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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격동의 시대 희비 진솔 담백한 노래

`시간은 무겁다`1983년`광주일보`신춘문예와 무크지`시인`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고광헌 시인의 두번째 시집`시간은 무겁다`(창비)가 출간됐다. 첫 시집`신중산층교실에서`(청사 1985) 이후 26년 만에 선보이는 이 시집에는 촉망받던 농구선수에서 해직교사, 사회운동가, 언론사 대표 등의 이력을 거치며 격동의 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온 시인의 신산한 삶과 올곧은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지나온 “삶의 짠한 곳을 콕 집어내어 환하게 하고 아득하게 하는 아름다운 시들”이 잔잔한 울림을 던지며 가슴을 “울컥, 하게 만드는”(안도현, 추천사)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지난 세월, 암울한 시대에 맞서 온몸으로 “최루탄 산발하던 시간 속”(`즐거운 추억`)으로 달려왔던 시인은 잠시 가쁜 숨을 가다듬고 “유일하게 평화로 남은/유년의 시간”(`나무들은 반듯하다`)을 거슬러 올라간다.“씀바귀 같던 그 시절”(`오누이`), “식민지 하늘, 어두운 들판”에서 “저당잡힌 생”(`가을 내소사에서 아버지를 보았다`)을 살았던 아버지와, “우물 속으로/무심한 별들이 쏟아지던 밤” “교복이 입고 싶”어 흐느끼던 누님과, 누님의 “얇게 여윈 잔등 쓸어주며/목젖 아래로 우시던”(`누님의 우물`) 어머니가 아련한 추억 속에서 떠오른다.돌이켜보면 “위로받고 싶은 슬픔이 너무 컸”(`회기동 한 시절`)던 시절, “산에 간 큰성/살릴라고 십삼년간/감악소 담벼락에” “몇동이나 되는”(`다시, 어머니가 쓴 시`) 눈물을 뿌렸던 어머니는 특히나 시인에게 특별한 존재로 되살아난다. 통한의 세월을 살면서도 “죽음에 맞불을 놓으”며 “생의 품격”을 잃지 않고 “기품이 넘치던”(`시간처럼 무거운 물건 보지 못했네`) 어머니의 삶은 “거친 발길에 제 몸 맡”기며 “밟히면서 강해”(`차전초`)지는 민중의 삶, 그 자체이다.상처로 얼룩진 쓰라린 시대를 견뎌온 `어머니`의 기품을 가슴에 새기며 가파른 삶의 현장을 숨가쁘게 달려온 시인은 이제 “섣부르게 이기려는 흉내 내면서”(`마흔`) “백미터 달리기로 살아온 세월”(`나무들은 반듯하다`)을 되돌아보며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이제 겨우 용서를 말”하는 “쓸쓸한 후회”와 “한없이 나약했”던 “죄책감”을 “돌릴 수 없는 나이테 앞에서 고백”(`이제 용서를 말하겠네`)하면서, “몸속 어디쯤에 숨겨둔 눈물”(`겁에 질린, 취하지 못하는`)을 터뜨려 “근심/가득한 몸”으로 운다.몸이 운다/아프다고, 슬프다고/고함지른다/마음보다 먼저 울어버린다//근심/가득한 몸//더이상/상처를 안고는 살 수 없다고/오늘밤/조용히 관절 일으켜세우고/울어댄다(`몸에 대하여`전문)그러나 지난 세월에 회한만 남는 것은 아니다. “누구 앞에 선다는 것은/배우는 일이라는 걸”(`즐거운 추억`) 깨달은 시인은 “뻔히 질 줄 알면서/앞질러 달리던 시절”(`그대, 다시 박수 받지 못하리`)을 새삼 그리워하며 “스스로를 던져/누군가의/생을 거룩하게 하고//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을/가슴에 품어/희망을 이어간 사람들”(`겨울 등고선`)을 위하여 “정직한 슬픔의 노래”(고명섭, 해설)를 부른다.비우지 않고/소리 채울 수 없다지만/버리지 않고/크게 울 수 없다지만//나, 저무는 5월/미처 채우지 못한/노랠 불러야겠네//다들 이제 끝났다고/발길 돌릴 때/혼자 기어코 울어버린 사내를 위해/노랠 불러야겠네/저 넘쳐나는 눈물 불러온 경계 위에서/오늘, 기어코 노랠 불러야겠네//너를 위해/처음부터 비우고/나를 위해 마지막까지 울어버린/한 사내를 위해//기다리다 홀로/노래가 되어버린 사내를 위해/차마 소리가 되지 않는 노랠 불러야겠네(`노래` 부분)시인은 이번 시집을 펴내며 “시로부터 스스로를 유폐시킨 시간이 멀고 무겁다”(`시인의 말`)고 말한다. 하지만 “삶의 현장의 부름에 응답하느라 시를 쓰지 못하는 동안에도 그는 시인이었”고, “저 세월 몰래 쓴 시들”이 보여주듯이 “날마다 시인으로 사는 시인이었다.”(해설) 그는 여전히 “빈집에/홀로 피어/발길 붙드는 꽃들”(`빈집`)에게서 애정어린 눈길을 거두지 않고, “하찮게 보이는 것에”도 “희망을 품는”(`큐레이터는 혼자였네`) 다감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 시대의 부름에 따르느라 오랜 시간 침묵했던 한 서정시인을 다시 맞이하게 된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창비 펴냄, 고광헌 지음, 124쪽, 8천원

2011-12-14

정갈한 언어로 일군 따뜻하고 아름다운 서정 세계

한국 서정시의 맥을 잇는 시인으로서 시단의 큰 기대와 주목을 받고 있는 박성우(40) 시인의 세번째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창비 펴냄)이 출간됐다.첫시집`거미`와 두번째 시집`가뜬한 잠`을 통해 서정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시인은 4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직접 몸 부대끼며 겪은 체험 속에서 가식 없는 정갈한 언어를 일구어 따뜻하고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를 그린다. 행간에서 출렁거리는 곰삭은 시어와 감각적이고 정밀한 묘사가 곳곳에서 은은한 빛을 반짝이며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나는 자주자주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비가 와도 가고눈이 와도 가고달이 와도 가고별이 와도 간다덜커덩덜커덩 왔는데두근두근 바짝 왔는데암도 없으면 서운하니까비가 오면 비마중눈이 오면 눈마중달이 오면 달마중별이 오면 별마중 간다"공동체적 삶의 회복을 지향해온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서 농경문화적 전통이 살아 숨쉬는 “외딴 강마을”(`자두나무 정류장`)을 주요 시적 공간으로 삼는다. “발 동동거릴 일 없이 느긋”(`나흘 폭설)한 그곳에서는 `나`와 `너`의 경계도 없고, 손익을 따지는 약삭빠른 계산도 무의미하다. 한 사람이 먼저 베풀면 자연히 그에 대한 보답이 이어지는 순박한 마음이 있을 뿐이다.시인이 그려내는 이곳의 삶의 풍경은 무척이나 정감있고 애틋하게 다가온다. 병원에 모셔다드린 보답으로 “지팡이 앞세우고 물어물어,” “족히 일년이 넘게” 집을 수소문하여 “참깨 한 봉지”(`참깨 차비`)를 들고 찾아오신 할머니, “닭서리”를 하다 들키자 닭 주인집 “논두렁과 밭두렁 우거진 풀”과 “동네 진입로며 마을 안길 가녘의 수북한 풀”까지 “시원시원” 베어내는 것으로 닭값을 대신하는 “한동네 환갑어른”(`닭값`). 이런 이웃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시인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아, “윗집 할매”가 “내 텃밭에 요소비료를 넘치게 뿌려” “상추며 배추 잎이 누렇게 타들어”가도 원망은커녕 “비울 때가 더 많은 내 집을 일없이 봐주”시는 할머니에게 “콩기름 한 통 사다가 저녁 마루에 두고”(`별말 없이`) 오는 선한 마음을 베풀며 살아간다.“외딴 강마을/자두나무 정류장에//비가 와서 내린다/눈이 와서 내린다/달이 와서 내린다/별이 와서 내린다//나는 자주자주/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비가 와도 가고/눈이 와도 가고/달이 와도 가고/별이 와도 간다//덜커덩덜커덩 왔는데/두근두근 바짝 왔는데/암도 없으면 서운하니까//비가 오면 비마중/눈이 오면 눈마중/달이 오면 달마중/별이 오면 별마중 간다”(`자두나무 정류장`부분)남달리 따뜻한 시인의 시선은 이웃뿐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성찰하며 생명의 근원을 파고든다. 강변을 걷다 발견한 고라니뼈에서 “물 한 모금과 목숨이 아무렇게나 뒤엉킨 시간”(`고라니뼈`)을 보며 자연과 생명의 섭리를 일깨우는 시인은, “씨앗 묻은 일도 모종한 일도 없는”데 “소나무에 호박넝쿨이 올”라온 “뜬금없는” 일에서도 거스를 수 없는 생명의 소중함과 경이로움을 깨닫는다.시인은 또 인간의 생명을 이어주는 상징으로서`배꼽`을 통해 생명의 본성을 재발견한다. “우리가 밥 배불리 먹고/배를 문지르는 버릇이 생긴 것”이나, “고플 때도 입이 아닌/배를(아니, 정확히 배꼽을) 만져보는 것”이 실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입이었던 배꼽”(`배꼽 2`)을 기억하려는 무의식적인 몸짓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지금은 “입에게 입의 일을 맡기고/입을 꼭 다문 입”에 불과한 배꼽을 만지면서 “엄마와 조곤조곤 애기하던 입”의 기억을 되살린다.박성우의 시는 낯설고 인공적인 언어로 가득한 최근 시들의 한 경향에서 한 발 비켜서서 “일상의 진실과 생명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불러일으킨다는 점”(하상일`해설`)에서 현재의 우리 시단에 커다란 의의를 지닌다. 첨단의 감각에 기울기보다는 순박하고 투명하며, 때로는 “서른일곱 먹도록” “서울엔 종점 같은 건 없는 줄 알았”(`종점`)다는 어리숙한 모습으로 중심에서 외떨어진 삶의 쓸쓸함과 아름다움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그의 시는, 언뜻 보기에 낡고 오래된 듯하지만 그럼으로써 오히려 더욱 생생한 서정시의 환한 미래를 보여준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2-07

20세기 중국 역사의 격변기

`펑유란자서전`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펑유란 지음, 3만원 삶에서 막다른 골목을 만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처음 몸담고 있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현대를 살아가며 서구적인 정신과 가치에 젖어 있던 사람도, 인생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시작하면 그간 알게 모르게 내 정신을 구성하고 있던 동양적 정신의 힘을 느끼게 된다. 인생의 험로를 어느 정도 더듬어본 중장년층이 동양 철학에 관심을 느껴 노자나 장자의 고전을 읽기 시작한다거나, 최근 도올 김용옥이나 강신주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진 철학자들이 풀어내는 동양 철학 방송 및 서적들이 인기를 끄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렇듯 동양 철학이 관심 받는 가운데, 동양 특히 중국 철학에 관한 한 놓쳐서는 안 될 거장을 새롭게 소개한다. 그 삶 자체가`20세기 중국 철학사`라고 평가받는 펑유란(馮友蘭·1894~1990)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20세기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철학사가인 펑유란은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중국 철학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학자이다. 세계 최초로 중국 철학의 방대한 세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펑유란의 저서 `중국철학사`는 식민지 시절부터 우리나라 학자들에게 읽혔을 뿐만 아니라 영어로 저술돼 서양 철학자들이 가장 포괄적이며 체계적으로 중국철학을 접할 수 있게 했다.펑유란이 1934년 중국인 최초로 중국 철학을 집대성한 이 책은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20세기 100권의 책`에 오를 만큼 20세기 지성사에 획을 그은 명저로 평가받고 있다. 말하자면 현대인이 중국철학을 이해하는 기틀을 마련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근대를 거치며 서양과 동양 양쪽에서 중국 철학, 나아가 동양의 철학 정신을 되돌아보고 지킬 수 있게 한 거장이었다.`평유란 자서전`(웅진지식하우스 펴냄)은 펑유란이 아흔 살을 앞둔 노년기에 접어들어 자기 일생을 막내딸 앞에서 구술한 내용을 엮은 자서전이다. 자서전엔 그의 삶 자체가 `20세기 중국의 철학사`로 불릴 정도로 중국 역사의 격변기를 온몸으로 겪어낸 철학자의 발자취가 생생하게 담겼다.“21세기에는 중국 철학이 새롭게 빛날 것이다”라고 예언한 펑유란의 유일한 자서전인 이 책에서 역사와 철학과 인생의 의미를 만날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2-07

20년간 12편 출간된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 첫 작품

`탐정은 바에 있다` 포레 펴냄, 아즈마 나오미 지음, 376쪽, 1만2천원아즈마 나오미(55)의 장편소설`탐정은 바에 있다`(포레 펴냄)는 1992년부터 2011년까지 약 20년간 12편이 출간된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아즈마 나오미는 개성 넘치는 시리즈의 잇따른 성공으로 기예의 미스터리 작가로 주목받고 있는 일본의 여류 작가다.지난 9월 개봉한 영화`탐정은 바에 있다`는 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바에 걸려온 전화`의 내용으로 만들어졌다.홋카이도 삿포로에 사는 탐정이 대도시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비정한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나가는 내용의 `스스키노 탐정 시리즈`는 영화 제작 소식이 알려지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고, 개봉 이후 이 시리즈 전체가 서점 진열대를 도배하다시피 하는 진풍경을 만들어냈다. 팬들의 성원에 영화 역시 후속편이 제작될 예정이어서 당분간 이 열기는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탐정 `나`는 뛰어난 관찰력과 예리한 판단력으로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나가기 보다 수상하다 싶은 일에 앞뒤 안 가리고 일단 고개부터 들이밀고 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표적이 돼 난데없이 두들겨 맞거나 쫓기거나 한다. 티격태격 난투극을 벌인 뒤, 탐정은 집으로 돌아와 아프고 쑤시는 몸을 달래가며 사건의 고리를 이어 맞춘다. 그래서 그의 밤은 언제나 고달프다. 가끔은 깜빡 정신을 잃고 차가운 땅바닥에 쓰러져 주위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기도 한다.왁자하고 독특한 번화가의 뒷골목에 있는 한적한 바에서 자신을 찾는 전화를 기다리며 위스키를 홀짝이는 탐정 `나`와 비정한 거리에서 일어나는 괴이한 사건들의 조합. `스스키노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차가운 하드보일드의 냄새를 풍기면서도 흘러간 시대의 향수, 유머와 수다스러운 요설이 넘치는 내레이션으로 독자를 웃음 짓게 만드는 독특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1992년에 발표된 작품임에도 행간에는 요즘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는 유머가 반짝이고 캐릭터 조형도 세련됨을 갖췄다. 출간 당시 유례없던 이 유머러스한 하드보일드 문학에 평단에서도 당황했으나 2011년 유머 미스터리의 붐과 영화 개봉이라는 호조에 재조명을 받으면서 이름을 알렸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2-07

