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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가을 전시회 감상법… 푼크툼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하늘이 높고 푸른 가을철, 사진작품이나 옛 유물, 미술작품 전시회를 찾을 기회가 많아졌다.이런 전시회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법으로 프랑스의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가 ‘찌름’을 뜻하는 라틴어 ‘푼크티오넴(punctionem)’에서 따온 ‘푼크툼(punctum)’을 추천한다.푼크툼은 사진작품이나 옛 유물, 미술작품 등을 감상할 때 관객이 작가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똑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일반적으로 추정·해석할 수 있는 의미나 작가가 의도한 바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지극히 개인적으로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예를 들어 낙동강 서부 지역에서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손잡이가 달린 머그잔을 감상한다고 하자. 원래 있던 자리를 벗어나 세상을 돌다 온 유물들은 우리에게 들려줄 정보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이처럼 오랜 세월이 지난 옛 유물들과 소통할 유일한 방법이 바로 푼크툼이다. 객관적인 정보나 해석에 기대지 않고 자신만의 기억에 비추어 예술 작품을 느끼는 것이다.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빙글빙글 웃는 동물 장식을 보고 오래전 세상을 떠난 애견을 떠올리며 뭉클해하는 식이다.푼크툼으로 어떤 기억과 감정을 떠올릴지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감상하는 작품이 눈에서 곧장 마음속으로 뛰어드는 경험을 하고 나면 잘 모르는 것들도 더욱 더 잘 바라볼 수 있게된다. 푼크툼은 매우 직관적이다. 그래서일까.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다르리라”는 유홍준 교수의 말을 더욱 실감하게 된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9-19

詩와 음악의 가을 마중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가을을 시샘하는지 또 다른 태풍이 지나갔다. 비록 한반도 아래쪽으로 비껴가긴 했지만, 2주 전에 휩쓸린 태풍피해가 워낙 커서 바짝 긴장과 조바심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태풍으로 인한 풍수해의 상흔이 곳곳에 아직 생채기처럼 남아 있는데, 가공할 태풍이 연이어 위협하게 된다면 설상가상(雪上加霜)의 피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에 정부에서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태풍 대비에 적극적인 행정조치를 시행하는 등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선제적이고도 실효성 있는 현장 대응활동을 지원하며 만전을 기했다.계절의 바뀜이 예사롭지 않음을 익히 알고 있지만, 수십년 전부터는 복병 같은 태풍이 가을날의 길목에서 산천을 할퀴고 들판을 쓸고 가니 천지간에 무엇 하나 순탄치 않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만큼 지구의 환경이 변하고 세상이 달라져서, 에너지의 순환이 점차 거칠어지고 만물의 움직임이 급작스레 코로나19같은 돌연함으로 치닫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리 난마 같은 기상이변도 계절의 수레바퀴 한 켠에서 무모한 듯 솟아오르는 상사화의 꽃대를 누르지는 못하고, 구절초와 쑥부쟁이의 흰눈 같은 하늘거림을 멈추게 할 수는 없으리라.마치 가을을 마중이라도 하듯이 일제히 긴 목을 뽑아 붉은 꽃을 피운 상사화가 초록에 어우러진 한켠에서 지난 주말, 시와 음악의 향연이 꽃무릇의 운치 마냥 멋스럽게 피어나고 들꽃 같은 문학 얘기가 도란도란 엮어졌다. 온갖 나무와 화초들이 자연스러운 모양새로 자리잡아 가지런하고, 새들의 지저귐 따라 바람 결에 수런대는 잎새들도 함께하며 반겨맞는 그곳은 포항시 북구 청하면에 소재한 기청산(箕靑山)식물원이다. 이야기가 있는 박물관식 식물원에서 경북문화재단이 주최하고 공감놀이터 ‘어링블’에서 주관한 ‘이정록 시인 초청강연·시낭송·노래가 된 시’를 테마로 시와 음악의 콜라보를 선보인 ‘붉은 상사화 음악회’가 싱그러움 속에 이채롭게 열린 것이다.시낭송과 수필 낭독이 차분한 음색으로 흐르고 성악과 악기 연주가 우렁차면서도 매끄럽게 울려 퍼지는가 하면, 어링블 꿈다락 어린이들의 이정록 동시집 ‘지구의 맛’ 동시 낭송은 맑은 목청과 고운 표정으로 자연사랑과 환경보전을 환기시켜서 의미가 있었다. 또한 선한 눈길과 맑고 밝은 언어로 많은 독자들과 호흡해온 이정록 시인의 구수한 입담과 해학적인 표현으로 ‘쑥은 쑥스럽게, 바람은 바람직하게’라고 말하는, 인문학적인 감성으로 짧으면서도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며 더욱 아름다워지고 바르게 되는 계기로 시를 쓰게 된다는 세상을 보는 너른 시선이 인상적으로 여겨졌다.상사화 피는 때에 맞춰 소소하고 수수하게 열린 숲속 음악회가 조금이나마 태풍의 상처와 코로나의 상심을 보듬고 다독이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현실의 삶이 복잡하고 힘에 부칠수록 자연과 예술을 찾아 교감하며 마음의 안정과 위무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시와 음악으로 가을 마중하듯이, 공감과 치유의 마음 마중으로 정갈한 가을을 열어가자.

2022-09-19

변화는 장수기업을 만든다

김종찬포스코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미국 캘리포니아주에는 남안의 샌프란시스코와 북안의 마린 반도를 연결하는 골든만에 설치된 금문교가 있다. 이 다리는 1937년에 완공된 최초의 현수교라는 것 외에도 그 당시 기술로는 어렵다고 했던 2.7km의 길이를 자랑하며 수면으로부터 높이가 67m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제원을 떠나 이 다리는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어떤 다리들과 비교해도 성능이나 환경과의 조화인 예술성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진단 장비들이 첨단화 되어도 변하지 않았던 것은 정해진 규정을 반드시 지키는 꾸준함이 축적된 문화에 있다. 일상점검을 통해 작은 결함이 심각한 문제로 성장하기 전에 발견하여 조치하고 결과가 표준화되어 매뉴얼에 업데이트되니 성능이 유지되는 것이다. 일상점검은 이상이 자주 발견되는 것도 아니어서 허투루 한두 번 해 보고 ‘적당히 해도 되겠지’라고 생각하여 지속되기가 어렵다. 문화화되기 위해서는 ‘단순하고 지루한 일’이 ‘중요하고 즐거운 일’로 바뀌는 축적의 과정을 겪어야 하며 그 과정을 겪지 않았다면 결코 문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금문교를 보면서 기업 역시 100년을 가기 위해서는 처음의 설계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인 유지관리가 중요하단 생각을 하게 된다. 녹슬거나 이음새의 틈이 기준 이상으로 열화 되기 전에 보완해야 하듯 기업도 경쟁력을 잃기 전에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특히 장치산업은 호황기 때는 규모의 경제를 통해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불황기 때는 매출액은 줄어드는데 고정비 지출은 줄지 않아 경영 성과가 악화되기 때문에 지속적인 유지관리를 통해 기능과 성능의 유지가 매우 중요한 산업이다. 대표적 장치산업인 화학산업도 중국과 중동 국가들의 대규모 설비투자로 인한 공급과잉으로 마진이 한계 상황이지만 바스프(BASF)란 기업은 글로벌 강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바스프는 1865년 독일에서 창립되어 전 세계 11만여 명의 직원이 1만여 개의 제품을 생산하는 거대 화학기업이다. 바스프의 특징 중 하나는 공정 간 프로세스 연결을 의미하는 페어분트인데 이는 자원순환 친환경 공급망 체제라고 얘기할 수 있다. 페어분트를 통해 한 공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과 열을 다른 공정의 원료로 투입하는 생산체계를 만들었다. 공정은 환경으로부터 부담스럽지만 제품은 최고의 재활용성을 가지는 것이 강점이다. 제철소에서도 철광석을 녹일 때 많은 열량이 필요하지만 설비 관점에서는 발생된 열을 식히는데 물을 사용하고 그 물은 가정의 난방으로 사용하니 그것도 페어분트라고 할 수 있겠다. 페어분트는 바스프 내부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고객사에도 확장하여 바스프와 고객사가 밀접하게 통합된 형태로 진화하고 있다. 이렇듯 바스프의 성공 요인은 100년이 넘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안주하지 않고 현재 노력에 충실하여 고객과 함께 가치를 높이는 노력과 미래 변화를 예측하여 끊임없이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2022-09-19

국민은 진실 규명을 원한다

김진국 고문 지난 대선은 비호감 선거였다. 여야 후보를 막론하고 좋아하는 사람보다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이 0.73% 이겼다. 윤석열 후보를 찍은 사람은 민주당, 혹은 이재명 후보가 싫고, 이재명 후보를 찍은 사람은 국민의힘, 혹은 윤석열 후보가 싫었다는 말이다.왜 민주당 정부를 거부했나. 당시 최대 유행어가 ‘내로남불’이었다. 임기 절반을 질질 끈 조국 사태는 정의를 상대적 개념으로 추락시켰다. 극심한 진영 갈등으로 진실보다 누구 편이냐가 유무죄의 판단 기준이 됐다. 정치인에게는 공정보다 진영과 표가 중요했다.윤석열 대통령은 평생 검사 경험밖에 없다. 표를 던진 사람도 그에게 큰 기대를 한 게 아니다. 미워하는 문 정부의 대항마여서 선택한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공정과 정의의 실현’을 기대했다. 그 일은 검사가 적임자라 생각했다. 그가 잘하리라 기대한 것은 그것뿐이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를 싫어한 사람도 많다. 정의를 실현한다며 보복의 칼을 빼 들어 정치는 사라지고, 국정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임기 초에 벌써 그런 국면을 마주했다.윤 대통령은 자신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의 기대와 협치 사이에서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경제도 안보도 매우 어려운 시기다. 국회의 절대다수 의석을 민주당이 차지하고 있다. 야당의 협조 없이는 고난의 행군을 할 수밖에 없다.최근 드라마 ‘수리남’이 인기다. 드라마에서는 대통령이 뇌물을 받고 군대까지 동원해 마약상을 돕는다. 수리남 정부가 국가 이미지를 훼손했다며 발끈했다. 90년대 수리남에서 실제 벌어진 일을 모티브로 삼은 드라마다. 하지만 이제 마약을 구하기 어려운 나라로 달라졌다는 것이다.범죄는 용납할 수는 없다.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나라도 아니다. 과거 한 범죄자가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無錢有罪)’를 외쳐 국민적 공감을 얻었다. 범죄는 밉지만 그런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하나다. 마찬가지로 ‘유권무죄 무권유죄(有權無罪無權有罪)’도 안 된다.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범죄를 저질러도 건드리지 못한다면 나라가 아니다.그런데도 말이 많다. ‘검수완박’이느니 ‘감사완박’이느니 하는 말이 나온 것도 법 집행의 공정성 때문이다. 한쪽은 공정하지 않은 검사의 수사권을 없애자고 하고, 다른 쪽은 그러면 범죄를 방치하자는 거냐고 반박한다. 한쪽이 그럼 그 권한을 경찰에 넘겨주자고 하자, 다른 쪽은 경찰은 공정하냐고 반문한다.권위주의 정부는 사정 기관을 정치에 이용했다. 야당 의원의 약점을 이용해 협박하고, 협조하게 했다. 선거 운동 중에 구속해 손발을 묶기도 했다. 공권력으로 국민의 선택을 방해하는 정치를 혐오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선 직전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자금 수사를 중단하도록 지시했다.추석 직전 넥스트리서치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수사를 ‘법과 원칙에 따른 수사’라는 응답이 51.4%였다. ‘정치 보복 수사’라는 답변은 41.2%였다. 김건희 여사에 대한 특검법도 64.5%가 찬성했다.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불법이 있으면 차별 없이 수사하라는 게 국민의 다수 의견이다.정의 실현과 정치 보복은 어떻게 다른가. 수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진실만 중요하다. 무리한 몰아가기는 역풍을 맞는다. 요란을 떨고, 결과가 허망해도(泰山鳴動鼠一匹) 비난받는다. 그런 일로 국정과 협치를 포기할 수는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때의 ‘논두렁 시계’처럼 망신 주기나 시간 끌기는 정치 보복 의혹을 키우게 된다.특히 정치 수사가 어려운 건 ‘내로남불’이다.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친척들을 특별 감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처삼촌부터 구속했다. 그런데도 동생 전경환 문제에 걸렸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도 아들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남을 치려면 내 주변부터 단속해야 한다. 대통령과 영부인이란 자리보다 더 영예로운 게 있나. 박사가 뭔가. 논란이 된다면 먼저 던지는 게 방법이다. 잘못이 있다면 인정하고 털어버려라. 진실만큼 튼튼한 방패는 없다./본사 고문김진국△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중앙SUNDAY 고문,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2-09-18

