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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가벼운 단어로 써내려간 무거운 詩

▲ 시인 오은“말들이 징검다리고 밥이고 우주고 엄마고 바로 당신이었던 그 무렵, 낙오된 귀를 열어젖히는 한없이 낯선 소리, 에르호 에르호….”-오은 `그 무렵, 소리들` 중에서(`에르호`는 `나`라는 뜻을 품고 있다.)“한국 시에서 소홀히 취급되었던 언어유희의 미학을 극단까지 몰고 간다”(시인 정재학), “스스로 생장한 언어의 힘으로 새로운 시적 규율을 만들어가는 시인”(시인 이재훈), “언어가 구성하는 사회적 조건과 가치를 의심하고 질문하게 한다”(평론가 허윤진)는 평을 받으며, 한국 시의 또하나의 `스타일`로 자리매김한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2002년 `현대시`를 통해 만 스무 살 나이로 등단한 오은 시인의 첫 시집이었다.그가 4년 만에 58편의 시를 들고 돌아왔다. 시인의 범상치 않은 언어감각은 여전하다. 특유의 블랙유머와 그 안에 담긴 사회·문명 비판의식은 이전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첫 시집에서 `무엇을` 쓰느냐보다 `어떻게` `얼마나 다르게` 쓰느냐에 더 집중했다면, 이제는 그 양쪽의 균형을 더 깊이 있게 맞추었다 할 수 있겠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시, 자신이 가는 길이 옳다는 확신이 담긴 시, 스스로를 무한히 긍정하면서도 자기 갱신을 위해 소중한 것을 과감히 버리는 시, 그러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잃지 않는 시, 기꺼이 역치를 끌어올리는 시”(`풀리는 시, 홀리는 시-더 좋은 시에 대한 단상`, `현대시` 2013년 1월호)를 그의 두번째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문학동네)에서 만날 수 있다.“익은 감자를 깨물고 너는 혀를 내밀었다 여기가 화장실이었다면 좋겠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아무도 듣길 원치 않는 비밀을 발설해버렸다 너의 시선이 분산되고 있었다 나에게로 천장으로 스르르 바깥으로 방사능이 누설되고 있었다 너의 눈빛을 기억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는 여기가 바로 화장실이라는 듯, 바지를 내리고 시원하게 노폐물을 배설했다 노폐물은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지 너의 용기에 힘껏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이 모든 일이 내년의 첫째 날에 일어났다 그날은 종일 눈이 내렸다 소문처럼 온 동네를 반나절 만에 휩싸버렸다 문득 폐가 아파와 감자를 삶기 시작했다 여기가 화장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말이 더 마려웠다” -`설` 전문이 시집의 서시 자리에 놓인 작품이다. 말의 씨앗을 발견하고 수집해 그것을 부풀리고 변환시키는 오은 시인 특유의 `말놀이`를 잘 보여준다. `설`이라는 단어를 모티브로 해서 혀(舌), 소문과 발설(說), 누설(泄)과 배설(泄), 눈(雪), 그리고 첫날의 의미까지 엮어갔다. 아무런 `폐`도 끼치지 않는 노`폐`물(`No폐물`로 읽을 수도 있겠다), 문득 아파온 `폐`도 마찬가지다. 표기가 동일하지만 다른 의미로, 이 의미에서 저 의미로 끊임없이 미끄러진다. `설`은 더 많은 `설`이 되어, `폐`는 더 다채로운 `폐`가 되어 무의식적인 감각과 음악적 긴장감을 더한다.“일단 세우고 말하자. 날을. 잡은 것 같았다. 감을. 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병을. 모르는 게 약이라지만” -`날`부분이와 같이 동음 혹은 유사음을 활용하거나 도치를 통해 시 전체에 리듬감을 주고, 익숙했던 한국어를 낯설고 신선하게 접근한 시가 곳곳에 포진해 있다. 시인은 특정한 의미로 굳어 있던 단어들을 유연하게 풀어주고 여러 갈래로 뻗어가며 일련의 `말사태`를 이룬다. 시인 김언은 이 시집 해설에서 이러한 `말놀이` 혹은 `말사태`가 어떻게 가능한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주변을 샅샅이 뒤져야 하고 때로는 현장을 산산이 부수어서 그 속에서 찾아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수색과 색출을 동반한 수집 작업이 극에 달하면, 최초 혼자 있는 것처럼 보였던 어떤 단어/소리/표기 들이 결코 혼자 있지 않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똘똘 뭉쳐서 거대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 찾아온다.`교양인`과 `세미나`란 단어의 뜻을 생각해본 적 있는가. 예사로 쓰이는 단어들이 가리키는 것과 실제 담고 있는 의미의 괴리를 우리는 체감하며 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은 시인의 재기 넘치는 언어유희 뒤에 스민 서늘한 냉소를 만나면, 재밌고 당혹스럽고 기발하고 아이러니해 잠시 어리둥절해진다. 일상적으로 써버리는 단어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시인의 “놀라운 것들의 방”(`분더캄머`). 그는 지금도 그 안에서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엄습하는 것들을 사랑해//(…) //별처럼 빛나는 순간을 기다려/ 우리의 동공이, 우리의 동맥이/ 현장을 사로잡는 순간을 기다려”(`아이디어`)라 천진하게 말하며 삶의 무게, 인생의 페이소스를 진하게 우려내고 있을 것이다. 가벼운 단어로 무거운 의미를, 익숙한 언어 습관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5-03

예술은, 신화적 흔적 존재의 흔적이 새겨진 철학의 마지막 가능성

신화와 이성은 원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됐다. 플라톤 이후 둘은 대립관계에 놓였고, 서양철학은 로고스의 역사로 이행했다. 신화를 지워낸 공백에 써내려간 이 역사는 어쩌면 말소의 역사요 왜곡의 역사다. 그러나 예술의 토양이 신화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예술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신화적 흔적을 가리키는 또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 흔적이 오히려 지금까지 역사를 가능하게 한 근원이라는 것, 또한 역사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심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사유를 전회하며 또다른 시원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이 심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은 바로 이 심연 속에서 찾아야 했다. 신화의 흔적, 예술은 `존재의 흔적`이 새겨진 철학의 마지막 가능성이었다.하이데거에게 예술은 왜곡된 존재이해를 극복하는 수련장이었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주는 신성한 학문이었으며, 따라서 진리가 드러나는 지상의 신전이었다.하이데거에게 실체화된 `나`는 없다. 하이데거의 `나`는 진행형의 시제 속에서 스스로 변형되면서 자신을 창작할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존재에 가깝다. 그런데 이 자유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 흰 캔버스나 글이 쓰이지 않은 백지, 커서만 깜박이는 빈 문서파일처럼 공포와 불안을 자아내는 텅 빈 자유다.하이데거식 미래는 끝이 존재하는 유한한 미래, 불가능성 앞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미래다. 그것은 무엇인가 `아닐 수 있는` 미래이고 `없을 수 있는` 미래다. 정해진 것이 아니라 `아님`으로 침윤된 가능성으로서의 미래. 결국 그것은 텅 빈 가능성으로서의 미래다.하이데거는 근대적 존재이해의 절대성을 상대화하고 역사화했다. 그리고 그런 존재이해가 어떻게 우리 삶에서 파생되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삶의 세계, 생활세계, 지상의 삶으로 돌아간다.하이데거는 평생 `존재`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추적했다. 특히 예술 속에서 `존재`의 흔적을 집요하게 찾았다. `철학의 모비딕-예술, 존재, 하이데거`(문학동네)의 작가 허먼 멜빌은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딕을 가리켜 “진정한 의미의 얼굴”이 없는 괴물이라고 했다. “주름투성이 이마가 넓은 하늘처럼 펼쳐져 있을 뿐”이라고. 하이데거는 `존재`라는 이름의 얼굴 없는 거대한 괴물에 맞서 초인적인 힘으로 사투를 벌인 에이해브 선장을 닮았다. 그것은 서양 문명, 그리고 이미 그 문명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우리 자신도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싸움이기도 하다. 어쩌면 싸움의 승패는 이기고 지는 결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투의 과정을 통해 성장판을 얼마만큼 열어내느냐에 달린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니체의 말처럼 “괴물과 싸울 때에는 괴물과 닮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26

`세계 문학계 거물` 파묵, 국내 첫 연구서

200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국내에 10종이 소개됐고, 그 책들은 모두 이난아(터키 문학 박사, 한국외대 강사)가 번역했다. 그녀가 10여 년간 파묵의 책을 번역하고 연구하고, 또 그와 교류해 온 결과물로, 파묵에 대한 국내 최초의 연구서를 펴냈다.오르한 파묵은 세계 문학에서는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전 세계 문학계의 거물로 우뚝 선 인물이다. 이난아는 `오르한 파묵-변방에서 중심으로`에서 그의 데뷔작인 `제브데트씨와 아들들`에서부터 최근작인 `순수 박물관`, 그리고 그의 에세이`이스탄불·도시 그리고 추억`까지, 그의 모든 작품을 심도 깊게 분석한다. 또한 이스탄불이라는 도시가 만들어 낸 작가, 그 작가가 펼쳐 보이는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파묵이 살아온 삶을 조망한다. 여기에 파묵과 가졌던 수차례의 인터뷰, 그녀가 직접 방문한 작품 속 도시에 대한 기록이 어우러져, 그의 삶과 작품 세계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그녀가 1997년 처음으로 파묵의 소설 `새로운 인생`을 번역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모든 작품을 번역하기까지 그와 교류해 온 경험을 통해, 작가와의 교감이 번역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 준다.이 책에는 2000년 초에 처음 파묵을 만난 이후부터 직접 찍은 그의 사진뿐 아니라, `눈`의 배경이 된 카르스와 그의 집필실, 이스탄불 풍경, 육필 원고 등 40여 장의 사진이 수록돼 있다. 또한 파묵이 2005년 방한한 후 터키 유수 신문 `사바흐`(2005년 6월5일자)에 기고한 `한국에 대한 인상이 어때요?`라는 글과 그가 `내 이름은 빨강`을 탈고해 원고를 출판사에 넘긴 후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쓴 글이 포함돼 있어 파묵과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26