“아시아문학 동력은 구전 설화 전승 발전”

계간 문학잡지 `아시아` 통권 제23호 아시아 지역 지식인들의 문화예술적 소통과 연대를 진중하게 모색하는 계간 문학잡지 `아시아`(발행인 이대환·작가) 통권 제23호가 나왔다. 이야기가 아시아를 이해하는 귀중한 통로의 하나라는 데 뜻을 함께하는 아시아 각국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이번 특집에서는 아시아 각국의 신화, 전설, 민담, 민요, 민속극 등 보편적 형식의 이야기에서부터 인도네시아의 와양, 베트남의 수상인형극, 한국의 판소리 등 각국의 고유한 이야기 양식이 가진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이번 호 권두 에세이는 고은 시인의 `아시아 서사 시대를 위하여`를 실었다. 그는 이미지와 영상 과잉의 시대에서도 인류의 오랜 표현 행위로써의 `서사`, `이야기`의 중요성을 피력하며, `잃은 아시아`, 아시아 여러 지역이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그들의 구전 설화 유산을 전승 발전시킬 문화 동력이 척박한 상황에 대한 숙고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시인은 지난 10일 서울에서 열린`아시아 스토리 국제 워크숍`에서 기조연설을 맡은 바 있다.조현설 교수는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로 그동안 신화와 옛이야기의 매력에 빠져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지역의 신화와 민담 연구에 힘을 쏟아 왔다. 이번 호 특별 기고에서 조현설 교수는 옛 이야기의 보편성과 특별성을 `민담적 복수와 신화적 화해` 안에서 고찰한다.이번 특집과 관련해 조현설 교수의 특별기고와 더불어 지난 10일 열린 아시아 스토리 국제숍의 생생한 현장을 담은 김남일 소설가의 취재기를 준비했다. 아시아 10개국이 참가한 이번 국제 워크숍의 취지와 한계, 아시아 각국의 이야기 유산을 통해 앞으로 더욱 공고한 연대를 기대하는 바람을 들어본다.`마나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키르기스스탄의 구비영웅 서사시이다. 총 50만 행이 넘는 방대한 양으로 `일리아드`와`오딧세이`를 합친 것보다 스무 배나 길며 “키르기스 정신의 정점”이라고 불린다. `마나스`는 3대에 걸친 영웅들, 즉 마나스와 그의 아들 세메테이, 그리고 손자 세이테크의 전기 삼부작이다. `아시아`에는`마나스` 영역을 시도한 최초의 키르기스인, 엘미라 쾨춤쿨로바의 제1부 `마나스` 편에서 `마나스의 첫 번째 영웅적 업적`의 일부를 싣는다. 더불어 엘미라 쾨춤쿨로바의 해설`키르기스의 구전전통과 서사시 마나스`에서는 서사시 `마나스`의 구성과 음송자 `마나스치`의 역할과 중요성을 살펴본다.키르기스 영웅 서사시`마나스`를 암송하는 사람들을 `마나스치`라 일컫는다. 총 50만 행이 넘는 서사시를 몇 날 며칠 밤 암송하는 이들은 경이로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이 방대한 서사시는 마나스치의 입과 입에서 전해온 구전문학의 최고봉이다. `자밀리야`, `백 년보다 긴 하루` 등을 써 국제적으로 이름을 떨친 소련 및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작가, 친기스 아이트마토프는 키르기스 출신이다. 최고의 마나스치로 인정받는 사야크바이 카랄라예프와 이웃이었던 친기스 아이트마토프는 작은 마을에서 이루어진 그의`마나스` 암송을 들으며 `천국`과 `말`의 신비로운 이중창을 목격하게 된다.이번 `아시아`제23호에는 네팔과 버마 그리고 한국 시를 싣는다. 특히 네팔 시는 독자들에게 첫 선을 보인다. 젊은 세대 네팔 시인들 가운데서도 독특한 성향의 아비나쉬 쉬레쉬타의 시는 신비주의적 분위기가 강하다. 버마 시인 띳싸 니의 시는 `시란 항상 반시(反詩)`여야 한다는 자신의 믿음처럼 짧지만 강한 여운을 남긴다. 한국 시는 곽재구 시인과 최영미 시인의 신작시를 싣는다. 특히 곽재구 시인의 `나무`는 곽재구 시인만의 섬세함과 서정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단편소설 코너에 실린 독특한 상상력과 마술적이고 몽환적인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이평재 소설가의 `가름의 멤스티치아`는 계속 되는 무더위에 전기가 간헐적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세기말의 풍경이라고 할 만한 시점의 이야기다. 게임 중독에 빠진 아들의 광기를 지켜보며 주인공은 흉흉한 민심 가운데 떠도는 괴담 속 기이한 짐승의 울음소리에 듣게 된다. 표명희의 `소품`은 한 겨울 보일러가 고장 나면서 주인공이 겪게 되는 우여곡절을 경쾌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그린 작품이다. 감각적이고 톡톡 튀는 문체를 자랑하는 하재영의 단편 `피팅 모델`은 몇 가지의 징후로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는 주인공의 불안을 서늘한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한국에서 만나기 어려운 북한 소설가 김혜영의 `답`은 바람직한 교사상에 관한 교훈적, 교육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겉으로는 뒤떨어진 듯 보이는 `영성`이라는 학생을 두고 친구 사이인 두 교사 옥희와 경미가 보여주는 서로 다른 접근 방법은 `좋은 교사`의 자질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시리아가 낳은 탁월한 소설가 하나 미나의 `부대 자루 위에서`는 부두 노동자, 이발사, 기자 등을 거친 작가 자신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든 작품이다. 여린 하나는 일을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자 공사장으로 가 돈을 벌 각오를 하는데, 그곳에서 야지를리라는 감독관을 만나 하나는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거친 노동자의 일상을 경험하게 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1-30

유머의 생산과 유통 이색 소재 미스터리소설

웃음`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50)가 신작 장편소설 `웃음`(전2권, 열린책들 펴냄)을 펴냈다. 이번 소설은 범죄 스릴러, 유머집, 역사 패러디의 속성을 혼합적으로 갖고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작품의 중심 소재는 유머의 생산과 유통이다. 유머는 그러나 이 작품에서 단순한 소재 그 이상의 역할을 한다. 유머는 이 작품의 배경이자 화두인 동시에 작품의 결을 만드는 화법이며 형식 그 자체다. 작품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농담을 지향하듯 발랄하고 유쾌하게 달려간다.작가의 상상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수없이 접하는 우스갯소리들이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편씩 절묘한 유머와 조크를 접한다. 더없이 완벽한 구성을 갖고 있는 `작품`들이지만 작가는 없다. 혹시 누군가, 또는 어떤 조직이 그런 조크를 의도적으로 만들고 비밀리에 퍼뜨리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이고 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 질문들은 `인간은 왜 웃는가?`라는 하나의 근원적 질문에 맞닿아 있고, 이 근원적 질문에 대한 문학적 탐구가 바로 이 작품이다./윤희정기자`웃음` 열린책들 펴냄,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440·464쪽, 각권 1만1천8백원

2011-11-30

이 우울하고 고독한 시대 문학이 있어 나는 설렌다

`모르는 여인들` 소설가 신경숙이 `종소리` 이후 8년 만에 여섯번째 단편집을 냈다. 지난 팔 년 동안 그는 장편 `리진`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쓰는 데 집중했다. 그 사이사이에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쓴 셈이다.개인적으로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들이 씌어진 시간들은 특별하다. 청탁을 받아서 썼다기보다 그가 쓰고 싶을 때마다 자발적으로 쓴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기에 수록된 일곱 편의 작품들은 지난 팔 년 중에 작가가 가장 침울했을 때나 내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씌어졌다는 뜻이다. 동시대로부터 혹은 그가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마음이 훼손되거나 쓰라림으로 얼룩지려고 할 때마다 묵묵히 책상 앞으로 가서 작품들을 썼던 것이다.“누구에게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때마다 이 작품들을 쓰지 않으면 다른 시간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이 불완전한 세계가 발화시키는 슬픔과 분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어쩌든지 완성을 하고 나면 피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들 속엔 익명의 `모르는 사람`들이 그려내는 성화(聖畵)가 있을 것이다. 주요인물로 등장하든 바람처럼 스쳐가든 이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모르는 사람들을 나는 나의 동시대인들이라고 느낀다. 이 세계의 중심부에 있지 않고 주변부를 떠도는 잘나지도 독특하지도 않은 사람들. 군중 속에 섞여 있으면 잘 보이지도 않을 사람들. 하지만 우리가 현대인이 되는 동안 상실해버린 인간적인 체온과 연민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나의 내적 요구에 의해 이러한 사람들을 비밀스럽게 하나씩 낳아서 세상에 섞어놓은 것은, 이 별스럽지도 않은 사람들의 인생이 한쪽으로 치우친 이 세계의 한 끝을 끌어올려 균형을 이루어주길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지난 팔 년 동안 써놓은 작품들을 모아 읽으며 내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따금 나를 행복하게 했던 나의 문장들도 사실은 나 혼자 쓴 게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있는 나의 동시대인들로부터 선물받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 우울하고 고독한 시대에도 문학이 있다는 것에 나는 아직도 설렌다./윤희정기자문학동네 펴냄, 신경숙 지음, 1만2천원

2011-11-30

詩가 어렵다고요? 마음이 通하면 쉬워요!

`시심전심` 문학동네 펴냄, 정끝별 지음, 260쪽, 1만6천원 시를 어려워하고 시를 두려워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여기 한 사람이 나섰다. 시를 읽고, 시를 쓰고, 시를 가르치며 사는, 시인임과 동시에 명지대 국문과 교수인 정끝별, 그가 두 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서로 통한다는 의미의 `이심전심`에서 제목을 딴 이번 책 `시심전심(문학동네 펴냄)`은 입시를 앞둔 중고등학생을 주 타깃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시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이 읽어 마땅한 책이기도 하다. 시를 어려워하고 시를 두려워하는 이들이 비단 청소년들만은 아닐 터이기 때문이다.이 책은 청소년문학문화잡지 계간`풋`에서 인기리에 연재됐던 원고를 전면적으로 수정, 보완하여 내용을 보다 탄탄하게 구성한데다 감각적으로 읽어나갈 수 있게 편집 방식에도 묘미를 둔 새로운 방식의 시 읽기 참고서다.이 책은 시를 읽는 능력, 시를 감상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어 하나하나를 꿈꿀 수 있는 섬세한 감각과 열린 상상력, 그것들을 엮어 한 편의 시로 종합해낼 수 있는 논리적인 사유야말로 시를 읽는 데 필수적인 능력임에 틀림없음으로 이를 키워주고자 시 한 편을 수술대 위에 올려놓고 본격적인 시 읽기의 해부 과정을 거쳤다.이 책은 총 5부로 나누어 시인 마흔 명의 시 마흔 편을 다루고 있다.김소월 시인에서부터 가장 젊은 장석남 시인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 시사를 총망라해 국어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시인들을 텍스트로 삼은 것이다. 또한 시의 경우에는 교과서에 자주 실렸을뿐더러 그동안 잘못 읽어왔거나 읽으면서 놓쳤던 부분이 많은 시들, 그러니까 해석의 여지가 많은 시들을 골랐다. 사실, 우리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려운 시를 나름의 감각과 논리로 풀어낼 수 있는 내공이 쌓였을 때, 쉽고 좋은 시의 매력은 보너스처럼 거저 찾아오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가 그간 쉽게 접했던 시 해설서 그 이상을 넘어선다.시를 말하는 방식은 둘씩 짝을 지어 `수능(언어) 지문의 세트 형식`으로 구성했다.예를 들어 `사랑`을 주제로 한 1부에서 김소월의`진달래꽃`과 이성복의`꽃피는 시절`을, `청춘`을 주제로 한 5부에서 이상화의`나의 침실로`와 박두진의 `청산도`를 나란히 놓고 비교 분석 하는 식으로 말이다. 요즘 대입 수학능력시험은 두 편 이상의 시를 제시한 후 그 시들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중심으로 시를 감상하고 해석할 수 있는 능력에 표현 능력까지 묻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매 편의 말미에 “그리고 여기”를 덧붙인 까닭은 제시된 시를 꼼꼼하게 촘촘하게 해석해보는 일로 말미암아, 제시된 시 이외의 시들을 자발적으로 찾아 읽게 이끌어 보다 심화된 학습 능력을 유도해보기 위해서였다.이 책에 있어 `읽는 책`의 기능도 중요하지만 `보는 책`의 기능이 추가된다면 머릿속에 시 한 편을 `그림`처럼 정리하게 할 수 있을 터, 하단 부분을 메모패드로 구성했다. 그래서 시에 대한 좀더 깊이 있는 이해를 위한 필자의 각주는 기호 대신 선을 활용해 해당 부분 본문과 연계, 한층 보기 쉽게 했다. 어려운 시어들은 표준국어대사전으로부터 뜻을 풀어놓았고, 헷갈리기 쉬운 한자들은 음과 뜻을 정리해 본문 속 문장들을 읽어나가면서 숙지하도록 정리했다. 또한 해설에 사용된 어려운 용어들의 사전적 뜻을 편집자주로 달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1-23