구미의 지속가능한 성장, 문화에서 찾아야

김장호 구미시장 유서 깊은 건축물과 걸음을 옮길수록 느껴지는 이국적인 풍경들. 수백, 수천 년 켜켜이 쌓인 도시의 역사와 문화는 여행자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유명 박물관과 미술관에 들르지 않더라도 거리 곳곳에 예술이 흐르고 문화가 펼쳐지는 도시, 삶의 여유와 낭만이 삶의 단면인 도시야말로 현대인이 지향하는 도시의 모습이다.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이나 지중해의 항구도시 프랑스 마르세유 같은 도시들 말이다.영국의 전설적인 록 그룹 비틀스의 고향 리버풀은 한때, 가난과 실업을 대표하는 쇠락한 도시였다. 침체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리버풀은 도시 곳곳에 비틀스의 숨결을 심었고, 음악, 미술, 스포츠 등의 다양한 문화 인프라로 도시를 가난에서 구했다.마르세유 역시 마찬가지다. 높은 실업률과 많은 이주 노동자들로 슬럼화되었던 마르세유는 흉물로 전락한 담배 공장을 예술가들에게 임대해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냈다.문화를 통해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이는 관광산업의 성장과 지역 경제 활성화로 이어졌다.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이러한 문화 활성화가 우리 구미에 필요하다. 지난 50년 경제발전의 중추도시로 산업 발전과 고도성장을 이끌어온 구미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있어 매우 특별한 도시다. 산업현장에서, 생업 일선에서, 우리 부모 세대가 흘린 땀과 눈물 덕분에 우리는 가난과 배고픔을 이겨내고 공부도 할 수 있었고, 3만 불 시대도 열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성장에는 누가 뭐라고 해도 구미의 노고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그런 구미가 지금 정체냐 지속성장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 도약과 후퇴를 결정하는 중대한 갈림길이다. 글로벌 경제위기와 산업 질서의 재편은 구미에 더 큰 변화와 혁신을 요구하고 있으며, 더 큰 질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문화예술 활성화가 반드시 필요하다.필자는 민선 8기를 출범하며 낭만과 품격이 있는 도시로 거듭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제대로 내세울 축제 하나 없는 구미에 대표 명품축제를 육성하고, 미술관, 미디어아트 전시관 등의 문화 인프라도 유치해야 한다. 침체된 원도심 구미역 인근 1, 2번 도로와 인동 시가지도 활성화시켜야 한다. 문화·예술을 곁들여야 할 수 있는 일들이다.마침 구미는 내년 10월 법정문화도시 지정을 목표로 시민들과 함께 문화도시 구미의 청사진을 그리는 중이다. 핵심 키워드는 일과 삶이다. 구미가 가진 산업과 노동, 그 의미와 가치를 통해일과 삶이 조화를 이루는 문화도시로 나아가는 데 방점을 두려 한다. 서면평가와 현장평가를 통과하고 최종 예비도시 선정을 앞두고 있는 만큼, 문화가 시민들의 일과 삶 속에 녹아내릴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일 방침이다.지금까지 구미문화는 척박했다. 경제와 산업에 치중하느라 문화에 소홀했던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산업과 문화는 별개일까. 트위터와 페이스북, 구글 등의 첨단 테크 기업들이 몰려있는 실리콘밸리를 보자.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샌프란시스코는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이 상시로 열리는 창의적인 도시로 꼽힌다. 실리콘밸리의 혁신이 가능했던 건 그러한 다양성과 창의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는 다양한 인간의 행동 스펙트럼이 어떻게 조합되는가에 따라 문화가 달라진다고 말했다. 즉,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도시의 문화와 정체성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결국 사람이다.이제 구미는 기업도시, 공단도시에 더해 풍부한 문화적 색채를 느낄 수 있는 문화도시, 낭만이 흐르는 예술도시로 나아가려 한다. 영국의 공업도시 리버풀이나 프랑스 마르세유처럼 구미의 문화자산으로 구미의 정체성을 살리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문화도시. 그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 싶다.

2022-09-18

그리스 최고의 영웅 - 헤라클레스자리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위대한 영웅을 꼽으라면 단연 마초적인 캐릭터 헤라클레스다. 헤라클레스는 신들의 제왕 제우스와 페르세우스 손녀인 알크메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알크메나는 티린스의 왕 암피트리온의 왕비, 즉 유부녀였지만 바람둥이 제우스는 개의치 않았다. 제우스는 남편의 모습으로 변신해 그녀에게 다가갔던 것이다.이를 안 헤라는 화가 머리까지 치솟았다. 헤라는 어린 헤라클레스에게 뱀 두 마리를 보내 죽이려고 했지만, 헤라클레스가 목을 눌러 죽여 버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헤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훗날 헤라는 헤라클레스에게 주문을 걸어 아내와 아들을 죽이게끔 만든다. 죄를 뉘우친 헤라클레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티린스의 왕 에우리스테우스를 12년을 섬기며 그가 명하는 12가지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신탁을 듣게 된다. 해라가 신탁을 통해 헤라클레스에게 고난의 모험을 겪게 계략을 짰던 것이다.처음 ‘사자자리’ 신화 황금사자를 죽이는 일부터, 괴물 뱀 히드라를 퇴치하는 일, 케리네이아 산에 사는 사슴을 비롯해 에리만토스 산의 멧돼지, 크레타의 황소, 괴물 게리온이 가지고 있던 소, 사람 잡아먹는 4마리의 말,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마지막 임무)를 산 채로 잡는 일이었다. 이 외에도 3천 마리 황소가 사는데도 30년간 청소하지 않은 아우게이아스 왕의 가축우리를 정리하는 일, 사나운 새를 퇴치하는 일, 아마존 여왕 히폴리테 띠를 탈취하는 일, 요정妖精 헤스페리데스가 지키는 동산의 황금 사과를 따오는 일 등 모두 12가지의 힘든 업을 모두 마쳐야 했다.이 과정에서 지하세계 하데스에게 사로잡혀 있던 테세우스를 구해주었으며, 인간에게 불을 전해주었다는 죄로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며 바위산에 묶여 있던 프로메테우스를 구출해 주는 등 그의 영웅담은 책 한 권으로도 부족하다.마침내 고난의 12가지 임무를 모두 마친 헤라클레스는 오이칼리아 공주 이올레의 사랑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왕이 약속을 저버리자 배신감에 격분한 나머지 오이칼리아 왕자이자 친구인 이피토스를 죽이고 만다. 헤라클레스가 분을 삭이지 못하게끔 꾸민 집념의 헤라 작품이었다. 이에 대한 벌로 헤라클레스는 옴팔로스 나라 옴팔레 여왕의 몸종으로 들어가게 된다. 헤라클레스는 영웅의 모습 대신 여장을 하고 3년을 지낸 뒤에야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훗날 자신의 두 번째 아내 대이아네아라를 유혹한 켄타우스로 족 네소스를 죽이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네소스가 죽기 전 헤라클레스가 변심하면 히드라의 독이 스민 자기 피를 옷에 발라서 입히라는 거짓말을 아내가 곧이곧대로 믿는 바람에 죽음을 맞는다.하늘의 신들은 지상의 영웅이 죽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았으나 제우스만은 그러지 않았다. 비록 인간의 육신은 불에 타버렸을지라도 자기 아들은 영원히 죽지 않음을 알았다. 신들은 헤라클레스를 하늘로 올려 헤라와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고 헤라의 딸이자 청춘의 여신인 헤베와 부부의 연을 맺어 준다.헤라클레스자리는 여름철 북쪽 하늘의 별자리로, 직녀성과 지난번에 다뤘던 왕관자리 중간에서 3등성 이하의 어두운 별들과 더불어 H자를 이루고 있다. 독자들은 직녀별을 찾아 서쪽에 무릎을 꿇고 거꾸로 서 있는 헤라클레스를 그려보시기를 바란다. 중심 부분에 H자로 펼쳐진 별들이 헤라클레스의 몸체인데, 특별히 밝은 별은 없으나 전체적으로 뚜렷한 윤곽을 가지고 있어서 쉬이 찾을 수 있다. /박필우 스토리텔러

2022-09-18

과거를 묻지 마세요

김규종 경북대 교수 영화배우 겸 가수로 이름을 날린 나애심(1930∼2017)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가 1958년에 나온 ‘과거를 묻지 마세요’다.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 이제 꽃이 피어나고 희망이 환하게 빛나는데 지나간 시절을 새삼 물을 이유가 있느냐는 노래다. 지금과 여기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천만번 지당한 얘기다.하지만 세상은 온갖 종류의 사람이 모여 사는 공간이다. 그나 그 여자의 과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람도 적잖다. 그들에게도 논리가 있다. 과거의 누적이 현재에 응축돼 있고, 과거는 미래에도 깊고 너른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란 얘기다.우리는 이런 주장을 트라우마 이론 혹은 인과론 또는 결정론이라 부른다. 20세기 심리학의 대가 프로이트(1856∼1939)의 이론이 여기에 바탕을 두고 득세해왔다.과거에 경험한 마음의 상처가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미래에도 지속될 것이라는 주장이 트라우마 이론의 토대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현재의 불행이 생겨나고, 그것은 과거를 바꾸지 못하는 한 미래까지도 계속되리라는 논리다. 많은 사람이 이런 논리로 현재의 불행을 과거로 돌리는 것에 동의하면서 임상을 진행하고 있다.문제는 과거에 마음의 상처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는 것이다.누구나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경험하면서 성장하기 마련이다. 괴로움과 아픔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성장과 성숙을 이뤄나간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말처럼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 있기에 우리는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행불행을 결정한다는 트라우마 이론은 지독할 정도로 운명론적이고 허무주의적이며 염세적이다. 이런 주장에 반기를 든 인물이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다.인간은 감정이나 과거에 지배받지 않으며,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그것은 미래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 아들러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인생은 찰나의 연속이며, 과거도 미래도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우리의 지금과 여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게다. 나아가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지금과 여기에서 생각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이 아들러의 담대한 주장이다.아들러의 주장에는 많은 게 함축돼 있다. 과거에 의지하거나 과거를 핑계 삼아 현재의 엄살을 합리화하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결론이다. 현재의 행과 불행의 원인을 오직 과거에 돌리는 인간에게는 아무런 선택지도 없다. 과거의 노예이자 수인(囚人)으로 평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묶인 인간의 미래 역시 과거에 달려있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것이 두 번째 결론이다. 아들러는 과거와 미래의 무관함을 강력하게 천명하는 용기의 심리학 이론가다.세 번째, 아들러는 지금과 여기를 살아가야 한다고 천명(闡明)한다. 그러므로 지금과 여기를 용기 있게 살려면 과거나 미래 따위는 던져버리라는 그의 주장에 상응하는 노래가 ‘과거를 묻지 마세요’ 아닐까 잠시 생각해본다. 창밖에 물까치 조용히 운다.