욕망의 시대 일갈하는 `우수 어린 목소리`

▲ 김용택 시인삶의 체험에서 우러나는 진솔한 언어와 빼어난 감수성으로 전통 서정시의 감동을 수많은 독자들에게 선사해온 김용택 시인의 신작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창비)이 출간됐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사라지는 것들과 곁에 남아 있어주면 좋겠는 것들”(이철수, 추천사)을 애틋한 그리움으로 노래하며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과 그 자연과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존귀함을 일깨운다.`섬진강` 연작 4편 새롭게 수록하찮은 존재들의 무한한 가치 노래한국문학 기념비적 성과로 평가우주적 질서를 관조하는 고요한 사유의 세계와 물질적 욕망에 포섭돼 삶의 진정한 가치와 참된 행복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이 시대를 통렬하게 일갈하는 우수 어린 목소리는 김용택 시의 새로운 진경을 이룬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은 김용택 시인을 일컫는 하나의 이름이기도 한 `섬진강` 연작 4편이 새롭게 수록된 점이다.시인의 첫 시집 `섬진강`을 시작으로 한 `섬진강` 연작은 주지하다시피 한국 농촌시의 전형이자 한국문학의 기념비적 성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이번 시집에 추가된 `섬진강` 30~33에서 시인은 가난과 소외의 아픈 과거를 현재적 의미에서 반추하거나 아름다운 섬진강을 앞에 두고 역설적으로 느끼는, 생의 고독과 팍팍해져만 가는 현실로 인한 심적 갈등을 그려낸다. 그 자체로도 명편들이되, `섬진강` 연작의 의의를 지금 여기에서도 가져가려는 시인의 부단한 시적 갱신이 무척이나 인상적인 작품들이다.“바닥이 다 보이는 강물 속 돌멩이같이 해맑은 얼굴들,/봄볕은 가난한 얼굴들의 그늘까지 벗긴다./붕대 감은 손이 자꾸 욱신거린다./고향으로 다시 갈까./직장을 옮길까./가난한 사람들에게/가난이 약속된 땅은 서러운 땅이다./나도 발끝으로 땅을 툭툭 찬다./돌부리가 걸렸는지 발가락이 아프다./이가 마주치는 이 가난,/돌멩이 끝이 보인다./흩어진 흙을 모아 다시 돌멩이를 덮는다./햇살 때문인지/이마가 뜨겁다.”(`섬진강 30`부분) 특별한 존재보다는 사소한 것들에 애정을 쏟는 김용택의 시는 곧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이기에 친근하게 가슴에 와닿는다. 시인은 지난날 “바닥없는 슬픔”(`섬진강 31`) 에 잠긴 채 “까만 돌처럼 쭈그려앉아 눈물을 흘”리던 “스무살 무렵”(`달콤한 입술`)을 떠올린다. 그 세월을 지나 어느덧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든 시인은 “사는 일들이 헛짓이다 생각하면, 사는 일들이 하나하나 손꼽아 재미있다”(`삶`)고 말한다. “문득 모든 풍경들이 생소해지는 이 호젓한 외로움” 속에서 “괜히 수줍”고 “모든 것들이 처음처럼 부끄러워 죽겠다”(`말이 머문 입술`)고 고백하는 시인은 더는 “삶에 여한을 두지 않기로 한”(`삶`) 너그러운 마음으로 차분히 세상을 바라보며 “하찮은” 존재들의 “무한한 가치”를 새삼 깨닫는다.“이 저녁/지금 이렇게 아내가 밥 짓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 나는/아무런 까닭 없이/남은 생과 하물며/지나온 삶과 그 어떤 것들에 대한/두려움도 비밀도 없어졌다./(…)/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지금의 이 하찮은, 이유가 있을 리 없는/이 무한한 가치로/그리고 모자라지 않으니 남을 리 없는/그 많은 시간들을 새롭게 만들어준, 그리하여/모든 시간들이 훌쩍 지나가버린 나의 사랑이 이렇게/외롭지 않게 되었다.”(`이 하찮은 가치`부분)자연의 섭리와 인생의 순리에 따르고자 하는 시인은 “세상을 한 손에 쥐고 무엇이든 한번의 터치로 끝”내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굴러갈 뿐”(`바퀴들은 쉬지 않는다`)인 “통제 불능”(`농사의 법칙`)의 자본주의 기계 문명에 맞서 결연한 목소리로 날카로운 비판 인식을 드러낸다. 시인은 “서정의 철조망을 넘어간 시들이/도시의 뒷골목에서/기아에 허덕”이는 삭막한 세상에 “눈물을 흘리는 기계”와 “비애를 느끼는 터미네이터를 만들고 싶다”(`바퀴들은 쉬지 않는다`)는 소망을 키운다. 물론 “그런 날이 오리라고, 쉽게 믿지 않”지만 “차례와 기다림과 일관성”의 법칙에 따라 “꽃 피던 시절, /꽃들이 흐르는 강물 소리로 왁지지껄 만발하던 시절”(`농사의 법칙`)을 되새기며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시인은 또한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과 더불어 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기도 한다. “현실은, 받아들이라는 말이니, 무섭다.”(`뇌`) 하지만 또 “현실은, 바로 본다는 뜻 아니냐.”(`젖은 옷은 마르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현실에 대응하는 시인의 옹골찬 자세는 그의 시적 출발의 또다른 면모이기도 하다. “전율하던 그 하얀 공포,/치명적인 치욕, 무서운 현실/오! 시,/시였어.”(`달콤한 입술`)라는 처연한 고백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듯, “너는 어느 쪽이냐”는 질문으로 상징되는 현대사의 질곡과 치욕적인 현실에 맞서는 시인의 결기야말로 그의 시의 참된 목소리에 다름 아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26

책·글의 `全人`이 말하는 문학과 세상

문학평론가이면서 출판인, 저술가이면서 독서가로 출판 기획에서 교정 실무까지 `책`과 `글`에 있어 명실상부 `전인(全人)`이라 일컬을 수 있는 김병익사진의 산문집 `조용한 걸음으로`(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오랫동안 세상 일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찬찬히 써온 글들을 묶어낸 이 책은 문학과 세상에 대한 에세이들, 동료 문인들에게 보내는 축사와 추모사, 근래 읽은 책들에서 연유한 소감으로 크게 세 개의 부로 갈무리돼 있다. 젊은이들이 품은 절망이 자산이 되고 희망이 되기를 바라는 글로 문을 열고, 이제 벤치에 앉아 쉬며 인생의 허망함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며 안식을 취하겠다는 글로 책을 닫는 가운데 1부 `돌아보며, 바라보며`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을 반기고 변화된 분위기들의 낯섦을 차분하게 짚어가는 가운데 염려와 희망을 함께 담아내고 있다. 4·19 당시 교정에서 품은 생각과 유신 당시의 편집인 시절에 대한 회상, 새 시대의 전망을 제시하기 등 저자가 살아낸 다양한 모습과 역할 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정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 훈훈하다. 2부 `도저한 정신들`은 그 이름만으로도 아련하고 그리운 박경리·박완서·김수영·오규원·황순원·이청준 선생 등 이 시대 도저한 정신들과의 만남과 그 정신을 잇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 들을 알려준다. 3부 `가장자리에서 서성이다`는 저자가 읽은 책들과 관련한 글들로 책을 만드는 사람, 쓰는 사람, 엮는 사람 등 책과 함께 살아온 저자의 다양하고 예리한 시각이 책에 대한 편안한 소감 가운데서 묻어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19

TV 속 예능, 당신의 고단한 하루를 버티게 하는 마음의 힘

우리의 고단한 하루를 버티게 하는 마음의 힘은 무엇인가.지난 10년간 열세 권의 책을 내며 대중과 활발하게 소통해 온,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이 열네 번째 책 `예능력`(민음사)을 펴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문화현상을 통해 도시인들의 심리를 살펴보거나, 소설 형식의 심리 치유서를 쓰는 등 매번 새로운 소재와 형식으로 대중 심리서의 새로운 장을 열어 온 저자는 이번에는 텔레비전 속 예능 프로그램 분석을 통해 예능에서 발견할 수 있는 `즐거움의 심리 구조`를 밝혀내고, 그 심리 구조를 어떻게 우리 일상에 적용해야 인생을 즐길 수 있는지 알려 준다.일상 속에서 그저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삶을 점검하고, 나를 돌아보며, 삶의 변화를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저자는 멘토와 힐링을 멀리서 찾지 말라고 말한다. 쓸데없어 보이고, 시간 낭비인 것처럼 보이지만, 놀랍게도 텔레비전 예능을 통해서도 우리는 마음의 힘을 회복할 수 있다. 웃고, 감동하고, 즐기는 사이 어느새 스스로 마음의 힘을 회복할 수 있다.`예능력`은 그동안 쉽게 보아 넘겨 왔던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 인생을 즐겁게 만드는 마음의 힘에 대해 말한다. 저자는 흔히들 `바보상자`로 취급하는 텔레비전의 예능 콘텐츠를 정신과 전문의의 시각에서 다시 바라보며, 다양한 예를 통해 예능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마음의 힘 다섯 가지를 설파한다.오랫동안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 온 저자는 스스로 예능을 통해 지친 마음을 치유받았고, 자신을 지켜내는 마음의 힘을 키웠으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능력을 배웠고, 놀 때 놀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우리가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다섯 가지 힘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나를 지키는 힘,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힘, 삶을 놀이로 만드는 힘, 삶을 감동으로 채우는 힘,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힘. 예능에서 발견한 마음의 힘 `예능력`은 나 자신을 지키며 타인과 조화를 이루고, 하루하루 즐기며 살아가면서도, 의미를 쌓아 가고 즐거운 미래를 기대하는 `오늘을 즐기는 마음의 힘`으로 요약된다.■ 나를 단단하게 지키는 힘세상에서 자신을 사랑해 줄 첫 번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 있는 존재라고 믿는 마음의 힘인 자존감을 지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개그콘서트`의 `네 가지`처럼 당당하게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심지어 그것이 허세라 해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자존감을 갖고, 콤플렉스도 자신만의 캐릭터로 만들며 세상에서 존재감을 가져야 한다.■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힘강호동과 유재석도 처음부터 국민 MC는 아니었다. 그들도 늘 프로그램 내에서 포지션이 바뀌어 왔다. 조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자 맡은 바 포지션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자기 포지션을 정확히 알고 움직여야 조직도 발전하고 자기 자신도 발전할 수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봐도 모두가 제대로 포지션을 잡지 못하면 프로그램이 잘 안 되기 십상이다. 자기 자신만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것처럼 상대를 받쳐 주고, 띄어 줄 줄 알아야 서로 빛날 수 있다.■ 삶을 놀이로 만드는 힘인생에서 우리가 부여받는 과제와 노동은 즐기며 하기 매우 어렵다. 하지만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톰의 페인트칠 에피소드가 그러하듯 노동과 놀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대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 게임을 할 때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Continue`를 누르는 것처럼 우리는 도전하고, 또 도전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강박을 버리고 조금은 느슨하게 사는 `잉여의 시간과 태도`를 가질 줄 알아야 한다.■ 삶을 감동으로 채우는 힘예능 프로그램의 중심은 `재미`이지만 또 다른 중심 코드로 `감동`도 떠오르고 있다. 그만큼 `재미`뿐만 아니라 `감동`도 우리 인생을 즐겁게 하는 중요한 힘이다.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할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인생을 더욱 잘 즐길 수 있다. 자기 인생을 잘 스토리텔링할 줄 아는 능력도 중요하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결국 자기 이야기가 있는 이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승리하듯, 우리에게도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감동을 주고, 그들의 응원을 받으며 인생의 장애물을 헤쳐 나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힘우리는 `잉여의 시간`을 보냄으로써 오히려 더 삶을 풍요롭게 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마음을 헛헛하게 한다. 미래를 꿈꾸지 못하고 그러므로 단 하루도 즐거울 수가 없다. 때로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려운 이웃을 돕거나 서로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한 공익성 콘텐츠를 담기도 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내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란 아주 거대한 일일 필요는 없다. 예능 프로그램만큼 `지금의 미션`에 집중하는 것도 없다. 우리도 자신에게 중요한 하루하루의 미션을 발견하고, 그것에 집중하며 살아갈 때 더욱 즐거운 인생을 만들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19

가슴 따뜻한 휴머니즘, 마법 같은 스토리텔링

2009년 2월 첫 출간 이후 200만 미국 독자들에게 사랑받으며 3년 넘게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켜온 `눈물의 아이들`(전 2권, 원제 Cutting for Stone, 문학동네)이 한국에서 출간됐다. 스탠퍼드 의대 종신교수인 작가 에이브러햄 버기즈는 `나의 나라`(1994)와`테니스 파트너`(1998) 두 편의 에세이를 통해 인간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과 생에 대한 따뜻한 긍정을 보여주며 이미 논픽션 분야에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입지를 굳혔다.그럼에도 그는 소설이라는 전혀 새로운 성격의 글쓰기에 도전했고, 놀랍게도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보여주며 단번에 픽션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눈물의 아이들`은 종교인의 금지된 사랑과 한 가족의 파란만장한 운명을 다룬 대하소설이라는 점에서 콜린 매컬로의`가시나무새`, 형제간의 우애와 배신을 정치적인 현실과 맞물려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쫓는 아이들`의 계보를 잇는다고 할 수 있다.버기즈는 인도, 아프리카, 미국 세 대륙을 넘나들며 사랑과 배신, 용서와 화해라는 인류의 오래된 화두를, 에티오피아의 군부 독재와 에리트레아 독립운동, 조혼과 할례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여성들, 미국 의료계의 간이식수술 발전사 등 생생한 역사적 사실들과 역동적으로 엮어냄으로써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19