위기의 시대 문학을 다시 묻다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 창비 펴냄, 한기욱 지음, 392쪽, 2만원평론가 한기욱계간 `창작과비평`편집위원으로 활발한 비평활동을 펼치고 있는 평론가 한기욱의 첫 평론집 `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창비 펴냄)가 출간됐다. 1998년 이래 지금까지 발표해온 평문을 모은 이 평론집은 문학에 대한 신실함과 작품에 대한 섬세한 분별력, 외국문학을 아우르는 폭넓은 식견이 조화를 이룬 성과이자 우리 평단의 주목할 만한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총 3부로 구성된 평론집 가운데 주로 시대론과 문학 쟁점을 다룬 1부의 평문들은 문학비평에 관한 저자의 주된 문제의식을 갈무리한 글들로, 특히 2000년대 이후 `창작과비평`을 중심으로 논의돼온 주요한 문학 쟁점들―2000년대 문학론, 근대문학 종언론, 리얼리즘론, 문학과 정치 논의, 장편소설론 등―을 망라하며 창비의 비평적 입장을 주도적으로 가다듬어온 자취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 과정에서 이 시대 한국문학과 비평의 향방을 놓고 동료 평론가들과 벌인 여러 날카로운 논쟁을 관전하는 것도 흥미롭다.저자에 따르면 문학비평의 주된 임무란 `문학의 진정한 새로움을 가려내는 일`이며, 그것은 곧 어떤 삶과 사회가 더 나은지를 분별하고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지를 사유하는 것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진정 새로운 것과 새로움을 참칭하는 것을 분별하는 작업이 불가결한바, 저자는 그를 위해 무엇보다 이론에 앞서 작품의 문양과 결을 세심하게 읽되 역사적 현실에 열린 비평의 자세를 강조한다.“문학에서 무엇이 새것다운 새것인지를 가리는 문제는 결국 `오늘을 사는` 행위와,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귀기울이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 작품의 문양과 결을 세심하게 읽되 역사적 현실에 열려 있는 비평은 정교한 이론의 적용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평가가 맨몸으로 작품과 시대적 현실을 대면하는 과정이 요구되며, 이럴 때 이론 자체를 재검토할 필요가 생기기도 한다. 하여 문학의 새로움은 창조적인 작품에서 발원하되 비평의 분투를 거쳐 우리에게 온다.”(`문학의 새로움은 어디서 오는가`)/윤희정기자

2011-11-23

벼랑 끝 곡예의 삶 그들을 어루만지다

`나비, 살랑거리다` 실천문학사 펴냄, 홍양순 지음, 280쪽, 1만1천원 이효석 문학상, 김유정 문학상 수상작가인 홍양순(53·사진)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나비, 살랑거리다`(실천문학사 펴냄)가 출간됐다.현대 사회에서 날로 황폐해져가는 가족의 운명을 그린 첫 소설집 `자두`에서 작가가 보여줬던 진실성 짙은 묘사는 이번 소설집에 들어와 더욱 핍진해졌고, 문장과 플롯은 한층 간결하고 탄탄해졌다.`나비, 살랑거리다`에서 홍양순 작가는 삶의 상처와 마주하는 것이 소설의 운명이라 여긴다. 그리고 곧 삶의 상처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소설가 오정희는 “홍양순 소설에는 겨우겨우 숨쉬는 존재들에 대한 깊은 연민이 가득하다. 단순히 소외된 자, 깊이 상처받은 자, 사회적 부적응자라고 명명하는 것이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큼 가녀린 인물들은 어느 먼 별에서부터 이 세상에 불시착한 사람들처럼 낯설고 불안하고 위태롭다.”라고 평하며 홍양순 작가가 불러내는 인간군상들의 면면을 환기시킨다.“순식간의 일이었다. 개가 염소를 낭떠러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염소는 여자가 숨을 멈춘 사이 절벽의 가장자리에서 절묘하고 아슬아슬하게 방향을 틀었다. 검둥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유유히 걸어서 여자에게로 돌아왔다. 잠시 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여자는 이번엔 많이 놀라지 않았다. 유심히 보니 염소는 개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개에게 접근해 뒷발로 툭툭 장난을 걸기도 했다. 개에게도 적의라고 할 것은 손톱 끝만큼도 없어 보였다. 염소가 다가오면 주위를 겅중겅중 뛰며 도리어 상대를 즐기는 것 같았다. 삶이라는 것이 어쩌면 저렇듯 벼랑 끝에서 벌이는 곡예와 같은 놀음은 아닐까. 여자는 검둥개와 염소의 무심한 장난을 보며 왠지 그럴 거라 믿고 싶어졌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서 여행객들의 떠도는 소리와 함께 경운기 소리가 털털털 들려왔다. 섬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그의 말대로 아무 짓도 저지를 수 없는 섬이었다.” (-`마라도`中)다채로운 여덟 편의 이야기들 속에서 주요하게 반복되는 모티프는 바로 `상실`이다.`가족`과 `노동`의 주체되기를 상실한 소설 속 인물들은 매번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교편생활 사직과 전자제품 대리점 사업에 실패한 후 낯선 공단 내 학교의 영어 주임을 맡은 남편, 그마저도 공장 노동자들의 활동을 도와 사측과 갈등을 빚는 남편 곁에서 현실에 대한 무기력감으로 자신을 “황량한 사막”과 동일시하며 “서서히 소멸되고 있”는 아내의 삶은 바로 `벼랑 끝 곡예`와 다를 바 없다(`미망(迷妄)의 집`).이렇듯 `나비, 살랑거리다`에 등장하는 작중인물들은 구체적 양상이 다를 뿐 삶의 빈곤과 무기력, 그리고 허무의 모습들을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다.그들은 삶의 난경(難境)을 벗어나기 위해 죽을힘을 다 쏟지만, 현실을 벗어나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들은 차라리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젖어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이 삶을 포기하는 것도 결코 녹록지 않다. 온전히 살지도, 온전히 죽지도 못하는 소설 속 인물들은 고통스럽고 비루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억척스레 이것들을 살아내는 `곡예`를 보여준다. 작가는 삶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존재들이 갖는 `생명력`에 주목한다. 작품 속에서 `생명력`은 때로 삶의 비루함에 굴복하지 않는 초월적 의지로 그려지기도 하고, 혹은 현실에 대한 아집과 만용으로 똘똘 뭉친 무모함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작가는 깊게 패인 상흔과 연루된 작은 것들의 `사이`로 우리를 초대한다. 우리는 그곳에서 삶의 상처와 마주하고 아파한다. 알 수 없는 통점들이 곳곳에서 아우성을 쳐온다. 하지만 결국 고통들의 존재들이 서로 유대하고 관계를 맺어가면서 우리 삶의 어느 순간은 상흔들을 훌쩍 뛰어넘기도 한다. 작가가 우리에게 그 많은 인물군상을 소개시켜 준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1-23

맛깔스런 사투리와 사람이야기

`그르이 우에니껴?` 푸른사상 펴냄, 권서각 지음, 304쪽, 1만3천800원 권서각(61) 시인의 산문집 `그르이 우에니껴`(푸른사상 펴냄)는 자전적인 에세이와 허구적인 픽션의 사이에서 종횡무진으로 달리는 문장을 통해 우리 시대의 현실을 예리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문화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경북 북부지역의 언어와 생활문화를 통해 우리 문화의 폭을 확장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소백산 아래서 생산된 무공해 문장과 감성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산문집`그르이 우에니껴?`는 `그러니까 어찌하겠습니까?`라는 의미의 경북 북부 지역의 방언이다.저자는 경북 북부지역의 변방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인이다. 시인의 변방 체험이 유머와 위트로 이루어진 맛깔스런 서사를 탄생시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사람 사는 세상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재미있게 읽는 가운데 우리는 또 다른 문화를 체험하고 이웃의 삶을 이해하는 기회를 가진다.제1부는 주로 소백산 아래 지역의 방언이 함의하고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의 독특한 정서와 의식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드라마나 소설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라는 실존하지 않는 상위개념의 방언이 소개되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어느 곳에도 없는 방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생생한 경상도 방언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제2부는 학교와 교육에 관한 서사다. 조금은 엉뚱한 교사의 캐릭터를 가진 인물을 통해 학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비교육적 현실을 유쾌하게 풍자하고 있다. 교육에 대한 이론적 접근이 아니라 구체적인 체험을 통한 서사라는 데 의미가 있다. 시골 학교에서 일어나는 맛깔스런 에피소드는 중장년 세대에게 유년의 추억을 덤으로 선물한다.제3부는 변방에 사는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보통사람과는 다른 괴짜, 물질에 대한 욕심 없는 소박한 사람들, 수염을 기르거나 꽁지머리를 하거나 모자를 쓴 가난한 예술가, 서울 쪽을 바라보지 않고 소백산 아래 삶의 터전을 잡은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통해 지역의 독특한 삶의 양식을 드러내고 있다. 특히 이퇴계 선생의 일대기를 서사적으로 구성한`퇴계가 도산으로 간 까닭`은 인간 퇴계와 그의 사상을 감동적으로 들려준다.“권서각 선생의 글을 읽다가 너무 재미있어 웃음소리가 창을 넘어 아랫집 웃집에까지 들리도록 크게 웃을 때가 많았다. 글은 모름지기 이렇게 읽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재미만 있는 게 아니라 웃음 뒤에 남는 게 있다.“그르이 우에니껴?”와 같이 말끝을 흐리는 어법, 무뚝뚝하고 불친절해 보이는 말속에 함축되어 있는 경상북도 북부지역 사람들의 질박한 정서, 풋굿을 하며 살아가는 이웃들에 대한 따뜻한 긍정, 과묵함과 촌철살인이 공존하는 말과 태도에 대한 폭넓은 애정이 찐득찐득하게 묻어 있다. `맞다, 이런 서사가 바로 사람 사는 모습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그런가 하면 김봉두 선생의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돌출행동과 저돌성은 읽는 이들의 속을 후련하게 한다. 가식과 허위와 출세주의를 향한 그의 공격적 행동에 공감하게 되는 것은 그가 진실하고 올곧은 사람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무지막지해 보이고, 꼴통 소리를 듣는 이들의 내면에 자리한 진정성 그게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그들은 현실에선 비주류로 분류되겠지만, 그들의 생각이야말로 `주류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걸 독자들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변방에서 변방의 삶을 꿋굿하게 지켜나가며 경지에 이른 김봉두, 강시위의 자아야말로 권서각의 분신이 아닐까?” - 도종환 (시인)권서각 시인은 1951년 경북 순흥에서 출생했다.본명은 권석창. 안동교육대와 대구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문학박사.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벌판에서`가 당선돼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시집 `눈물 반응` `쥐뿔의 노래` 등이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경북지회장을 맡고 있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1-11-16

도시 재난과 허약한 현대인에 대한 고발

`아령 하는 밤` 창비 펴냄, 강영숙 지음, 244쪽, 1만1천원 김유정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백신애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한국 문단의 걸출한 여성작가로 자리매김한 강영숙(44)의 신작소설집 `아령하는 밤`(창비 펴냄)이 출간됐다.`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이후 2년여 만에 펴내는 네번째 소설집 `아령 하는 밤`은 2011년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문래에서`가 수록돼 더욱 눈길을 끈다. 일상 속 불안과 악몽을 과감한 무늬로 직조해온 강영숙은 새 소설집에서 기존의 작품세계에서 몰두했던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에 대한 탐구를 한층 강하게 밀고 나가 완숙한 경지를 선보이는 동시에, 연대와 희망에 대한 모색을 시도하면서 새로운 변곡점을 제시한다.이번 소설집의 테마는 `도시`이다. 그런데 이 도시는 다름아닌 `재해`로 가득한 도시이다. 재해로 뒤덮인 도시의 순례자로 나선 강영숙은 들끓는 욕망으로 번쩍이는 도시의 전면을 전복시키는 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 문래, 강변북로, 광화문광장, 옥인동, 황학동 등 구체적인 지명들의 언급은 공포에 뚜렷한 원근감과 실감을 입힌다. 일찍이 그로테스크한 도시풍경을 소설의 주요한 장치로 활용했던 작가의 공간설정 능력은 이번 소설집에서 한결 무르익은 솜씨를 보여준다.가령`죽음의 도로`에서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한 여성이 강변북로에서 자살을 감행하려다 실패하는 과정을 강박적으로 그려낸다. 강변북로를 배경으로 시시각각 세밀하게 변해가는 화자의 위태로운 심리묘사는 현대인의 히스테리컬한 일상을 소름끼치도록 완벽히 재현한다.한편, `문래에서`는 구제역을 소재로 삼아 문명의 진보가 자초한 재앙을 건조하고 서늘한 문장으로 경고한다.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단편은 도시를 파고드는 재해의 기미를 예민하게 포착해 정공법으로 돌파하는 묵직한 작품이다.이밖에도 이혼한 전 부인의 실종 후 그녀를 찾기 위해 도시를 배회하는 사내가 등장하는`불안한 도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불행이 재해 이상으로 파괴적일 수 있음을 설득력있게 전개하며, 악취가 끊이지 않는 오염된 공단지대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짓궂은 유머로 버무린`아령 하는 밤`은 강영숙 특유의 기이한 환상이 돋보인다. 표제작이기도 한 `아령 하는 밤`에서는 특히 범죄의 가해자임이 암시되는 노인을 향한 화자의 선망과 두려움의 초조한 혼재 속에 작가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다.그러나 이번 소설집에서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재해 자체보다 재해 그 이후이다. 대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아이오와가 배경인 `라디오와 강`과 허리케인으로 삶의 터전이 무너진 뉴올리언즈에서 펼쳐지는 `재해지역투어버스`는 탈국경적인 도시의 재앙을 보여준다. 그러나 두 소설에서 무게를 싣는 쪽은 머나먼 이국의 재해현장 보고가 아닌, 재해 이후 사람들이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는 치유의 여정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1-16

