단`으로 에도가와 란포 상 수상과 함께 수상작 역대 최단 100만 부를 돌파하며 화려하게 데뷔한 다카노 가즈아키는 밀도 있는 구성과 속도감 있는 전개뿐 아니라 사회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는 작품을 잇달아 발표해 사회파 미스터리의 선두주자로 주목받아왔다. 이번에 출간된 `KN의 비극`에서 임신과 중절이라는 민감한 소재를 흥미로운 스토리에 담아 냄으로써 또 한 번 독자들에게 깊이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젊은 나이에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 자리에 오른 슈헤이는 새로운 맨션을 구입하고 아내 가나미와의 행복한 삶을 꿈꾼다. 그러던 어느 날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가나미가 기뻐하며 남편에게 소식을 전하지만 슈헤이는 불안정한 직업과 맨션을 구입하는 데 탕진한 재산 때문에 좀 더 여유가 생긴 다음에 아이를 갖자며 중절 수술을 제안한다. 가나미는 괴로워하면서도 마지못해 수긍한다.`KN의 비극`은 모호하게 그려지는 또 다른 여성의 존재를 통해 시종일관 스산한 공포를 느끼게 하며, 한정된 시간 동안 긴장감 넘치고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이야기를 통해 스릴을 안겨 준다. 한편으로 의사로서 이소가이가 갖는 고뇌를 통해 `생명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6-28

인간 내면과 정신의 문제 깊이 다뤄

`말(言)`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일상을 한번 곰곰이 되돌아보자. 하루 중 우리는 얼마만큼의 말들과 또 어떤 말들을 듣고 내뱉으며 세상과 소통하고 있는가. 그 와중에 우리를 현혹시키고 선동하는 말들, 혹은 처음에는 강렬하게 다가오는 듯하나 한순간에 휘발해버리는 수많은 말들이 부지불식간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반면에 어떤 말이나 글귀는 우리 가슴속에 이정표로 남아 우리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주는 것들도 있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해줄 이 시대에 꼭 새겨듣고 읽어야 할 대문과 철학자들의 문장을 엄선하여 기획한 `책 읽는 오두막`의 `이렇게 말했다` 시리즈에서 `브레히트`에 이은 두 번째 책, `헤세는 이렇게 말했다`가 출간됐다.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헤르만 헤세는 그의 작품이 전 세계적으로 6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약 1억5천만 권 이상이 팔렸을 만큼 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대문호임에 틀림없다. 1942년, 헤르만 헤세를 노벨문학상 수여자로 선정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장에 대한 대담성과 통찰력으로 고전적 인도주의의 이상과 높은 품격의 문체를 보여주었다”. 이렇듯 헤세의 작품은 평화·인도주의적인 세계주의를 향해 있다.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평탄한 문학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소년일 때,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까지 두 번씩이나 자살을 시도했을 정도로 헤세는 정신적으로 심약했다. 이런 그에게 문학은 `구원`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 개인적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기 시작한 문학은 어느새 그 자신을 뛰어넘어,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기에 이르렀고, 자신이 통과한 그 슬픔으로 세상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인생에서 두 번이나 겪은 세계대전에 대해 확고한 반전 의지를 피력함으로 작가로서의 시대정신도 잊지 않았을 만큼 의식 있는 작가의 전범을 보여주기도 했다.이런 헤세의 삶과 함께 작품을 들여다보면, 그에게 글쓰기는 치유로서뿐만 아니라 단순한 창작 활동, 그 이상의 `구도적 행위`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명사의 이야기를 통해 헤세의 작품이 거론되는 것을 보아도 그의 작품은 인간이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종교심과도 비슷한 내면과 정신의 문제를 깊이 다루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와 시간의 의미를 깨달은 그의 글들을 읽고 있으면 현재 우리가 느끼고 있는 슬픔과 불안의 시간들이 차츰 따뜻하고 값진 시간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바로 이 책은 남다른 통각으로 한 시대를 위무하며 수많은 명작을 남기고 떠난 헤세의 주옥같은 작품 속에서 현재의 우리 삶을 반추해볼 수 있는 문장들을 엄선한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6-21

등단 40년 기념, 열한 번째 시집 詩의 눈으로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다

▲ 시인 정호승일상의 평이한 언어가 빛을 발하는 맑고 투명한 감성적인 시세계로 많은 독자들로부터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정호승 시인의 신작 시집 `여행`(창비)이 출간됐다. 지난해에 등단 40년이 된 것을 스스로 기념해 펴내는 열한번째 시집이다. “시 속에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울고 있는 별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곽재구, 추천사)는 감상처럼, 3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변함없이 맑고 순결한 시심을 자아올려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깊은 반성과 고뇌가 서린 성찰의 세계를 보여준다. 인간다운 삶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으며 “남아 있는 삶 동안 여전히 시의 눈으로 세상과 인생을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시인의 말`) 시인의 경건한 마음이 애틋한 여운을 불러일으킨다.인생의 평범한 진리를 나직한 목소리로 일깨우는 슬프면서도 따뜻한 시편들이 가슴을 적시는 잔잔한 감동은 이 시집의 가장 큰 매력이다. 여기에 50여편의 미발표 신작시를 읽는 반가움이 시집을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개에게 짜장면을 사주었다/배가 고프면 고플수록 내가 개밥을 먹고/내가 세상에서 가장 먹고 싶었던/짜장면을 개에게 사주었다/기쁘다/눈부신 햇살 아래/짜장면을 맛있게 먹는 개들이 아름답다”(`오늘의 기쁨`전문)“꽃이 물을 만나/물의 꽃이 되듯/물이 꽃을 만나/꽃의 물이 되듯//밤하늘이 별을 만나/별의 밤하늘이 되듯/별이 밤하늘을 만나/밤하늘의 별이 되듯//내가 당신을 만나/당신의 내가 되듯/당신이 나를 만나/나의 당신이 되듯”(`성체조배` 전문)어두운 현실에서도 “흐린 외등의 불빛마저 꺼져버린/막다른 골목길”에 “희망의 푸른 그림자”(`희망의 그림자`)를 비추는 정호승의 시는 낮은 곳에서 더욱 빛난다. 시인은 “가난한 사람들이/배고파 걸어가는 저 거리”(`마지막 첫눈`)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외면하지 않는다. 삶의 밑바닥을 깊숙이 들여다보며, “라면박스로 정성껏 집을 짓”고 “하루에 한번씩 하관하는 연습”(`눈사람`)을 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지는 시인의 손길은 더없이 따사롭다. “세상의 너와 나를 생각”하며 “낮은 데로 더 낮은 데로” 내려가 “인간의 낙엽으로 다시 썩을 수 있게 되길”(`미소`) 바라는 시인은 잠시라도 “아름다운 인간이 될 수 있”(`바닷가`)기를 꿈꾼다. “나는 길가에 버려져 있는 게 아니다/먼지를 일으키며 바람 따라 떠도는 게 아니다/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당신을 오직 기다릴 뿐이다/내일도 슬퍼하고 오늘도 슬퍼하는/인생은 언제 어디서나 다시 시작할 수 없다고/오늘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길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당신이/지푸라기라도 잡고 다시 일어서길 기다릴 뿐이다/물과 바람과 맑은 햇살과/새소리가 섞인 진흙이 되어/허물어진 당신의 집을 다시 짓는/단단한 흙벽돌이 되길 바랄 뿐이다”(`지푸라기` 전문)타인의 고통을 한없이 선한 연민의 눈길로 바라보는 것에 비하여, 자신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는 사뭇 엄격하고 가혹하기까지 하다. 시인은 “버릴 수 있는 자존심이 너무 많아서 슬펐던”(`자존심에 대한 후회`) 일생을 후회하기도 하고,“오늘도 새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고 간다”(`속죄`)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면서, “내가 인생에게 속으며 살아온 것은/내가 인생을 속이며 살아왔기 때문”(`꼬리가 달린 남자`)이라고 고백한다. 이처럼 시인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거짓의 검은 혀”(`혀를 위하여`)를 잘라내는 참회로 죄책감을 드러낸다.“살아서는 그 나무에 가지 못하네/(…)/내 한마리 도요새가 되어 멀리 날아가도/그 나무 가지 위에는 결코 앉지 못하네/나는 기다릴 수 없는 기다림을 기다려야 하고/용서할 수 없는 용서를 용서해야 하고/분노에 휩싸이면 죽은 사람처럼 죽어야 하고/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다 받아들여야 하네/그래야만 죽어서는 그 나무에 갈 수 있다네/살아 있을 때 짊어진 모든 슬픔을/그 나무 가지에 매달아놓고 떠나갈 수 있다네”(`슬픔의 나무`부분)어느덧 이순의 나이를 넘긴 시인은 “늙어간다고 사랑을 잃겠”으며 “늙어간다고 사랑도 늙겠느냐”(`산수유에게`)며 어떤 사랑을 다짐한다. “별의 길을 따라”(`별의 길`) 반평생 오롯이 시의 길을 걸어온 시인은 “왜 떠날 생각을 하지 않니”(`여행가방`)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이제 조용히 떠날 채비를 차린다. 그러나 상처 입고 외로운 마음들의 오지로 떠나는 시인의 여행은 `돌아옴`을 특별히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것은 곧 사랑에 다름 아니다.“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과 같다”(`토요일`)는 테레사 수녀의 말씀을 되새기며, “운명의 검은 가방을 던져버리고” “종착역도 없는 역”(`나의 기차`)으로 향하는 시인의 여행길에 “축복인 양”(`눈사람`) 첫눈이 내릴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6-21