낙타시인 김충규 미발표작, 세상 밖으로

▲ 김충규 시인`낙타` 등 5편의 시로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김충규 시인. 사물이 풍기는 죽음의 냄새와 고통의 미학을 치열하게 그려온 그가 2012년 3월18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아직 갈 길이 멀었던 그의 나이 마흔일곱이었다. 출판사 `문학의 전당` 대표를 역임했고, 계간 `시인시각` 발행인으로 바쁜 삶을 살면서 시쓰기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시인 김충규.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일 년 후, 그가 남긴 마지막 시들을 모아 유고 시집을 내놓았다. 그가 이제 세상에 없다는 사실 때문일까. 시 곳곳에서 발견되는 죽음과, 그 이후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마음을 건드린다. 저렇게 살다 죽더라도 바람이 묘비명을 남길 일은 없듯내 가련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순간이 오더라도나는 묘비명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그저 세상이라는 유리벽에 반복적으로 미끄러지다일생을 훌쩍 허비한 것에 불과할 테지만앞을 가로막은 유리창을 원망할 필요는 없는 것바람은 바람 없는 영원의 숙박을사람은 사람 없는 영원의 숙박을그나 나나 사후(死後)는 그리 고요하면 아주 그만―`유리창과 바람과 사람` 부분“나는 묘비명을 남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던 시인. “죽음이란 게 어쩌면 그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화려한 꽃이 아닐까/ 그 꽃을 피우기 위하여 일생 동안 피의 거름을 생산한 게 아닐까”(`안개 속의 장례`) 하고 물었던 김충규 시인. 평소 몸이 약했던 그의 시에서 고통과 죽음은 늘 유효한 질문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죽음을 오히려 “당신의 죽음을 축하합니다” 노래를 불러주고 싶은 의식으로 여긴다. 지금 여기야말로 “산 자들이 유령처럼 보이”고 짙은 안개가 깔린 “질식해버릴 것 같”은 죽음과 다를 것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삶과 죽음은 등가이다. 그는 사물이 되어버린 시체를 바라보며 쓸쓸함을 느낀다. 그것은 “시신처럼 아무 생각이 없”는 우리를 향한 다른 시선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시적 자아를 드러낼 상징적 동물로 낙타를 선택한다.그는 `낙타시인`이라 불릴 만큼 낙타의 이미지를 시에 자주 활용했다. 낙타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두 주일을 견디며, 쉬지 않고 300km가 넘는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젖과 고기, 털까지 알뜰하게 쓰이는 낙타는 사막에서 없어서는 안 될 동물이다. 낙타의 실용성은 살아가기 위해 노동하며 밑바닥까지 소모되어야 하는 인간에 대한 서글픈 통찰과 닿아 있다.그의 시에서 또하나 부각되는 이미지는 해안가에 밀려와 신음하며 죽어가는 고래다. 수중 생활을 하는 고래가 왜 해안가로 올라와 죽어가는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시인은 말한다. 먼 조상의 부름 탓일 거라고. 고래의 먼 조상은 개나 고양이처럼 작은 네발짐승이었다고 진화론에선 이야기한다. 뭍에서 나고 물로 갔으나 다시 뭍의 기억으로 돌아오는 삶. 이것은 우리 존재가 현생, 지금 이 삶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처 모르는 아득한 시간대를 다른 존재와 공유하며 순환한다는 우주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나는 숨이 찬 사람입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바다가 분명합니다”(`어느 해변에 가야`)라고 말하는 시인. 그는 자신이 고래였던 시절, 그리고 고래일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고래는 죽어가지만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거대한 순수성으로 표현된다. 불볕이 내리쬐는 사막은 밤이 되면 바다로 변하고 시인의 몽상 속에서 고래는 거대한 몸을 뒤척인다.우리는 “이미 발목을 다”쳤고 “세상의 어떤 숲으로도 날아들지 못”(`가는 것이다`)한다. 고래의 이마엔 작살이 꽂혔고, 미친 자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죽어가지만, “우리에겐 그들을 구해줄 힘이 없다”(`들불`).고단한 영혼이 둥둥 떠오를 저 허공은 바로 “내 심장을 꺼내 먹”인 “고래가 숨을 얻어 (….) 헤엄쳐오”르는 곳이다.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고래는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두를 품어 “아득한 해저로 데리고 가”려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당신도 나도 불행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언제든/ 주저앉을 수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 “당신은 당신의 나는 나의/ 내일을 그려”본다. “우리의 피는 아직/ 어둡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인의 목소리가 유독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는, 이것이 유고 시집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없고 그의 온기를 느낄 수 없기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시인이 시를 통해 도달하려 했던 존재의 멀고도 그리운 근원, 그 따뜻함과 아프도록 분리되어 있는 우리 자신을, 그리고 고통을 주는 세계를 껴안는 방식을 슬며시 돌아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12

“대인관계 힘들면 한 발 물러 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 가져보라”

▲ 하국근 명리연구원 희실재 원장힘든 시기다. 대인 관계도 힘들고, 경제적으로도 힘들다. 이럴 땐 한 발자국 물러서서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겠다. 명리연구원 희실재 하국근 원장의 `내 삶의 그릇은 뭘로 채울까`(깊은솔)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직설어법으로 건네는 삶의 지침서가 될 만한 책이다.우리는 누구나 희망을 가슴에 안고 삶을 이어간다. 그 희망이 현실로 나타나든 그냥 꿈으로 남겨지든, 현실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영위하고픈 마음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평범한 염원이다. 어떤 과정을 밟아서 나갈 것인가는 자신이 잘 알고 있겠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자신은 막상 깨닫지 못할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사주`다. 사주를 통해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있고, 그렇게 함으로서 자신을 추스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한 방편으로 잘만 활용하면 사주가 개인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며, 타고난 성향이나 소질을 계발하는 데 큰 보탬이 될 수가 있다.타고난 성향을 안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흥미, 관심, 소질, 재능, 가치관을 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좋아하는 일과 잘 할 수 있는 일, 다시 말해 천직을 파악할 수 있다면 `타고난 사주`대로 살 수도, 나쁜 방향이라면 피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명리학은 글자 그대로 `명의 이치를 다루는 학문`이다. `자기가 타고난 그릇이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아는 게 명리`라는 것이다. 무엇을 담을 것인가. 명예를 담을 그릇을 타고났다면 벼슬을 담아야 할 것이며, 재물을 담을 그릇을 타고났다면 돈을 담아야 할 것이다. 밥그릇에 국을 담아서는 효과가 떨어질 것이고, 국그릇에 간장을 담아도 그 효용성은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내 삶의 그릇은 뭘로 채울까`는 이런 점을 감안해 어릴 때부터 계발이 필요한 아이들 적성 찾기에서부터 부모들의 효과적인 양육방법, 진로지도, 학습 방법 등을 비롯해 이, 전직 시기 및 사회활동 때 필요한 처세술 등을 타고난 사주와 비교해 담고 있다. 또 사주로 추론할 수 있는 건강에 관해서도 폭넓게 분석하고 있다.`내 삶의 그릇은 뭘로 채울까`는 단순한 명리학 이론서가 아니다.신문기자 출신인 저자가 다년간의 임상과 상담을 통해 얻어진 결과들을 명리학의 이론과 현대인들의 삶에 접목시킨 글들이다.하국근씨는 영남대 환경대학원 풍수지리학 석사를 졸업한 뒤 매일신문 기자, 편집부장을 역임했다. 경산1대학 평생교육원 풍수지리학 교수, 수성대학교 평생교육원 명리학 교수, 대구시 수성구청 문화센터 명리학 강사를 역임했다. 현재 네이버 블로그 `희실재`를 운영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12

모욕을 견디며 존엄을 지킨 여인들

프랑스와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세 여성의 삶을 교차시키며 내면의 강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세 여인`(문학동네)은 2009년 공쿠르상 수상작이자 국내 처음으로 소개되는 마리 은디아이의 작품이다. 세네갈계 프랑스 작가 마리 은디아이는 등단 이래 어떤 문학적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으며, 클래식하고 섬세한 문체와 현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공간, 특히 작품 속에 스며 있는 기묘함으로 프란츠 카프카에 비견되기도 했다.`세 여인`은 세 편의 이야기, 세 개의 소우주 속에 담긴 세 여성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모두 아프리카 대륙과 프랑스, 더 정확히 세네갈과 프랑스 사이에서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여성들이다. 오래전 가족들에게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뼛속까지 이기적인 아버지로부터,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지만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젖어 살아갈 뿐인 남편으로부터,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자신을 철저히 짓밟는 한 남성으로부터, 노라와 판타 그리고 카디 뎀바, 세 여성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와 존엄을 지켜나간다. 뿌리깊은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변화시키고 스스로를 끌어올리는 힘은 그들 자신도 알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고요하고도 부드러운 내면의 힘이다. 가혹하고 불편하며 폭력적인 진실이 침묵과 조용한 성찰의 언어로 조심스레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독자들은 강인하고 굳센 세 여성이 보여주는 정신의 승리에, 모욕을 견뎌 개인의 존엄을 지켜내는 그들의 강렬한 이야기에 경탄에 찬 마음의 가벼운 떨림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05

20년간 침대서 내려오지 않은 남자 이야기

“독특하고 기괴한 설정에 있어서 카프카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았는데 소설을 읽다 보면 카프카의 `변신`이 자꾸만 떠오른다.” `침대`를 번역한 정회성은 `옮긴이의 말`에서 이런 감회를 밝히고 있다.이 책의 주인공 맬컴은 20년이 넘도록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어른이 되는 것이 특별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평범해지는 것임을 깨달은 그는 스물다섯 번째 생일 다음 날 침대로 올라가고, 7484일 후 기중기가 침대와 한 몸이 된 그를 들어 올려 집 밖으로 옮길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대신 천천히 `죽어 가는` 것을 선택한 맬컴과, 그런 그를 지켜봐야 하는 가족들의 이야기.`침대`는 성장을 거부한 남자 곁에서 성장해 가는 가족들을 그리고 있는 독특한 성장소설이다.남들과는 다른 삶을 택한 형 때문에 이름 대신 `맬컴의 동생`으로만 불리는 `나`의 이름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 작가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는 “나는 일부러 그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갖는 걸 원치 않았어요. 그는 평생 맬컴의 그림자로 살아왔기 때문이죠”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나`는 부모와 사랑하는 여인의 관심을 형에게 빼앗긴 채, 그러나 끊임없이 그들의 사랑을 갈구하면서 살아간다. 평범함을 거부한 형 때문에 이름조차 잃었지만, 동시에 형 때문에 삶과 사랑을 고민하면서 특별하게 살게 되는 것이다.힘차게 박동하는 심장을 나눠 주고서 갑자기 그것을 벽에 던져 무참히 터뜨려 버린다면 그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학교에서 배운 모든 내용이 결국 현실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면? 이런 게 진짜 삶이라면, 굳이 침대 밖으로 나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본문 중에서)맬컴과 나의 부모, 그리고 두 형제의 연인인 루 역시 맬컴이 던져 준 인생의 숙제를 풀기 위해 고민하고 방황한다. 자신이 만든 탄광의 엘리베이터 사고로 십여 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은 후 평생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아빠,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을 돌보는 데서 삶의 의미를 찾는 엄마, 가족을 떠나 버린 엄마 때문에 폐인이 된 아빠에게 돌아가기 위해 연인을 떠나야 했던 루.이 세 사람 역시 맬컴 때문에 남들과는 다른 인생의 길을 걷게 되지만, 역시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게 된다.언젠가 아버지가 했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라는 말을 나는 늘 곱씹는다. 그러나 반대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그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음을 `침대`는 그려 낸다.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는 맬컴을 먹여 주고 씻겨 주고 다독여 주는 엄마는 그를 살게 하는 것일까 죽게 하는 것일까.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며 “형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녀의 사랑이었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맬컴은 마지막 날인 7천484일째에 “나는 엄마에게 누군가를 이십 년 동안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렸어. 내가 엄마를 살아 있게 한 거야”라고 말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05