고독한 예술가의 유목민적 초상

`리투아니아 여인` 민음사 펴냄, 이문열 지음, 276쪽, 1만1천500원 소설가 이문열(63)이 신작 장편소설 `리투아니아 여인`(민음사 펴냄)을 펴냈다.`불멸` 이후 1년 9개월 만에 펴낸 이 소설은 이문열이 오랫동안 천착해 온 주제이기도 한 `들소`, `시인` 등의 계보를 잇는 예술가소설이다.이 작품의 주인공 `김혜련`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뮤지컬 음악 감독이다. `다국적 정체성`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녀의 타오르는 예술혼과 다문화적 사랑, 그리고 디아스포라의 운명에 맞서 피와 땅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시대의 유목민적 생애가 슬프도록 아름답게 펼쳐지며, 독자들에게 다시 한 번 진한 감동의 울림을 전한다.한국인이자 미국인이며 리투아니아인이기도 한 그녀, 뮤지컬 음악 감독 `김혜련`. 코카서스 인종의 용모적인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국적인 외모, 그리고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을 지닌 그녀는 뮤지컬 음악 감독으로서, 또한 시립 교향악단의 지휘자로서 시대의 명사가 되어 각종 광고와 매스컴을 장식하며 화려하게 부상한다. 소설은 그녀의 불꽃같은 사랑과 3년 만의 파경, 그리고 눈부신 성공 이면의 좌절을, 또다시 이 땅을 떠나고야 마는 고독한 유목민적 예술가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1993년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명성황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떠난 뮤지컬 관람 여행 중 소설의 모델격인 인물을 처음 만나 작품을 구상했다고 한다. 유년시절 한국에서 자랐던 그 여인의 추억담과 리투아니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그녀의 이모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가는 소설화에 대해 마음을 굳혔고, 결국 18년 만에 `리투아니아 여인`이란 작품으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작가 이문열은 `리투아니아 여인`을 통해 “피와 땅이 더 이상 개인의 정체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21세기적 현실”을 지적하며, 태생과 인종, 지역이나 국경을 넘어선 다국적 정체성에서 비롯된 21세기적 정체성의 혼란상 및 그렇게 성장한 고독한 예술가의 유목민적 모습을 오롯이 보여 준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1-11-16

1%가 아닌 99%의 나와 우리들의 욕망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한국일보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수상작가 김경욱(40)의 신작소설집`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창비 펴냄)가 출간됐다. 등단 이래 놀라운 성실함으로 간단없는 자기갱신을 거듭하며 늘 주목을 받아온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한층 정련되고 절제된 스타일과 능란한 구성으로 독자를 사로잡으며 인간과 이야기의 심연을 날렵하게 부각해내는 빼어난 경지를 선보인다.취업 성폭력 비틀린 욕망 등 출구가 없는 시대현대사회와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 아프게 꼬집어그는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잘 쓰는` 소설가이다. 20대 초반에 작품활동을 시작해 거의 스무 해 가까운 시간 동안 이번 소설집을 포함해 무려 열한 권의 책을 펴냈으며, 늘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구성으로 독자를 사로잡으며 흥미로운 소재를 통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문제를 던지는 소설들을 선보여왔다.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작품활동 내내 흔들림 없이 매번 스스로를 넘어서는 발전된 면모를 보여왔다. 이번 소설집에서도 한눈에 드러나는바, 단정하고 유려하기로 정평이 높은 문장은 한층 더 정련되고 절제되었으며, 플롯과 디테일도 더 정교하고 생생하다.그는 어쩌면 `소설을 잘 쓰는 법`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업그레이드`하는 방법까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새 소설을 읽을 때마다, 독자들은 김경욱에 대한 기대를 갱신하지 않을 수 없다.“스스로 빛나지 않는 존재인 인간에게 어둠은 언제 찾아오고 언제 물러나는가. 스스로 빛나지 않는 사내에게 어둠은 찾아왔다 물러가는 것이 아니었다. 어둠은 늘 있었다. 찾아왔다 물러갔다 다시 찾아오는 것은 빛이었다. 사내는 이제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하는지도 몰랐다. 나무처럼, 한그루 나무처럼. 말을 잃은 계집애를 등에 업은 채.”(`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신에게는 손자가 없다`에는 전작들에 비해 훨씬 건조하고 묵직한 분위기의 작품들이 눈에 띈다. 소설집의 첫 작품이자 표제작인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는 하드보일드한 색채가 강렬한 작품이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 성폭행을 당해 후유증으로 말을 잃은 초등학생 손녀와 재개발지역에서 단둘이 살아가는 사내가 있다. 이미 가스가 끊기고 곧 전기와 수도마저 끊길 막막한 상황이지만, 그는 보상금을 거부하고 가해자 아이들의 집을 찾아 치밀한 복수를 준비한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복수는 그를 둘러싼 완강한 현실에 어떤 의미있는 타격도 가하지 못한 채로 막을 내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한가닥 희망은 언뜻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미할 뿐이다. “이 도시에서만 수백개의 수도계량기가 동파된 월요일 아침”, 암울하고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복수를 준비하는 사내의 행동이 냉정하고 담담하게 그려지는 가운데, 사내가 처한 상황의 암담함과 사내가 뿜어내는 의지의 박력이 서로 맞부딪치며 둔중한 울림을 전한다.`하인리히의 심장`은 두 남녀의 불가사의한 죽음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건조하게 나열한다. 서로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황량한 내면과, 끝내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비현실적인 죽음 앞에서 망연히 서 있는 형사의 모습이 아득한 궁금증을 남기는 작품이다.출구 없는 가난에 짓눌린 남자들 삼대의 생활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태양이 뜨지 않는 나라` 또한 이들의 일상이 어떤 전망도 기대할 수 없이 무한히 반복될 것임을 보여주며 시종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한편 사회적 계층의 문제가 이야기의 핵심을 구성하는 작품들도 눈길을 모은다. 취업 사수생 과외교사 주인공과 압구정동 고등학생 커플의 한강변 데이트를 그린 `러닝 맨`은 한강변에서 수차례 마주치는 `뱀 문신을 한 사내`와 누렁개를 쇠줄에 묶어 끌고 가는 오토바이 등이 부녀자 납치강도사건에 대한 소문과 병치되면서 막연한 불안과 긴장감으로 독자들을 우선 사로잡는다.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99%`는 1퍼센트의 상류층을 향한 우리의 속물적 욕망을 되비춘다. 광고회사에 다니는 최대리는 어느날 스카우트되어온 미국 유학파 스티브 킴에게 위기감과 열등감을 느끼는데, 그럴수록 스티브 킴이 사실은 고등학교 시절 자신이 전학간 학교에서 2등의 자리로 끌어내렸던 김태만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사로잡힌다.소설은 그럴듯한 증거를 조금씩 흘리며 독자로 하여금 스티브 킴의 정체를 궁금하게 만들지만, 종국에는 스티브 킴이 김태만인지 아닌지 알 수 없도록 열려 있다. 그로써 소설은 스티브 킴에 대한 최대리의 의심이 어쩌면 그를 향한 질투와 선망이 낳은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추측마저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열린 구조와 미스터리한 장치를 활용해 소설 속 인물의 시선을 이중 삼중으로 뒤집어 보이며 독자의 허를 찌르고 나아가 독자 자신의 욕망을 되돌아보게 하는 수법이야말로 그의 소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장기이며, 이것이 소설의 중핵에 있는 현실의 문제를 보다 풍부하게 드러내주는 것임은 물론이다.소설집의 마지막 작품 `아버지의 부엌`에서, 어린시절 `미미의 부엌`을 갖고 싶어한 자신의 꿈을 용납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으로 내내 타인의 선택에 이끌리기만 하는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 남자는 오랜만의 귀향길에서 비좁고 더러운 아버지의 부엌을 마주한다.소설의 말미에 부자가 함께 찾은 미술관에서, 핑크색 `미미의 부엌`을 확대해놓은 설치미술작품에 기대앉아 있는 아버지의 늙고 지친 모습을 주인공이 바라보는 장면은 이들 부자의 어긋난 욕망과 삶을 선명한 이미지와 상징으로 축약해 보여준다.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한 이 장면에 이르러서야 `부엌`을 매개로 아버지와 주인공의 인생이 서로 통할 가능성이 희미하게 제시되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이처럼 김경욱의 소설은 능란한 수법으로 독자를 이끌어 손에서 책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이윽고 이야기 속에 숨겨진 인간의 심연, 또는 이야기의 심연이라 할 공간을 독자에게 열어 보인다. 곱씹을수록 더 크고 깊어지는 이 심연 앞에서 다만 독자들은 그 여운을 음미하고, 나아가 찬찬히 스스로 그 심연에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김경욱 소설이 지닌 힘이자 그만의 매력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창비 펴냄, 김경욱 지음, 300쪽, 1만1천원

2011-11-09

창의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림역사책

`역사의 미술관` 역사는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이자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시대의 흐름을 통찰해내는 가장 교훈적인 텍스트이다. 역사는 사유하는 자의 시각에 따라, 그의 시대정신에 따라, 그의 창의력에 따라 다르게 이해되고 해석되고 또한 기록된다. 이주헌의 `역사의 미술관`(문학동네 펴냄)은 그림을 통해 보다 생생하고 창의적으로 역사를 이야기하는 그림 역사책이다. 그림 속의 역사 뿐 아니라 그림이 그려진 시대 상황까지 아우르며 또한 두 시대의 연관성까지 파고드는 깊은 성찰과 탐색의 기록이다. 이 책의 그림은 예술 자체로서 해석되기보다 하나의 도구가 되어 다른 분야로의 확장을 꾀한다. 예술적 가치를 넘어 역사와 인문으로 확장하는 매개의 역할을 해냄으로써 대중에게 새로운 교양을 선사한다.이 책은 주요 인물과 사건, 개념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하며, 역사의 큰 맥락을 놓치지 않도록 “한눈에 읽는 역사”를 부속 페이지로 만들어 본문에서 다루는 인물과 사건의 앞뒤 흐름을 파악하며 통시적으로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1장 산은 높고 골은 깊다에서는 시대를 품에 안았던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여기에는 알렉산드로스, 아우구스투스, 나폴레옹과 같은 영웅도 있지만 루이 14세, 이반 뇌제, 스탈린과 같은 문제적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서른 세 살의 나이에 요절한 비운의 제왕 알렉산드로스는 재위기간 12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고 이는 이후 유럽과 아시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성과였다. 그는 당대의 석학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그가 제국을 이끈 리더십의 비결은 포용과 배려였다. 정복한 곳의 왕을 왕으로 대우했고 포로들을 욕보이지 않았으며 스스로 정복지의 왕녀들과 수차례 결혼을 함으로써 경계를 허물고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했다.2장 History 속의 Herstory에서는 남성중심의 역사 속에서도 강한 존재감을 빛내며 역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 클레오파트라와 퐁파두르 부인의 이야기와 여성이 대상 또는 도구가 되었던 매춘, 오달리스크의 이야기가 있다. 그림으로 가장 많이 표현된 여성 중 한명인 클레오파트라, 이 책에서는 연애의 달인이 아닌 이집트 마지막 파라오인 정치가로의 그녀가 그려져 있다. 사랑의 전략으로 일어선 권력의 화신이 여러 화가의 작품을 통해 여러 개의 얼굴로 표현돼 있다. 루이 14세의 정부로 그 시대의 문화를 지배했던 퐁파두르 부인, 그녀의 초상화는 하나의 장르가 될 만큼 발달했는데, 이는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집을 올 때 그녀의 어머니가 파리의 스타일을 지배하라고 당부를 할 만큼 퐁파두르 부인의 문화 권력을 두려워한 일화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3장 역사는 피를 먹고 자란다에서는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또는 역사의 흐름상 불가피했던 인간의 피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염병에서는 인류가 농업시대로 진입하면서 전염병이 창궐하고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죽음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이해하던 사람들이 이제 죽음을 신이 내린 형벌로, 불쾌하고 두려운 공포의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왕들의 처형에서는 중세 유럽의 절대왕정이 붕괴되는 원인과 과정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에는 권력의 희생양으로, 시민들의 심판으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간 왕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세계대전에서는 제1차 2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발발했고 진행됐고 끝이 났는지 흐름을 훑으면서 참혹한 전쟁을 겪어낸 인간이 존엄에 눈뜨고 인간다운 삶을 호소하는 작품을 통해 전쟁을 바라보는 인간 의식의 변화를 보여준다.4장 정신의 역사, 역사의 정신에서는 유구한 시간의 흐름을 통과해내면서 인간이 이성과 정신의 영역에서 어떻게 변화, 성장, 진보하였는지를 카리스마, 종교개혁, 그리스의 지성 등 몇 개의 키워드를 통해 보여준다. 카리스마에서는 사도 바울에서 시작된 이 단어가 처음에는 신의 은혜를 베푸는 종교적 영적 능력을 의미하던 것이 막스 베버와 히틀러를 통과해 J. F. 케네디로 오면서 대중적 매력도와 호감도의 지표로 성격이 바뀌어 정치사회 지도자의 필수항목처럼 된 지점을 이야기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문학동네 펴냄, 이주헌 지음, 368쪽, 1만6천원