독자들을 웃기고 울리는 바로 당신의 사랑 이야기

한겨레문학상, 요산문학상, 허균문학작가상 수상작가인 소설가 한창훈(51)이 4년 만에 들고 온 이야깃거리는 단연, “사랑”이다. 좀더 고민해 찾으면 제목으로 쓰인 “연애사(史)”가 더 들어맞을 듯하다. 각각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신만이 간직해온 은밀한 “연애사” 하나쯤은 있을 터, 또한 “그 남자”가 바로 당신 혹은 나를 지칭하는 것은 당연지사. 제목만으로 이 소설집이 매우 흥미롭고 또 따끔할 것이란 걸 대번에 추측할 수 있겠다. 그것도 이야기라면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펄펄”(문학평론가 서영채, 추천사) 뛰는 소설가 한창훈이라면? 그렇다면 우리 독자는 마음 놓고 실컷 웃을 준비가, 또 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그동안 그만이 독점적으로 그려내 보인 섬, 그 섬사람만의 위트 속에서 그 “사랑”이라는 것을 좀더 가깝게 또는 나의 개인(연애) 역사와 비교해가며 옆사람 힐끔 눈치 보며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고백하건대, 한창훈의 이번 신작 소설집 `그 남자의 연애사`(문학동네) 속에 부려놓은 이 아홉 편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나와 연애했던 당신의 연애사, 즉 우리들이 함께 견디고 건너온 “연애, 사(事)”인 셈이다. 한창훈의 이번 신작 소설집 `그 남자의 연애사`속 사랑 이야기는 삶과 사랑의 겸침이다. 그가 들려주는 편편의 사랑 속에는 삶의 무늬(의지)가 스며들어 있고, 우리가 겪는 삶(사랑)의 시작과 끝을 말하고 있으며 그 안에 파도치는 다양한 연애(삶의 무늬)의 형국이 섬세하게 갖가지 일화로 뻗어 있다. `사랑을 하자`가 `삶을 살자`로 읽히는 소설. 그런 연유로 이 소설집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가슴이 먹먹하다가도 삶의 긍정 에너지로 가득 찬 의지를 다짐하게 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6-21

안락과 혼란 사이, 거기에 숙녀가 있다

▲ 시인 박상수시인이자 비평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박상수 시인이 두번째 시집 `숙녀의 기분(문학동네)`을 펴냈다. 전작 `후르츠 캔디 버스`이후 7년 만에 찾아온 이번 시집은 그 제목부터가 읽는 이의 마음을 잡아끈다.먼저 `숙녀`. 1) 교양과 예의와 품격을 갖춘 현숙한 여자. 2) 보통 여자를 대접하여 이르는 말. 3) 성년이 된 여자를 아름답게 이르는 말. 그러나 굳이 이러한 사전적 정의를 밝히지 않더라도 이제 막 성인이 된, 젊은 여성을 존중하는 의미를 담은 호칭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터. 그리하여 이 시집을 이끌어가는 화자는 7년 전 사탕을 빨던 아이도, 세상을 너무 많이 알아버린 중년도 아니다. 또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반대로 특권을 누리는 권력을 가진 자들은 더더욱 아니다.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한 단계 계단을 오르긴 했으나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툰 아이와 어른 사이, 소외 계층도 특권 계층도 아닌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가야 하는 안락과 혼란 사이, 거기에 `숙녀`가 있다.그렇다면 `기분`은 무엇일까. 1) 대상·환경 따위에 따라 마음에 절로 생기며 한동안 지속되는, 유쾌함이나 불쾌함 따위의 감정. 2)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나 분위기. 이처럼 `기분`은 외부의 영향을 받아 일어나는 것이다. 때문에 `기분`을 파악하는 것은 그것을 둘러싼 대상과 환경을 파악하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이 던져져 있는 삶의 정황에서 생겨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분이기 때문이다.“가지 마세요 우릴 구해주세요만국기가 펄럭이는 계주에서 흰색 바통을 놓쳐버린 것처럼진한 당밀차가 캐러멜 색으로 마룻바닥 위를 흠뻑 적셔나갈 때운동장 스무 바퀴를 뛴 다음의사향 냄새 감도는가슴을 두 개나 가지고서.”-`교생, 실습` 부분서시에서 우리는 숙녀로 진입하려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운동장 스무 바퀴를 뛴 다음의/ 사향 냄새 감도는/ 가슴을 두 개나 가지고” 있는 숙녀 직전의 그들은 메이크업이나 향수 따위로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교생 선생님`의 경험만으로도 인생이 바뀔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여린 감수성을 지닌 그들은 “만국기가 펄럭이는 계주에서 흰색 바통을 놓쳐버린 것” 같은 곤경과 상실감 속에서 비로소 숙녀의 세계로 진입한다.“좀 가, 냄새나니까 좀 가내 침대에 들어가서는 자는 척하고 있구나 그렇게도 입지 말라는 늘어난 면 티를 입고서, 굴욕 플레이가 더는 싫어서 너를 만났지 스쿨버스에서 캐리어 올려줄 사람이 없어서 너를 만났어 일주일 전부터 너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기어이 마구 해버렸다 넌 이불 밑에서 번민광처럼 중얼거렸지내가 시험 떨어졌다고 이러는 거니.한 번 더 떨어져서 다섯 번 채워, 그다음엔 어디 국토대장정 같은 데라도 갔다 와 거기 가면 울면서 어른이 된대그러지 말랬지 그런 마이너스 사고방식”-`기숙사 커플`부분그러나 숙녀의 세계로 진입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굴욕 플레이가 더는 싫어서” 애인을 만들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취업시험에서 떨어지는 애인을 봐야 하는 심정은 더하다. 오히려 “그렇게도 입지 말라는 면 티”와 가까이 가기도 싫은 `냄새`가 비참한 현실을 더욱 확인시켜줄 뿐이다. 실패로 얼룩진 굴욕을 극복하고 눈물을 흘리는 성장통을 겪어야 어른이 될 수 있는 현실에서 “찻잔 받침대에 조금씩 밀크티를 따라 마시며, 어른 흉내를 내”보기도 하지만, “얕보이기 싫어서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을 그만두고 싶어도 이내 “고개라고 끄덕이지 않으면// 당장 나는 할 게 없어”지는 현실을 자조할 수밖에 없는 숙녀들. 아니, 그들은 어쩌면 숙녀가 되고자 하는, 숙녀를 선망하는 자들에 가까울지 모른다. 화장실도 안 가고 공부하면서, 어려 보이는 외모에, “스타크래프트 밴에서 내려선 스타일”을 한 진짜 숙녀를 그저 바라보며 “나한테는 답이 없는” 것을 확인하는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기 때문이다.-함돈균, 해설 `숙녀라는 이름의 굴욕 플레이어` 중에서책장을 넘기며 앙큼 발랄한 숙녀들의 모습과 우스꽝스러운 좌절의 순간들을 확인하며 웃다보면, 어느덧 씁쓸한 현실에 입맛을 다시게 된다. 그러나 기분은 언제나 사라지고 바뀌는 것. 굴욕의 나날이지만 그럼에도 숙녀들은 주문을 외운다.“큐티 큐티 큐트 샤라랑!”/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6-14