2022-09-18

노인공화국

우정구 논설위원 얼마전 통계청이 발표한 세계와 한국의 인구현황 및 전망에 의하면 2070년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전체의 절반 가까운 46.4%로 추산됐다. 올해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중 17.5%보다 28.9% 포인트가 늘어난다.같은 기간 세계 인구는 79억7천만명에서 103억명으로 증가하고 한국은 5천162만명에서 3천765만명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세계 29위인 우리 인구가 59위로 하락한다. 저출산과 폐쇄적인 이민정책 등을 주요 원인으로 분석했으나 결과를 놓고 보면 매우 충격적이다.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로 전락하고 평균 가구원 수가 2040년에 가서는 현재 2.37명에서 1.97명으로 줄어든다. 한집에 사는 사람이 평균 2명이 안 된다는 분석이다.노인인구가 줄면 일할 수 있는 인구감소는 당연하다. 일할 수 있는 연령층이 대폭 줄어들면서 한국의 경제 성장은 뒷걸음질 할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과 공무원 연금은 고갈 상태에 빠지고 지하철에는 돈내고 타는 사람보다 무임승차하는 노인이 더 많다.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투표권을 가진 유권자의 절반이 65세 이상 노인이어서 노인들의 정치적 파워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경제적으로 생산력이 없는 노인을 위한 정책이 국가 정책의 주요 위치에 등장하면서 사회는 활기를 점차 잃어간다.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현재 65세로 통용되는 노인 연령을 10년에 1세씩 상향하는 제안을 했다. 노인 부양률을 줄이고 연금수급 개시의 연장 등 실효적인 은퇴연령을 늘리면서 사회적 충격을 흡수하자는 제안이다. 노령화가 간단한 문제는 아니지만 해결을 위한 실제적 접근법이 서둘러 만들어져야 한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9-18

세대간 교류를 위해

이정희 위덕대 교수·일본언어문화학과 옛날이야기를 보면 “옛날 옛날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았습니다”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많이 있다. 아마 이것은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화자가 할아버지나 할머니일 가능성이 크다.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주들을 무릎 위에 앉혀놓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정겹다. 그만큼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교류가 빈번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어른들이 “요즘 애들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어”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또한, “내가 어렸을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내가 자랐을 때와 달라도 너무 달라”라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뒤따라 나온다.게다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요즘 아이들은 대면 커뮤니케이션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또래간의 대면 커뮤니케이션도 서툴고, 세대간 커뮤니케이션은 더더욱 힘들어 한다. 굳이 집 밖에서 인간관계를 맺지 않아도 집안에서 비대면 교류가 가능해 지게 되었다. 상대방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서로 이야기 하면서 미묘한 감정 변화나 표정의 변화 등에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과도 익명으로 얼마든지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고, 의견이 맞지 않는 다거나 가치관이 다를 경우에는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으면 되고, 상대가 싫어지면 관계를 끊으면 된다. 이런 인간관계가 자연스럽게 성립된 것이다.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같은 또래, 같은 나이의 동급생끼리만 접할 기회가 대부분이고, 다른 연령층과의 교류는 놀라울 정도로 적다. 예를 들어 노인들과 중고등학생들과의 교류, 또는 노인들과 초등학생, 유치원생들과의 교류는 생각보다 훨씬 적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같은 나이의 동급생끼리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 갈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세대간의 관계가 결여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러한 사회 환경 속에서 의도적으로 세대간 교류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미 미국을 비롯해 유럽에서는 세대간 교류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어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세대간 교류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너무 부족하다.먼저, 곳곳에 있는 경로당과 노인정 등은 명칭을 바꾸고 세대간 교류의 장으로 마련했으면 좋겠다. 유치원에서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과 교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활성화 되어야 하겠다. 여기에 대학교육에서 세대간 교류를 위한 새로운 강의가 개설되면 좋겠다.세대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를 해소하고, 해결하거나, 예방하여 살기 좋은 건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2022-09-18

족집게 코칭이 필요해

유영희 작가 장윤정은 자타가 인정하는 트롯 신이다. 본인이 노래를 잘할 뿐만 아니라 남의 노래를 잘 들어주고 조언도 잘해준다. ‘장윤정의 도장깨기’라는 프로그램에서 장윤정은 노래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레슨해준다. 프로그램 이름을 가만히 보니, 처음에는 ‘원포인트 레슨’이었다가 ‘족집게 코칭’으로 바뀐 것 같은데, 변경된 이름이 훨씬 좋다.출연자들이 어느 정도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장윤정이 레슨 신청자의 노래 부르는 습관 한두 가지를 귀신같이 포착해서 교정해주면 노래가 완전히 달라진다. 전 국민 가수 만들기라는 부제가 왜 달려 있을까 생각해보니, 그런 고급 레슨을 받을 수 없는 일반인들도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노래를 잘하게 될 수 있게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나 역시 한때 노래를 잘하고 싶어서 보컬 레슨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고, 혼자 노래방에 가서 몇 시간씩 노래를 불렀던 경험이 있는 터라 흥미 있게 영상을 보면서 장윤정 레슨의 요점을 이해하게 되었다.레슨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노래와 상관없는 나의 습관이나 성격을 드러내지 말고 노래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몸짓과 목소리와 표정을 노래 가사에 일치시키고, 지나치게 멋을 부리지 말라는 등 신청자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준다. 그런 조언을 듣는 신청자의 표정은 깨달음에서 오는 환희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영상 몇 개를 보니 그런 습관이 생기는 배경에는 노래 부르는 이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런 예 중에 가장 인상적인 출연자는 탈북 가수 노수현이다. 장윤정은 노수현에게 떠나는 임을 원망하는 가사를 자기 탓하는 방식으로 부른다면서 원망할 때는 확실하게 원망해야 한다고 하자 노수현이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구체적인 말은 안 했지만 아마도 누군가 자신을 떠났어도 자기 탓만 했던 경험이 있었던 듯하다.이렇게 가수는 다른 사람의 노래를 들으며 그의 습관과 마음을 보지만, 글쓰기 강의를 하는 사람은 글을 보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본다. K대 강의에서 어느 학생이 글마다 편차가 심하고 분노가 많이 느껴져 불러서 물어보니, 자신은 키보드 워리어라고 하면서 인터넷에서 공격적인 글로 문제를 많이 일으킨다고 한다.성인 글쓰기 반에서는 어느 수강생이 친구와 통화하는 장면을 쓴 것을 읽고 그때 마음이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니, 자기 자랑만 하는 친구가 달갑지 않아서 빨래를 널며 통화했던 것 같다고 한다. 이렇게 글을 보면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이 보이고 글을 지도할 방향을 알게 된다.그런데 노래나 글은 짧아서 이렇게 코치도 할 수 있고 귀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인생은 그럴 수 없다. 특이한 습관과 결핍으로 가득 찬 우리 인생도 누군가 한눈에 알아보고 코칭해주면 좋으련만, 인생은 길기도 길어서 코칭해 주기도 쉽지 않고 자기 삶을 볼 수 없으니 고치기도 어렵다. 그러나 노래든 글이든 자신을 자꾸 표현하고 코칭을 받다 보면 몰랐던 나의 모습을 알게 되고 그러면 삶도 조금은 달라질 수 있다. 용기 내어 나를 표현해보자.

2022-09-18

어떤, 생태행위-살금살금

이원만 맏뫼골놀이마당 한터울 대표 포항의 대안공간 ‘space 298’에서 ‘어떤, 생태행위’라는 콘셉트로 2022년 하반기 릴레이 전시를 하고 있다.첫 전시는 판화작가 이윤엽의 ‘둥질(nesting)’이다. 지난 8월 30일부터 9월 7일까지 진행된 이번 전시에서는 판화, 드로잉, 회화, 오브제 설치, 공동체 미술 등 다채널에서 활동하는 멀티미디어 아티스트 이윤엽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면모를 담담하게 조명하였다.경기 수원 원천(현재 광교신도시), 화성 목리 창작촌(현재 동탄 신도시), 평택 대추리(현재 캠프 험프리스), 그리고 현재 안성 남풍리에 정착하기까지 지역의 변화와 삶의 행복과 지속의 문제는 이윤엽 작업에서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윤엽은 그가 만난 사람들, 이웃이었던 사람들, 그들의 힘, 같이 먹은 밥, 농사짓는 땅, 같이 겪어 낸 계절을 그린다.이번 전시 안내책자에 둥질은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여 공동체를 꾸리며 진화해가는 생태학적 관점에서의 삶의 과정과 양상을 일컫는다’고 한다. 진화를 한다는 말에 ‘어떻게?’라는 의문이 생겨 오래 전시를 둘러보고 책자를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그러다가 나는 ‘왜가리’란 작품에 붙인 작가의 글에 꽂혔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진화’이야기를 들려주는 삼촌을 만났기 때문이다. 망치자루가 녹아내리는 목판에 ‘일자리가 녹고 있다’는 제목을 붙이고서는 ‘그게, 포스트 휴먼이에요?’라는 글을 보태며 미래의 인간에 대한 담론에 못질을 하더니 ‘왜가리’에서는 ‘인간이 새와 이렇게 한통속일 수 있다’며 자신이 생각하는 진화 된 인간, 포스트 휴먼을 퍼포먼스로 보여준다.상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작가가 우유를 사러 시내에 가다보니 논에 왜가리가 가만히 서 있는 걸 보았는데 미꾸라지나 개구리를 기다리려니 하고 지나쳤는데 올 때보니 그대로여서 뭔가 수상쩍었단다.가만히 보니 다리에 줄이 감겨서 날아가지 못하고 있더란다. 그래서 풀어주려고 다가갔는데 왜가리가 웬 짐승이 자신을 공격하는 줄 알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근처에 가지를 못했다. ‘어떻게 할까’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왜가리처럼 가만히 서있기로 했단다. 한걸음 다가가서는 또 가만히 서있고, 또 한걸음 다가서서는 서고 그렇게 살금살금 조심조심 다가가니 왜가리가 공격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 줄을 풀어줄 수 있었고 왜가리는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는 이야기다.전시를 기획한 이병희 space 298 디렉터가 말하는 이윤엽 작가의 작업특징은 ‘리더미컬한 자율’이라고 한다. 아, 맞네. 살금살금, 조심조심. 얼마나 리더미칼한가! 그리고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자신이 우연히 발견한 일에 가담한 것 아닌가!리드미칼한 자율적인 움직임으로 그는 왜가리와도 한통속인 인간으로 진화해 인간들이 버린 줄에 구속된 왜가리의 줄을 풀어 주었으니 ‘어떤 생태행위’가 아닌가! 심지어 ‘고마워요’라는 왜가리의 인사말까지 들었다고 생각한다니 얼마나 행복했을까!이렇게 잘 이해가 되는 전시라니! 나는 집으로 돌아와 그가 운영한다는 유튜브에서 띵까 띵까 춤추며 작업시작 준비운동을 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아하 인간의 진화가 쉽네’라고 생각했다.지구가 불타고 있다. 기후위기가 아니라 지구가열이다. 가뭄을 보라, 폭염을 보라, 폭우를 보라. 산불을 보라, 태풍을 보라. 고래 뱃속을 보라. 바다가 화가 났다. 인간이 욕망을 줄이고 ‘공생하는 인간 호모심비우스’로 진화하지 않으면 2050 탄소중립을 이뤄내지 못하면 여섯 번째 대멸종, 6도의 멸종이 올 것이다는 온갖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바닷물 수위가 올라가니 바닷가나 지하, 지상 1층의 부동산은 구입하지 말아야하나? 이 암울한 지구에 내가 내 자식들을 살게 할 수는 없으니 결혼과 출산은 고려해 봐야하나? 그래도 이 정도에서 멈추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거야. 그렇지 않다면 정말 큰 일이잖아’우리가 답답해하고 있는 그런 지점에 이윤엽 작가는 ‘뭐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아’라며 시큰둥하니 우리 앞에 왜가리판화를 내밀어 보여준다. 고도성장 이후의 우리의 삶이 우리인간이 진화해 가야할 하나의 방향을 본 것 같아 반갑고 고맙다.작고하신 이어령 선생은 마지막 노트에 지금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눈물 한 방울’이라고 쓰셨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는 타인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 인간의 따스한 체온이 남아있는 눈물. 인간은 이미 피의 논리, 땀의 논리를 가지고는 생존해갈 수 없는 시대를 맞이했다”며 눈물은 ‘희망의 씨앗’이라고 하셨다.눈물 한 방울로 뜨거워진 지구를 식힐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 그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인간은 살금살금 다가가서 고래의 지느러미에 걸린 그물을 풀어주고 바다사자 목에 걸린 줄을 풀어줄 수 있는 인간으로 진화할 것이다. 살금살금, 찔끔찔끔, 우리도 그렇게 매일 조금씩 진화했으면 좋겠다.