2011-11-09

깊어가는 가을 詩가 된 사랑을 이야기하다

`사랑의 미래` 문학과 지성사 펴냄, 이광호 지음, 240쪽, 1만1천원 `사랑`처럼 흔한 말이 또 있을까? 그리고 동시에, `사랑`처럼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말이 또 있을까? 여기, `사랑`을 이야기하는 한 권의 책이 있다. 너무 달콤하거나 너무 애달프지 않아서, 사랑을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을 `사는` 이야기라서, 익숙하면서도 그렇기에 더더욱 새로운 한 권의 책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저 진부하고 상투적인 `사랑`에 대해 아직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게는 중요하다”고 고백하는 문학평론가 이광호의 “사랑을 둘러싼 40편의 공허와 1편의 기이한 위로”가 담긴`사랑의 미래`(문학과 지성사 펴냄)가 깊어가는 가을, 독자들과 만난다.이광호는 현장 비평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비평문에서도 그의 미문은 단연 돋보인다. 꾸며서 만든 문장이 아니라 깊이 있는 사유와 애정 어린 통찰로 빚어낸 군더더기 없이 정확한 문장은, 자칫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비평문에 이광호만의 색을 입힌다. 이런 그의 언어가 이번 책에서 `사랑`을 만난다. 더없이 아름다워서 강력한 `사랑의 언어`가 과장되지 않은 몸짓으로 독자들을 부른다. 그 언어 속으로 가만가만 들어가는 `미래`로의 여정은, 여전히 너무 많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을 넘어서서 “어떤 느낌을 공유한 이름 없는 공동체”의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지난해 7월부터 그해 11월까지`웹진문지`에 연재됐던 이 글들은 연재 당시에도 많은 독자들의 공감과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하지만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한 편 한 편 읽는 느낌과 그 흐름을 한 권의 책에서 쉼 없이 따라갈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를 것이다. 연재 5개월에 걸쳐 이어졌던 고른 호흡은 이 한 권의 책 속에서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이 책은 사랑을 이야기하는 다른 방법에 대한 작은 탐색이다.”41편의 글은 각각 시의 한 구절에서부터 출발하여 사랑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들을 그려낸다. 마치 한 편의 긴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편, 사랑의 매혹이 아니라 무기력감에 가까운 그 문장들은 두 개의 시간으로 나뉘어 흐른다. 하나는 `그`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시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각각의 시간으로 흘러가지 않고, 서로 엇갈리거나 마주 보거나 교차하면서 그 선후를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의 사건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글은 하나의 픽션일까? 하지만 마침내 독자들이 이 이미지들의 사건들에서 발생한 장면들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광호가 전하고자 하는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사유의 궤적이다.“시적인 이미지와 간명한 서사와 에세이적인 사유”의 교차. 이 한 권의 책에서 이광호는 이 새로운 글쓰기를 완성시켰다. 이 글을 `허구적인 에세이` 혹은 `픽션 에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주인공과 글쓰기 주체의 얼굴과 이름이 모두 지워진다. “`그`와 `그녀`는 복수의 `그들`이거나 혹은 `당신들`이거나 `내` 안의 사람들이”라는 이광호의 고백은 이 글을 `익명의 에세이`로 명명하는 쪽에 무게를 싣게 한다. 사랑을 익명성으로 이행으로 바라본 이광호의 시각은 2009년 펴낸 그의 비평집 『익명의 사랑』에서도 이미 확인된 바 있다. 그 책의 머리말에서 “사랑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 속에 머무는 사건이”라고 말한 이광호는 “갈망의 지겨움과 공허 속에서 문득 명랑해진 사랑”이 “익명적인 힘들과 만”나는 모습을 이번 책에서 비로소 그려보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집단적 주체화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비밀스런 2인 공동체를 생성”하는 사랑은 “사랑의 정체성과 동일성을 지우는 데까지, 자기의 파괴와 혼돈으로 나아가려고 한다”는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그의 오래된 사유가 전혀 새로운 형식의 에세이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특히 이 책은 “1인칭의 고백과 2인칭의 대화와 3인칭의 묘사”의 공존 속에서, `그/그녀`였던 자신을 보았다가, 언젠가의 `그/그녀`를 만났다가, `그/그녀`들의 이야기를 지켜보게 되는 특별한 독서 경험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는 점에서 이 가을에 더없이 어울리는 선물이 될 것이다.“사랑하는 자는 하나의 장소를 만나고, 다른 계절로 떠나야 한다. 그 사람의 계절은 보다 더 짧거나 더 강렬하거나 더 느릴 수도 있다. 우리가 같은 문장에 머무를 수 없는 것처럼, 생을 통해 하나의 계절을 지킬 수는 없다. 계절이란 기억과 시간에 대한 단념의 이름이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이건 그들이 통과한 계절들의 이미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계절들의 돌이킬 수 없는 순환에 관한 것이다.“너무 어리거나 너무 늙은 사랑이, 그렇게 지나갔다. 서로 엇갈리는 긴 시간보다 분명한 것은 그 기억조차 흐려지는 날이 온다는 것. 언어만이 그 계절들을 봉인한다. 어떤 사랑의 이야기는 망각의 힘으로, 망각하려는 힘으로, 다시 쓰인다. 기억보다 더 오래된 세월을 향해.”_`프롤로그-한때 새들을 날려 보냈던 계절들`에서“사랑의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사랑의 미래를 향해 떠날 수 있다. 어떤 희망도, 어떤 목적도, 어떤 대가도, 어떤 이름도 없이.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가 어딘가에 남아 있고, 그 하늘의 늙은 그림자 아래서 `당신`이 늦은 아침밥을 먹고 있다면, `나`도 한 숟가락의 밥을 뜨고 다시 길을 나설 수 있다.나는 당신을 기다리지 않겠지만,내 걸음이 당신의 미래에 이르게 된다 해도당신 놀라지 말아요.”_`에필로그-이제는 그대 흔적을 찾지 않고`에서/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1-02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인디언의 삶

`인디언의 지혜` 판미동 펴냄, 베어 하트 지음, 324쪽, 1만3천원“마음에서 우러나는 다른 생명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한 것과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전문적인 지식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증명`할 수 없는 자연이 가진 힘은 종종 믿지 못할 것으로 치부돼 왔다. 또한 자연을 섬기는 옛사람들의 지혜는 원시 신앙이나 미신 등으로 가치 폄하되는 일이 잦았다.그러나 물질적 풍요 이면에서 정신적 공항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자연으로 돌아가 그와 하나 돼 살아가는 삶은 필수불가결하다. 사방이 막힌 듯한 괴로운 상황에 직면한 사람들이 산을 찾고 바다로 향하는 것은 자연 속에서 스스로를 정화하려 하는 우리의 본능이 발현된 행동일 것이다. 대지를 어머니로, 모든 생명의 모태가 되는 태양을 아버지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형제자매로 여기며 존중하는 인디언의 지혜가 새삼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인디언의 지혜`(판미동 펴냄)의 저자 베어 하트는 전통적인 훈련을 받은 마지막 세대의 인디언 주술사인 동시에 정규교육을 받은 인디언으로, 인디언에 대해 현대인들이 가지는 오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주술사가 되기 위해 자신이 겪은 과정과 주술사로서 사람들을 치유한 경험을 통해 자연의 신성한 힘을 믿고 받들어 온 인디언들의 삶이 결코 미신으로 치부할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한번은 조너스 베어 삼촌이 나를 연못으로 데려갔다. 삼촌은 연못을 들여다보라고 하더니 나에게 물었다.“무엇이 보이니?”“내 모습이 보여요.”“물속에 이 막대기를 넣고 휘저어 보거라.”삼촌 말대로 물을 휘저었더니, 다시 물어 왔다.“이번엔 뭐가 보이니?”“제 얼굴이 일그러져 보여요.”“그 얼굴이 좋니?”“이런 얼굴은 싫어요.”“사람을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이 못마땅할 때가 있단다. 사실 그건 너의 모습을 그 사람에게서 보고 있는 것이란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 어느 부분을 그 사람을 통해 보고 있는 거야. 그래서 상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란다. 하지만 실제로는 너의 일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그 점을 늘 명심해라.”-본문 39쪽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과 더불어 사는 하나의 인격체로 보았다. 때문에 인디언들의 삶과 철학은 어머니 대지와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과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그럼에도 과거 백인의 입장에서 제작된 서부 영화 속에서 인디언들은 주로 미개하거나 야만적인 모습으로 그려지기 일쑤였고, 그것이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디언의 이미지로 굳었다. 그러나 베어 하트가 책에서도 서술했듯 정작 인디언 자신들은 스스로를 야만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살아 온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 인디언들은 적을 위해서도 기도를 할 줄 알고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형제자매로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이 책에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묘사되는데, 현대인들이 오해해 온 미개하거나 잔혹한 모습과는 반대다.주목할 것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간 인디언들의 지혜를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베어 하트는 나무나 강물, 우리를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에서도, 작은 벌이나 곰에게서도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며 다양한 일화를 통해 독자들을 인디언의 지혜 속으로 이끈다. 풍성한 체험과 지혜가 녹아든 그의 이야기는 우리가 자연과 조화된 삶에 이르는 길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인디언의 전통 속에서 자란 저자는 스승이나 부족 어른들의 가르침을 여러 가지 일화를 통해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영혼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진짜 배움이라는 것을 피력한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1-02

예술·기술 결합으로 21세기 창조한 잡스의 사랑 미움 꿈을 담은 자서전

스티브 잡스 애플 공동 창업주 공식 자서전 `스티브 잡스` 민음사 펴냄, 월터 아이작슨 지음, 안진환 옮김, 944쪽, 2만5천원 “죽은 후에도 나의 무언가는 살아남는다고 생각하고 싶군요. 그렇게 많은 경험을 쌓았는데, 어쩌면 약간의 지혜까지 쌓았는데 그 모든 게 그냥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그래서 뭔가는 살아남는다고, 어쩌면 나의 의식은 영속하는 거라고 믿고 싶은 겁니다.”`IT 영웅` 고 스티브 잡스 애플 공동 창업주의 공식 자서전`스티브 잡스`(민음사 펴냄)가 지난 24일 세계 동시 출간되면서 국내를 비롯해 전 세계 서점가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이 책의 말미에서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어쩌면 평생을 신비주의로 일관하던 그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유일한 공식 전기`스티브 잡스`를 써 달라고 요청한 것은 평생 살아오면서 쌓은 “약간의 지혜”를 세상에 남기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 약간의 지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내 열정의 대상은 사람들이 동기에 충만해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영속적인 회사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모두 2순위였다. 물론 이윤을 내는 것도 좋았다. 그래야 위대한 제품을 만들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윤이 아니라 제품이 최고의 동기 부여였다.”요컨대 “위대한 제품을 만드는 영속적인 회사를 구축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하는 것이다. 이 책에 담긴 것은 스티브 잡스가 만들어 온 위대한 제품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 제품을 만들었던 위대한 조직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조직을 이끌었던 위대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이 위대한 인간 스티브 잡스에 대한 책은 이미 시중에 넘쳐난다. 하지만 잡스는 그 책들에 대해 늘 극도의 불만을 표시했다. 잡스가 자신의 허락 없이 출간된 전기를 두고 불쾌감을 감추지 못한 나머지 해당 출판사의 다른 책들까지도 애플 스토어에서 모두 치워 버리라고 지시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평생 예술과 기술이 결합된 완벽한 제품을 추구해 왔던 그는 이번에 자신의 생애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평소 절친하던 `타임`의 전 편집장이자 CNN의 전 최고 경영자 월터 아이작슨을 불러서 전기를 써 달라고 의뢰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결심한다.“몸이 아프기 시작하니까 내가 죽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한 책을 쓸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그들이 뭘 알겠습니까? 제대로 된 책이 나올 수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직접 내 얘기를 들려주어야겠다 싶었지요.”그러니까 이 책은 스티브 잡스가 유일하게 자신의 입을 열어 자기 삶의 모든 것을 밝힌 처음이자 마지막 기록이며, 그가 프레젠테이션 말미에 늘 입을 열어 사람들을 기대에 차게 했듯이 그의 생애 최후의 “And One More Thing”에 해당한다.이 책에는 21세기를 새롭게 그려 나간 창조자 스티브 잡스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부모 집의 조그마한 차고에서부터 시작해 세계 최고의 회사가 된 애플의 놀라운 성장 비밀, 애플 I에서 시작해 매킨토시와 토이 스토리를 거쳐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이르는 혁신적 제품들의 탄생 비화, 그리고 애플의 CEO 사임 이후 두 달여에 걸친 그 마지막 순간까지 처음 공개되는 온갖 이야기들과 함께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전설의 프레젠테이션 준비 과정에서 극도의 절제와 완벽주의로 상징되는 경영 비법까지, 이 책은 스티브 잡스의 혜안이 빛나는 명언으로 가득 차 있다. 스티브 잡스가 사랑하고 미워하고 꿈꾸고 아껴 왔던 것들을 충격적으로 고백한 이 책의 내용은 그동안 잡스를 다루었던 유사한 도서를 모두 넘어선다. 그 모든 책들은 예고편에 불과했으며, 이 책은 그에 관한 온갖 낭설과 추측을 한 번에 정리해 버린 최종 버전인 셈이다. 혹자는 이 책을 읽지 않고서는 애플도, IT도, 창조성도, 혁신도, 경영도, 그리고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기 힘들다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저자 아이작슨은 2009년부터 2년간 잡스와 함께 어린 시절 집을 방문하거나 함께 산책을 하며 그를 40여 차례 집중 인터뷰했고, 그의 친구, 가족, 동료뿐만 아니라 그에게 반감을 가진 인물이나 라이벌까지 포함해 100여 명의 인물들을 만났다. 그중에는 잡스의 최대 라이벌이었던 빌 게이츠를 비롯해,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애플의 핵심 디자이너 조너선 아이브, 그리고 애플의 후계자 팀 쿡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IT의 영웅들이 모두 포함돼 있다. 또한 이 책에는 실리콘밸리에서 보낸 잡스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주 개인적인 일화부터 공식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까지, 그의 괴팍한 채식주의 믿음과 선불교로부터 받은 영향, 디자인 스튜디오에서의 일, 픽사에서의 비전, 애플의 혁신 정신 등 잡스의 개인사 전체가 담겨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0-26

암흑기 작가의 심층세계·한국문학 재조명

방민호 서울대 교수 `일제말기 한국문학의 담론과 텍스트` 출간 방민호(47)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최근 펴낸 `일제말기 한국문학의 담론과 텍스트`(예옥출판사 펴냄)는 그가 일제 말기 문학에 관해 10년간 집중해온 과정의 산물이다. 총 16편의 논문, 원고지 2천400매로 구성된 이 책은 일제 말기를 둘러싼 역사철학의 인식을 바탕으로 방대한 역사자료들이 동원돼 있다. 당시 제국 권력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문학인들이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었던 것, `있는 그대로` 쓰지 못하고 `위장`과 `연기`와 `수사`로 피력한 것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다.저자는 이광수, 박태원, 이상, 이태준, 김기림, 김남천, 임화, 오장환, 조지훈의 문학세계 분석을 통해, 일제 말기 문학의 새로운 미래적 가치를 발견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즉 `대일 협력`이 강요된 현실에서 문학활동을 해야 했던 당대 작가들의 의식의 `이면`을 들여다봄으로써 그들이 차마 말하지 못한 것은 무엇이었으며, 어떠한 위장의 방식을 선택했는지를 통찰하고 있다.이로써 일제 말기 문학에는 친일문학밖에 없었다는, 그래서 이 시대의 문학을 `암흑기 문학`이라고 인식하는 통념을 깨고 한국문학사를 위한 훌륭한 문학 자산들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필자가 이 책에서 뭔가 다르게 벌인 일이 있다면 그것은 일제 말기 작가, 시인, 비평가들의 담론과 텍스트를 심층적으로 읽어 그들이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하려 했던 것을 발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문학이 근본적으로 수사학적이라는 사실이 일제말기 한국문학 앞에서는 더욱 더 깊이 음미될 필요가 있다. 이 시대의 문학을 독해하는 데 있어 `연기`나 `위장`에 대한 고려 없이 `있는 그대로` 담론과 텍스트를 읽는 것은 문학 연구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일이나 다름없다.(11쪽)”저자는 현해탄 콤플렉스로 대표되는 이 시대 문학에 대한 식민주의적 시각에 맞서, 일본문학의 메커니즘에 속박되지 않는 한국문학의 보편성과 창조성을 발견하고 있다. 특히 이상, 김기림, 이효석 등의 연구에서 이와 같은 시각이 강조돼 있다. `한복을 입은 이상`에서는 소설 `실화`와 `날개`의 비교분석을 통해 이상이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의 의식의 궤적을 살핌으로써 그가 얼마나 보편적인 문학의 경지를 추구했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문명비평론의 행방-김기림의 경우`에서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구도로써 펼쳐온 김기림 비평의 전개과정을 통해 그가 민족의 원리를 찾아나가는 행로를 분석하고 있다. `이효석과 하얼빈`에서는 1940년 전후에 발표된 이효석 소설의 내면적 분석을 통해 그가 국민문학론이라는 정치주의적 담론과 일본적 오리엔탈리즘론과 엄격한 거리를 두었으며 독자적인 예술주의적 이상을 추구하였음을 확인하고 있다.그는 일제 말기 작가들의 `친일적` 작품들의 분석을 통해 엄혹한 시대에 작가들이 어떠한 `내성(耐性)`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특히 이광수, 김남천, 채만식, 박태원 등의 작품들에 대해 매우 신중하고 섬세한 분석으로써 `전향`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작가들의 심층 세계를 파악하고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0-26