조직심리학자가 들려 주는 미루는 습관에 관한 모든 것

부장의 트집이 두려워 중요한 업무를 퇴근 전까지 미룬 적은 없는가? 과제는 오늘 마감인데 여전히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클릭하고 있지는 않은가? 헬스를 등록하고도 퇴근만 하면 방에 누워 리모컨을 잡고 있지는 않은가? 이처럼 일상적으로 미루는 습관에 젖는 진짜 이유를 알면, 지금까지 결심만 하고 실천하지 못해서 잃어버린 많은 기회들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 미루어 둔 다이어트,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기 위해 허둥댔던 수많은 밤들, 충동에 못 이겨 아깝게 날려버린 시간 때문에 낙담한 경험이 있는가? 아무리 사소한 늑장이라도 중요한 일을 망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아직도 호주머니 속에 당신의 잠재력과 꿈을 구겨 넣고 있다면 지금 당장 꺼내라. 오늘도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자신이 세운 결심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하지만 늘 결심은 창대하지만 결과는 미약하다. 왜 그런 것일까? 바로 늑장이라는 고약한 녀석 때문에 우리는 굳게 다짐한 결심마저 나 몰라라 하게 된다.이 늑장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은 매번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절망하게 한다. 때로는 늑장의 유혹에 넘어가 건강과 학점, 그동안 쌓아 둔 통장의 잔고마저 모두 잃게 된다.자타공인 `미루기 대장`이었던 피어스 스틸은 그동안 자신을 괴롭힌 `늑장`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연구에 몰두했다. 그 결과 진화심리학, 조직심리학, 뇌과학 전 분야를 망라하는 세계 최고의 늑장 권위자가 됐다. 바로 이 순간에도 저자의 `늑장` 관련 논문은 `월 스트리트 저널`, `뉴욕 타임스` 등을 비롯해 각종 분야에서 활발히 인용되어지고 있다.`결심의 재발견`(민음사)은 고질적이고 백해무익한 `늑장`과 `합리적인 미루기`를 구분하면서 `늑장`에 대한 과학적 해부를 시도한다.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한 모든 결심, 동기부여가 되지 않아 결국 달성하지 못한 당신의 목표를 위해 `늑장` 탈출에 필요한 과학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방법을 소개한다.조직심리학자인 저자 피어스 스틸은 뇌과학과 동물행동학, 진화생물학 등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늑장`의 본질적 원인에 대해 명쾌하게 해명한다. 일주일 후의 마감을 영원히 오지 않을 먼 미래처럼 여기며 순간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건 단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근원적인 생존 전략인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6-14

`방전 인생` 10가지 충전 매뉴얼 소개

동기부여와 마케팅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비즈니스 트레이너로 꼽히는 브렌던 버처드가 방전된 인생을 위한 10가지 충전 매뉴얼을 알려주는 `충전`(문학동네)이 출간됐다.날마다 충전하는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마음 가득 충만감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방전된 몸과 마음으로는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책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에너지를 되찾아 다시 한번 충전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책은 관점과 성격을 주도하고 새로움·일의 흐름을 주도하라고 권한다. 또 배움의 욕망을 평가하고 지휘하고 성공을 정체성에 통합할 것을 강조한다. 이와 함께 분명한 비전을 갖고 크게 생각하고 대담해 질것, 긍정적인 투사를 연습하고 매달 도전 프로젝트를 계획하라 등 주도권·실력·합치성·배려·유대감 등 5가지 기본욕구와 변화·도전·창의적표현·기여·의식 욕구 등 5가지 추진욕구를 소개하고 있다.저자 브렌던 버처드는 성과 향상 아카데미와 전문가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매달 전 세계 20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의 책과 온라인 프로그램, 뉴스레터, 강연 등을 접하고 있다. 도미니카공화국에서 겪은 자동차 사고에서 영감을 받아 쓴 책`골든 티켓`은 아마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고 10여 개 언어로 번역됐으며 두번째 책 `메신저가 되라` 또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다. 개인과 팀, 조직이 전하(電荷)를 발견하고 목소리를 공유하고 세상에 더 큰 영향을 미치도록 돕는 일에 인생을 바쳐왔다. `앤더슨 쿠퍼` `CBS 뉴스` `오프라와 친구들` 등의 방송에 출연했으며 달라이 라마, 리처드 브랜슨, 토니 셰이, 토니 로빈스, 웨인 다이어, 스티븐 코비, 디팩 초프라, 잭 캔필드, 팀 페리스, 스티브 포브스, 아리아나 허핑턴 등 각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 같은 무대에 섰다. 액센처, 알코아, 아마존닷컴, 비자, 매리어트 인터내셔널 등 세계 유명 기업들의 의뢰를 받아 일했으며 세계 60여개국의 기업가와 경영인, 수십 개 대학을 대상으로 세미나와 강연 활동을 펼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6-14

걸어서 이승 못 오는 친구에 전하는 이야기

▲ 고형렬 시인고형렬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문학동네)를 펴낸다. 1979년 `현대문학`에 `장자(莊子)`를 발표하며 시단에 나온 26세의 시인이 시를 삶으로 삼아온 지도 어느덧 34년. 올해 생물학적 나이로 육십이 된 고형렬은 아홉번째 시집을 다음의 제사(題詞)로 시작한다.“그곳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는 내가/ 이곳으로 걸어올 수 없는 너에게”. 그리고 83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뒤따른다. 지난 2013년 5월11일은 시인의 절친이었던 고(故) 박영근 시인의 7주기였다. “나의 두 날개는/ 그의 가슴속 하늘을 날고 있다”(`시인의 말`)는, “그래서 5월이 가기 전에 시집을 내고 싶었다”는 시인. 그러고 보니 시집 제목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도, 한 편 한 편의 시들도 마치 시인이 “이곳으로 걸어올 수 없는” 친구에게 전하는 이야기처럼 들린다.전작 `유리체를 통과하다`의 해설을 쓴 평론가 황현산은 “욕망은 망각으로 씻기고, 상처 입은 육체와 나쁜 기억에 시달리는 마음은 투명한 눈물방울로 허물을 벗는다”며 고형렬의 시적 갱신에 주목한 바 있는데, 신작 시집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는 그 갱신의 연장선상에서 읽힌다. 이는 5년 전 시골(양평군 지평)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며 낯선 나를 만들고 싶었다던 시인의 바람과도 맥이 닿은 듯하다.“도시는 수많은 유리알을 낳는다도시의 유리체를 통과한 것들은유리체 통과의 꿈을 꾸지 않는 것들과 함께 있지만유리체를 통과하지 않은 것들과 같지 않다아직도 뒹굴며 꿈꿀 뿐이다돌아온 것들은 죽고 완성된 것은 훼손된다꿈을 통과하지 않은 것들만 밖에서 천예(天倪)의 숨을쉰다, 유리체는 녹화되지 않고 영원히 비어 있다구름을 향해 그들은 불구의 몸으로가지를 뻗는다”―`유리알 도시의 빌딩 속에서―고귀한 삶을 빙자한 숲의 은유` 부분메트로폴리탄의 고층 빌딩들은 유리창과 거울의 위엄과 능력을 뽐내듯, 서로 경쟁하듯 도시에 들어차 있다.도심 속 빌딩의 사방, 삶의 공간 사방이 유리와 거울로 둘러쳐져 있다는 점에서 유리와 거울의 기능은 같다. 그러나 유리는 빛을 투과시키고 거울은 빛을 반사시킨다는 점에서 상반된 속성을 지니기도 한다.“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에 종종 등장하는 “거울” “유리알” “유리벽” “유리체” 등의 시어는 현대 도시의 폐쇄성, 단절성을 상징하는 한편,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움(“통과의 꿈”)을 노래하는 셈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6-07