2022-09-18

‘신재생에너지 축소’는 기업경쟁력 포기

위현복(사)한국혁신연구원 이사장 지난 8월 30일 윤석열 정부의 전력수급기본계획 초안이 발표되었다. 전력수급기본계획은 2년마다 수립되는데 이번에 발표된 초안은 전략환경영향평가, 관계 부처 협의 등을 거친 뒤 올 연말께 확정될 예정이다.전력수급기본계획 초안을 요약하면, ‘원전 확대, 신재생에너지 축소’라고 할 수 있다. 이번 기본계획은 지난해 문재인 정부 시절 내놓은 NDC(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완전히 뒤집은 것으로 평가된다. 2021년 9월 30일 발표한 NDC 상향안에서는 신재생에너지가 30.2%로 가장 높게 설정됐고, 그다음 원전 23.9%, 석탄 21.8% 순이었다. 그런데 8월 30일 발표된 기본계획 초안에서는 원전이 32.8%로 8.9%포인트 늘어났고, 신재생에너지는 8.7%포인트 줄어 21.5%가 되었다.신재생에너지가 대폭 감축된 것은 한국 지형 특성상 태양광·풍력설비 등을 대폭 늘리기 어려운 데다, 원전 대비 불안정한 비용 문제, 발전 설비 인근 주민들의 거부감 등이 고려됐다고 한다. 신재생에너지 보급 속도와 송배전망 건설비 등 현실적인 어려움도 감안된 것으로 알려졌다.독일을 예로 들어서 국제적인 신재생에너지 비중 증가 속도를 살펴보자. 독일은 1990년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1.0%다. 2000년에 들면서 6.6%이던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2020년에는 44.9%까지 올라갔다. 독일의 2030년 신재생에너지 목표는 65%이고 2050년에 80%까지 늘린다는 계획이다. 영국의 경우 신재생에너지 비중이 2000년 초 2.7%에서 2020년 42.3%까지 증가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2000년 1.5%에서 2020년 6.4%로 거의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독일은 매년 250억 유로 즉, 34조 원에 가까운 자금을 투입하여 신재생에너지를 확대하고 있다. 현재 선진국과 우리나라와 신재생에너지 격차는 현재 무려 20년에 달한다.유럽 여러 국가가 신재생에너지 공급에 집중하는 이유는 RE100(신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약속하는 글로벌 캠페인) 때문이다. RE100은 각 정부가 주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적 기업들이 국제단체와 함께 2050년까지 기업에서 사용하는 전기 100%를 신재생에너지로 사용하고 거래 기업도 100% 신재생에너지를 쓰도록 하겠다는 자발적인 협약이다.벌써 30여 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들이 RE100을 달성했고, 주요 글로벌 기업 대부분이 2027년까지 RE100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EU에서는 2026년부터 CBAM(탄소국경조정제도)을 실시하여 EU로 수출하는 국가에 탄소국경세를 징수하겠다고 선언했으며, 미국도 곧 이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법안을 준비 중이다.우리나라는 무역이 GDP에서 60%나 차지할 정도로 해외교역을 통해 먹고사는 나라다. 따라서 RE100이든, CBAM이든,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될 수 있는 나라다. 지난해 신재생에너지 비율이 22% 넘어선 미국조차 향후 하나의 완결된 새로운 산업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468조 원을 투입하고 있다. 이 돈은 태양광·풍력에 대한 투자, 새로운 송·배전망 구축, 전기 충전소 신규 건설, 전기자동차 보조금 지원 등에 소요되는 자금이다.이런 국제적인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전 정부에 비해 오히려 축소하는 것은 충격적이다. 요즘 산업현장에 가보면 대부분 기업들이 RE100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데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대책을 세우는 곳은 거의 없다. EU에서는 2026년부터 발효하기로 한 CBAM을 2025년으로 앞당기려는 움직임이 있고, 미국도 곧 시행할 태세여서 조만간 우리 국가 경제가 난관에 봉착할 수 있는데도 정부가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외면하는 것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는다.우리나라 지역 특성이 신재생에너지 축소 이유로 거론된다고 하는데, 신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독일의 경우 국토의 대부분이 위도 50° 이상, 우리나라는 위도 38° 이하에 위치해 있어 햇볕 양이 우리나라가 훨씬 풍부하다. 우리나라가 하루 평균 햇볕을 쬘 수 있는 시간은 약 3.9시간이고, 독일은 약 2.8시간에 불과하다.풍력에너지도 한국은 3면이 바다로 형성돼 있어 독일에 비해 비교적 풍부한 나라이다. 부지 또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으로 표현되는 오랜 농경 정책을 유지하다 보니, 식량안보라는 이름으로 농지에 태양광을 쉽게 설치할 수 없도록 돼 있어 신재생에너지를 설치할 부지가 부족할 뿐이다.한국환경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주요국이 신재생에너지를 25%씩 증가시키는데 17년~30년 걸린 점을 감안한다면, 지금부터 우리나라는 선진국의 2배 내지 3배의 속도로 신재생에너지를 공급해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고 한다.이제 신재생에너지 시대를 맞아 자원 빈국인 우리가 ‘신재생에너지 자립’만큼은 반드시 이뤄야 한다. ‘신재생에너지 자립’을 위한 충분한 햇볕과 바람, 토지가 있다. 선진국이면서 제조업 강국인 독일을 모델로 해서 최단기간 내에 ‘신재생에너지 자립’을 달성하는 것이 우리나라가 국제무역을 통해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윤석열 정부는 신재생에너지 축소는 기후 위기 대응과 기업의 수출 경쟁력까지 동시에 포기하는 정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022-09-18

태양광 복마전

우정구 논설위원 복마전(伏魔殿)은 마귀가 숨어 있는 전각으로 나쁜 일이나 음모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악의 근거지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소설 수호지(水滸志)에 등장하는 표현이다.책에는 왕의 심부름으로 용호산에 은거하고 있는 장진인을 만나러 간 홍신이 그곳에서 복마지전을 발견하고 그 속에 놓인 석비(石碑)를 들추니 108명의 마왕이 뛰쳐나왔다는 얘기로 꾸며져 있다. 100명이 넘는 마왕이 숨어 있었던 곳이니 악의 굴이라는 의미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부와 권력이 얽혀있는 듯하면서 사건의 전모가 잘 드러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각종 비리 사건들을 언론은 복마전에 곧잘 비유해 보도한다. 부산 엘시티 의혹이나 대장동 사건 등도 복마전으로 불렸다.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하면서 친환경 에너지사업으로 강력하게 밀어붙인 태양광 사업이 복마전이 됐다는 소식이다. 정부 합동부패예방추진단이 전국 12개 지자체를 대상으로 태양광과 관련한 정부 사업비 운영실태를 표본 조사했더니 2천600억원이 넘는 돈이 부당하게 집행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한덕수 총리가 이를 두고 “태양광 사업에 나랏돈이 밑 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새고 있다”고 개탄하듯 언급해 사태가 매우 심각함을 짐작케 한다. 더 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이번에도 정부의 눈먼 돈이 얼마나 새어 나갔는지 궁금하다. 샘플 조사에서 드러난 비리가 빙산의 일각일 거라는 관측이 나오니 정부 사업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도덕적 해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특히 탈원전의 대안으로 문재인 정권이 의미심장하게 추진한 태양광사업이 위법과 비리로 얼룩졌으니 사업의 신뢰 추락은 물론 전 정권의 친환경 정책에도 누를 남길 수밖에 없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9-15

복수의 정치학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한국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데는 여야간 정치보복이 반복되기 때문이란 주장이 있다. 정치보복이란 말이 처음 나온 것은 우리 정치사에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대통령제를 선택한 이후 정권을 잡은 대통령들이 나름대로 정치적 업적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집권 후 자신의 업적을 쌓는 데 몰두했다.예를 들면 좌우 대립의 혼돈 속에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한·미 동맹을 이끌어낸 이승만,‘한강의 기적’으로 경제를 일으킨 박정희, 탈냉전의 북방정책으로 한국 외교의 르네상스와 남북 화해의 시대를 연 노태우, 독재정권과 목숨 걸고 싸워 민주화를 쟁취하고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척결을 단행한 김영삼, 외환위기로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살리고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한 김대중이 있었다.물론 5·18 광주사태와 군부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정권을 쿠데타 동지인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물려줬다가 감옥살이를 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예외다. 이들은 각자의 시대가 던져준 어려운 숙제들을 피하지 않고, 혼신의 힘을 다해 과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된다. 정치보복 얘기가 나온 것은 바로 그 이후의 대통령부터다.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수사를 받던 중 극단적 선택을 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구속됐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집권기간 동안 적폐청산으로 포장된 ‘분열의 정치’를 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보수·진보의 갈등도 모자라 친이·친박, 친노·반노, 친문·반문이라는 시대착오적인 인물 중심의 프레임이 난무했다. 결국 ‘국민통합’은 점점 더 이루기 힘든 과제가 됐다. 국가원수가 정치적 반대세력을 정죄하는 데 온힘을 쏟으며 포용의 자세를 버린 결과다.윤 대통령의 위기 요인은 분명하다. 부인의 허위 경력 의혹과 장모의 비리 혐의 등에 대한 뭉개기다.‘공정과 상식’을 모토로 집권한 그가 자신 주변의 허물을 모른체 하다보니 집권 후 고정 지지층까지 흔들리며 지지율이 떨어진 것이다.끝내는 야당이 ‘김건희특검법’으로 공세에 나섰다. 이에 맞서는 방법은 정공법이 최선이다. 부인의 과실이 있다면 사과하면 그뿐이고, 장모의 비리가 있다면 그에 상응한 처벌을 받으면 된다. 그런 연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수사 역시 똑같이 공정하게 처리하면 된다. 사실 이 대표에 대한 사법리스크는 야당 측도 짐작하는 바다.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의 핵심 인물들이 공포영화의 주인공처럼 잇따라 목숨을 끊고 있는 것이 국민적 의혹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피할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도 야당은 이 대표에 대한 수사 자체를 ‘정치보복’프레임을 걸며 진흙탕 싸움으로 만들려한다.보수와 진보정권이 번갈아 집권하며 권력의 부패를 견제하는 민주주의 작동원리는 존중돼야 한다. 이것이 정치보복이란 독소로 부패되지 않아야 한다. 이제는 여야 정치권이 내면의 양심과 역사의 엄중한 요구에 귀를 열고, 응답해야 할 때다.