대한민국 안방을 열광시킨 16인의 드라마 작가

`올 댓 드라마티스트` 아시아 펴냄, 스토리텔링콘텐츠연구소 지음, 272쪽, 1만2천원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오늘도 수서에서 여의도까지 새벽 버스를 타고 달려야 했다. 울고 보채는 아이는 동생에게 맡기고 왔다. 다행히 대본 연습 시간에 맞춰 늦지 않게 도착했다. 원고를 읽어 보던 PD는 그녀에게 다시 수정을 요구했다. 이미 수도 없이 고친 원고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최선이라면, 다시 고치리라. 지쳐 쓰러져 펜조차 들 수 없게 될 때까지 최선을 다 할 것이라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다리가 풀려 계단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어디선가 온기가 다가왔다. 청소부 아주머니가 건넨 따뜻한 보리차 한잔이었다. 그녀는 종이컵을 보며 `사람의 온기란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엄마의 바다`, `그대 그리고 나`, `쑥부쟁이`를 쓴 김정수 작가의 이야기다. 그녀가 쓴 드라마에 담긴 온기는 몇 년 후 수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에 담겼다. “한 편의 드라마가 탄생하기까지 드라마 작가에게는 시청자가 흘리는 눈물보다 더 많은 눈물이 필요하다.”`서울의 달`을 집필하면서 김운경은 극중에서 제비로 등장할 인물을 찾기 위해 영등포로 갔다. 사교댄스계의 종결자로 꼽히는 일명 `대머리 박` 선생을 찾아가 입문을 간청했다. 삼고초려 끝에 그는 마침내 `대머리 박`의 제자가 되어 사교댄스를 배우고, 카바레 세계를 알아 갔다. 당대 최고의 유행어가 된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터닝”은 책상머리에서 얻어질 수 있는 대사가 아니었다. … 거지들의 세계를 다룬`형`을 집필할 때는 거지들의 소굴 한복판으로 기어들어 갔다. 작품에 등장하는 전후의 거지들은 음성의 꽃동네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김운경은 걸신(乞神)이라는 것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거지는 그냥 가난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거지 귀신이 들려야 한다. 잘 차려진 깔끔한 음식보다 얻어먹는 더러운 음식이 훨씬 더 맛있는 사람이 진짜 거지다. `거지왕` 김춘삼은 어느 날 손님들과 함께 식당 뒷문으로 들어가다가 음식 쓰레기통에 거꾸로 처박혀 있는 생선 등뼈를 보았다. 식당에서 시킨 비싼 음식이 나왔지만 손이 가지 않았다. 부글부글 끓는 음식 쓰레기 속에 거꾸로 처박힌 생선 등뼈가 눈앞에 어른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김춘삼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몰래 나와 잔반통에 박혀 있는 생선뼈를 집어 단숨에 핥아먹었다. 혓바닥은 짜릿했고, 목구멍은 전율했다. 걸신이 들린 사람은 상한 것을 먹고도 병에 걸리는 일이 없다. 걸신이 몸을 떠난 거지는 상한 음식을 견디지 못한다. 거지는 한 번 병에 걸리면 세상을 뜬다. 육체를 지탱하던 걸신이 이미 육체를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김재영(소설가,`코끼리``폭식`), 김종광(소설가,`경찰서여 안녕``71년생 다인이`), 박영란(소설가, `나의 고독한 두리안 나무`), 서성란(소설가,`특별한 손님``파프리카`) 등 한국 문단을 이끄는 소설가들이 필진으로 참여한`올 댓 드라마티스트`(아시아펴냄)는 드라마 작가들의 삶을 생동감 있게 그려 내고 있다. 이들은 드라마 작가의 직업적 특성과 드라마가 지닌 의미에 대해서 성실히 조명했다. 그리고 모든 필진은 드라마 작가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한국 드라마가 세계에서 환영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느꼈다고 한다. 이들이 드라마 작가들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고 취재하면서 느낀 삶에 대한 어떤 긴장감은 취재 기간 내내 필진들을 따라다녔다. 독자들도 글을 통해 그것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책은 김수현, 김정수, 김운경. 주찬옥, 최순식, 이선희, 박지현, 최완규, 권인찬, 홍진아, 노희경, 박계옥, 김도우, 정성희, 정형수, 이기원 등 드라마 작가 16명의 이야기가 구성지게 펼쳐진다.“드라마 작가가 끝까지 붙들고 매달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간을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풍조나 시류를 신경 쓰지 마세요. 좋은 대본이면 됩니다. 엉성하게 작업하지 마십시오. 드라마는 세공(細工)으로 여겨야 합니다.”- 김수현 편이 책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삶을 살고 있는 드라마 작가들에 관한 책이다. 그들은 늘 성공한 드라마의 뒤편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인생을 통해 드라마를 썼다. 그들이 만난 사람이 드라마 속 인물이 되고, 경험한 바가 사건이 되고, 아껴 둔 소중한 것들이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드라마 작가는 토씨 하나도, 대사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0-19

맛 지도 따라 맛 여행 떠나면 인생이 맛있다

`칼과 황홀` 문학동네 펴냄, 성석제 지음, 356쪽, 1만3천800원 무엇을 쓰든 단번에 읽는 이의 심금을 찌르는 절대 무공의 이야기꾼, 소설가 성석제(51)가 돌아왔다. 그가 오랫동안 벼린 칼을 뽑아들고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금껏 각별한 관심으로 나름의 미학을 구축해온 `음식`에 관한 것이다. 그는 음식이란 “그 무엇보다 우리의 존재에 맞닿아 있기에”, 소설로도 잘 안 되고, 시도 못 된다며 `이야기`의 방식으로밖에 풀어낼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가 나고 자란 고향 상주에서부터 한국에서 비행시간으로만 26시간이 걸리는 칠레에 이르기까지―작가 성석제가 천하를 유람하며 맛본 궁극의 음식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낸 숙수들과 그 음식을 나누어 먹은 정겨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성석제의 음식 이야기`칼과 황홀`"(문학동네 펴냄)은 문학동네 온라인 카페(http://cafe.naver.com/mhdn)에 올해 3월부터 7월까지 일일연재된 작품이다. 매일 오후 다섯시, 저녁시간을 앞두고 위를 후벼파는 `맛고문`이라는 독자들의 행복한(?) 원성 속에,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를 읽기 전에는 반드시 `턱받이`를 둘러야만 흘러내리는 침을 감당할 수 있다는 등의 재기발랄한 독자 댓글이 달리며 인기리에 연재됐다.책으로 엮으면서 연재분 외에 국수, 두부과자, 포도 등 그의 생을 푸근하게 해준 주요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더해졌고, 1995년부터 지금까지 한 영화전문지에 꾸준히 만화를 연재하고 있는 만화가 `정훈이`의 위트 넘치는 삽화도 실렸다. 만화가 정훈이의 전매특허 캐릭터인, 목도 허리도 없는 `인간적인` 몸매의 소유자 `남기남`과 함께 성석제의 맛 기행을 따라가다보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저도 모르게 웃음 한 사발을 쏟아내게 된다. 또한 책을 읽고 나면 당장이라도 맛집으로 달려가고 싶어질 독자들을 위해 말미에는 `성석제의 맛 지도`를 수록했다. 각 글에 등장하는 맛집들은 물론이거니와, 그 밖에 그에게 “은혜를 베풀고 영향을 준 전국의 음식점과 찻집, 술집”을 총정리했다.이 책의 1부는 그가 `하루 세 번의 여행`이라고 표현한 끼니, `밥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먹는 즉시 전투력이 상승하는 어머니표 쇠고기라면, 고양이도 울고 갈 부뚜막 무쇠솥 김치볶음밥 같은 가정식에서부터 껍데기째 연탄불에 올려놓으면 뽀얀 물이 나오는 맛이 `겁나게` 진한 벚굴, 울릉도의 약소와 명이나물과 같은 국내식을 뛰어넘어, 독일의 `할매 포차`에서 먹은 독일식 소시지 `부어스트`, 중국에서 혼자 3인분을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다는 동파육에 이르기까지 세월과 타향의 수만 가지 맛을 넘어 단숨에 뇌리를 강습하는 압도적인 맛의 향연이 펼쳐진다.2부에서는 마음의 노독을 눅지근하게 풀어주는 술상을 받아볼 수 있다. 성석제의 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막걸리다. 수많은 술을 섭렵한 만만치 않은 주당(酒黨)이지만, 그가 `삶의 계단을 넘어설 때 함께하는 술`로 꼽는 것은 단연 막걸리다.그가 술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걸출한 술꾼들의 연대기에도 눈이 휘둥그레진다. 열일곱 살 때부터 술을 마셔서 한 끼에 소주 한 병씩, 하루 평균 소주 세 병을 일흔 살까지 꾸준히 마셔왔다는 절세의 술꾼 이확재 어른. 성석제는 그에게 “무릇 술을 마시면 그냥 마시는 것이지 잘 마시는 것은 무엇이며 많이 처먹기만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는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어른은 이렇게 답한다.“술은 음식이다. 생명 가진 사람에게는 그저 고마운 것이다.”책장을 덮으면서 독자들은 `작가의 말`에 그가 남긴 한 문장에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그리고 그의 음식 이야기에서 끝끝내 발견하게 되는 것은, 희귀하고 별난 음식이 아닌 지극히 평범해서 아름다운 인간, 그리고 맛있는 인생이므로./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0-19

축구의 육체언어는 솔직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최영미 시인 에세이 `공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예민한 자의식이 세계와 대결하는 팽팽한 긴장을 솔직한 언어로 표현해온 시인 최영미(50)는 에세이스트로서도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해온 빼어난 산문가다. 그가`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이후 2년 만에 신작 산문집`공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들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축구에 대한 그의 열렬한 사랑과 분석적 비평을 담은 축구 에세이집. 매번 `위험스런 모험`을 마다하지 않는 그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스포츠 에세이라는 장르로 또다시 신선한 도전을 감행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시집과 소설 출간을 무한정 미루게 할 정도로 최영미 시인의 축구앓이는 유명하고 또 지독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부터 시작된 축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십여 년이라는 기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역사가 있다. 국내에서 발행된 축구 관련서들을 훑고 그것도 모자라 영국에서 발행되는 `월드 사커(World Soccer)`를 구독하면서 축구 정보를 탐식한 것은 기본. 기회가 되면 게임의 규칙을 배우고, 자리가 만들어지면 축구를 화제로 삼고, 열 일 제쳐두고 경기를 관람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부터는 신문과 잡지 등에 축구에 관한 글을 본격적으로 발표하면서 축구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철학을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대한축구협회로부터 한일 월드컵 공식보고서 편집자문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2005년에 출간된 시집 `돼지들에게`에는 `축구장에서 생각한 육체와 영혼`을 주제로 9편의 시를 발표했고, 2011년 초에는`중앙일보`에 `시인 최영미의 유럽 축구 기행`을 연재하기도 했다.그렇게 축구에 빠져 밤을 낮 삼아 보낸 지 십여 년. 축구 해설가 못지않은 전문지식과 통찰력을 갖춘 그가 축구 경기에 빗대어 예측 불허의 삶을 읽는다. “월드컵이 아니었다면” 좀 더 일찍 소설을 완성하고, 더 많은 시를 썼을 거라고 자책하는 그에게 축구는 “삶의 이유이자 덫”이기도 했다.왜 그는 축구에 열광하게 되었을까? 물론 “재미있어서”다. 그러나 속내는 복잡하다. “위선이 일상화된 사회”, “친교가 없고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에게 절대로 공을 넘겨주지 않는” 사회와 대조적으로 축구장 안에서 벌어지는 “육체의 언어는 구체적이며 솔직”하기 때문이다. 기대하는 곳으로부터만 공이 날아오는 한국 사회와 달리, 운동장에서 공은 어디서 날아올지 모른다. 예측 불가능성, 그것이 게임의 본질이다. 하여, 그를 지배해온 열정을 풀어낸 산문 27편에는 육체의 언어에 대한 환희의 기록뿐 아니라 불합리한 삶과 벌여온 치열한 고투의 기록까지 담겨 있다.이 책에는 일간지에 연재하면서 호평을 받았던 유럽 축구 기행, 지난 10년간 다양한 매체에 기고해온 월드컵 이야기와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한 K리그 관전기가 담겨 있다. 축구의 역사에 대한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경기 전체를 읽어내는 통찰력, 지적인 분석이 돋보이는 인물비평, 그리고 현장감 넘치는 취재기 등 축구 입문자부터 축구에 대해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모든 이들이 즐길 수 있는 에세이들이다.규칙이나 룰이 아닌 역사와 철학을 통해 축구를 읽어내는 능력은 남다르며, 흥미롭다. 특히 그가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FC 바르셀로나의 역사는 카탈루냐의 비극과 겹쳐지면서 묘한 울림과 공감을 이끌어낸다. 일찌기 저자는 호나우지뉴 선수의 열렬한 팬임을 자처해왔다. “어느 선수를 왜 좋아하는지, 딱 부러지게 분석할 능력”이 없다고 그는 겸손하게 말하지만, 경기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선수 개개인의 역할을 정확히 간파해내는 글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내공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 수 있다.1부는 2011년 초 맨체스터-볼턴-바르셀로나-함부르크-보훔-로마를 잇는 여정을 통과하면서 저자가 만나고 보고 느낀 기록이다. 그는 유럽에서 박지성, 이청용, 손흥민, 백승호, 정대세 선수를 만나, 작가 특유의 섬세한 감성으로 선수들 개개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포착해 전해준다.유럽 축구팬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은 2011년 챔피언스리그 관전기다. 아스널 홈구장에서 직접 관전한 아스널과 FC 바르셀로나의 16강전, 스페인과 카탈루냐의 역사를 고스란히 반복하는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4강전, 맨유와 FC 바르셀로나의 세기의 결승전, 축구장 밖에서 벌어지는 감독들의 치열한 수사학 대결, 여성팬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외모와 언변, 축구 철학의 대결로 귀결되는 경기 내용까지, 축구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수많은 매력이 서술된 부분이다.저자가 K리그를 관전하기 시작한 것은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식기 전부터다. 그러나 경기장 접근이 어려운 점, 열악한 시설, 실망스러운 경기 내용 등 유럽 축구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분위기의 K리그 관전기는 당시 한국 축구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저자가 말하듯, “국민과 언론의 관심이 없으면, 한국 축구는 변할 수 없다.” 2011년 한국 축구계를 발칵 뒤집은 K리그 승부 조작 사건이 바로 그 무관심의 증거일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0-12