예술을 사랑하는 사회학자의 연구서

대중의 사랑과 평단의 지지를 받으며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눈앞에 없는 사람` 등 지금까지 두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자 사회학자인 심보선이 첫 연구서이자 산문집인 `그을린 예술`(민음사)을 출간했다. 심보선은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현재 우리 사회가 맞이한 예술의 위기와 삶의 비참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전망하며 예술을 행하고 또 삶을 사는 당사자로서 체험하고 관찰하고 느끼고 사유한, 예술과 삶의 관계를 말한다.신자유주의 체제의 거대한 영향 아래 우리 삶은 피폐해졌고 시장 논리에 잠식당한 예술은 죽었다. 심보선은 우리가 조금 더 자유롭고 조금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꾸는 꿈으로서의 예술을 꿈꿔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에서 삶, 정치, 일상과 접속하며 우리 삶 속에 위태롭고도 생생하게 존재하는 예술, 자본주의의 격렬하고 성마른 불길 속에서 꿈틀거리며 살아 있는 이러한 예술을 심보선은`그을린 예술`이라고 명명한다. 심보선은 몇 년간 그을린 예술의 꿈을 탐구했고 그 꿈이 출몰하는 장소를 방문했고, 그 꿈을 실행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그을린 예술`은 예술을 사랑하는 사회학자의 뜨거운 연구서이자 `그을린 예술`의 출현과 현장을 포착한 일종의 르포이며 공동체의 삶과 세계의 행복을 염려하며 저항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인의 진심과 열망이 담긴 산문이다./윤희정기자

2013-06-07

`행복 담론` 만연 사회, 실체 들여다 보다

▲ 철학자 탁석산정치권에서 비롯된 `국민행복시대`라는 말이 최근 들어 전사회적 쟁점이 되고 있다. 사실 행복은 일찌감치 자기계발의 주류 담론으로 자리잡아왔다. 소위 우리 사회의 멘토들도 너나할 것 없이 저마다의 행복론을 펼치고 있는 실정이다. 철학자 탁석산은 이번에 출간한 `행복 스트레스`(창비)에서 맹목적으로 행복에 집착하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우리 사회에 만연한 행복 담론의 실체를 깊이있게 들여다본다. 저자는 현대인들에게 강요되는 행복 강박증을 `행복 스트레스`로 개념화하며 우리가 종교처럼 떠받드는 행복이 사실 텅 빈 개념일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악용될 수 있으며, 우리 인생을 헛수고로 끝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애초부터 모든 것을 의심하는 철학자들이 우리 사회의 맹목적 행복 집착 현상을 분석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문제제기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등장한 지 200년도 되지 않는 `행복`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시대의 키워드가 되었는지를 분석하고, 이런 사고방식이 어떻게 우리 삶을 왜곡하는지를 밝힌다. 그리고 행복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성찰적인 대안을 제시한다.`행복 스트레스`는 한국문화의 역동적인 생활철학을 분석하고 그 이면에 감춰진 심리상태를 꿰뚫어보는 통찰을 선보인 탁석산이 자신의 대표적 베스트셀러 `한국의 정체성`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후 마음먹고 내놓는 한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서이자 자기계발 담론에 잠식당한 행복을 인문학적 통찰로 재구성한 대중적 교양서이다. `신은 죽었다` 그리고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믿음이 근대 사회를 지배한 이후 `행복`은 신의 자리를 차지한 대표적인 키워드이다.철학은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벌이는 투쟁 속에서 자신을 키워왔음을 지적하는 저자 탁석산은 이번 책에서 왜 철학이 시대의 물음인 행복에 제대로 답하지 않는지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그가 보기에 정부와 종교단체를 비롯해 개인과 사회 전체가 행복에 집착하는 오늘날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은 행복은 좀처럼 얻기 어렵고 설사 얻었다 해도 지속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행복한 사람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도 모두 행복해야 한다고 외쳐댄다. 대한민국 전체가 `행복 스트레스`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저자 탁석산이 개념화한 `행복 스트레스`의 대표적인 사례는 모순적이게도 `범람하는 멘토`의 존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공부·승진·돈·외모·명예·젊음 등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에 목을 매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자신이 가진 것을 잃어버릴까봐 불안해하는 사람들에게 멘토들의 목소리는 달콤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시대의 유행어가 되고, 수많은 종교 지도자와 스님들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이 그 증거다.저자는 행복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사회와 개인, 그리고 `그 사이`까지 아울러 살피며 행복문제의 근원을 캐나가야 우리의 현실이 바뀔 수 있다고 말한다.우리가 언제부터 행복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왜 그토록 행복에 집착하는지 그리고 행복이 어떻게 현대인을 지배하는 세속종교가 되었는지 파헤치는 `행복 스트레스`는 행복에 대한 짧은 역사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그 어떤 것보다 오늘날의 우리 삶을 철학하고 그 안에서 개인의 삶을 바꿀 대안을 스스로 모색하게 하는 인문학의 본령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잠시 동안의 위로 혹은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강요하는 책들 사이에서 인문학의 폭넓은 시야와 통찰을 보여주는 이 책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책은 1부 `행복이라는 이상한 이름`, `행복 신화를 만든 것들`, 3부 `행복을 다시 생각한다` 등 총 3부로 구성돼 있다.저자 탁석산은 행복이라는 말을 지금처럼 사용한 것은 서양에서도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동양권에서도 15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이전에 사용한 행복은 `신의 은총` `운`과 같은 의미로서,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힘을 뜻하는 말이었다.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 특히 공리주의의 등장으로 행복의 의미가 쾌락으로 대체됐다는 것이다.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이 행복의 크기를 잴 수 있으며, 자신의 힘으로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근원이다. 국가와 사회가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진 이유이기도 하다.제1부가 행복에 집착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과 그 기원을 살핀다면, `제2부 행복 신화를 만든 것들`은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행복 스트레스의 배후에 숨겨진 힘을 파헤친다. 저자가 주목한 것은 공리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 시장주의다.행복의 배후에 있는 공리주의, 민주주의, 개인주의, 시장주의가 상품화, 추상화, 개인의 고립, 즉흥적 쾌락 등의 문제를 불러왔으며, 행복에 집착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저자는 제3부에서 본격적으로 우리 사회의 행복을 다시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6-07