희망 잃은 슬픈 존재의 가슴 어루만지다

▲ 김성규 시인선명한 언어와 유려한 이미지를 구사하며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동화적 상상력으로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쳐온 김성규 시인의 두번째 시집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창비)가 출간됐다.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폐허에 다름 아닌 자본주의 사회의 폭력과 삭막한 “세계의 적나라하고 추악한 양상들을 땀내 나는 언어로 기록해나”(조재룡, 해설)가며 부조리한 현실의 이면을 새롭게 인식하는 깊은 사유의 세계를 보여준다.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서정적인 목소리와 그늘진 삶의 비참한 풍경을 예민하게 포착해내는 냉정한 시선이 돋보이는 “처연한 아름다움과 절절한 울림이 있는”(송찬호, 추천사) 시편들이 불행한 삶의 고통 속에서 희망마저 잃고 살아가는 슬픈 존재들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지뢰밭 가운데서/한 남자가 일직선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적도를 따라 걸어가는 중입니다/왜 적도로 가느냐고 묻자,/전쟁이 끝나 우리가 만날 수 없을 때/부서진 건물 사이를 지나/너는 왼쪽으로 걸어/나는 오른쪽으로 걸을게/서로를 찾아 헤매다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다면/적도를 향해 걸어가자//지뢰밭 가운데서/한 여자가 적도를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적도로 걸어가는 남과 여` 전문)김성규 시인은 자신의 내면세계에 대한 성찰보다는 “가난이 재난을 찾아가”고 “재난이 가난을 찾아내”(`해열`)는 이 세계의 비극적 상황에 관심을 기울인다.“반쯤 쪼개진 하늘”(`수박`)에 “돼지비계처럼 떠다니는 구름과 시체의 얼굴로 부풀어오르는 달”(`동면, 폐정, 병이 최초로 발생한 곳`)과 같은 섬뜩한 풍경 속에는 재앙으로 물든 참혹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비장함마저 감돈다. “썩은 물이 흘러넘치고/뱀의 허물처럼 아이들의 꿈이 밤하늘에 떠다”(`동면, 폐정, 병이 최초로 발생한 곳`)니는 폐허의 가시밭 어느 곳에서도 희망의 불씨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올라갈 곳은 없고 오직 떨어질 일만 남”은 고통스러운 지상에 “폭풍이 언제 멈출지는 아무도”(`폭풍 속으로의 긴 여행`) 모른다. “나, 걸었지/모래 우에 발자국 남기며/길은 멀고도 먼 바다/목말라 퍼먹을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뒤를 돌아보았지/누군가의 목소리가 날 부를까/이미 지워진 발자국/되돌아갈 수 없었지/길 끝에는 새로운 길이 있다고/부스러기처럼 씨앗처럼 모래 흩날리는/되돌아갈 수 없는 길/이제 혼자 걷고 있었지/깨어보니/무언가 집에 놓고 왔을까/이미 지워진 발자국/되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걸으며/목말라 퍼먹을게 없어 기억을 퍼먹으며/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을까”(`유랑`전문)“두 눈을 뜨고 노래해도/고통은 바구니에 담겨지지 않”고 “두 눈을 감고 노래해도/고통의 바구니는 줄어들지 않는”(`두 눈을 감고 노래해도`) 비참한 삶 속에서 시인은 죽음과도 같은 폐허를 응시하는 시인은 어쩌면 오히려 죽음 속에서 삶의 자양분을 얻는 듯도 하다. “다시는 가지 말아야 할/그래서 갈 수 밖에 없는 길”(`눈 위에 찍힌 붉은 발자국`)을 밟아나가야 한다고 다짐하는 시인은 “밤마다 베고 자던 구름에도 세금을 매기는”(`얼음궁전`) 비정한 세상의 한복판에 우뚝 서서 어둠의 불꽃을 피워올린다. “내일은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내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시인은 “어둠 속/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뿔`)이며 “마귀가 불러주는 주문을/온몸으로 받아 적”(`방언(方言)`)는다.“그 소리는 모든 종말의 순간에 울려퍼진다/그 소리는 죽은 자들을 일깨우며/그 소리는 황혼의 무덤 위에서/그 소리는 근육을 터뜨리고 망치를 들어올린다/그 소리는 피 묻은 대장장이의 손으로/그 소리는 모두를 불러모으고/그 소리는 고통 없이 심장을 뚫고/그 소리는 눈먼 자들을 주저앉히며/그 소리는 분노를 녹여/그 소리는 검은 땅에 패배의 씨앗을 흩뿌린다”(`쇠나팔`부분)무릇 `시인`이라 함은 세계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불화하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자이다.김성규에게 시인이라는 존재는 “자고 일어나면 병이 깊어지는”(`해열`) “예언자”(`예언자`)이자 “위대한 마법사”(`미식가`)이며 “스스로를 형틀에 매달고 살아가려는 망명자”(`심문관`)이다.자신이 “쓴 시가 지나간 시간을 되살릴 수 없다는 것”(`혈국(血國)`)을 알고 있기에 시인은 “이제까지 쓴 것들을 다 버리고 다시 써야”(`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 한다고 자신을 다그치면서,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를 심장 속에 새겨넣”(`정원사`)고 “독을 뿜지 않기 위해 혓바닥을 입속에 말아넣”(`중독자`)으며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4-05

프로이센 특권계층 폐해 낱낱히

오늘날 독일문학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독일이 낳은 가장 위대하고 대담하고 야심 찬 문학가 (…) 둘도 없는 희곡작가였으며―둘도 없는 산문작가이자 소설가”(토마스 만)로 손꼽히는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 1777~1811)의 중단편소설집 `미하엘 콜하스`(창비)가 출간됐다. 이 작품집은 표제작 `미하엘 콜하스`외에 `O. 후작 부인` `칠레의 지진` `싼또도밍고 섬의 약혼` `로까르노의 거지 노파` `주워온 자식` `성 체칠리아 또는 음악의 힘` `결투` 등 클라이스트 중단편 여덟편 전체를 완역해 묶어 냈다.클라이스트 특유의 문체를 그대로 살리고자 문단 구분, 간접화법과 직접화법 등을 충실히 따라 옮기되, 잘 읽힐 수 있도록 세심하고 정확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한 것이 이번 번역본의 특징이다.방대한 분량의 중편소설 `미하엘 콜하스`의 경우, 등장인물 및 사건전개를 설명해주는 부록을 실어 작품의 이해를 도왔으며, 본문 뒤에는 5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작가의 생애 및 수록작 각각에 대한 깊이있는 해설을 덧붙였다.`미하엘 콜하스`에 실린 클라이스트의 중단편소설들은 `소설집` 제1권(1810년, `미하엘 콜하스` `O. 후작 부인` `칠레의 지진`)과 제2권(1811년, `싼또도밍고 섬의 약혼` `로까르노의 거지 노파` `주워온 자식` `성 체칠리아 또는 음악의 힘``결투`)에 수록돼 출간됐으며, 이러한 작가의 관심사가 직간접적으로 반영됐다.`미하엘 콜하스`는 당시 프로이센의 경제 및 사법 개혁이라는 시대적 현안을 다룬다. 소설에서는 부패한 융커 계급의 특권이 선량한 시민에게 끼치는 폐해를 보여주며, 이들 특권층의 행동을 방치한다면 `미하엘 콜하스`가 일으킨 유의 혁명적 봉기가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미하엘 콜하스는 법질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 이르자 “사회에 대한 책임” 때문에 불법체제를 응징하러 나서게 된다.어느 후작 부인이 저도 모르는 새에 임신된 아이 아버지를 찾는다는 광고를 내는 것으로 시작하는 `O. 후작 부인`은 발표 당시 큰 물의를 일으켰다. 기이한 임신의 과정이 “독일문학 사상 가장 유명한 대시(―)”로 표현되는 외설성이 그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중요한 주제는 여성의 자아 정체성 확립과 자립적 행동을 통해 19세기까지 절대적 권위를 유지해온 시민사회의 `부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이 소설은 세 문단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는 장소가 “도시-골짜기-도시”로 달라지고 시간이 “낮-밤-낮”으로 이어지며 “지진-낙원-학살”이 생겨나는 내용과 부합한다. 클라이스트의 동시대인들은 프랑스혁명을 지진에도 비유했는데, `칠레의 지진`에서도 자연재해가 기존 체제의 전복을 은유하고 있다. 클라이스트는 혁명에 대해서는 비관적이었지만 혁명적 관점에서 사회와 도덕 비판을 시도했으며, 집단광기에 사로잡힌 군중에 맞서는 돈 페르난도를 통해 극한상황에서 인간의 가치를 입증하는 영웅적 인물을 그려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29

현대사회, 시간이 `노동의 인질` 되다

▲ 한병철 교수2012년 최고의 인문서로 꼽힌`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베를린 예술대학)의 책 `시간의 향기`(문학과지성사)가 번역·출간됐다.`시간의 향기`(2009)는 `피로사회`(2010)의 전작으로 현대사회에서 모든 시간이 노동의 인질이 되었다고 진단한다. 모든 시간은 일의 시간이고, 여가시간도 일의 시간을 준비하는 보조적 의미밖에 지나지 못한다는 것.왜 나는 늘 시간이 없고 시간에 쫓길까? 왜 시간은 그토록 빨리, 그토록 허망하게 지나가버리는 것일까? 그토록 바쁘게 지냈음에도 어째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을까? 나는 주어진 많은 시간을 요령 있게 활용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이 책`시간의 향기`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느끼고 있는 이러한 일상적 의문들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성찰이다. 또한 우리가 직면한 시간의 문제들이 결코 효율적인 시간 관리 기법 같은 것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흥미롭게 보여준다.한병철 교수에 따르면, 오늘의 시간은 리듬과 방향을 상실하고 원자화됨으로써 위기에 봉착해 있다. 오늘날 시간의 흐름은 자연적 순환과 같은 리듬도, 미래의 구원이나 종말, 또는 진보라는 의미 있는 방향성에서 오는 서사적 긴장감도 상실해버렸고, 그저 끝없는 현재들의 사라짐으로써 체험될 뿐이다. 그리하여 지속성의 경험은 매우 희귀한 것이 됐다. 이에 따라 개개인의 삶도 이렇게 분산된 시간 속에서 산만하게 흘러간다. 즉흥적인 시작과 중단이 반복된다. 그 과정에서 삶은 완결되지 못하고 불시에 끝나버린다.한병철 교수는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근대 이래 계속 강화되어온 “활동적 삶의 절대화” 경향에서 찾는다.이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오직 일하는 자, 활동하는 자라는 사실에서 밖에는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를 자신의 의지에 복속시키고 변화시키는 노동만이 인간에게 궁극적 자유를 가져온다는 헤겔-마르크스의 사상에서 그 극명한 표현을 얻는다.활동적 삶의 절대화는 시간에 대한 관념에도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 시간은 어떤 리듬도 어떤 질적인 특징도 없는 양적인 단위일 뿐이며, 가능한 한 단축시켜야 할 비용일 뿐이다. 그것은 바로 “향기 없는 시간”이다. 속도에 대한 신앙은 여기서 탄생한다. 시간은 비용이기 때문에 기다릴 줄 모르는 조급증, 무엇이든 앞당기고자 하는 욕망이 지배적인 심리로서 자리 잡는다. 게다가 그러한 심리는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린다는 느낌을 강화한다.그렇다면 어떻게 시간의 향기를 되찾을 수 있을까?한병철 교수는 활동적 삶 중심의 가치관을 사색적 삶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일한다. 나는 활동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이 근대 이후를 지배해온 가치관이었다면, 한병철 교수는 이를 `나는 일하지 않는다, 나는 멈춘다, 고로 존재한다`로 전도시킨다.멈춤의 시간, 활동하지 않고 자기 안에 머물며 영속적 진리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 이때 인간은 진정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는 머무름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기다림을 참지 못하는 태도, 그 조급증의 문화가 `빨리 빨리`라는 개념이 되어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한국 사회에서 머무름의 기술, 멈추어 서서 사색하는 능력은 반드시 장려되어야 할 중요한 능력일 것이다.`시간의 향기`의 주요 테제들은 헤겔, 마르크스, 니체, 프루스트, 하이데거, 한나 아렌트, 료타르 등의 사상과의 비판적 대결을 통해서 도출된다.짧은 분량이지만 이러한 근현대 주요 사상가들에 대한 논의는 간명하게 요점을 짚어주면서도 깊이를 잃지 않는다. 프루스트의 그 유명한 보리수 꽃잎차에 담근 마들렌의 향과 맛에 관한 이야기는 고대 중국의 시계 `향인(香印)`에 대한 분석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며, 여기서 일깨워진 지속성의 감각은 하이데거의 토착성과 정주의 철학에 대한 아름다운 서술로 이어진다.한병철 교수의 저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독일 철학계를 넘어서 더 넓은 독자층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주요 미디어 전체가 그에게 주목하게 된 계기는`피로사회`부터였다.`시간의 향기`는 `피로사회`의 전작으로서 출간 당시에는 `피로사회`만큼 독일 언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입소문을 타고 꾸준히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책이 됐다. (현재 독일에서 7쇄까지 출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29