후배들에게 전하는 회한과 시행착오 기록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 리더스북 펴냄, 박경철 지음, 400쪽, 1만6천원시골의사 박경철씨(47)가 청년들에게 자아찾기, 세상을 읽고 소통하는 법을 조언하는 에세이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기혁명`(리더스북 펴냄)을 펴냈다.외과전문의. 시골의사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저자 박씨는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등 베스트셀러를 펴낸 투자 분석가이며, 라디오 진행자로도 활동했다.현재 안동신세계연합클리닉 원장이면서 10년 동안 MBN 등 방송에 출연하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이끌며 대중과 친숙하다. 또 (재)평화재단 평화교육원이 주최하는 청춘콘서트에서 안철수 서울대학교 대학원장과 대담 등을 통해 이 시대 청년들에게 비전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이 책은 6년 동안 안 교수와 전국의 중·고교, 대학가를 돌며 열었던 `청춘 콘서트`의 총정리판이랄 수 있다. 강연에 참여한 한 학생이 “나름대로 공부하고 있지만 좋은 대학과 직장을 얻을 수 없는 걸 안다”고 말한 사건 때문에 박씨는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이 책은 최근 출간 일주일 만에 종합 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다. 저자는 “내 회한을 담은 시행착오의 기록이다. 내 실패를 족보처럼 정리해 후배들에게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저자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청년들에게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머릿속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막연히 좋아 보이는 것, 기발하고 멋져 보이는 목표들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허울 좋은 스펙만을 강요하는 사회에 세뇌된 채, 진정한 자기 꿈과 목표가 무엇인지조차 생각할 겨를 없이 기성세대가 만든 시스템에 휘둘린 결과다.이 책은 저자가 삶의 곳곳에서 만난 다양한 이들을 통해 깨닫고 배운 것들, 방대한 독서를 통해 축적한 지혜로 가득하다. `세상은 스승의 바다`라고 한 저자의 말 그대로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개인적 차원의 체험에서 끝내지 않고 사회 시스템으로까지 확대시키며 구조 전체를 보는 날카로운 분석력과 깊이 있는 인문학적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박경철 특유의 단호한 문체 역시 독자를 매료시키는 요소다.박경철의 말처럼 인생은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늘 정직하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0-12

풀꽃에게서 배운 싱그러운 삶의 지혜

`효재처럼 풀꽃처럼` 문학동네 펴냄, 이효재 지음, 280쪽, 1만3천800원이번에 출간하는 2년 반 만의 신간 `효재처럼 풀꽃처럼`(문학동네 펴냄)은 패션디자이너 이효재가 풀꽃에게 배운 싱그러운 삶의 지혜를 담았다. 자세히 들여다봐야 `꽃이네` 싶은 작은 풀꽃, 꽃의 배경이 되는 넝쿨식물, 콩나물처럼 가느다란 1년짜리 아기 나무…… 식물들에서 길어 올린 담백하고 여운 깊은 삶의 지혜가 책 갈피 갈피 담겨 있다. 아름다운 사진과 더불어 간결한 문장에서 이효재의 싱그러운 내면의 향기가 느껴진다. “식물을 키우며 배웠다.시간의 힘을 믿을 것. 사랑으로 기다려줄 것.나는 그냥 기다려주는 것.나는 참새네 방앗간이고,동네 아낙들 쉬어가는 정자나무이고,새들이 둥지 트는 고목나무이고,열심히 일하다 막혔을 때 찾아와 퍼먹는 우물이고…….가르치려 하면 갑갑해져 어찌 계속 오고 싶을까.다만 조용히 들어주고 가만히 기다려주는 것뿐.”-`효재처럼 풀꽃처럼` 중에서어느 나이쯤인가, 우리는 작은 풀꽃, 순한 식물들에 마음이 끌린다. `효재처럼 풀꽃처럼`은 이효재가 꽃을 키우고 뜰을 가꾸며 깨닫게 된 지혜, 꽃으로 맺은 인연, 꽃처럼 향기롭게 살고 싶은 소망을 잔잔하게 말한다. `효재처럼 풀꽃처럼`을 읽다 보면 어느덧 우리 마음도 순해지면서 작은 풀꽃 하나에서 큰 격려를 받을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핸드폰 문자 하랴 카카오톡 하랴 다들 뭔가에 바쁘니 봄이 훌쩍 오는 줄 알지만 나같이 집안퉁수 아날로그는 안다. 봄이 슬로로 서서히 온다는 것을.촉을 올리고, 꽃망울을 맺고, 꽃을 피워내는 것은 결코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그 어떤 꽃도 쉽게 피어나는 꽃은 없음을, 봄눈 속에서부터 얼마나 치열하게 준비를 하는지 찬찬히 지켜보는 나는 알고 있다-`효재처럼 풀꽃처럼` 중에서/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0-12

조선시대 부부는 어떻게 살았을까

인문학은 사람을 다루는 학문이다. 하지만 그동안 인문학의 중심은 범상한 개인의 사생활보다는 국가나 민족 같은 거대담론에 있었다. 그 때문에 실생활과 인문학 사이에 상당한 괴리감이 생겨났다. 이성과 감성, 서로 함께할 수 없을 것 같은 인간사와 인문학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이종묵(50) 서울대 국어국문과 교수는 `부부`라는 주제를 선택한다.옛사람의 삶과 현대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옛사람의 삶과 글을 통해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 방향을 찾을 수 있다. 이종묵 교수는 이렇게 옛사람의 일을 현재의 나를 위한 것으로 삼는 것이 전통시대 학문에서 그토록 강조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이며, 이것이야말로 인문학의 본령이라고 이야기한다. `부부가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현상의 문제와 `부부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였는가?`라는 인식의 문제를 대주제로 놓고 부부라는 가장 지근한 문제를 다루는 `부부`(문학동네 펴냄)에는 다양한 부부가 등장한다.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지내는 부부도 있고, 오해와 갈등 때문에 반목하는 부부도 있다. 한편으로는 서로 존경하며 문우(文友)처럼 지내는 부부도 있다. 우리의 다양한 삶만큼이나 다양한 옛 부부의 모습. 그 모습을 통해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부부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부부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이종묵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조선시대 다양한 부부의 모습을 펼쳐보인다. 각종 문헌과 문학 작품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부부가 어떻게 살았고,부부의 문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치밀하게 살폈다.유교 이념이 지배하던 조선시대에 부부란, 일곱 살이 되면 자리도 함께하지 않고 서로 내외하며 지내다 얼굴 한 번 못 보고 중매에 의해 결혼해 평생 함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종묵 교수는 조선시대 남녀 간을 이야기할 때 드는 `남녀칠세부동석` `남녀상열` `남녀유별`과 같은 말이 당시 자유연애가 적지 않았음의 반증이라고 본다. 아무리 금기가 많은 시대라 해도 현실적으로 청춘 남녀의 사랑을 막기 힘들었다. 제도적으로는 용인되지 않았지만 `남녀상열`하여 `야합`해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혼인하는 `불고이취`는 성행했다. 마음 가는 대로 거처를 옮겨 아내를 다섯 명이나 둔 박의훤 같은 평민은 물론이거니와 과부와 사사로이 혼인했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된 이지 같은 양반도 있었다. 인습에 얽매인 혼인이 아니라 서로 좋아 함께 살면 그뿐이지 중매나 혼례식 같은 절차는 큰 의미가 없었다.오늘날에는 혼인을 개인의 소중한 권리로 생각해 결혼을 하건 하지 않건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고 여긴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혼인은 개인의 영역이 아니었다.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돌보는 입장에서 혼인은 국가의 장래와 연결된 대사(大事)였다. 그렇기에 정조는 노총각과 노처녀의 혼인을 서두르도록 하라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고, 혹 가난 때문에 혼기를 놓친 남녀가 있으면 이들에게 혼인 비용 등을 대주기도 했다. 이렇게 국가가 개인의 혼인을 책임진 것은 남녀의 혼인은 천지의 조화이며, 인간의 음양이 조화를 이뤄야 하늘의 음양 또한 조화를 이뤄 가뭄이나 흙비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뜨거운 사랑을 글로 남기지 않았다고 해서 부부간의 지근한 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법과 체통을 중시한 시대였지만 바깥나들이가 쉽지 않은 아내와 함께 소풍을 가기도 했고, 혼인한 지 60년이 되면 회혼례를 올려 기쁜 일, 슬픈 일을 함께 겪어온 세월을 돌아보기도 했다.평생을 함께 살아가다보면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문제였다. 불화의 원인은 다양했다. 이덕무는 `사소절`에서 자존심 싸움, 가난, 서로의 약점이나 잘못 등을 부부간의 갈등의 원인으로 들었다. 이외에도 처가와 친가, 남편의 외도 등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이유로 조선시대 부부는 다퉜다. 이런 부부간의 갈등에 대해 선비들은 그 책임을 스스로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아내와 금슬이 좋지 못했던 이황은 자신의 경험을 들어 제자에게 “그 가운데 성품이 악하여 교화하기 어려운 부인이 실로 스스로 소박을 당하게 된 죄를 제외한다면, 그 나머지는 모두 남편에게 책임이 달려 있다고 하겠소”라며 부부 불화의 책임이 기본적으로 남편에게 있다고 했다. 상대의 잘못을 비난하고 지적하기 전에 스스로의 행실부터 돌아보아 끊임없이 반성하고 원만한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학문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10-05

일상 모티프로 상상의 나래 펴다

`개그맨!` 문학과지성사 펴냄, 김성중 지음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지만, 졸업한 후에도 한동안 자신이 작가가 되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다 서른두 살이 된 그는 소설을 쓰기 위해 구립도서관을 찾아가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2년 후인 2008년, 그의 말을 빌리자면 “도서관 생활을 수기처럼 옮긴” 첫 소설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로 그는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데뷔 3년 만인 올해, 첫 소설집`개그맨`을 낸 김성중의 이야기이다.그가 작가가 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 문인은 그의 등단 소식을 전하며, “갖지는 못해도 잊지는 말자”는 영화`동사서독`의 대사를 인용했다. 김성중은 그 이야기처럼 살았고, 결국 등단할 줄 알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김성중은 “작가는 특수한 다른 종족이라고만 생각했다”면서 자신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이 인생에서 가장 신기한 일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그의 첫 소설집`개그맨`을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소설을 늘 생각하는, 천생 소설가인지 확인할 수 있다.`그림자` `개그맨` `게발선인장` `간` `순환선` 등 일상적인 단어로 된 작품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소설의 모티프를 삶의 도처에서 얻는 듯하다.앞서 언급했지만 등단작 `내 의자를 돌려주세요`도 “도서관 생활을 수기처럼 옮겼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어느 날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 의자의 이야기를 받아 적는 식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도서관의 의자`라는 사물을 서사에 대한 작가의 사유 안에 녹인 활발한 상상력으로 경쾌하게 풀어냈다.이 등단작 이후 김성중은 다채로운 이야기를 다양한 스타일로 표현하며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그의 자유로운 상상력은 이 세계에 대한 그의 사유의 도저함을 반영하며, 진정한 소통에의 욕망을 향한 그의 지속적인 관심사를 나타낸다./윤희정기자

2011-10-05

우리는 매일 선택을 한다 뇌과학의 베일을 벗기다

`선택의과학` 사이언스북스 펴냄, 리드 몬터규 지음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한다. `몇 시에 일어날까?` `무엇을 먹을까?` `버스를 탈까? 지하철을 탈까?`와 같은 단순한 선택은 물론, `어디에 취직할까?` `저 차를 사기 위해 매달 얼마씩 저축해야 할까?`와 같은 복잡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위해 잠시 또는 오랫동안 고민한다. `선택`은 수많은 가치가 연결된 결정체로, 기계, 식물, 동물, 인간 모두 선택을 한다. 기계는 프로그램된 대로 선택하고, 식물은 새의 신경계의 능력에 맞춰 자신을 숨기는 선택을 하고, 그 선택으로써 번식한다. 애완용 토끼는 언젠가 도주하기 위해 도주 경로를 익히는 선택을 한다. 인간은 잃을 것을 알면서도 도박이라는 선택을 하고, 테러라는 극단적인 선택도 한다.그런데 그 `선택`을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고, 심지어 예측할 수 있다. 의사 결정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리드 몬터규는 fMRI(기능성 자기 공명 영상 장치) 연구의 최전선에서 그 선택 과정을 보여 줘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됐다.(주)사이언스북스에서 출간한 리드 몬터규의`선택의 과학`은 우리 뇌에서 일어나는 선택 과정을 뇌과학으로 설명한 책이다. 저자인 리드 몬터규가 독자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이 책의 원제 `왜 이 책을 선택했는가?`이다.리드 몬터규는 계산과 신경 생물학을 기초로 인간의 사회적 인지, 의사 결정, 목표가 있는 선택에 관해 연구한다. 현재 버지니아 공과 대학 물리학과 교수이다. 고등 과학원, 소크 연구소, 미국 국립 과학 학술원에서 연구했으며, 사회적으로 상호 작용하는 뇌에 대한 동시 연구를 실현시킨 최초의 뇌 스캔 스프트웨어 개발 연구를 이끌었다. `네이처`, `사이언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뉴욕 타임스`, `월 스트리트 저널`, `포브스`,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미국 국립 학술원지` 등에서 그의 연구를 종종 기사함으로써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됐고, 신경 과학 전문지인 `뉴런`에 사람들이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를 왜 선택하는지에 대한 논문을 써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주목받았다.이 책은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밝혀낸 `선택의 보편적인 원리`에 대한 신경 과학적 실험 결과를 엿볼 수 있으며, 인지 과학의 오랜 숙제 중 하나인 `선택은 과연 계산 가능한 과정일까?`에 대해 흥미로운 통찰력을 듣게 된다.특히 합리성과 효율, 후회와 실망, 신뢰와 배신 등 최근 지성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인 행동 경제학의 여러 주제를 신경 과학의 최신 이론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또`펩시 챌린지`라고 불리는 뉴로마케팅(neuro-marketing) 사례와 `의식의 생물학적 토대` 같은 신경 철학적인 담론은 이 책에서 얻는 행복한 덤이다.`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따르면 인간은 하루에 150가지 이상 선택을 한다. `아침에 언제 일어날까?`에서 `점심은 뭘 먹을까?` `잠은 언제 잘까?`에 이르기까지 의식하지 못하는 일상의 순간에서 끊임없이 선택은 벌어진다. 이 책은 인간 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바로 이 `선택`이 뇌에서 어떻게 벌어지는가에 대해 `최전선`의 목소리를 전한다.이 책은 의사 결정의 과학에 관한 새로우면서도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시각을 통해 우리의 일상적 경험에 있어 중대한 사건들, 바로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에 관해 최신의 뇌과학이 밝혀낸 비밀들을 보여 준다. 인간의 행동과 마음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는 `지적 혁명`의 출발점을 이 책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09-29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 문학동네 펴냄, 성미정 지음, 104쪽, 1만원