다정하고 강건한 아포리즘 詩세계 펼쳐

▲ 김정환 시인시·소설·평론 등 문학 장르 외에도 역사·음악·미술·인문 등 문화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다산성의 상징`이라 불릴 만큼 전방위적 글쓰기를 해온 김정환 시인의 신작 시집 `거푸집 연주`(창비)가 출간됐다. 최근 4년간에 걸쳐 완결한 `전작 장시 3부작`을 빼면 `레닌의 노래`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시집이다.전체 4부로 구성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지나온 세월, 20세기의 시대정신에 대한 성찰과 모색을 통해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서로 교감하고 소통하는 “다정하고 슬프고 강건한 아포리즘”(진은영, 추천사)의 시세계를 펼쳐 보인다.시집 전반에 걸쳐 선명하게 드러나는 폭넓은 지식의 깊이와 특히 `늙은 몸`의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과 사유가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연작시 `다시 읽는 지구 위의 생물`과 `전집의 역전` 등에서 보이는 독특한 형식과 행갈이의 파격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이제는 너를 향한 절규 아니라/이제는 목전의 전율의/획일적 이빨 아니라/이제는 울부짖는 환호하는/발산 아니라 웃는 죽음의 입 아니라 해방 아니라/너는 네가 아니라/내 고막에 묻은 작년 매미 울음의/전면적, 거울 아니라/나의 몸 드러낼 뿐 아니라, 연주가 작곡뿐 아니라/음악의 몸일 때/피아노를 치지 않고 피아노가 치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 내 귀로 들어오지 않고 내 귀가 들어오는 것보다 더 들어와 있는/너는 나의/연주다.//민주주의여.” (`서시`전문)평론가 황현산이 해설 서두에서 “죽음의 시집”이라고 말했듯, 이번 시집에서는 유독 `죽음`에 대한 시인의 오랜 성찰이 두드러진다. 연작시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을 비롯해 `국광(國光)과 정전(停電)` `장모 승천`이 그러하며 연작시 `전집의 역전`에서 불러내는 인물들도 아일랜드의 시인 셰이머스 히니를 제외하면 로르카, 아흐마토바, 실비아 플라스, 박완서, 김근태, 김대중 등 모두 저세상 사람들이다.다른 시라고 해서 죽음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시편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도드라진다.시인은 특히 `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에서 `모기` `거미` `간장게장 게`의 입을 통해 또 `LP 음반` `수의 역사` `매김씨` `늙은 몸`에 비춰 죽음의 여러 양상들을 묘사하며 그 자신의 죽음을 “일종의 구원처럼” 혹은 “가장 신뢰해야 할 전망처럼 암시”(황현산, 해설)하면서 “죽음을 능가하는 죽음”(`여성 모델의 언어`)을 통해 오히려 삶의 명징성을 깨닫는다. 시인은 또 “죽음이란 살아온 생 거슬러/걸어가는 것”(`선물과 명작`)이라고 말한다.세칭 `전방위 예술가`로서 특히 클래식 평론가로도 정평이 나 있는 김정환 시인에게 `음악`은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가 아니라 “삶과 죽음의 종합”(해설)이자 “만국 공통 언어”(`폭설의 아내, 안팎과 그후`)로서 포괄적인 상징어로 쓰인다.“어둠과 음악이 서로를/육체적으로 탐하는 죽음”(`전집의 역전`)에서 드러나듯 시인은 죽음이 음악으로, 음악이 죽음으로 느껴지는 어떠한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내 이빨은 하루 종일 달그락대며 바야흐로/무너지는 중이지만/내 귀의 나이는 뭔가 긁히는 잡음까지 걸러낸다”는 시인은 “`음반=음악=평면=세계`”(`이것들이 인간 죽음에 간섭`)로 보기도 한다.시 `음악의 세계사 그후`에서 시인은 고전음악의 거장들의 생애와 그 뒷이야기를 한편 한편의 시로 형상화해 연주하듯 들려준다.김정환 시인은 또 번역가로서도 탁월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이미 `셰익스피어 전집`(40권)을 번역 중인 시인은 최근에는 5개 언어권 12명 시인의 시전집을 혼자서 완역하는 작업에 돌입하는 괴력을 보여주고 있다.그 과정에서 발상을 얻은 시 `전집의 역전`에서 시인은 “폴란드어 낱말/하나하나 번역하다가 음악과 미술이 만국 공통 언어이듯/시는 만국 언어 공통의 문법”(`폭설의 아내, 안팎과 그후`)이라는 깨달음 속에서 세계적인 시인들의 위대한 시정신과 그들의 전생애에 걸친 삶과 고뇌의 흔적들을 선명한 이미지와 감성의 언어로 되살려낸다.아울러 “역사가 내내 비명의 참사인 것에” “평생 울었던” 김근태, “평화와 희망의 이름” 김대중, 죽어서도 “저승의 슬하 쪽을/더 배려하려는 내색으로 유구”한 박완서, “부유한 집 자제로 가산을 가난한 친구들 시집 출판 비용으로/물 쓰듯” 썼던 강태열(시인) 등을 추억하며 기린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3-05-31

아름답거나 착하지 않은 유년시절

▲ 한유주 소설가새로운 언어와 서사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강력한 해체적 실험을 감행하며 독자와 평단의 뜨거운 주목을 모아온 한유주(31)의 첫 장편소설 `불가능한 동화`(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2003년 문학과사회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래 발표하는 소설마다 읊조리는 듯한 시적 문장과 기존 서사를 해체하는 파격적 형식으로 읽는 이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온 작가가 처음 긴 호흡으로 장편소설을 묶어냈다. 2011년 봄부터 이듬해 봄까지 계간 `문학과사회`에 연재된 이 소설은 “무언가 다르다”와 “역시 한유주다”는 상반된 의견을 불러오며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총 1부와 2부로 나뉘는데 다른 두 차원에서의 이야기가 서로 스미고 짜이며 교묘하게 얽혀 들어가 앞-뒤, 선-후의 경계를 교란하며 결국은 언어의 세계가 모조리 붕괴되어버리고야 마는 경험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한 아이가 있었다. 아이를 위한 동화가 아닌 아이로부터의 동화가 시작된다. 오로지 순수하기 때문에 가장 비겁하고 잔인할 수 있는 아이들의 세계. 가장 강력하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존재들 속에 한 아이가 있다. 아무도 이 아이를 알지 못한다. 눈에 띄지도 않고 누구에게도 불리지 않는 아이. 등과 허벅지처럼 옷으로 교묘하게 가려진 부위마다 푸른 멍과 붉은 상처가 돋아 있는 아이다. 자신을 둘러싼 폭력적 세계를 일기장에 담아낼 수 없는 아이는 “구체적 일상”을 요구하는 숙제 앞에서 누적된 분노가 폭발한다. 밤을 틈타 교실에 들어간 아이는 급우들의 모든 일기장에 `어른스러운 글씨체`로 자신의 문장을 적어 넣는다. 하지만 너무나 아이답게도 담임선생의 `경찰서에 가서 거짓말 탐지기를 해보자`는 허풍스런 겁박에 당황한 아이는 증거를 없애기 위해 일기장을 들고 도망치다가 같은 반에 있는 `미아`와 마주친다. 너무 놀란 아이는 또다시 쏟아질 매질을 피하기 위해 아이만의 극단적인 잔인성을 발휘하게 되는데….”작가가 자신의 창작물과 현실에서 대면하는 판타지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유주의 장편은 표면적 사태만으로 진부를 논할 수 없는 서사적 특질이 있다. 마치 M. C. 에셔의`뫼비우스의 띠`나`그리는 손`처럼 선행과 후행을 가름할 수 없고 쓰는 자와 쓰이는 자를 분리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소설의 형식과 서사의 본질에 대해 깊이 탐구해온 한유주였기에 그 묘한 경계를 넘나들며 긴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가 이 탄탄한 언어의 벽돌로 이루어진 세계의 완전한 붕괴를 예고한다.강력한 서사적 실험을 끝까지 밀고 간 이번 소설은 분명 한유주스럽다. 그러나 이 혼란을 하나의 완결성 있는 `이야기`로, “불가능한 동화”의 가능성을 보여준 이번 한유주의 첫 장편소설에서 독자들은 이전과 확실히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5-31

일상을 그린 화면, 책으로 옮기다

동양화가 유근택 교수(성신여대)의 그림은 일상의 한 귀퉁이를 화면에 담아낸다. 세상에 빈약한 대상은 없다는 자각으로부터 시작된 그의 그림은 우리네 삶을 함축적으로 압축한다.알다시피 `일상`이란 화두(話頭)는 2000년대 우리 미술동네에서 즐겨 쓰던 화두(畵頭)이다. 20~40대의 젊은 작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고민하고 시도해본 주제다. 민주화와 전지구화라는 거대담론이 묵직하게 내려앉던 1980~90년대 미술계에서는 가급적 꺼려했던 소재, 설령 작품에 담는다 해도 키치적 방식을 가미하거나 입체설치-영상의 스펙터클한 방식으로 다뤘던 화제(畵題)를 그는 묵묵히 `한국화`에 포개어 나갔다. 비엔날레와 레지던시라는 현대미술을 상징하는 제도 속에서 큐레이터와 평론가의 시야에 포착되기 위해서는 `비` 일상적-서구적 작업을 해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작가들 사이에 깔려 있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가 생각하는 미술이란 특정 시대, 특정 형식에 영합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형식이란 바로 `나`, 즉 화가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나와 자연이 만나는 지점, 그곳이 바로 삶의 전통과 연결된 것이라는 고집을 한 번도 꺾지 않았다.이런 그가 자신의 화력(畵歷) 20년을 기념해 한 권의 책 `지독한 풍경-(유근택, 그림을 말하다·북노마드)`을 펴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5-31