2022-09-15

이재명 구하기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라이언 일병 구하기’란 영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스필버그 감독의 전쟁영화다. 라이언 일병은 4형제 중 막내인데, 위로 세 형들이 모두 참전을 했다가 전사했다. 이를 알게 된 육군참모총장이 그 막내아들만이라도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행방을 알 수 없는 라이언 일병을 구출해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 임무를 맡은 밀러 대위와 7명의 대원들이 벌이는 활약상이 영화의 줄거리다. 마침내 라이언 일병을 구출하지만, 그 작전을 수행한 대원들은 밀러 대위를 포함해 여섯 명이 죽고 두 명만 살아남는다. 이 영화는 웅장한 규모와 실감나는 전투장면이 압권이지만, 한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섯 명이 희생되었다는 측면에선 생각의 여지가 많다.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이재명 대표를 구하기 위해 총력전을 펴고 있다. 물론 위의 영화에 나오는 라이언 일병과 이재명 대표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네 아들이 모두 전쟁에 나가서 세 아들이 죽은 노모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목숨을 걸고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정신에 대한 경의와도 ‘이재명 구하기’는 거리가 멀다. 구태여 공통점을 찾자면 그 과정에 우여곡절이 많다는 걸 들 수가 있겠다.민주당의 ‘이재명 구하기’는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여당시절부터 수사팀을 해체하고 정권에 추종하는 검사들로 교체하는가 하면 검찰총장의 옷을 벗게 하고, 꼼수와 편법을 써서 검찰 수사권을 완전 박탈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래놓고 이재명을 대선후보로 밀었다가 낙선을 하자 대신 국회의원 배지를 달아주고 당 대표를 시키더니 당헌까지 개정하는 등 3중 4중으로 ‘방탄조끼’를 입혔다. 그래도 검경의 수사가 계속되자 ‘김건희 특검법’을 들고 나와 맞불을 놓고, 심지어는 법무장관과 대통령의 탄핵을 거론하기도 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하도 기상천외해서 대한민국 헌정사에 길이 남을 일이 아닐 수 없다.라이언 일병은 낙하산을 타고 적진에 뛰어들었지만 이재명 대표는 온갖 비리의 의혹에 둘러싸여 있다. 허위사실공표(선거법위반)로 기소된 것을 시작으로 변호사비 대납 의혹, 대장동과 백현동 개발특혜 의혹, 성남 FC 의혹 등 지금 수사 중인 사건만도 십여 개나 된다. 그야말로 항우장사도 어쩔 수 없는 사면초가여서 민주당이 이재명 대표를 무사히(?) 구출할 가망은 거의 없어 보인다. 영화에선 라이언 일병을 구출하려다가 여섯 명의 대원이 죽었지만, 겹겹으로 둘러싼 안전장치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끝내 이재명도 구하지 못한 채 엄청난 희생만 치르게 될 것이란 얘기다. 오로지 진영논리에 눈이 멀어 애당초 부당하고 승산도 없는 일에 올인 하다가 명분도 실리도 잃고 치명상만 입게 될 것이 빤히 보인다.밀러 대위는 죽으면서 라이언 일병에게 가치 있게 살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했다. 그래야 자신과 대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이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력투쟁을 하고서도 이재명을 구하지 못한 민주당에게는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이재명은 이제라도 국회의원직과 당대표직을 내려놓고 성실하게 검찰의 수사에 임하는 것이 그나마 당과 자신을 위한 최선이 될 것이다.

2022-09-15

인생도 운전처럼

윤영대 수필가 차를 운전하여오면서 인간의 삶도 운전과 같음을 알았다. 사고 없는 운전을 위해서는 운전 기술도 있어야 하지만 신호와 차선을 잘 따라야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듯이 탈 없이 인생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도 지켜야 할 법과 가야 할 길을 잘 알아야 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가끔은 뜻하지 않는 장애물도 만나고 위반해 보고 싶은 유혹도 있을 것이며 자신도 모르게 교통위반 딱지가 날아오기도 한다.운전의 기본은 가고 서는 것이다. 출발과 정지의 기술뿐만 아니라 가야 할 때와 서야 할 때를 잘 판단해야 하는데, 그 가고 서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신호등이며, 길이 교차하거나 갈라지는 곳, 또 주의해야만 하는 곳에 설치되어 있다. 우리의 인생에도 무수한 신호등이 깜빡거린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신호등일 뿐이며, 모르고 지나치기 쉽고 지나고 나서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후이다. 빨간 신호가 들어오면 괜히 짜증 나고 푸른 신호에 맞게 잘 통과하고 나면 기분이 좋듯, 우리 삶도 앞이 막히거나 잘 풀리지 않으면 불안해지고 일이 잘되어 나가면 몸도 마음도 즐겁고 가벼워진다.빨간불은 정지 신호다. 그러나 좀 있으면 파란불이 켜진다. 그런데 그 몇 초간을 묵묵히 잘 기다리는 사람과 사뭇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의 차이는 성격 탓만은 아닐 것이다. 파란불은 계속 달려도 좋다는 신호다. 그러나 언제 빨간 신호로 바뀔지 모르는 것에 대비하여 브레이크에 발을 얹는 습관을 갖는 것이 좋겠다. 우리는 흔히 푸른 신호를 보고 달려왔을 때, 가속해 통과하려고 하기 쉬운데 자칫 신호 위반과 함께 사고의 위험이 따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인생도 그렇다. 앞날이 약속되고 순탄하게 승승장구할 때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안하무인으로 달려나가다 보면 자기 페이스를 잃고 큰 실패를 겪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호는 빨간불보다는 파란불일 때 더 위험하다. 푸른 신호에서 브레이크를 밟아가는 사람과 가속페달을 밟는 사람, 이 두 경우 항상 사고는 후자의 경우에 많다는 사실이다. 나는 한적한 자동차 전용도로를 달릴 때 빨간 신호가 보이면 속도를 줄이며 다가가서 정지하는 일이 없이 다음 푸른 신호에 맞추어 통과하는 시도를 한다. 빨리 가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서서히 가다가 서지 않고 통과하는 것이 쾌감도 있고 서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우리의 인생에도 신나게 달리는 푸른 신호만 켜지는 것이 아니다. 빨간 신호가 들어오면 잠깐 서서 허리도 펴고 눈을 들어 앞을 보는 여유를 가지자. 명절날 정체된 고속도로를 달려보면 버스 전용차선으로 용감하게 질주하는 규정 위반의 차들을 본다. 바쁜데도 차선을 지켜 가는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규정을 지키며 천천히 밀려가는 많은 차량을 볼 때 동행의 평온함을 느낀다.푸른 신호 앞에서 브레이크를 조금씩 밟아가는 지혜와 밀리는 차량의 물결을 따라 천천히 달리며 멀리 보는 여유를 운전하면서 깨달았다. 남은 내 인생의 운전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2022-09-15

삶의 종점을 내려다보며

정미영 수필가 비바람이 하릴없이 들이치는 날이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국화원이 소슬히 떨고 있다. 오늘 떠나는 망자의 삶에도 비바람이 많았는지, 국화원이 슬픔을 응축한 채 웅크리고 있다.작년, 신축 아파트 담장 너머에 이층 건물이 들어섰다. 세련된 외벽에 국화꽃 한 송이와 국화원이라는 글자만 간판으로 걸려있어 몇몇 사람들은 미술관인줄 착각하지만, 이곳은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장례식장이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심 한가운데에 존재와 부재의 형체가 장례를 치르는 동안 서로 껴안고 이별하는 공간이다.나는 조문객의 움직임을 가만히 응시하며 가늠해 본다. 가까운 이와의 별리가 주는 슬픔의 깊이를. 가슴을 쥐어뜯으며 흐느끼는 사람, 땅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 울음을 삼킨 채 눈물을 훔치는 사람 등 죽음 앞에서는 같은 상실의 무게를 지닌 것 같아도, 톺아보면 모두가 제각각의 농도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공무원이셨던 친정아버지는 출장을 떠난 길 위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나는 비보를 접하고 황망히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그 곳에서 보았던 안내판에 쓰인 망자의 이름이 낯설었다. 내 아버지지만, 더는 부를 수 없는, 손을 내밀어도 잡을 수 없는 공허감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영정사진을 쳐다보면 짙은 슬픔의 농도로 무거워진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그 날의 장면들이 오버랩 될 때면 장맛비에 봇물 터지듯 가슴속에 눈물이 쏟아져 차오른다. 먹먹하게 온몸을 짓누르는 강렬한 슬픔이 상실감으로 변주되어 내 마음속으로 재빨리 휘감아 흘러 들어온다.며칠 전, 지인의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죽음을 대하는 장례식장의 분위기가 무겁고 엄숙하지만은 않았다. 고인은 삼 년 동안 요양병원에서 생활했다. 죽음의 유예기간 동안 아흔여섯 살의 고인과 가족들은 많은 이야기를 했고, 서로 따뜻하게 감싸 안는 시간이 많았단다. 그런 연유로 현실을 받아들인다고 지인은 평온하게 전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죽음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완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리라.서아프리카 가나에서는 댄싱 장례식이 유행이라고 한다. 상여꾼들이 관을 어깨에 짊어지고 박자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바닥에 앉거나 드러눕는 등의 다양한 퍼포먼스로 장례식장을 흥겹게 축제 분위기로 이끈다. 망자를 절차에 따라 추모하는 엄숙하고 차분한 진행이 아니라 템포 빠른 음악과 경쾌한 춤을 통해 고인과 작별하고 유가족과 조문객을 위로한다고 한다.나에게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고인의 생전 삶을 따뜻한 마음으로 돌이켜보는 것은 좋은 의미인 것 같다.생명 있는 모든 것들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준비가 필요한 일은 각자의 죽음을 잘 대비하는 일임에랴.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현재에 남겨진 사람에게도, 서로가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도록 이별 연습을 미리 해보면 좋을 성 싶다.웰다잉(Well-Dying)! 가족들이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는, 훈훈한 내 장례식 풍경을 만들려면 평소에 자주 떠올려야 될 단어다. 죽음을 기억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금기(禁忌)를 상기(想起)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아 성찰을 통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다. 뚜렷하게 돋을새김으로 각인된 의미 있는 장례에 대한 나만의 인식을 바람결에 날려 보내고 싶지 않다.어느덧 나도 계절을 알리는 인생시계의 시침이 가을로 접어들었다. 오늘, 나의 장례식 장면을 두 눈 감고 상상해 본다.향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드는 듯하더니 울컥, 미세한 애잔함이 눈물로 변해 뚝뚝 흘러내린다. 장례식장의 차가운 공기, 껴안고 흐느끼는 가족들, 문득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허가 온몸을 감싸고돈다. 삶의 종점, 먼 것 같지만 언젠가는 내가 닿을 곳이다.나는 지금, 나의 장례식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국화원을 내려다보고 있다.