“이번엔 함빡 웃어 보세요”

“그 밤에 문득 나는 달에게 우리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짧은 형식의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일렁거렸다.”`문득`이라 말했지만, 이 이야기들은 작가의 마음 한구석에서 꽃피울 날을 기다렸던 것 같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글, `달이 듣고 함빡 웃을 수 있는 이야기` `달이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야기`를 엮은 짧은 소설집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문학동네)는 작가 신경숙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경쾌하고 명랑한 작품집이 아닐까 싶다.“패러독스나 농담이 던져주는 명랑함의 소중한 영향력은 나에게도 날이 갈수록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명랑함 없이 무엇에 의지해 끊어질 듯 팽팽하게 긴장된 삶의 순간순간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작가의 말`에서낮의 긴장을 풀고 밤의 고요 속에서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면, 그 안엔 일상의 순간순간이 전하는 소소한 기쁨과 슬픔들, 크고 작은 환희와 절망들이 달빛처럼 스며들어 있다.가만 들여다보면 그것은 곧 나와 당신의 이야기, 내 친구와 가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해내는 작가 특유의 감수성에 은근슬쩍 숨겨놓은 유머의 뇌관들로 인해 슬몃 입꼬리가 올라가다 저도 모르게 하하 소리 내어 웃게 된다. 아직 그리 깊지는 않은 밤, 문득 올려다본 서쪽 밤하늘 한켠에 새침하게 초승달이 떠 있다. 그럴 때면 문득, 누군가에게 안부인사를 전하고 싶어진다. `달 좀 봐.` 작가 역시 꼭 그랬나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29

무수한 비자림에 가려진 `인생 성찰`

지난해 출간한 장편소설 `레가토`로 제45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하며 “항쟁세대의 고해성사라고 부를 만한 권여선 소설의 절정이자 한국 문학에서 기억의 윤리학이 성숙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평을 받아안은 권여선이 네번째 소설집 `비자나무 숲`(문학과지성사)을 펴냈다.2010년에서 2012년에 걸쳐 발표된 중단편을 모은 이 책은 `시간과 기억`에 대한 작가의 천착은 여전하지만 앞선 작품 `레가토`가 `학생운동`의 절정인 한 시기의 기억을 불러낸 것이라면, 이번 소설집은 짧고 긴 인생들 사이에서 쌓고 지워가는 기억과 망각의 깊이를 통해 삶의 심연을 가늠하게 한다. 절대 잊지 못하리라던 기억을 깨우는 잔상들을 하나씩 좇아 힘겹게 불러내지만 그 또한 실제 `사건`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젊은 날 한 시기를 동거하며 매일같이 함께 생활한 친구와 그 속에 품은 자신의 치기와 과오들을 까맣게 잊고 살아 왔음을 떠올릴 때, 우리가 인생이라는 망각의 힘에 이끌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잊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하면 섬뜩하다. 이 작품집을 통해 우리는 실로 무수한 비자림에 가려진 인생들을 성찰하고 삶이 품은 기억과 시간의 흔적을 받아들인 권여선의 해방과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22

책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 그려

▲ 정수복 작가`파리를 생각한다` `파리의 장소들`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등으로 이어지는 저서에서 에세이와 인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파리와 프로방스의 골목에 숨어 있는 `사색과 영감의 장소`들로 독자들을 이끌었던 사회학자이자 작가 정수복이 신작을 펴냈다. 그가 이번에 걸어들어간 곳은 특정 도시나 마을이 아닌 `책과 독서가들이 있는 시간과 공간`이다.그에게 독서란 단지 `발`을 움직이지 않을 뿐, 언제나 `지금-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을 만나는 또다른 의미의 `산책`이었다. 그는 산책할 때마다 늘 가방 속에 책을 넣고 다녔고, 그가 산책하는 곳에는 늘 책과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그의 산문집 `책인시공`은 여러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양한 책을 읽는 각양각색의 모습을 통해 책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를 그려 보인다. 여기에는 이름이 잘 알려진 작가와 유명인들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자기만의 시공간에 책을 들고 등장해 고유한 풍경으로 피어난다.침대에서, 버스에서, 전철에서, 도서관에서, 서점에서, 거리에서, 공원에서, 그리고 아침, 한낮, 저녁, 밤 시간에 관계없이, 어려서나 청춘일 때나 늙어서나,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견디고 즐기며 자기만의 내면 공간을 만들어가는 사람들. 산책자 정수복이 문장으로 그려낸 독서가들의 초상, 그리고 사람과 책이 한곳에 아름답게 어우러진 일상의 풍경화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이 책은 `독자 권리 장전`이라는 글로 시작한다. `책 읽는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인권 선언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17가지의 항목들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언제나, 어디서나, 마음 내키는 대로,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읽을 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혼자 있을 때조차 쉴 새 없이 휴대폰 벨이 울리고, 고독과 침묵의 시간을 `죽은 시간`으로 여기며 끝없이 삶의 여백을 지워나가는 이 세계에서, 어쩌면 아무런 방해 없이 책 읽기에 좋은 시간과 장소가 주어지길 기대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는 지금 당신이 서 있는 바로 그곳을 `서재`로 바꾸고, 일상의 빈틈을 독서시간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우리의 삶 속에 숨어 있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 들을 하나하나 펼쳐 보인다.황인숙의 옥탑방, 정혜윤의 침대,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 장정일의 기차, 로쟈 이현우의 버스….이곳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공간, 혹은 책 읽기에 지독히 부적절한 공간처럼 보이지만, 비범한 독서가와 작가 들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을 금세 서재로 만들어, 언제 어디서나 거리낌 없이 책을 꺼내든다. 정수복의 책이 특별한 것은 지금껏 책에 관해 이야기할 때 거의 다루지 않았던 `독서가들의 시간과 장소`가 책에 관한 논의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22

무릎에 생긴 멍이 어느날 눈동자가 되다

▲ 주하림 시인2009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주하림(27) 시인이 첫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창비)을 출간했다. 등단 4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생경하고 감각적인 언어와 현란한 이미지가 톡톡 튀어오르는 환상적인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보인다.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돋보이는 색다른 시작법은 첫 시집의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하다. 주하림이 논리의 세계를 훌쩍 뛰어넘어 꾸려놓은 감각의 세계를 목격하다보면 어느새 시인의 언어에 실려 이국 그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독특한 경험을 맛보게 된다.낯설기에 강렬한 시인의 언어는 논리보다는 감각으로, 기억보다는 인상으로 진하게 스스로를 각인시킨다.“드디어 빛 없는 세계다/나는 눈곱을 붙였다 뗐다 하며 태어난다/간지럽냐고?/너의 마음은 반은 맞히고 반은 틀린 답이다/골방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이틀에 한번 폐렴을 앓고/화분 속의 꽃들은 서서히 죽어가며 나의 안부를 묻는다/(…)/한밤중 과자 부스러기 속에서 콘돔 껍질 속에서/개미들은 전생에 벗어둔 옷을 꺼내 입고/문득 수많은 탄생들이 두려워진다/너는 입덧을 원했고/나는 적막에서 기괴하게 살다 간, 가난한 화가의 생애를 가리킨다”(`레오까디아와의 동거` 부분)어법을 염두에 두지 않는 주하림의 시는 읽기에 “불편”하다.“말 씀씀이가 재미있고 어조의 재빠른 선회에 늘 재치가 가득 있지만”(황현산, 해설) 읽어가는 것만도 쉽지 않고, 시인의 의도라거나 시의 뜻을 제대로 알아차리기는 어려운 일이다.그의 시는 기존 문법이나 논리적 사고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이를테면 “그대 배꼽에서 시든 입술을 줍”(`입실`)는다든가 “무릎에 생긴 멍이 어느날 눈동자가 되”고 “안과에 찾아가 피가 뚝뚝 흐르는 무릎을 올려놓”(레드 아이)는다는 기묘한 발상은 단숨에 다가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예민한 감각을 열어놓는다면 시인이 이끄는 대로 그 호흡을 따라가며, “삶, 터전이란 것에 늘 시달려야 했”(`텍스처 무비`)던 화자가 들려주는 “수수께끼 같은 소리”(`미찌꼬의 호사가들`)의 “슬픈 귀엣말”(`네덜란드식 애인`) 같은 “위험한 고백”(`위험한 고백`)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무릎에 생긴 멍이 어느날 눈동자가 되었습니다/(…)/마을 안과에 찾아가 피가 뚝뚝 흐르는 무릎을 올려놓습니다/입이 세개인 것보다 낫지 않나요 당신은 치료를 원합니까/눈이 영영 사라지길 비나요 아니면 눈과 무릎이 조화롭게/공생하길 바라나요 이제 막 꿈틀거리는 눈을 붕대로 칭칭 감고/간호사는 그 위에 입술을 그려넣었습니다 세개의 입을 달고,/나는 계절이 지날 때까지 비난 속에 살 것임을 예감했죠”(`레드 아이`부분)다소 생경한 시 제목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주하림 시의 배경은 다분히 이국적이다. 카를 다리(체코), 말라부 해변, 프레그레소 항(멕시코), 북경, 상하이, 하얼빈(중국), 후꾸오까, 오끼나와(일본), 비벌리힐스(미국) 등 대륙을 넘나드는 시적 공간과 미도리, 미찌꼬, 깁슨, 애디, 루쏘, 이사벨, 후루미, 카와이, 채터턴, 소피 등 주로 외국 인명으로 등장하는 화자들은 마치 외국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이국적 풍경과 분위기를 자아낸다.시인은 또한 일본 만화, 마니아용 영화, 서양의 고전소설 등의 한 대목을 인용하거나 소재로 삼는다. 다양한 장르의 인용에서 우리는 시인의 폭넓고 다채로운 문화적 섭렵과 남다른 취향을 엿볼 수 있다.“일요일 아침, 물에 빠져 죽고 싶다는 어린 애인의 품속에서/나는 자꾸 눈을 감았다//만국기가 펄럭이는 술집에서 나라 이름 대기 게임을 하면/가난한 나라만 떠오르고//누군가 내 팔뚝을 만지작거릴 때 이상하게 그가 동지처럼 느껴져//자주 바뀌던 애인들의 변심 무엇이어도 상관없었다//멀리 떼 지어 가는 철새들//눈부시게 흰 아침//이 세계가 나를 추방하는 방식을 이해해야 할 것만 같은”(`몬떼비데오 광장에서`전문)“너처럼 아름다운 불면증 환자는 처음이다//뜨거운 새, 관념, 관념에 다가가는 자세/우리가 달아나려 하는 한 그것은 우리의 운명//사람들 귀에 새 부리를 걸어주었지만/처음 배운 날갯짓조차 하지 못하더군/간밤의 지긋지긋한 비가 진눈깨비로 바뀌는 순간/우리 그림자는 섹스만 해서 눈이 멀어버린 것일까/창을 조금 열고 펑펑 쏟아지는 알약을 상상하다 깊은 잠이 들었다”(`빛의 볼륨`부분)/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22