“원치 않는 기억과 불필요한 정보 삭제”

천재적인 기억술로 유명하며 두뇌 계발 강연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에란 카츠가 스토리로 들려주는 두뇌 계발의 기술 `뇌를 위한 다섯 가지 선물`(민음인)을 출간했다. 현재 이 책은 이스라엘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전작 `천재가 된 제롬` `슈퍼 기억력의 비밀`로 국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던 저자는 그동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문화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번 책에서는 유대인의 지혜는 물론 아시아 문화의 아름다움과 지혜, 특히 한국의 우수성이 책 곳곳에 드러나며, 이야기를 통해 뇌와 마음을 위한 다섯 가지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구성됐다.저자는 유대 문화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문화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는 잠재력을 깨울 수 있도록 할 자기 계발법을 널리 알리고자 이 책을 집필했다.원치 않는 기억과 불필요한 정보를 삭제하고 좋은 기억을 채워넣으며, 치명적인 실수를 예방하고 올바른 결정을 내리며, 충동과 욕망을 통제하고, 상대를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기술이 이야기로 펼쳐진다.1965년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에란 카츠는 500자리의 숫자를 한 번 듣고 기억해 기억력 부문에서 세계 기네스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두뇌 능력 계발 및 향상에 대한 강의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 다국적 기업과 기관에서 기억력 증진에 대학 강연과 세미나를 1천회 가까이 진행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5-24

안온한 일상 이면의 허위의식 꿰뚫다

▲ 정미경 작가오늘의 작가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2천년대 한국문학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된 정미경 작가의 신작 소설집 `프랑스식 세탁소`(창비)가 출간됐다. `프랑스식 세탁소`는 그가 5년 만에 선보이는 네번째 소설집이다.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7편의 단편을 통해 안온해 보이는 일상의 이면에 도사린 인간의 허위의식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한편 각자가 추구하는 아름다운 삶과의 괴리 속에서 개인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조용히 어루만진다. 때로 “설명할 수 없는 결정”(`타인의 삶`)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우리가 진정 “우리였던 순간”(`번지점프를 하다`)이 언제였는지를 사색하는 다채로운 인물들의 삶이 작가 특유의 단단한 문장과 깊은 성찰을 통해 펼쳐진다.정미경 작가는 1987년 신춘문예 희곡 부문으로 등단한 이후 2001년부터 본격적인 소설 창작을 시작했지만 그 이후 누구 못지않게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왔다. 소설집과 장편을 오고 간 그간의 결과물들은 읽는 이에게 늘 그 완성도에 대한 신뢰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번 신작 `프랑스식 세탁소` 또한 하나같이 빼어난 완성도를 지닌 수작들로 채워져 있다.표제작 `프랑스식 세탁소`는 복지재단 이사장인 `나`와 그가 사보에서 우연히 접한 프랑스인 요리사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나`는 자신에 대한 순수한 존경심을 지닌 여직원 `미란`에게 묘한 호기심으로 접근하지만 재단의 비리 의혹에 연루돼 수사를 받게 되자 `나`가 가진 능력있고 도덕적인 이미지에 타격이 갈 것을 두려워하는 미란을 은연중에 자살로 몰고 간다. 그런 그에게 요리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만으로 뜨거운 삶을 살다가 그 자부심을 훼손당하자 끝내 생을 포기한 프랑스 요리사 `르와조`의 이야기는 번민과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의 안온한 삶의 궤적을 바꿀 생각이 없다. 그에게 미란과 르와조의 순결함이나 열정 따위는 얼른 치워버리고 싶은 `바닥에 떨어진 꽃잎`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한국과 프랑스, 현실과 소설이라는 분명한 경계가 있음에도 `나`와 `르와조`의 이야기는 읽는 이의 마음을 절묘하게 하나로 휘감는다. 정미경의 소설은 진실과 거짓, 성찰과 자기기만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영역에서 빛을 발한다.(한기욱, 추천사) 작가는 `프랑스식 세탁소`를 통해 우리에게 일관된 질문을 던진다. 이 치열한 욕망의 시대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 우리가 믿는 것들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폐부를 찌르는 듯한 작가의 사유는 그래서 비교적 차분한 소설의 톤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이야기를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으로 남긴다. 첫번째 수록작 `남쪽 절`은 작가가 밝힌 바와 같이 설치작품 `남쪽 절(南寺, 미나미 테라)`을 소재로 삼았다. 철저한 어둠 속에서 한 발 한 발 내디뎌야 하는 체험에서 느끼는 낯설고 막막한 기분은 주인공 `김`의 심경에 부합한다.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들고 싶어서” 1인 출판사로 독립한 뒤 살아남기 위해 그는 대필 사실을 숨겼다가 문화계에서 퇴출된 과거의 베스트셀러 작가 `백`과의 계약을 따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런 김에게 최소한의 신념과 이상을 포기하지 못하는 아내는 껄끄럽기만 한 존재이며, 지옥과도 같은 용산의 투쟁도 백을 만나러 가는 길을 가로막는 짜증스러운 일일 뿐이다. 그러나 김 역시 심정에서는 자기 삶의 방식에 대해 자괴감을 떨치지 못한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계속 발길을 돌리게 되는 `남쪽 절`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모든 감각을 동원해 조심스레 걸어나가야 하며, 한 점의 빛이 곧 희망의 근거가 되는 가운데 아무도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의 작은 손길로 넘어지지 않게 되는 암흑이다. 이 기묘한 어둠은 현대인의 삶의 작동방식을 상징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안락한 일상의 한 꺼풀 아래에 전혀 다른 세계가 놓여 있다는 인식은 `파견 근무`와 `타인의 삶`에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파견 근무`의 화자인 `강`은 지방법원 판사이다. 최고의 엘리트로서 지역 유지들과 호의호식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중독된 도박의 세계에서 점차 삶이 파탄에 이른다. 그는 애초에 믿었던 철두철미한 법의 세계마저 다분히 판사의 재량에 좌지우지되는 것이라 느끼며 끊임없이 도박장으로 달려가는 상상만을 하게 된다. 이와 양상은 정반대이지만 `타인의 삶`의 인물들 또한 삶의 나락 앞에 놓인다. 의사인 `현규`와 결혼을 앞둔 `나`는 애인이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를 결심하자 어찌할 바를 모른다. 현규는 “인생의 어떤 순간에,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을 할 때가 있다”고 결연히 말하지만, 그 이면엔 모르핀 중독과 얽힌 사건이 있다. `나`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그 결정의 진정한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다.해설을 쓴 이소연 평론가의 말처럼, 정미경의 소설은 생에 내장돼 있는 복잡하고도 신비로운 이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운명 앞에 굴복하거나 우연에 휘청거리기도 하는 인물들을 만나게 되지만 그들이 끝내 실패하거나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나의 삶과 나의 현실을 다시금 차분히 되새기게 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5-24