2022-09-14

경진(庚辰)

육십갑자 중 열일곱 번째에 해당하는 경진(庚辰)이다. 천간(天干)은 경금(庚金)이요, 지지(地支)는 진토(辰土)다. 천간과 지지가 모두 양(陽)으로 이루어져 아주 강한 기운을 가지고 있다.경진일주는 넓은 평원에 우뚝 솟은 바위산이다. 멀리서 보면 우장하고 당당하다. 마치 제련되지 않은 원석 덩어리다. 꿈과 이상이 크고, 순박한 성품이며, 목표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경향이 있다.경금(庚金)은 강한 금(金)의 성질을 갖고 있어 자기주장으로 주변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 그러한 성질을 자제하고, 일관성 있는 논리를 갖추면 사회에 기여하여 두각을 나타내면 성공할 수가 있다. 진토(辰土)는 수기(水氣)의 창고로 나무가 잘 자라게 하며, 사람을 기르는 재주가 있다. 그러므로 꿈을 꾸고 살거나 다른 이의 꿈이 되거나 꿈을 심어주는 사람이 된다.경신일주를 가지신 분은 천하대장군이 경(庚)을 치고, 천하대장군의 낙처를 담당하는 지하여장군은 용, 즉 진(辰)이다. 앞으로 전진만 할 뿐, 뒤를 돌아보지 않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살면서 발생하고 일어나는 일은 다 세상의 살림살이고, 그 살림살이가 하늘의 낙처이기에 침묵해야 한다. 하늘시계의 말없는 가르침인 ‘10천간’을 잘 받아내는 땅의 안테나를 가진 12지신 상중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동물이 바로 용(龍)이다.그래서 용(龍)의 기운을 받은 사람들은 용이 물을 만나면 승천하여 본래 하늘의 기운이 되고, 물을 만나자 못하면 그냥 땅에 사는 도룡뇽이 된다. 수질이 3, 4급수들과 어울리면 지렁이 같은 토룡(土龍)이 되고, 올라가다가 떨어지면 이무기가 되기에 조심해야 한다, 주위 환경 변화에 잘 적응하며 처신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다.별 진(辰)은 옥편에는 별이름이 수성이며, 또한 북두칠성을 나타낸다. 조선에서도 별자리에 대한 사료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만들어진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다.‘천상’(국보 제228호)은 하늘의 상을, ‘열차’는 차에 따라 나열하고, ‘분야’는 지역에 따라 구분하여 그린 그림이다. 여기서 차(次)는 하늘의 북극에서 세로로 12구역으로 나눈 단위다. 분야는 점성술과 관련이 있다. 하늘의 별자리를 지상과 연관시켜 점성술의 일환으로 사용되었다.동양 별자리와 서양 별자리를 비교하면 이름이 크게 다르다. 서양 별자리는 대부분 그리스·로마신화 속의 동물이나 영웅들의 이름이다. 동양 별자리는 모양과는 상관없이 하나의 별을 하나의 대상으로 나타내었다. 여름 밤하늘의 대표적인 별자리 중 하나인 견우와 직녀(칠석)도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새겨져 있고, 만 원권 지폐 뒷면에도 도안되어 있다.강경진일주에 ‘괴강살’(魁罡殺)이 있다. 괴강(魁罡)이란, 괴(魁)는 북두칠성의 머리 부분에 있는 네별을 말한다. 일설에 문운(文運)이 있어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은 이 별에 기도를 드렸다. 강(罡)은 북두칠성의 다른 이름이다. 그만큼 강력한 힘과 권력을 나타낸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가지고 있어 성품이 매우 강하며, 미래를 바라보는 안목과 지혜가 강한 것이 장점이다. 외모가 준수하고, 지적인 매력이 있고, 기가 센 성격이므로 다소 잔인하거나 폭력성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한편으로 진취적인 성격으로 뛰어난 리더십을 보여주기도 한다.예전에는 여자 사주에 ‘괴강살’이 있으면 성격이 까다로워 남편과 시댁을 섬길 수 없어 백년해로하기가 어렵다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는 경쟁력을 가진 사주로 해석되어 성공하기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사주로 평가가 된다. 일지(日支)가 진(辰)으로 끝나는 무진, 경진, 임진의 여자는 대체로 아름답고 능력이 있고 재물복도 많다.‘여씨춘추’ 거사(去私)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진나라의 평공(平公)이 대신인 기황양에게 “남방지방의 현령으로 누구를 보냈으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기황양이 “해호라는 사람이 적임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평공이 “해호라는 사람은 당신의 원수가 아니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기황양은 “임금께서는 누가 현령 자리에 적임인가를 물으셨지, 저의 원수를 묻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평공은 크게 감탄하였고, 곧바로 해호를 현령으로 임명하였다. 온 나라의 높고 낮은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다고 말했다.얼마의 세월이 지난 뒤에 평공이 다시 기황양에게 “나라 안에서 군대 일을 맡길 사람을 찾지를 못 하겠네 누구에게 맡기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기황양이 “기호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평공이 “기호는 그대의 아들이 아니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기황양이 “임금께서는 누구에게 군사 일을 맡겼으면 좋겠는가 하는 점을 물으셨지, 누가 제 아들이냐고 묻지는 않으셨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류대창 명리연구자 평공이 다시 한 번 크게 감탄하고, 기오를 임명하여 썼다.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모두 잘했다며 안심했다. 공자(孔子)가 이 일을 듣고 “기황양은 참으로 훌륭하구나! 남을 추천하는 일에서 원수조차도 꺼려하지 아니하였고, 친족을 추천하는 경우에는 자기의 아들조차도 빼놓지 아니하였구나. 그 사람이야말로 공적인 일을 함에 있어서 한결같은 마음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사람은 개인적으로나 나라 전체로나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목표라는 것은 나라의 안위와 백성의 행복이다.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은 나라의 안위와 행복을 파괴하거나 방해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정치의 목적은 ‘인간을 위한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선’이 개인이나 국가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국가를 위해 좋은 것을 취하고 보전하는 일이 사실상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을 위한 선’을 실현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민족이나 국가를 위한, 즉 보편적 ‘인간을 위한 선’을 실현하는 것은 더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2022-09-14

재주보다 집요함으로 승부한다

장규열 한동대 교수 한국의 골목길이 가장 미국적인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1949년 미국 텔레비전아카데미가 시작한 에미상(Emmy Awards)은 그 성격이 조금씩 바뀌어오긴 했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드라마와 영화는 물론 최근에는 넷플릭스와 디즈니플러스 등 OTT 상영물까지 담게 되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그런 시점적 트렌드를 잘 타기는 했어도, 누가 보아도 스토리에 담긴 향수와 긴장감, 상상력과 도발성으로 장식한 콘텐츠가 강렬했다. 에미상의 남우주연상과 감독상을 비롯하여 무려 6개 부문을 획득하였다. ‘기생충’, ‘미나리’와 함께 칸영화제, 아카데미상과 골든글로브상을 거치며 인정을 받아 K-콘텐츠는 이제 글로벌 기준이 되었다. 이런 성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실력. 어려움과 힘든 시간을 거치며 지치지 않고 쌓아온 내공의 힘이 아닐까. 스크린쿼터제를 썼어야만 했을 정도로 한국영화는 가시밭길을 거쳐왔다. 깊은 수렁을 지나면서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집요함이 없었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인고의 시간이었다. 탁월한 재주가 물론 마지막 빛을 발하지만, 바닥에 도도히 흐르는 집념이 이룬 결과가 아닐까.감독은 수상소감에서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역사를 만들었다’고 고백하였다. 진심이 아니었을까. 한국 드라마가 가장 미국적인 상을 받았다는데, 실제로 그 옛적 동네 골목길 이야기들로 글로벌시장을 승부한 셈이 아닌가. 우리에게만 있는 스토리베이스가 세계 천장을 뚫은 셈이다. 문화원형의 또다른 승리다. 우리만의 이야기가 또 무엇이 있을까 돌아보아야 한다.전 미국을 통틀어 텔레비전 수상기가 5만도 채 안 되던 시절에 에미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겨우 걸음마를 떼었을 텔레비전이라는 뉴미디어의 오늘같은 성공을 상상이나 했을까. 씨앗도 그런 씨앗이 없었을 터에, 그 작은 성공의 가능성에 물을 주고 거름을 댄 사람들이 있은 다음에 74년이 흘러 오늘이 되었다.미국 텔레비전이라고 좋기만 했을까. 수다한 부침을 겪으며 오늘에 이르렀을 미국인들의 집념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어떤 노력도 쉽게 펼쳐지지 않는다. 한국에서 영화를 한다는 생각도 한때는 얼마나 허무맹랑했을까. 문화와 예술은 단번에 피어오르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의 상상과 창의가 고단하고 집요한 노력을 만나 지치지 않고 길고 긴 시간과 싸움을 한끝에 겨우 조금씩 솟아오른다. 떼는 발걸음마다 무거웠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지켜보는 눈길은 또 얼마나 아슬아슬했을까.잘 만들어야 하지만, 또 잘 알려야 한다. 아무리 멋진 스토리도 누군가 알아채지 못하면 보러올 재간이 없다. 기획과 제작, 홍보와 실행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인 전략이 구사되어야 작은 성공이라도 거둘 수 있다. 고집과 집념이 상상과 창의를 만나도록 이끌어야 한다. 지치지 않도록 지원해야 하고 기다려주어야 한다. 문화와 예술이 일어나면 사람이 모인다. 서울거리에는 외국인들이 북적인다고 한다. 가능성의 싹을 본 김에 문화로 승부했으면 한다. 정치보다 나아도 훨씬 낫지 않은가.