서러움의 역사와 넘어섬의 삶

시인 이성복이 `아, 입이 없는 것들` 이후 10년 만에 일곱번째 시집`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언뜻 낯설기만 한 제목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는 신라 시대 향가 `풍요(風謠, 공덕가(功德歌)`의 한 구절로, 이 여섯 글자 이두는 `오다, 서럽더라`로 풀이된다. 신라 백성들이 불상을 빚기 위해 쉼 없이 흙을 나르면서, 그 공덕으로 세상살이의 고됨과 서러움을 위안하고자 불렀던 이 노래가, 이번 시집의 들머리에 놓인 “뜻 없고 서러운 길 위의 윷말처럼, 비린내 하나 없던 물결”의 맑은 `죽지랑의 못`(`죽지랑을 그리는 노래`)과 맨 끄트머리에 놓인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바라봄만으로 큰 위안이 되었던 한 그루 `기파랑의 나무`(`기파랑을 기리는 노래`)를 각각 입구와 출구로 삼은 “이성복의 풍경”(문학평론가 김현)을 바라보고 드러내는 데 긴요한 열쇠 구실을 한다.독자들은 지난 1980년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등장과 함께 이성복의 시가 충격하고 매혹한 한국문학사의 한 장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다.사람도 사물도 이제 더는 견디기 힘들어 보인다 싶을 때 시인이 내딛는 다음 발걸음은 의외로 가볍다. 피붙이의 죽음처럼 “고통이 극심할수록 더욱 명징해지는 정신”을 바라보듯, 극단까지 밀어붙여보고 절망의 나락을 경험한 뒤에야 갖게 되는 위안이다. 헛헛한 가슴이지만 아직 가시지 않은 온기, 더는 깊어질 수 없는 상처, 좀체 소리 날 것 같지 않은 울음이 그 안에 웅크리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15

흔적으로 남은 상처에 `희망의 싹` 틔워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작가 조경란이 5년 만에 신작 소설집 `일요일의 철학(창비)`을 출간했다. 8편의 단편이 실린 이번 작품집에는 더욱 간결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진 서사와 그 안에 단단하게 응축돼 반짝이는 상징들이 눈길을 붙잡는다. 저마다의 깊은 고독과 상흔을 지닌 채 담담하게 살아내는 하루하루 속에서 조심스레 희망을 발견하려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절실하고 아름답게, 잔잔한 여운으로 다가온다. 올해로 등단 18년차, 그간 작가는 모두 열세권의 책을 펴내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차분히 자신의 길을 걸어왔고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중견작가로 확고히 자리잡아왔다. 이제 여섯번째 소설집에 이르러 작가는 더욱 간결해진 서사와 함축적인 상징이 두드러지는 여백과 응축의 미학을 선보이며 자신의 문학세계에 한층 깊이를 더하고 있다. 단절과 고독에 처한 인물들의 섬세한 내면 묘사가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타인과 만나는 차분한 시선과 어우러져 더없이 짙은 정서적 파문을 낳는다.조경란의 소설이 만들어내는 정갈한 분위기는 극적인 사건을 이면에 감춘 채 고요하고 담담하게 그려지는 일상의 풍경에서 비롯된다. 첫 작품 `파종`에서 주인공의 가족들은 각자가 지닌 상처 때문에 서로를 깊이 상처 입혔던 시절을 지내왔다. 일본에 사는 동생이 팔을 다쳐 주인공과 아버지가 함께 동생의 집에 가서 한동안 살림을 거들게 되면서, 가족들은 낯선 타국의 공간에서 일상을 함께하며 서로 마주한다. 상처와 갈등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이들은 우연히 씨앗을 심고 그 싹을 지켜보는 과정을 함께하면서 점차 서로의 존재를 가슴에 품기 시작한다. 뜨거운 고통의 시간은 지났고 이제 상처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 흔적으로 남은 상처에는 희망의 싹이 트고 있다. 소설은 그것을 되새기고 복기하기보다 그 시간이 지난 이후의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작가는 섣불리 치유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상흔과 더불어 일상을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인물들에게 예기치 않은 작은 싹을 틔워줄 뿐이다. 그 자리에서 비로소 감지되는 생의 기운은 그래서 오히려 무엇보다 절실하고 진실하다. 이 정갈한 일상과 그 안에 담긴 통찰이야말로 “근래 한국 단편소설이 보여준 가장 깊고 아름다운 세계”(백지연 `해설`)일 것이다.`학습의 生`에서 생의 의지는 더욱 팽팽하고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은퇴한 고등학교 윤리교사로 이혼 후 만성적인 면역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시골에 외딴집을 얻어 고립된 생활을 꾸려가는 주인공에게 한 소년이 나타난다.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며 투포환 선수의 꿈을 접은 소년에게 투포환 연습을 위해 집 마당을 빌려주면서 주인공 역시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지만 동네 사람들이 둘의 관계에 대해 수군거리고 주인공이 소년의 도둑질을 의심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위기를 겪게 된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 다시 마당에서 소년의 쇠공 소리가 들려오면서 주인공은 자신에게 전해지는 생의 울림을 느낀다.“공이 지면에 쿵, 부딪칠 때마다 내 몸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나를 에워싸고 있는 이 깊고 과묵한 시간과 어둠이 조금씩 뒤로 밀려났다. 나는 반듯하게 돌아누워 그 울림이 전하는 말에 귀 기울였다. 내가 사는 곳은 암흑도 사차원의 상태도 아니다. 이곳은 저 쇠공이 밀어내는 강한 힘으로 허공을 꿰뚫고 지나가는 세계다. 나는 보지 않고서도 쇠공을 던지고 줍고 다시 던지는 아이를 본다. 그 공이 날아가는 궤적도. 그것은 마치 내 힘의 크기 같아 보인다. 내가 보는 것이 현재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73면)이 생생한 감각은 `일요일의 철학`의 마지막 장면과도 상통한다. 한사코 집과 가족을 떠나 낯선 곳에서의 체류를 선택했지만 여전히 삶에 대한 막막한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주인공은 맹인 학생 루카스와 술집 바텐더 `원숭이 남자`, 그리고 그의 꼬마 아이 등과 조심스러운 교류를 나누고 인라인스케이트를 더듬더듬 연습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그곳을 떠날 날을 앞둔 어느 날, 곧게 뻗은 내리막길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멀리 앞을 내다보며, 조심스레 미끄러지듯 발을 내딛는다.이들의 절실한 몸짓은 `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와 `성냥의 시대`에서는 가까운 이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응시하며 타인을 이해하려는 안간힘으로 드러난다. 우울과 불안에 잠겨 생을 마감한 남편을 애도하는 `밤을 기다리는 사람에게`의 주인공이나 성냥을 만드는 일에 평생을 바친 아버지의 흔적을 되짚어가는 `성냥의 시대`의 주인공의 이야기 모두, 고립을 넘어서 또다른 고립된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각각 다른 결로 그려 보인다. 숨은 상처를 억지로 헤집지 않으면서 그 공백까지 포함한 타인의 고독을 끌어안으려는 이 조심스러운 시도는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탐문으로 이어진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15

연애·인생의 쓴맛 다 안 서른 넘은 여자들 “그래도 다시 사랑 좀 해보자” 덤벼들다

다나베 세이코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사랑을 받은 연애소설 9편을 모은 베스트 컬렉션 `서른 넘어 함박눈`(포레 펴냄)이 출간됐다. 단편소설의 대가로 알려진 다나베 세이코는 200만 부 베스트셀러 `신 겐지이야기`의 저자로 일본에서는 `다나베 겐지`라는 닉네임으로도 불리는 국민작가이며, 특히 간사이 사투리 연애소설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영화와 함께 큰 사랑을 받은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서른 넘어 함박눈`은 `서른 넘은 여자들`을 테마로 쓴 구첩반상 같은 연애소설집이다.이 상 위에는 매콤한 맛, 시큼한 맛, 짭조름한 맛, 숙성된 장에서 우러나는 깊은 맛까지 각기 다른 맛을 내는 이야기가 줄줄이 올라 있다.천연덕스러운 여자와 바람기 많은 남자의 속 보이는 밀애, 둔한 여자와 게으른 남자의 기우뚱한 연애, 우악스런 여자와 부드러운 남자의 장난 같은 교제, 재미없는 남자와 아직도 사랑 타령하는 여자의 고양이 같은 사랑, 그 밖에도 지지고 볶고 헤헤거리다 투덕거리다 하는 부부 사이, 애증으로 똘똘 뭉친 일심동체 같은 모녀 사이, 뭉쳤다 헐뜯었다 하면서도 꼭 붙어 수군대는 여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열두 두름쯤 되는 삶의 자잘한 이야기들이 촘촘하게 곁들여 있다.▲ 다나베 세이코그러나 연애소설이라고 해서 달콤하고 낭만적인 전개를 기대한다면 참으로 곤란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은 희로애락에 부르르 떠는 가련하거나 다감하거나 섬세한 여인의 분위기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연애의 쓴맛, 인생의 쓴맛을 알아버린 서른 넘은 여자들이 그래도 다시 사랑 좀 해보자고 덤벼드는, 조금은 안쓰러운 실화 같은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다나베 세이코의 연애소설은 뜨거운 `시작`과 절절한 `이별`보다 어중간하게 시작되고 흐지부지하다 시시하게 끝나버리는 현실적인 연애의 굴곡을 실감나게 그려내 늘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사랑이 어디 그리 흔하던가. 현실의 사랑은 그저 나뭇가지 모아 대충 피운 모닥불 같은 것이다. 낭만과 온기로 잠시 설레다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싸늘해지고 마는….회색 재가 남은 자리엔 씁쓸함과 애잔함, 아쉬움과 외로움, 그리고 원수 같은 `그 남자`에 대한 기억만이 조용히 똬리를 튼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15