하위문화 시적 에너지로 고급문화 기습

▲ 황병승 시인하위문화의 거칠고 생생한 시적 에너지를 이용해 고급문화를 기습하는 시인 황병승이 세번째 시집 `육체쇼와 전집`(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황병승은 첫 시집 `여장남자 시코쿠`에서 모호한 상징들로 주류 질서 바깥의 것들을 과감히 동원함으로써 문단으로부터 양 극단에 놓인 평가를 받았다.호평과 혹평이 뒤엉켜 밀려드는 상황에서 나온 두번째 시집 `트랙과 들판의 별`은 문화라고 이름 붙은 것들의 토대가 얼마나 허약하고 덧없는가를 끈질기게 고발했다. 독자는 6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황병승 특유의 발칙한 화법을 한껏 만나게 된다. 그의 생생한 도발은 언제나 자발적 실패로 귀결되는데 이는 다시 한 번 기성의 질서를 통렬히 조롱하는 효과를 발한다.총 46편의 시를 통한 황병승과 세계의 밀고 당기는 한판 대결이 볼 만하다. 시인은 이겼다 말하지 않고 세계는 끝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관전 포인트는 거기에 있다.황병승의 시어는 때로 맹견의 송곳니와도 같다. 이 사나운 이빨이 겨누는 곳은 언제나 세계의 두꺼운 가죽이다. 공격받은 가죽은 순식간에 벌어지며 그 사이로 세계의 맨살이 시뻘겋게 드러난다.“타인의 자유를 강력히 구속하고 체력을 과시하고 난장판을 사랑하며 뒷거래에 주력”하는, 야수보다 무정하고 악독한 사람들의 맨살이다. “셰퍼드가 사람을 구분하는 데 3초”밖에 안 걸린다지만 시인이 보기에 이런 명백한 악을 구분하는 데 3초는 “너무 길다” (`가죽과 이빨`). 시인의 거침없는 공격을 목격한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시집의 해설을 통해 고통과 경이를 동시에 체험했음을 고백한다.“황병승의 유식한 구어와 음흉한 암기 같은 문어와 유창한 저주는 그때마다 고통스럽도록 적합하고, 그 리듬은 자주 책장을 덮도록 아름답다”-`실패의 성자`에서1970년생 시인의 세대에게 실패는 일상다반사다. 이들의 이십대 중후반을 절망케 한 외환위기는 어느 날 마치 다 극복된 것처럼 호도되더니 슬쩍 신자유주의의 기치가 끼어들면서 끝이 어딘지 모를 터널은 자꾸만 연장되고 있다. 이를 대변하듯 시집은 어두운 우화 속에 실패하는 주체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인다.특히 `Cul de Sac`(프랑스어로 `자루 밑바닥`이란 뜻인데 흔히 `막다른 골목`이나 `출구 없는 장소`를 가리킨다)에서는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한 남자가 깊은 구덩이에 빠져 죽은 채로 발견되는 일화를 시 쓰는 화자의 절박한 사유와 나란히 전개하면서 동세대의 슬픔과 분노와 공포에 찬 신음을 들려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5-24

현대인의 잠자는 양심 뒤흔든 잠언들

`분노하라`라는 작은 책 한 권으로 세계인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깨뜨린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스테판 에셀이 2012년 발표한 마지막 자서전이 출간된다. 지난 2월27일 향년 95세로 타계한 이래 전 세계적으로 그의 삶을 재조명하는 붐이 일고 있다.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문학동네)는 스테판 에셀이 세상을 떠나기 1년여 전인 2012년 프랑스에서 발표한 자서전으로, 원제는 `Tous comptes faits… ou presque(이제 모든 것을 말하지요… 거의 모든 것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책의 한국어판은 현재 파리에 살고 있는 작가이자 칼럼니스트 목수정이 번역했다.마치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진보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불꽃같은 신념으로 자신의 지난 삶을 낱낱이 회고한 그의 마지막 자서전은 우리의 잠자고 있던 양심을 뒤흔드는 잠언들로 가득하다. 그는 몸에서 서서히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고 여전히 자본주의의 폭력과 난맥상을 지켜보면서도, 세상은 진보해왔으며 여전히 더 큰 진보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그것은 그가 낙관적이거나 절대적인 좌파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현실주의가 역사의 진화를 명백히 관찰한 결과일 뿐이라고 말했다.스테판 에셀의 사후 그를 프랑스 국립묘지인 팡테옹에 안장하자는 청원서를 올린 정치가들에는 좌파와 우파가 따로 없었다. 에셀이 지지해온 사회당과 녹색당은 물론 우파인 대중민주연합의 정치가들까지그의 죽음 앞에 고개 숙였고,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스테판 에셀은 `프랑스의 사상` 그 자체”라고 추모했다. 그가 진영을 넘어 이렇게 폭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굳건한 믿음, 그리고 그 세상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교조적인 관점을 벗어나 미래 세대와 소통하고 교감한 열정 때문이었다.▲ 스테판 에셀이 책에는 그가 이러한 사상을 구축하기까지 그의 생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만남과 모험이 펼쳐진다. 그에게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자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며 자유와 행복을 향해 질주해 영화 `쥘 앤 짐`의 여주인공 모델이 된 어머니 헬렌 그룬트에 대한 이야기에서부터, 메를로퐁티, 다니엘 컨벤디, 에드가 모랭 등의 사상가들과의 전율 어린 만남, 그리고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 서른네 살이었던 `친구의 어머니`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던 이야기를 비롯해, 그의 생애 단 한 번 찾아온 동성애 경험 등 그 자신의 아주 특별한 사랑의 연대기가 담겨 있다.`분노하라`라는 강력한 슬로건과 레지스탕스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스테판 에셀의 인간적인 매력, 그리고 `분노하라`가 불러일으킨 세계적인 돌풍 이후, 스테판 에셀이 젊은 세대에게 당부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 마지막 자서전에 응축돼 있다.“사랑을 사랑하라, 감탄에 감탄하라!”에셀은 한 인간이 어떻게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막연히 기다리지 않고, 진정 100% 청년으로 살 수 있었는지를 보여준 사람이었다. 그의 1세기에 가까운, 충만하고도 활력으로 가득하던 삶이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00살까지 산 레비스트로스나 얼마 전에 죽은 대처가 오히려 그들의 죽음이 그들이 한때 살아 있었음을 알렸다면, 에셀은 94세에 발표한 이 책이 하나의 증거물이듯, 죽음을 앞둔 그 마지막 호흡까지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나눈 삶이었다.지식의 감옥에 갇히거나 안온한 노년의 평화 속에 주저앉지 말고 참여하는 것, 맹렬히 세상을 움직이는 노를 젓는 하나의 손이 되는 것, 우리가 믿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행동하는 것이 그가 한 세기를 줄곧 청년으로 살아낸 첫번째 비법이라면, 또하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거의 한 세기를 살아낸 이 자유롭고 인간적인 혁명가는 더이상 숨길 것도, 거칠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의 인생에 깃든, 경계를 가로지르는 각양각색 사랑의 역사를 회고한다. 그리고 “질투하지 않는 사랑의 방법을 체득하고 모든 사랑의 모험에 주저 없이 나섰던” 이 경쾌한 젊은이는 훗날 사람들의 사랑과 행복을 가로막고 경계 짓는 모든 것들에 맞서 싸우는 레지스탕스가 되었다.스테판 에셀은 이 책에서 지구상의 60억 인구가 유럽인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두 개의 지구가 필요하고, 미국인의 방식으로 살아가려면 다섯 개의 지구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나의 지구에서 60억의 인구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라면, 그는 이 현실 가운데서 가능한 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내길 꿈꿨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5-10

`믹스언매치` 연작 3편 등 8편 수록

1999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와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한 소설가 원종국의 두번째 소설집 `그래도`(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하나의 모티프를 다양하게 변주해가며 탄탄한 이야기 위에 통통 튀는 상상력을 선보여온 원종국의 14년간의 시도와 실험이 고스란히 담겼다. SF적 상상력과 실험적 기법을 동원해 생명 복제와 이를 둘러싼 철학적 문제를 선구적으로 다루며 지속적으로 발표된 `믹스언매치` 연작 3편을 비롯한 총 8편의 단편이 이 소설집에 수록됐다. 이 책은 어딘가 한쪽씩 고장 나고 쪼그라든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그래도”의 가능성이 소설집 전체를 관통한다.멋진 해결이나 대단한 해소 없이도 자조와 좌절에 파묻히지 않는 `그래도`들의 이야기가 읽는 이들의 마음 한편에도 작게나마 간질간질한 봄을 피워올릴 것이다.앞선 이야기를 인정·수용하면서도 뒤에 이어지는 내용으로 귀결될 때 쓰이는 접속부사 “그래도”. 마치 이전 삶에 대한 부정성을 모조리 긍정으로 전환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의 클리셰처럼 사용되기도 하는 단어다. “그래도 늦지 않았다” “그래도 사랑한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등 `그래도`가 범람하는 오늘 여기에서, 원종국의 `그래도`를 음미해 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5-10