2022-09-14

1인치의 장벽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인 히트를 친 후 에미상 시상식에서 6개 부문을 휩쓸면서 한국 콘텐츠들이‘1인치 장벽’을 깨고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1인치 장벽’이란 2년전 영화‘기생충’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이 골든 글러브 수상소감으로 이야기함으로써 널리 퍼졌다. 자막의 크기를 말하는 것으로, 미국의 경우, 자막을 읽는 것이 부담스러워 해외 영화를 잘 보지 않는 데, 바로 그 자막의 장벽을 넘기만 하면 정말 좋은 영화가 많다는 것이다.‘오징어 게임’은 지난해 9월 공개된 지 엿새 만에 전 세계 넷플릭스 1위를 차지했다. 46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최장 기록을 세웠다. 세계 곳곳에서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패러디하는 것은 물론, SNS에는 달고나 만들기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 한국 놀이 영상도 잇따랐다.‘오징어 게임’신드롬은 결국 에미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빈부 격차와 경쟁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 전 세계인들이 공감한 셈이다.황동혁 ‘오징어 게임’ 감독은 당시 신드롬에 대해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한탕주의 같은 것이 더 심해지는 세상에 파산한 사람들이 하는 그 게임이라는 게 지금 이 시대의 흐름이나 상황과 잘 맞아떨어져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국경을 뛰어넘는 OTT의 대중화도 한몫했다. 전 세계 시청자들이 단 한 번의 가입만으로 다른 나라의 드라마들까지 손쉽게 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영화 ‘기생충’ 등 한국 콘텐츠의 성공 이후 다른 나라 콘텐츠를 자주 접하며 자막에 대한 거부감이 줄어든 것도 ‘오징어 게임 성공’에 기여했다는 평가다. ‘오징어 게임’ 이후‘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등이 해외 시청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어 한국 콘텐츠가 1인치의 장벽을 넘는 도전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2022-09-14

길과 길

오낙률시인·국악인 사람들은 인생 여정 (人生 旅程)이라는 말로 인간의 삶을 정의하곤 한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태어나서 걸음마를 시작한 이후, 잠자는 시간이나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 등을 제외하고는 끝없이 어디론가 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어디론가 끝없이 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길이란 존재는 인간의 삶에서 필수 조건이 됨을 또한 부정키 어려울 것이다.요즘 사람들의 길을 내는 방식은 예전의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면, 도심이나 외곽지에 큰 도로 하나를 낼라치면 설계과정에서 담당 공무원이 지도위에 먼저 실선으로 표시하고 그다음은 중장비를 동원해서 길을 완성하면 끝이다. 그러나 문명이 오늘처럼 발전하기 전의 세상에서는 길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 꾀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최초의 한 사람이 그곳으로 지나가고, 또 뒤를 이어 먼저 지나간 사람의 흔적을 따라 다른 사람이 그곳을 지나가고, 그렇게 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지나고서야 비로소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고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이 되었을 것이다. 옛날, 우마차가 다니던 길도 최초에는 그렇게 작은 길이 만들어진 다음에 사람들이 삽이나 곡괭이로 길을 넓혔을 것이다.길은 소멸과 생성을 거듭한다. 도무지 길이 생기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새로이 커다란 길이 생기고 영원히 존재할 것 같던 길이 몇몇 사람의 기억 속에 추억만 남기고 말끔히 사라지기도 한다. 필자의 뇌리에도, 지금은 농경지 정리로 말끔히 사라지고 없는 유년 시절의 길에 대한 기억이 오래된 흑백사진처럼 또렷이 남아있다. 필자 나이 대여섯 살은 되었을까? 부모님께 흰 고무신을 싸 달라고 조르며 울다가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새터 마을 고무신 점을 향해 졸랑졸랑 따라 걷던, 할아버지의 사랑 어린 길에 대한 기억이며, 동네 신작로를 놔두고도 가깝다는 이유로 꼬불꼬불 좁은 논길을 즐겨 다니던 초등학교 등 하굣길에 대한 기억이다.인간의 삶을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 인간이 다니는 길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길이 있다. 물길이다. 세상의 길 중에 물길보다 더 중요한 길은 없다. 물길이란 자연계의 왕도로서 인간마저도 범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길이며 지상 모든 생명의 존망에 관계되는 길이다. 해서 우리나라 법령에서도 물길에 해당하는 하천법을 최 상위법에 두는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해마다 태풍철이 되면 수해 소식으로 온 나라가 초상집 분위기이다. 그렇게 해마다 나타나는 수해 현상을 인간에게 길을 빼앗긴 물의 분노쯤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몇 년 혹은 몇십 년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라 해서 가벼이 생각하고 인간이 무단으로 둑을 쌓아 점령하여 사용하고 있는 탓은 아닐까? 해마다 도시와 농촌에서 일어나는 홍수의 형태를 보면, 도심의 홍수는 대부분 하천 주변이나 하천의 하류에서 일어나고 농촌의 홍수는 계곡 주변의 농토가 유실되거나 침수되는 형태로 일어난다. 이러한 홍수 현상은 농촌 도시 할 것 없이 물이 제 길을 찾아 흐르려는 현상일 뿐, 무단으로 물길을 점령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결과가 아닐까 싶다.

2022-09-14

합계 출산율 0.75의 시대

최병구 경상국립대 교수 추석을 맞아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부모님 집을 방문하며 아이들을 데리고 대형 쇼핑몰을 찾았다. 반려동물 출입이 자유로운 쇼핑몰에는 수많은 종류의 강아지와 각양각색의 반려견 유모차가 즐비했다. 물론 아이들도 적지 않게 보였지만, 반려견과 반려견 유모차의 수도 만만치 않았다. 대기업이 만든 복합 쇼핑몰에서 아이와 반려동물이 뒤엉킨 장면은 기괴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생명으로 동물을 인식하는 것이 보편화 된 시대이다. 도나 해러웨이는 ‘반려종 선언’에서 반려동물과 인간의 소통은 인간 중심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인간, 즉 포스트 휴먼의 탄생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반려동물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통계청은 지난 달 24일 2022년 2분기 합계출산율이 0.75라고 발표했다. 2018년 대한민국의 합계출산율이 처음으로 1 아래로 떨어졌고, 이로 인한 위기감이 팽배했지만 이후에도 출산율은 급격하게 떨어지기만 한 것이다. 지난 6월 출생아 수는 통계청이 월간 출생아수를 발표한 1981년 6월 이후 가장 최소인 1만8천830명이며, OECD 국가 평균 합계출산율이 약 1.6명인 것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이 얼마나 빠르게 아이를 낳지 않는 국가로 변화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더욱 심각한 것은 출산율 저하 문제를 우리 모두 알고 있으며, 정부가 막대한 예산을 오랜 시간 투입했지만 반등의 여지없이 아이를 낳지 않는 속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소비’의 문제에 주목해야 한다. 내가 쇼핑몰에서 느낀 기괴함의 정체도 바로 이것이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유모차에 태워진 잔뜩 멋을 낸 반려견과 그 주인의 모습에서 아이를 위해서라면 빚을 내서라도 원하는 것을 해주는 부모를 떠올리는 것은 오독일까? 소비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사랑을 대리한다는 의식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정작 아이 혹은 반려동물과 어떻게 깊게 교감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돌봄에 수반되는 헌신이 사회적 관계의 재구성으로 나아가기 어렵다는 말이다.최근 오픈 서베이가 발표한 ‘Z세대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한국의 Z세대 62.7%가 행복을 위해 소득과 재산이 가장 중요하다고 답한 반면, 미국의 Z세대는 인간관계와 우정을 꼽았다. 출산이 파산의 지름길이라는 Z세대의 인식을 단적으로 확인시켜준 결과이다. 개인이 체감하는 사회적 관계 혹은 가치를 재구성해야 합계 출산율의 반등을 이룰 수 있다.그 시작은 국가와 사회가 아이를 부모와 함께 키운다는 의식을 젊은 세대가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함께 살아가는 대상이 꼭 구별 짓기를 통해서야 주체성을 드러내는 ‘사람’일 필요도 없다. 이질적인 대상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 문화가 형성될 때 출산율의 반등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돌봄은 이질적인 두 주체가 연결되는 과정이자 새로운 세상을 함께 가시화하는 시간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2022-09-14

기후 우울증

우정구 논설위원 2019년의 일이다. 영국의 어느 사회운동가는 “기후변화 해결 없이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출산파업을 선언했다. 그는 “극심한 기후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살기 힘든 환경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지 않아 출산파업 운동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출산파업에 대해 한국의 젊은이 상당수가 동조하고 있다는 여론조사가 나온 적도 있다.모 환경단체는 “여름에 내린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 위기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감을 호소하는 환경단체의 지속적인 환경관련 계몽운동에도 지구의 기후 위기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지구촌 곳곳에서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가뭄, 산불 등 다양한 재난이 일어나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위기감은 그렇게 심각해 보이지 않는다.지금과 같은 지구온난화가 진행된다면 지구촌 인구의 20억명 정도는 사하라 사막과 비슷한 기후 환경에서 살아야 될 지 모른다는 경고도 나왔다. 기후변화로 먹고 살아가야 할 식량 생산이 줄고 각종 재난이 빈발해지면서 인류의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지적에도 세상은 그저 무덤덤하다.유엔 산하 정부협의체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협의체(IPCC)가 나서 지구의 기후위기 문제에 적극 대처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뾰쪽한 묘책이 안 보인다.초강력 태풍 힌남노가 포항·경주에서 10명의 목숨을 빼앗고 엄청난 재산 피해를 입혔다. 지구촌의 기후변화가 앞으로 힌남노보다 더 강력한 태풍을 몰고 올 거란 기상학계의 전망에 갑갑한 마음이 앞선다. 코로나 블루처럼 기후변화에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도 늘어난다는 소식도 들린다. 우울증 영역에 기후 우울증이 하나 더 추가된다는 얘기다. 우울한 소식이다./우정구(논설위원)

2022-09-13

TK인구 ‘500만명’ 붕괴의 의미

심충택 논설위원 추석연휴 찾아간 고향마을 골목은 조용했다. 10여 년 전만 해도 해도 작은 산골동네지만 집집마다 귀성 가족들로 붐볐는데, 올해는 명절분위기가 거의 나지 않았다.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탓이다.정치·경제적 상징성이 강한 대구경북(TK)인구 ‘500만명’이 지난 3월(500만135명)을 마지막으로 무너졌다.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8월말 기준 대구인구는 237만1천936명, 경북인구는 260만9천356명으로, TK인구는 모두 498만1천292명이다. 행안부 인구현황을 가끔 들여다보면 TK인구가 매달 3천500여명에서 많게는 6천여명씩 줄어들어 아찔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TK인구 500만명은 정치적 지분이라는 무게감과 함께 경제적 의미도 컸다. 기업이 공장입지 선택을 할 때 가장 먼저 보는 데이터가 청년층 유출입 통계인데, 대구·경북은 이제 이 부분에서 매력적인 곳이 되지 못한다. 부산시도 인구 감소 걱정을 하는 것은 대구와 마찬가지다. 8월말 기준 333만1천444명으로 매달 1천400여명씩 인구가 줄고 있다. 청년인구가 살길을 찾아 떠나가는 비수도권 도시의 공통적인 비극이다.반면, 8월말 기준 경기도는 1천359만56명, 인천시는 296만3천117명으로 매달 인구가 2천~4천500여명씩 증가하고 있다. 인천시가 대구시 인구를 추월한 것은 아주 오래됐다. 유정복 인천시장(국민의힘)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서인부대’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다. ‘서인부대’는 서울, 인천, 부산, 대구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경제 규모에서 인천이 서울 다음가는 국내 2대 도시로 거듭나겠다는 뜻이 담겼다.부산과 대구는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지만, 인천은 경제자유구역과 원도심 개발 활성화로 인구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어 국내 2대 경제도시로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나타낸 것이다.TK인구 감소는 곧 청년 인구 감소를 의미한다. 대구시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순유출 인구 2만4천여명 가운데 20~29세 청년 인구만 9천여명이다. 청년 인구 감소와 노인 인구 증가는 결국 ‘지방소멸’의 문제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지극히 부정적인 현상이다. 청년층 인구의 중요성에 대해 UC버클리대 엘니코 모레티 경제학과 교수는 “세계적으로 청년층 창조계급을 유인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간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모든 권력과 사회적 자원이 지금처럼 수도권으로 몰리는 한 국민은 좋은 직장과 교육 환경을 찾아 서울로 몰려들 수밖에 없다. 정부가 국토 전체를 효율적으로 쓰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인구위기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것이다.지역균형발전이 제대로 되려면 수도권에 집중되는 국가자산(일자리·교육·의료·교통·문화)을 규제하지 않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 수도권규제를 완화하면서 비수도권 균형발전을 도모하겠다는 발상 자체는 애초에 불가능하다.다시 강조하지만 사회 모든 분야에서 균형발전이 이루어지려면 최고 권력자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2022-09-13