199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이후 우리 시단에 또 하나의 새로움으로 자리해온 성미정(44), 그녀의 신작 시집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문학동네 펴냄)가 출간됐다. 올해로 데뷔 17년차인 그녀는 그사이 네 권의 시집을 펴낸 것이니 근 4년 만에 한 권씩은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아온 참이다. 그리 과할 것도 그리 부족할 것도 없다 싶다. 이번 새 시집에 담긴 시가 52편이니 어림잡아 지금껏 이백 편에 가까운 시를 썼겠구나, 싶은 계산이 나오는데 따지고 보면 한 달에 한 편쯤은 된다. 한 달에 한 번쯤은 “머리 속 언어의 알에 뭔가 수상한 낌새가 감지되”었을 터, “이게 그냥 곤계란인지 아님 뭔가 톡 튀어나올 건지 밤새도록 지켜”봤을 터, 그러다가 “여보세요 그 안에 누가 있나요 노란 솜털의 비약비약 울기 좋아하는 시인 혹시 거기 있나요” 두드려보기도 했었을 터(`나는 비약을 사랑하는 시인의 알에 불과할 뿐`), 품고 있는 알에 실금조차 안 갔다 해도 어쩌랴, 사실 이렇게 관심으로 두드리고 듣고 느끼려하는 과정이 죄다 시인걸. 그렇다. 어찌 보면 이 시집은 올해로 `마흔 다섯`이 아니라 `마음 다섯`이 된 시인 성미정의 여전한 성장일기이며 관찰일기라 할 수 있겠다. 나이는 먹는 대로 자라는 게 아니지만 마음은 먹는 대로 자라는 거니까.성미정이 펴낸 시집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시집마다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이들을 모아보니 오롯이 한 여자의 역사다. 첫 시집`대머리와의 사랑`에서 소녀였고 처녀였던 그녀가 두번째 시집`사랑은 야채 같은 것`에서 연애와 결혼을 경험하며 살림하는 아내가 되더니 세번째 시집 `상상 한 상자`에서 `재경`이라는 아들의 엄마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네번째 시집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에서 그녀는 포지션을 어떻게 취했을까. 물론 아내이며 엄마의 직함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은 앞선 시편들 때와 같으나 추가된 위치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이가 들어 쓴 김치를 담글 수밖에 없는 예순일곱의 엄마, 이명클리닉에 다니는 일흔넷의 아빠, 이 두 분의 `둘째 딸년`이란 자리다.엄마가 담근 새콤한 김장 김치 김장독에서 막 꺼내 살짝 살얼음이 낀 김치 한 보시기에 따뜻한 밥만 있으면 겨우내 반찬 걱정 없던 기억들은 친정집 뒤란의 장독대와 함께 사라져버렸는데 엄마는 지치지도 않고 매년 김치를 담고 있다 육십칠 년 성상(星霜) 엄마의 인생이 쓰디써 엄마 손에 남은 건 쓴맛뿐인 듯한데 그래서 김치 담그는 날이면 행여 어린 새끼들 눈 매울까봐 애태우며 김치 속 버무리느라 더 새빨개지던 그 손으로 거둔 딸년 둘도 외면해버린 김치를 엄마는 매년 쓰고 있다-`엄마의 김치가 오래도 썼다` 중에서아이가 제법 자라고 보니 그제야 늙은 부모가 눈에 밟히더라는 우리 모두의 때늦은 후회를 시인도 아마 요즈음 겪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시인의 재주는 슬픔을 눈물 대신 일종의 농담이나 펀(fun)으로 승화시키는 데 있다. 꽤나 심각한 상황에서도 시인은 주위를 환기시키고 짐짓 딴청을 부리듯 농을 칠 줄 안다. 뭔가를 툭, 하니 걸고넘어지는 것이다. 더 쓸쓸해지지 않도록, 더 절망하지 않도록.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시인인 남편과 함께 장난감 가게를 운영하며 사는 시인에게 동화는 상상 그 너머의 무지갯빛 신세계라기보다 생활 그 자체다./윤희정기자hjyun@kbmaeil.com

2011-09-29

`어른스런 입맞춤` 문학동네 펴냄, 정한아 지음, 148쪽, 1만원

여기,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호랑이에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호랑이가 떡으로만 살 수 있는가, 먹어서 배부른 것이 사랑인가”(`회의적인 육식동물의 연애`) 하고 대답하는 시인이 있다. 그녀에게 `사랑`은 `지옥`이며 “믿음은 열어도 나갈 수 없는 바깥”(`이웃 사랑의 위생 관`) 이다. 허나 이 `지옥`에는 “모든 가련한 것들”을 애도하는 “때로 한 찰나가 영원을 잡아먹는 그런 사랑” (`어떤 기도`) 을 하는 그녀가 있다. 2006년`현대시`로 등단한 시인 정한아(37)다. 그녀가 데뷔 6년 만에 첫 시집 `어른스런 입맞춤`(문학동네 펴냄)을 들고 왔다. 첫 시집의 뜨거움이라 하면, 날것, 죽기 전에 아가미를 펄떡이는 물고기의 그것일 텐데, 정한아의 첫은 좀 남다른 데가 있다. 덜 익었다거나 여물었다는 비유보다 어쩌면 오래 익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더 맞겠다. 그녀의 첫을 열매 맺기를 거부하는 시들이라 일컫음은 어떨까. 중요한 것은 시간을 거스르는 거부가 아닌, 이미 그것을 넘어섰다는 데 있다. `거대한 감옥`이거나 `타인의 침대`인 이 세계에서 정한아가 살아가는 방법은 “하필, 사랑”이다. 죄짓지 않고 사는 이 없지만 그 죄 다음이 하필 사랑이라니. 타인에게 침대는 휴식의 공간이고 시간이다. 허나 그것은 곧 나의 불편한 세계로 귀결된다. 시인은 “춥고 캄캄하고 척척한 곳”에서 “못생긴 심장의 나지막한 허밍”을 들으며 “마주치자마자 내 골수에 자기의 촉수를 담그는 얼굴들과” “차일수록 자욱해지는 지랄 같은 외로움을 몰고”(`이상한 가투(街鬪)`) 가며 살아간다. 삶은 `영원히 붙박인 폭우 속 캠프의 밤`(`눈을 가리운 노래`)이며 `진흙투성이`의 `끝나지 않는 축제`(`눈을 가리운 노래`) 다.“이곳에 바닥도 천장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있어야 한다고 믿지도 않게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진공상태에서도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고, 아틀란티스인처럼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고, 언제나 그래왔다고, 우주인이 화성에 가도 출구 따위는 없다고, 그러니까 우리가 완전히 체념했을 때, 썩은 동아줄, 잭의 시퍼런 콩나무, 팔다리 없는 무지개 너머 에도 바깥은 없고 발바닥은 아등바등 두 팔은 지푸라기처럼 꺾인 너의 목을 끌어안고 어푸 어푸 (사랑해 사랑해) ((살려줘 살려줘))-`타인의 침대`에서어느 날 두 사람이 만나한 사람을 낳고 모두 사라지는말할 수 없이 폭력적인 생리어느 날 두 사람이 만나한 사람을 죽이고 손을 씻는말할 수 없이 공공연한 심리이 거리의 이정표는 이제아는 것들만 알려준다 이미와 있는 것들의 끔찍한 소용돌이-`죽은 예언자의 거리`이 부정의 세계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정한아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앵무새`는 그 질문을 들고 온다. 그녀에게 `앵무새`는 고독의 증거 그 자체다. `앵무새`는 자신의 언어가 없다.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다. 정한아에게 타자, 타인은 `앵무새로 하여금 대신 말하게 하`는 존재들이다. 내게 이름을 지어준 아버지도 `앵무새`와 떠나버렸고 세계는 앵무새의 정체성과 다름없다. 고독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앵무새`의 목소리로 다시 한번 들려오고 그것은 한 존재의 고독으로 다시 그녀 자신에게 돌아온다. 고독은 그녀로 하여금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휘발되는 언어는 앵무새로 하여금 하나의 세계로 다시 들려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앵무새는 시인의 `거울` 이자 `자화상`이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09-29

한편의 詩 처럼 살게 하소서 암과 싸우며 희망을 노래

`작은기도` 열림원 펴냄, 이해인 지음, 200쪽, 9천500원 시인은 작고 사소한 것에 사랑의 눈길을 보내는 존재이다. 시인은 작고 보잘것없는 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을 숙명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동시대의 시인 중 작고 사소한 것을 가장 일관되게 눈여겨보고 그것의 소중한 소여(所與)를 섬세한 언어로 헤아린 대표적인 시인은 누구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해인 수녀를 가장 먼저 꼽을 것이다.이해인 수녀는 `작은 위로`와 `작은 기쁨`에 이어 이번에 다시 작은 것을 애정 어린 눈으로 보살핀 새 시집 `작은 기도`(열림원 펴냄)를 펴냈다. 새 시집에서 이 수녀는 크고 빠른 것에 붙들린 나머지, 자신의 삶의 속도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작은 것의 고르고 느린 숨소리를 들려준다. 그를 통해 언제나 새롭게 순환하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삶의 본래 자리를 일깨운다.어떤 시든 그것이 지극하고 간곡하게 갈망하는 희망을 향하고 있을 때 그것은 기도가 된다. 다시 말하면 시는 노래가 된 기도의 언어이고, 기도는 발원으로 뻗어나간 시다. 이해인 수녀의 새 시집 `작은 기도`에는 시와 기도가 갖는 순정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찬미, 삶에 대한 긍정을 소박하지만 호소력 짙은 언어로 노래한다. 1976년 발표한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 이후 사랑과 따뜻한 위로의 언어로 많은 이에게 감동을 선사해왔던 이해인 수녀의 이번 시집은 올해 이해인 수녀가 수도 생활 중인 성베네딕도 수녀회의 설립 8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또한 오랜 수도생활 동안 여일하게 작고 사소한 것들에 애정과 관심을 쏟았던 이 수녀의 진심 어린 사랑의 언어가 담겨진, 세상의 모든 것을 품에 그러안고 희망을 노래하는 한 수도자의 기도의 시집이다. 그동안 틈틈이 써두었던 50여 편의 미발표작에 1999년 초판을 냈던 시집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 중 몇 편을 덧붙어 출간한`작은 기도`는 시인으로서, 수도자로서 신을 향한 기도가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길 바라는 이해인 수녀의 문학의 뿌리를 총체적으로 포괄한 시집으로 볼 수 있다. 암 투병과 사랑하는 지인들의 잇단 죽음을 목도하는 아픔의 시간을 견뎌내왔던 이 수녀는 이번 시집에서 지난날을 겸허히 되돌아보고 현재의 삶을 긍정하는 시인의 깊은 깨달음을 담아냈다.“신을 위한 나의 기도가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 당신 안에 숨 쉬는 나의 매일이 읽을수록 맛 드는 한 편의 시가 되게 하소서. 때로는 아까운 말도 용기 있게 버려서 더욱 빛나는 한 편의 시처럼 살게 하소서./시는 저에게 꿈을 꾸게 만드는 하나의 놀이이고 노래였습니다./전쟁의 폐허 속에 다들 우울하고 가난했던 초등학교 시절 언니 오빠가 낭송하는 김소월·한용운·윤동주의 시들은 저를 모국어의 아름다움에 눈 뜨게 해주었습니다.”―`내 문학의 뿌리`(이해인) 중에서`작은 기도`에는 총 88편의 시가 수록돼 있는데, 이 “88”이라는 숫자는 수도원에 입회 당시 주어지는 이해인 수녀의 고유 번호(이를 수도원에서는 편의상 “빨래번호”라고 부른다)인 88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는 기도의 시를 쓰게 해준 수도공동체에 이 시집을 헌정하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을 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이해인 수녀는 시를 쓸 때 한 수도자가 순례의 길 위에서 보고 겪고 느낀 것들을 표현한 상징 언어의 기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항상 이웃에게 작은 위로를 전하는 아름다운 러브레터가 되기를 바라고, 자신의 시를 읽고 마음이 정화됐다거나 아름답고 선하게 살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됐다는 고백을 들으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고 한다. 자신의 시가 날개를 달고 치유와 위로의 천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선한 일을 하고, 맑은 삶을 살겠다는 생각으로 수녀가 되었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를 쓰면서 시 안에 자신의 변함없는 그 뜻을 알알이 새겨 넣은 시인의 마음을 `작인 기도`속 신작시들에서 더욱 절절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사연을 보내오는 수많은 이들에게 그들이 사랑과 희망을 잃지 않도록 일일이 답장을 보낸다는 이해인 수녀의 시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이자,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2011-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