붕어빵 VS 타코야키 놓고 父子 한판승부

한국소설의 참신한 상상력을 발굴하기 위해 창비가 제정한 창비장편소설상의 6회 수상작 김학찬 장편소설 `풀빵이 어때서?`가 출간됐다.`풀빵이 어때서?`(창비)는 소재에 대한 장악력, 생생한 인물 묘사, 깔끔한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며 재치있는 발상과 기발한 화법이 눈길을 사로잡는다는 평가를 받았다.(`심사평` 196~97면).작가 김학찬은 진중하면서도 균형 잡힌 문제의식으로 현실세계를 진단하고 이를 재기 발랄한 이야기로 재창조해내는 귀한 재주를 가진 신예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뛰어난 구성력과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솜씨는 앞으로 그가 펼쳐갈 새로운 상상의 세계를 기대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가볍고 경쾌한 문장, 영상을 보는 듯 생생한 묘사, 태연한 말장난과 은근한 농담까지. 소개팅 현장을 묘사하며 시작되는 `풀빵이 어때서?`의 첫 장면은 작품 분위기를 한눈에 보여준다. 소개팅에서 주인공은 `가업`을 잇는 일에 대한 자부심을 과장되게 늘어놓는다. 주인공의 행색과 외모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던 여자는 주인공이 `가업`을 들먹이자 자세를 고쳐 앉으며 높은 관심을 표한다.아버지 밑에서 주인공이 잇는다는 `가업`은 다름 아닌 풀빵 장사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평생 붕어빵만을 구워온 붕어빵 명인이고, 주인공은 아주 어릴 때부터 대를 이어 붕어빵 굽는 걸 천직으로 생각해왔다. 미래에 대해 따로 고민해본 적도 없고 붕어빵 굽는 데 대학 졸업장은 필요 없기에 대학 진학도 고려해본 적이 없다. 그런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군에 입대한 직후였다.▲ 김학찬 소설가고문관으로 낙인찍힌 주인공은 사회에서 붕어빵을 굽다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명 붕어빵병으로 활약하게 된다. 제대할 때까지 전투복을 갖춰 입고 붕어빵만 구운 주인공은 제대와 동시에 질릴 대로 질린 붕어빵에 이별을 고한다. 제대 후 일본으로 떠난 여행에서 운명처럼 타코야키를 접한 주인공은 타코야키 굽는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유학을 떠난다. 이 순간부터 부자의 불화는 시작된다. 아버지는 타코야키를 굽는 아들을 인정하지 않고 아들은 붕어빵만을 고집하는 아버지를 견디지 못한다. 붕어빵이라는 고전적인 음식과 새로이 수입돼온 타코야키라는 음식의 대립은 부모세대와 자식세대의 갈등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아들아, 붕어빵은 여전히 너를 그리워하고 있다. 나와 붕어빵은 너를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 (…) 어서 귀순하거라”(34면)라고 고집스레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막상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바로 주인공이 어릴 적 집을 나간 줄로만 알았던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되는 것. 가족의 비밀이 폭로되며 주인공은 예상치 못한 강펀치를 맞지만 결국 `미안하지는 않지만, 고맙다`고 능청스레 말하는 정신적 건강함을 보이며 한걸음 성장한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 일련의 과정은 유쾌하면서도 잔잔한 울림으로 남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5-10

인생은 가까이선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지옥 그림은 항상 그려졌어요. 사는 게 고통 아닌 때가 없었나보죠.”“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 최은미의 단편들을 읽고 나면, 문득 이 말이 다시 떠오른다. 고단한 일상의 한순간에 희망의 메시지처럼 붙들고 싶기도 했던 저 말이, 그러나 다시 보니, 더욱 서럽다. 멀리서 바라보는 코미디만큼 서글픈 것이 또 있었던가. `희망`이라는 말처럼 허망한 것이 또 있었던가. 그 안에 파묻혀 있는 이들에겐 더없이 고통스러운 날들의 연속이지만 한 발짝만 물러나도 한 편의 소극(笑劇)이 되어버리는, 그래서 더욱 서글픈 삶의 모습들.“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하나요.”(….)“사방이 막혀서 빠져나갈 기약이 없는 곳. 문헌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너무 아름다운 꿈` 중에서“그렇다. 사방이 꽉 막힌 곳, 이 生에서 빠져나갈 곳은 없다. 꿈속에서는 무엇을 해도 진실이 아니야. 그 꿈을 깨야지. 꿈을 깰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뭔지 알아. 바로 뛰어내리는 거야.”-`너무 아름다운 꿈` 중에서최은미의 소설집 `너무 아름다운 꿈`(문학동네) 소설 속 `리`의 말대로, 과연 악몽과도 같은 삶에서, 아니, 우리가 삶이라고 생각하는 이 나쁜 꿈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 삶 밖으로 나가는 것밖에는 없는 것인가. 그 밖으로 뛰쳐나가야 새로운 삶, 진짜 삶이 나타나는 것일까. 그러면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는 것일까.이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붙들고 싶었던 어떤 빛들. 사랑의 순간들, 잠시나마 모든 것을 잊고 웃음을 터뜨리던 어떤 찰나의 시간들. 하지만, 또 이런 말들은 어떠한가.“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마라. 미운 사람도 가지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그러므로 사랑을 지어 가지지 마라.”(`애호품`, `법구경`)결국, 사랑도 미움도 우리를 더욱 고통스런 순간으로 내몰기도 하는 것.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아니, 우리는 그럴수록 더 열렬히 사랑을 원하고, 더욱 치열하게 누군가를, 무엇을 미워한다.문제는 삶의 한복판에서 아직 닫혀 있는 보석함들을 열고자 하는 의욕을, 그러니까 삶을 더욱 살아나게 하는 너무 아름다운 꿈을 우리가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혹은 그것이 우리에게 한 번의 삶을 여러 번 살게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삶의 도처에 고통이 잠복해 있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삶에 고통스런 순간들이 있겠지만 그러한 순간들조차 되돌아오게 하는 힘과 의지를 빌려 우리는 그 순간들 안에서 어떤 보석들을 꺼내며 그 순간들을 구제하면서 고통조차도 긍정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삶 그 자체를 의욕하고 반복을 의지하는 한에서.-권희철(해설,`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비극을 읽는 것입니다`)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살아내는 것, 이라고 최은미의 소설들은 말하고 있는 것일까./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5-03

탁월한 심리 묘사·흥미진진한 스토리

역사상 최고의 전기 작가이자, 심리소설의 대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생전에 완성한 유일한 장편소설 `초조한 마음`(문학과지성사)이 출간됐다.오스트리아 빈의 유복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츠바이크는 역사적 통찰력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심도 깊은 해석으로 발자크·스탕달·톨스토이·에라스무스 등의 전기를 쓰며 세계 3대 전기 작가로서 명성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인간 심리와 무의식에 대한 섬세한 분석과 묘사가 담긴 소설로 필력을 인정받았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유럽 최고의 작가로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작가”였다.츠바이크는 시, 중·단편 소설, 전기, 희곡 등 여러 장르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했으나 장편소설은 많지 않다. 그나마도 다른 작품은 사후에 유고 더미에서 발견되어 출간된 것이고, 츠바이크가 생전에 완성하고 독자들에게 평가받은 장편은`초조한 마음`이 유일하다. 이 작품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망명생활을 하던 1939년 스톡홀름과 암스테르담에서 출간해 탁월한 심리묘사와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다.츠바이크는 이 작품에서 인간의 미세한 감정까지 낱낱이 해부해 치밀하게, 그리고 생동감 있게 표현해냈다. 자신을 희생할 용기도 없으면서 지나친 연민만을 품었던 주인공 호프밀러를 통해 연민이 가지고 있는 양면성을 잘 그려낸 이 소설은 숨기고 싶은 마음 속 깊은 곳의 이기심과 나약함을 들춰내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도 하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인간 본성에 대한 분석과 흡인력 있는 전개는 문장가 츠바이크의 진수를 보여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