가난한 삶 속 희망의 불씨 지피는 여유

▲ 함민복 시인선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천성 그리움`의 힘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가난한 삶을 노래해온 함민복(52) 시인의 신작 시집`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이 출간됐다. 지난 2005년 10년 만에 네번째 시집 `말랑말랑한 힘`을 펴낸 데 이어 다시 8년 만에 선보이는 다섯번째 시집이다.요즘 시단의 풍경으로 보자면 꽤나 느린 걸음이지만, “함민복의 상상력은 우리가 기꺼이 공유해야 할 사회적 자본이다”(이문재, 추천사)라는 평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세월의 무게에 값하는 70편의 수작을 담았다.부드러운 서정의 힘이 한결 돋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가난한 삶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여유로움이 배어 있는 삶의 철학과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는 “경험에서 이끌어낸 실존론적 사유”(문혜원, 해설)의 세계관을 펼쳐 보인다. 손끝에서 놀아나는 섣부른 수사나 과장 없이 정갈한 언어에 실린 솔직하고 담백한 `삶의 목소리`로 일구어낸 시편들이 따뜻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잔잔한 울림을 선사한다.“보름달 보면 맘 금세 둥그러지고/ 그믐달에 상담하면 움푹 비워진다 //달은/마음의 숫돌//모난 맘/환하고 서럽게 다스려주는//달//그림자 내가 만난/서정성이 가장 짙은 거울”(`달`전문)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평등한 삶을 지향하는 시인의 사유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시인은 감겨 제 몸을 재고 있는 줄자(`줄자`), 살아 움직일 때보다 더 무거운 고장난 시계(`죽은 시계`), 녹이 슬어 버려진 저울(`앉은뱅이저울`)처럼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사물에 주목하면서 그것들로부터 존재론적인 사유의 바탕을 얻는다.여기서 시인은 풍경을 지우며/풍경을 그리고 건물을 지워/건물이 없던 시절을 그려놓는 안개와도 같은 시각으로 폐기된 사물에서 빛나는 사물성을 읽어내며 “보임의 세계에서 해방된”(`안개`) 사물 고유의 본성을 감지한다.“나는 나를 보태기도 하고 덜기도 하며/당신을 읽어나갑니다//나는 당신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기를 기다리며/당신 쪽으로 기울었다가 내 쪽으로 기울기도 합니다//상대를 향한 집중, 끝에, 평형,/실제 던 짐은 없으나 서로 짐 덜어 가벼워지는”(`양팔저울`부분)매일의 고달픈 일상을 힘겹게 이어나가는 현실은 세대나 계층을 불문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비애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시인 또한 그러한 삶의 남루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그는 이 남루한 삶의 풍경들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가운데 그 모든 장삼이사들의 끈기 어린 의지적 면모를 살며시 들춰 보여준다.“좌판의 생선 대가리는/모두 주인을 향하고 있다//꽁지를 천천히 들어봐//꿈의 칠할이 직장 꿈이라는/쌜러리맨들의 넥타이가 참 무겁지”(`금란시장` 전문)“물이 법(法)이었는데/법이 물이라 하네//물을 보고 삶을 배워왔거늘/티끌 중생이 물을 가르치려 하네//흐르는 물의 힘을 빌리는 것과/물을 가둬 실용화하는 것은 사뭇 다르네//무용(無用)의 용(用)을 모르고/괴물강산 만든다 하니//물소리 어찌 들을 건가/새봄의 피 흐려지겠네”(`대운하망상`전문)함민복의 시는 꾸밈없는 삶의 기록이다. 시인은 삶의 어느 한 순간도 가벼이 보지 않고 소중한 의미로 받아들이며 세상의 모든 존재들에게 애틋한 마음을 건네며 다가선다. 가난을 일으켜 세우는 긍정의 힘이 있기에 그의 시는 가난하면서도 따듯하다.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흔들린다`)며 “먼 길 걸어온 사람들 목을 축여줄 수 있”(`폐타이어 3`)기를 소망하는 그의 시는 더 나은 삶과 사회,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가 될 것이다. 메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봄비처럼 그렇게.“뜨겁고 깊고/단호하게/순간순간을 사랑하며/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바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데/현실은 딴전/딴전이 있어/세상이 윤활히 돌아가는 것 같기도 하고/초승달로 눈물을 끊어보기도 하지만/늘 딴전이어서/죽음이 뒤에서 나를 몰고 가는가/죽음이 앞에서 나를 잡아당기고 있는가/그래도 세계는/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단호하고 깊고/뜨겁게/나를 낳아주고 있으니”(`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전문)/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3-08

박맹호, 한국 출판 반세기를 말하다

▲ 박맹호 민음사 회장사람은 누구나 평생에 한 번쯤은 `그 생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키기보다 오직 미래를 창조하는 데 몰두하는 사람은 삶 자체로서만 답할 뿐 이에 대한 답을 흔히 후세의 몫으로 넘기곤 한다. 1966년 서울 청진동 옥탑방 한 칸에서 민음사를 창립한 이래, 문학과 인문학 출판에서 많은 업적을 쌓아 마침내 한국 최대의 단행본 출판사로 키워 낸 박맹호 민음사 회장이 그 질문에 답하면서 `책`이라는 과감한 제목의 자서전을 펴낸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그동안 “각계 명사들이 지나간 이야기를 털어놓는 지면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번번이 고사해 온 터여서 더욱 그렇다.`박맹호 자서전`(민음사)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의 형식으로 씌었다. 1933년 생으로 올해 맞은 팔순이 한 계기가 됐고, 충청북도 보은의 한 마을인 비룡소에서 시작해 “책으로 쌓아 올린” 평생을 돌이키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박 회장이 답하고자 한 것은 늘 위기가 아닌 적인 없었던 한국 출판의 역사를 통해, 그 역사 속에서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던 민음사의 역정을 통해 오늘날 팽배해 있는 패배주의적 “출판 위기론”에 대한 대안적 통찰이다.이 책에는 박 회장과 책의 만남이 빚어낸 강렬한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실려 있다. 청소년 시절 그가 즐겨 읽고 감동에 빠졌던 `인간의 굴레에서`, `1984`, `밤으로의 긴 여로`, `적과 흑`,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삼국지`, `수호지` 등 동서양의 명작들은 문청 시절에는 `이런 작품을 쓰겠다`는 다짐으로, 출판 입문 이후에는 `이런 책들을 반드시 내 손으로 펴내겠다`는 형태로 가슴에 남아서, 수많은 시도 끝에 결국 40년이 흐른 뒤인 1998년에야 실현되어 최근 300권을 돌파한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의 밑거름이 됐다. 그밖에도 `한국일보` 제1회 신춘문예에 소설로 당선될 뻔했으나 독재 정권에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취소되어 운명이 바뀐 이야기, 시인 고은과 만나서 의기투합해 출판 동지이자 평생의 우정을 계속한 이야기, 김현, 김치수 등 `문학과 지성` 그룹과 함께 `세계 시인선` `오늘의 시인 총서` 등을 기획해 시집 열풍을 불러온 이야기, 정병규를 만나 그를 디자이너의 길로 이끌고 함께 한국 책 디자인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분투한 이야기, 건국 이래 최대의 베스트셀러인 이문열 평역`삼국지`를 둘러싼 이야기, 한수산, 박영한, 강석경, 하일지 등 작가들과의 인연, 김용옥, 최창조, 이강숙 등 신진 학자들과의 만남 등이 두루 실려 있어 흥미를 더한다.대한출판문화협회를 둘러싼 이야기는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부분을 드러낸다.그는 2005년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출협 회장에 당선돼 한국 출판의 미래를 열기 위해 분투하다가, 병으로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드는 대목에서는 숙연한 느낌이 든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3-03-08

딸의 죽음에 응답하는 어머니의 회상

부커 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창백한 언덕 풍경`(민음사)가 출간됐다. 이시구로는 `떠도는 세상의 화가`로 휘트브레드 상을, `남아 있는 나날`로 부커 상을,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로 첼튼햄 상을 수상했으며 `나를 보내지 마`(2005)를 타임 선정 `100대 영문 소설` 목록에 올린 현대 영미 문학의 거장이다.`창백한 언덕 풍경`은 1982년 위니프레드 홀트비 기념상을 수상하며 “영국 문학의 새로운 사자”의 출현을 알린 이시구로의 데뷔작으로, 영국에 홀로 사는 중년의 일본 여인 에츠코가 딸의 자살을 겪은 후 과거 일본에 살던 시절 만난 모녀 사치코와 마리코를 회상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 나가사키가 배경인 이 소설에서 이시구로는 피어오르는 버섯구름 하나 없이, 폭격의 굉음이나 처절한 비명 하나 없이 원폭 투하의 비극을 그린다.원폭 후 9년이 지난 1954년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영국으로 이주한 작가는 원폭의 참상을 생생히 묘사한 일본의 소위 `원폭 문학`과 달리 담담하고 절제된 서술로 인간 내면의 상처에 집중하면서 영어로 쓰였지만 일본적 정서를 가장 정확하게 담은 소설을 탄생시켰다.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차분히 목도하며 다음에 올 희망을 말하는 이 작품은 조용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22

유연과 단호 `그런데`의 세계

“그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마치 찰흙을 가지고 노는 일처럼 즐겁고 신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박순원 시인. 2005년 `서정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하고 시집 `아무나 사랑하지 않겠다`와 `주먹이 운다`를 발표한 시인의 세 번째 시집 `그런데 그런데`(실천문학사)가 출간됐다. 웃음과 슬픔으로 섬세하게 그려진 그의 이번 시집을 통해 독자들은 진한 페이소스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나는 그런데가 좋다 그리고도 그렇고 그러나도 그저 그렇고 그러므로는 딱 질색이다 (….) 순딩이 같은 그리고는 개성이 없다 그러나는 까칠하다 그러므로는 고지식하다 그러니까는 촌스럽다 특히 끝의 두 글자 니까가 마음에 안 든다 그런데는 두루뭉술하면서도 날렵하게 빠져 다닌다 그랜저 같다 그런데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런데 말이지 천연덕스럽게 자기가 가고 싶은 쪽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그러므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 `아라비안나이트` 부분둥글어서 슬픈 세계가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쓰는 말 중에 하나인 `그런데`. 시인이 말하듯 `그런데`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이야기해오던 것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한 번에 들었다 놨다 할 수 있고, 한 번에 뒤집어버릴 수 있는 힘이 바로 이 `그런데`라는 말에 있다. 누군가는 불리한 입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런….”라고 말을 돌리고, 또 누군가는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런데!”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때로는 “그런데 말이야” 하고 팍팍한 삶의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숨구멍을 뚫어놓는다.`그런데`라는 말은 매우 유연하게 빠져 나가면서도 뒤따라올 말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한다. 시인이 말하듯 저 유명한 `아라비안나이트`도 결국 `그런데의 세계`다.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은 “그런데”라고 말하지 못한다. 자신의 주장이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른 아침 아내가 배춧국을 끓인다 배추는 이른 아침부터 불려 나와 끓는 물속에서 몸을 데치고 있다 배추는 무슨 죄인가 배추는 술담배도 안 하고 정직하게 자라났을 뿐인데 배추에 눈망울이 있었다면 아내가 쉽게 배춧국을 끓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 그래 나도 눈망울을 갖자 슬픈 눈망울 그러면 이른 아침부터 불려 나가 몸이 데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_시 `이른 아침` 부분시집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여러 번 웃게 되는데 그중 한 장면이다. 시 `이른 아침`에서 시인은 슬픈 눈망울이 있다면 아침부터 배추가 끓는 물에 데쳐지지는 않았을 것이라 가정하며, 일찍 데쳐지지 않기 위해서 슬픈 눈망울을 짓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시인은 저 옛날 군사독재 시절 대통령을 위해 천삼백원을 내고 국가가 보조해주는 복장을 구입해 소년체전 기념 “마스게임”을 준비하면서부터(`마스게임`), 최근에 이르러서는 회사 사장에게 “말대답도 안 하고 불쌍한 척” 가만히 있는 것에서(`멧새 소리`) 본능적으로 “슬픈 눈망울”을 가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 박순원 시인시인은 “주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부러 낑낑거리며” 살아가는 소시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크게 한번 몸을 뒤트는” 연포탕에 든 낙지와 목줄에 묶인 강아지를 통해 읽는다. 그들의 단념을, 그 처참한 기분을,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는 풍경을 통해 스리슬쩍 그려내고 있다. 시인의 목소리에서 투사의 결기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지만, 대신 투창보다 예리하게 연마된 눈빛이 서려 있다. 그 눈빛에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단호함이 있다. 시인은 재밌는 상상력으로 비천해 보이는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 모습은 웃음을 주는 동시에 슬픔을 형상화한다. 그런 사물들 중에는 “불 밝히는 일 딱 한 가지 일만 하다가 끊어지면 끊어져서 덜렁거리면 유리와 함께 버려지는”(`필라멘트`) 필라멘트, “아무것도 아니니까 (….) 뻥뻥 걷어찰 수 있는”(`축구공`) 축구공이 있다. 시인은 이처럼 사소하기 때문에 버려지는 것들, 아무것도 아니니까 걷어찰 수 있는 것들의 고귀한 의미를 되새긴다.시인은 이번 시집에 담긴 왁자한 웃음을 통해 이 세상을 한번 실컷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그가 세상을 들었다 놓는 팔뚝에는 두꺼운 근육 대신 유쾌한 웃음이 묻어 있다. 그 웃음소리는 `그러니까`에 길들여지지 않는, `그러므로`에 순응하지 않는, `그러나`에 따귀 맞지 않는, `그리고`에 목 눌리지 않는 신비스런 힘이 있다. 시인은 그 비밀을 들려주기 위해 조용히 속삭인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22

암탉이 발견한 진주, 수탉이 꿀꺽 삼키다

2007년 `시와상상`으로 등단한 이래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 `시산맥` `영남동인`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송은영 시인이 등단 이후 6년 만에 첫시집 `별것 아니었다`(화남출판사)를 출간 했다. `겨울 과메기`, `등 가족`, `옷이 나를 입다`, `바다를 필사하다` 모두 4부로 나누어져 총 61편의 시를 싣고 있는 그의 이번 시집은 `그 어디에도 구원이 없는`, `정직한 땀으로 절대불가능`한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절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으면서, 그녀만의 발랄한 시적 상상력을 통해 오늘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해 낸다.송은영 시인은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알리바바와 40명의 도적`이 득세하는 오늘의 세계와 비주류로 떠도는 타인들의 얼굴 속에서 참다운 삶과 생명의 공동체를 발견하고자 한다. 시적 반어법 또는 순진성의 아이러니를 통해 단 한 번도 중심에 서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양심마저 속일 수 없었던 자들의 정직한 윤리와 선(善)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타락한 문명 속에서 오히려 새로운 구원과 해방을 찾고 있는 그의 시집은 조악한 현실에 당당히 맞서고 전지구적인 위악(僞惡)에 늠름하게 대거리를 할 수 있는 시적 응전(應戰)의 힘을 여투고 있다. 그녀의 시는 돌출하는 현실의 악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늡늡한 사랑의 기미(機微)에 대해서도 과장하지 않고 진솔하다. 시적 수사(修辭)가 아닌 그녀만이 내뱉을 수 있는 육성이 더 아름답고 듬쑥하다는 것을 그녀의 시는 보여준다.▲ 송은영 시인임동확 시인(한신대 문창과 겸임교수)은 송 시인의 이번 시집에 대해 송은영 시인은 `질보다 양`을 중시하는 `알리바바와 40명의 도적`이 득세하는 오늘의 세계와 비주류로 떠도는 타인들의 얼굴 속에서 참다운 삶과 생명의 공동체를 발견하고자 한다. `하릴 없이 빈둥거리는 경찰`이나 `철봉에 매달린 어른들이 아이처럼` 세상을 `내려다보`는 여유로운 반어법 또는 순진성의 아이러니를 통해 단 한번도 `중심에 서보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양심`마저 `속`일수 없었던 자들의 정직한 윤리와 선(善)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중력이 없는 사이버 공간` 같은 타락한 문명 속에서 새로운 구원과 해방을 가져다줄 `엄마`의 `젖줄`을 `심해 문어(文魚, 文語)`가 되어 찾으며 시작에 빠져있다”고 평했다. 송 시인은 “모래알처럼 많은 시인과 시들, 그 속에 내 시는 보이지도 않고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지만 그래도 나는 내 시가 좋다. 시를 쓸 때만큼은 살아 있는 것 같기 때문“이라고 전했다.“암탉들이 모이를 쪼다가 진주를 발견했다이 진주를 어떻게 할까머뭇머뭇 거리다 수탉에게 보여주었다수탉은 낼름 삼켜 버렸다목구멍으로 꿀꺽 넘어간다별것 아니었다.”-송은영 시 `별것 아니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22

최고의 `손자` 해설서, 한국판으로 출간

국내 최초로 출간되는 고문헌, 고고학의 대가 리링 베이징대 교수의 `손자` 주석 및 해설서 `전쟁은 속임수다-리링의 `손자`강의(글항아리)가 출간됐다. 국내 동양학계에서 선진시대 병법 전문 연구가 거의 없는 상황에 이 책은 의의가 깊다.리링 교수는 이 책을 통해 고대 병서라는 것이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출현했으며 `손자`라는 책의 다양한 판본이 어떻게 지금의 형태로 완성돼 왔는지에 대한 형성사적 역사를 수십 쪽에 걸쳐 매우 세밀하게 서술하고 있다.금본(今本) `손자`와 고본(古本)`손자`의 체재와 내용 상의 차이점, 조조 등 역대 `손자` 주석가들의 장단점, 현대에 들어와 이뤄진 `손자` 연구, 해외에서의 `손자` 연구 등을 차례대로 읽으면서 소화할 수 있게 구성됐다.단순히 군인을 독자로 상정하고 병서를 번역한 것이 아닌, 군인에서 문인까지 이르는 독법과 손자병법 응용연구, 손자에 대한 철학적 접근 등 `손자`의 사상적 차원에 큰 의미를 두고 있고 병법 기술적 차원도 인간행동학의 차원에서 심도깊게 접근하기 때문에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펼쳐지는 용병술과 전략을 통해 국가, 경제, 인간, 사회 집단의 다양한 군상과 의미를 풍부하게 얻을 수 있다.아울러 저자는 세계적 안목에서`손자`를 읽을 수 있도록 세계에서 쓰여진 많은 병서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철저하게 언급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손자` 연구를 일일이 검토하고 소개하고 있으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한 구절 한 구절 `손자`와 대비해서 그 체재상의 차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의 공통점과 차이, 구체적인 병술과 전략에서의 공통점과 차이를 매우 면밀하게 고증하고 음미하고 있다.서양철학사는 “플라톤에 대한 긴 주석”이라는 말이 있듯, 동양에도 비슷한 말이 있다. 명나라 모원의는 “`손자`가 가장 잘 쓰여진 병서이며, 그 밖의 병서는 `손자`를 주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무비지` 권1 `병결평`서문)라고 말했다.병서는 중국 고대의 유산으로 수량이 매우 많은데, 대략 계산해보더라도 선진시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4천여 종이나 된다. 이 많은 책들이 모두 `손자`에 대한 주해에 불과하다는 말은 어느 정도의 과장을 감안하더라도 `손자`의 경전적 지위를 깨닫게 해주기에 충분하다.그간 학계와 재야의 적지 않은 `손자` 전문가들이 기다려온 이 책은 `손자`에 대한 완벽한 주석과 신선한 해석으로 2006년 중국의 각종 상을 휩쓸었으며 현재까지 재판을 거듭하며 “가장 많이 읽히는” `손자`해설서의 권위서로 군림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15

이 시대 진정한 치유, 여기 다 있네

1991년 `시와 시학`을 통해 등단한 복효근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따뜻한 외면`(실천문학사)이 출간됐다.그동안 시인은 `마늘촛불`, `목련꽃 브라자` 등의 시집을 통해 자연과 생명의 표면을 깊은 응시의 시선으로 읽어내며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해왔다.이번 시집 역시 일상 속의 현상과 사물에 대한 복효근만의 세밀한 관찰력이 돋보이고 있으며, 작은 존재로부터 깨닫는 삶의 의미와 세계에 대한 이해가 한층 더 성숙해진 서정시의 언어로 펼쳐지고 있다. 각 시편들은 개체의 비의를 이끌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성찰에까지 나아가고 있다.총 4부로 구성된 63편의 시들이 아픔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마취하는 데 급급한 이 시대의 힐링 열풍에 진정한 치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정갈한 시어는 고요한 절의 둘레를 거닐듯 진지하면서도 무겁지 않고 편안하다. 불교적 종교시는 아니지만 복효근의 시는 향을 사를 때 풍기는 목탁의 향을 살며시 품고 있다. 그에게 삶이란 혁명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일지라도 주어진 길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 `따뜻한 외면`에서 이 결연한 수용의 태도는 “거친 물살에 제 살을 깎으며” “아픈 지느러미를 파닥하여야 하는”(`성(聖) 물고기`) 물고기나 “때론 3미터도 넘게 쌓인다는 눈”을 “다만 견딜 뿐”(`자작나무 숲의 자세`)인 자작나무처럼, 저마다 고단함을 인내하는 사물의 이미지로 포착되고 있다.그러나 이를 자포자기나 수동적인 자세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생을 귀하게 여기는 성찰의 결과이다. 시인은 아픔을 받아들이는 것이 삶의 성숙을 위해 필요한 수행의 과정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한 번 부러졌던 뼈처럼/돌은 얼음의 뼈가 되어 얼음은 더 단단해”(`얼음연못`)지듯 고통이 삶을 완성시킨다는 생의 진실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고 정직하게 마주하려 한다. 만남과 이별이 하나이고 탄생과 죽음이 하나이듯, 존재에게 있어서 고통은 생득적인 숙명이라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를 떨쳐내려고 몸부림치는 대신, “저마다 생이 갖고 있는 가파른 경사”(`자작나무 숲의 자세`)를 담담하게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이처럼 시인은 “대못이 살이 되도록 대못을 끌어안아”(`타이어의 못을 뽑고`) 고통까지도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를 소망한다. 그렇기에 소쩍새, 공벌레, 바지락, 종이컵 등 아무리 작고 하찮은 것들이라 할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지난날은 밑동부터 잘라 떠나보냈고 눈서리 칠 내일은 믿지 않는”(`맹목`) 자세로 `현재`를 치열하게 버텨내는 존재들에게는 마치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들이 부르는 서로의 세례명처럼”(`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그에 걸맞은 숭고함이 녹아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꿈꾼대도 결국 치유되지 않을” 고통에서 “치유를 꿈꾸지 않겠다”(`타이어의 못을 뽑고`)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집의 표제시인 `따뜻한 외면`은 장애물이 있는 세계에 노출된 두 존재가 함께하는 것을 보여준다.비를 그으려 나뭇가지에 날아든 새가나뭇잎 뒤에 매달려 비를 긋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나비 쪽을 외면하는늦은 오후`따뜻한 외면` 전문`비`라는 상황에 맞서서 새와 나비는 나뭇가지로 날아들고, 원래 나비를 잡아먹는 새는 현재의 어려움을 함께 맞서고 있는 나비를 “작은 나뭇잎으로만 여기고” 외면한다.나비로부터 거리를 둔 새의 적당한 무심함은 천적관계의 공생을 잠깐 동안 가능하게 해주는데, 이는 나비에 대한 배려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외면`이라는 차가운 단어가 `무심함`을 통해 따뜻한 것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따뜻한 외면`의 시편들이 상처를 숨기지 않으면서도 포근한 온기를 가진 것은 이 때문이다.복효근의 시세계에서는 어떠한 타자의 침입도 폭력적이지 않다. 속이 죄 빠져나간 고등어에게 소금이 들어와도, 바지락 속에 작은 어린 게 한 마리가 들어앉아 있어도, 모두 “빈 내 몸에/너를 들이고/또 그렇게 빈 네 몸에/나를 들이고/비로소 둘이 하나가”(`한 손`) 되는 과정이자 결과이다. 이렇듯 타자가 나의 내면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결국 사랑의 과정이기에 그 속에서 일어나는 떨림, 그리움, 외로움까지 전부 하나로 따뜻하게 받아들이고자 한다.시인은 죽은 국화를 보고 “애초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었다”(`멀리서 받아 적다`)고 말하거나, “쓸데없이 이들의 역사에 간섭을 하고 있다”(`새의 행로`)고 고백하기도 한다.마찬가지로, 존재 그대로의 본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것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한 방법일 수 있다는 신념이 자리한 흔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다양한 개체들이 한 곳에 모여 질서를 세우고 사는 것을 가능하게 한 비밀이기도 하다.물론 평화와 고통이 공존하는 삶을 맨발로 걷다 보면 때로는 쇠약해져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슬픔과 절망이 덮쳐오기도 한다. 특히 죽어간 이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은 노환을 앓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시편들을 통해 절절하게 묻어나온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3-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