나만 괜찮아

조현태 수필가 추석을 턱 앞에 두고 11호 태풍 ‘힌남노’가 몰려와 엄청난 피해를 남기고 사라졌다. 먼저 소중한 생명을 잃고 침수로 재난을 당한 모든 분께 진심어린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더구나 민속명절 한가위를 맞아 얼마나 상심이 크겠으며 추석인들 명절로 느껴질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부디 용기 잃지 마시고 이 재난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태풍 상륙 며칠 전부터 역대급 태풍으로 ‘사라’에 버금가는 진로방향과 위력이라고 모든 방송이 재난대비를 반복하여 알렸다. 필자는 태풍이 닥치기 전날(9월 5일) 감포 어느 바닷가에 갔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전촌항 주변에 횟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모든 횟집이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출입문을 제외한 모든 유리창문은 전부 두꺼운 합판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멀리서 찾아온 손님도 돌려보내며 영업을 중단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 여러 팀이 횟집에 왔다가 아쉬운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영업이익을 목적으로 횟집을 운영하는데 많은 팀을 돌려보내기가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안전을 우선으로 하는 영업에 박수를 보냈다. 충분히 그럴 법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둘러보니 각종 선박을 도로 위로 끌어올려 단단히 결박해 놓았다. 재난대비 방송을 듣고 충분히 이해한 대책으로 보였다.그런데 막상 태풍이 지나고 보니 예상 외로 피해를 입은 곳이 많다는 보도다. 재난대비 방송을 듣지 않거나 무시했을까. 아니면 ‘나는 괜찮아’로 뭉그적거리고 있었을까. 이도저도 아니면 자연의 위력보다 자신이 더 세다는 자기우월주의에 빠졌을까. 모르긴 해도 나름대로 최선의 대비는 했으리라 여긴다. 만조와 폭우가 겹치면 어떤 상황일거라는 예상을 방송사마다 종일 외쳤으니까. 정보에 가장 민감하게 살아가는 현시대에 재난방송을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피해를 입은 것은 자연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깨우치게 하는 사건이다.그날 양동마을에는 자동화재경보기가 작동했다. 억수같이 비가 퍼붓는 가운데 하룻밤에 세 차례나 소방차가 출동을 했다. 결국 화재경보가 울린 것은 습기로 인한 오작동이라는 설명이었고 경비원이나 소방대원이 완전 밤샘을 했다. 불이 나지도 않았는데 세 번씩이나 출동하였건만 소방대원은 전혀 귀찮아하거나 힘들어하지 않았다.화재감지 센서가 워낙 예민해 화재가 아닌 습기에도 작동했다면 예방효과는 확실하다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웠더라도 불이 나거나 큰 사고가 난 것 보다야 훨씬 다행이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횟집에서 문과 선박을 단속하고 손님을 돌려보내더라도 태풍 피해를 덜 입는 쪽을 택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지 않은가. 태풍 때문이라면, 지하주차장이 침수되는 상황과 바닷가 월파 상황이 별로 다를 바가 없다. 다만 얼마만큼 예방에 노력을 하느냐에 달려있지 않겠는가.아직도 12호 태풍 ‘무이파’가 활동 중에 있다고 한다. 꼭 태풍만 아니더라도 살면서 위험하거나 불가항력이 닥칠 때를 미리 대비하는 마음가짐과 자세를 잊지 않기만 바랄 따름이다.

2022-09-13

아름답게 오래되기 위하여

이재현 동덕여대 교수·교양대학 “시간은 모든 것을 쓸어가는 비바람 / 젊은 미인의 살결도 젊은 열정의 가슴도 / 무자비하게 쓸어내리는 심판자이지만 // 시간은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거장의 손길 / 하늘은 자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를 / 시련의 시간을 통해 단련시키듯 / 시간을 견뎌낸 것들은 빛나는 얼굴이 살아난다 // 오랜 시간을 순명하게 살아나온 것 /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 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 //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노동자 시인이라고 불리는 박노해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느린걸음, 2010)에 수록된 시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의 1연에서 4연까지이다. 인용이 좀 길지만 모두 8연으로 된 시의 앞 절반을 가져와 보았다. 사람이건 사물이건 시간이 흐르면 늙고 낡아지고 때론 썩고 부패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스러지고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오래된 것들에서 의미를 찾으려 하였고, 오래된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고 선언한다.지난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가 세상을 떴다. 1952년 25살의 젊은 나이에 영국의 여왕이 된 그녀는 영국을 포함한 열여섯 개 나라(영 연방)의 군주로서 70년을 통치하였다. 물론 영국의 왕은 정치적 문제에는 개입하지 않는 입헌군주국의 형식상의 최고통치자이기에 엘리자베스 2세 또한 영국의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비록 정치에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영연방의 수장이면서 영국 성공회의 최고 치리자로서(세계 성공회 전체의 수장은 캔터베리 대주교이다.) 영국뿐 아니라 세계 많은 나라의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일찍 왕위에 올랐고 오래 산 만큼 오랫동안 영국의 왕으로 재위한 까닭에 엘리자베스 2세는 2022년 기준으로 입헌군주제의 나라와 절대군주제의 나라를 모두 포함한 세계의 왕들 가운데서 최고령의 왕이었고, 최장기간 재위한 군주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오래됨이 마냥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제는 영국의 왕이 된 찰스 3세의 아내이자 자신의 며느리였던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비운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고, 남편 필립공을 먼저 보내는 슬픔도 겪어야 했다.제국주의 시대 영국의 왕족을 거쳐 왕이 되었기에 본인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제국주의 폭력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었고, 계속되는 군주제 폐지론에 시달리며 왕권이 흔들리기도 하였다. 실제로 자메이카와 앤티카바부다 등 카리브해의 섬나라들은 여왕의 서거를 계기로 영연방으로부터 탈퇴하여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한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기도 했던 영국은 이제 많이 쪼그라든 것이 사실이다. 여왕의 시대가 저물면서 그 쇠퇴가 더 빨라질지도 모른다.오래된 것이 빛을 발하고 가치가 높아지고 고전으로 명작으로 그 삶을 이어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그런 것은 아니다. 시인의 말처럼 비바람의 시간을 잘 견뎌내고, 노회하게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게 낡아가고 늙어갈 때 오래된 것이 진정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2022-09-13

88년, 서울

영화 ‘서울 대작전’(감독 문현성)은 80년대 후반의 서울을 배경으로 올드카의 향연이 눈에 띠는 영화이다. 쏘나타, 포니 픽업, 르망, 프라이드, 스텔라, 그랜저, 포터, 프레스토, 베스타, 코란도 등 다양한 올드카들이 멋지게 튜닝된 모습으로 서울 공도를 질주하는 모습은 그간의 한국 영화에서 보지 못한 색다른 재미라 할 만 하다.하지만 보다 주목을 요하는 것은 이 영화가 ‘88년의 서울’을 재현해내는 방식이다. 그 모습은 그간의 작품들에서 그려진 ‘현실감 있는 서울’의 모습과는 다르다. CG를 통해 구현된 서울의 모습은 현실적이라기보다 만화적이라는 느낌에 가까우며, 이는 할리우드가 자신들의 80년대를 재현해내는 방식과 닮아있다. 더불어 극의 초반에 자신의 차를 압류당하고 빌린 차를 튜닝해 문제를 해결해나간다는 플롯의 구성은 최근의 카 체이싱 영화 뿐만 아니라 ‘니드 포 스피드’와 같은 게임 속 분위기를 연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채롭다.하지만 이는 ‘서울 대작전’이라는 영화가 80년대의 서울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화 속 서울의 모습은 촌스러움과 ‘힙’한 느낌이 한껏 과장된 채 서로 공존하는 문화적 혼종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대작전’은 재현의 실패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겠으나, 이를 작품의 실패로 간주하는 것은 다소 섣부른 진단이 아닐까 싶다.그렇다면 이 영화가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화 속에서 자주 노출되는 “서울 바이브”라는 단어를 곱씹어보자. 그때 그 시절과는 맞지 않는 ‘바이브’라는 단어는, 이들이 원하는 바가 충실하게 재현된 과거가 아니라 자신들의 리듬으로 재구성된 문화적 구성물임을 선언한다. 관객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영화로부터 거대한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영화의 미학적 지향이 그 시절을 그 시절답게 재현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발칙하다고 할 만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우리가 살아온 과거를 제멋대로 비틀고 찢어 조합했을 뿐인 영화라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간 레트로를 지향해온 다방면의 문화 컨텐츠가 자꾸만 놓치고 마는 과거의 요소를 억지로라도 붙잡고 있기 위해 노력한다. 예컨대, 그간의 레트로를 표방하는 컨텐츠들이 당대의 문화적 요소를 조망하면서 의도적으로 정치경제적 문제에 대해서는 흐린 눈으로 지나쳐간 것과 달리, ‘서울 대작전’은 88년 서울의 뒷모습을 영화 속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88올림픽의 재개발로 집이 사라진 철거민들의 모습과 그 위에 나붙은 세계화, 축제, 올림픽, 발전과 같은 표어들. 독재 정권의 관성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하지 못한 인물들의 모습. 깡패보다 악랄한 정권의 부역자들과 이들을 스쳐가듯 날아가는 검게 그을린 흰 비둘기의 모습에 이르기까지.그와 같은 부분적 요소들을 거쳐 다시 영화를 바라보자면, 이 영화가 원하고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한결 뚜렷해진다. 그것은 과거를 재현하고 곱씹으며 “그땐 좋았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재구성된 문화적 혼종성의 공간을 통해 이들이 욕망하는 바는 관습과 관행으로 물든 한국적 정치경제적 체질과의 단절이다. 이는 영화의 플롯에서도 두드러지는데,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전 정권과의 단절을 원하는 신 정권과도 단절하길 원한다. 예컨대 이들에게 88년 서울이란 여전히 독재의 관습과 관행을 버리지 못한 채 ‘새로움’과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둘러썼을 뿐인 구시대에 다름없다. 임지훈 2020년 문화일보,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된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88년의 서울’이라는 상징적 시공간을 단순한 재현이 아닌 패스티쉬의 방식으로 묘사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이는 ‘레트로’를 지향하고 표방하는 문화 컨텐츠들이 지향해야 하는 바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도 이어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정치적, 경제적 위험성이 거세되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향락의 대상으로 전락한 과거가 아니다. 과거에 내재된 정치경제적 불안의 요소들마저 새로운 감각을 통해 문화적으로 재현해내는 감각이 필요하다. ‘서울 대작전’이 실패하는 바가 있다면, 그와 같은 재현이 보다 미학적이지 못했다는 점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미학적 실패는 영화 전체를 퇴행적 좌파의 꿈으로 읽어낼 여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깊은 아쉬움을 남기는 지점이기도 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나름의 의미와 재미를 갖추고 있다. 그 시절을 얼마나 ‘그 시절답게’ 재현하는 가가 아니라 그 시절에 미처 현실화되지 못한 ‘가능성’을 탐문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대작전’이 던지는 메시지란 “그땐 좋았었지”같은 싸구려 노스텔지어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란 “그리하여 우리에게 미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가까울 것이다.

2022-09-13

낭만과 실용 사이

아이폰의 새로운 시리즈가 출시되었다는 소식에 괜스레 통장 잔고를 확인해본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잘 쓰던 핸드폰의 속도가 어쩐지 급속도로 느려진 것만 같다. 카메라 화질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건 느낌에, 그립감도 만족스럽지 않고, 액정이 너무 작은 것은 아닌지, 용량이 모자란 것은 아닌지, 쓸데없는 투정을 늘어놓게 된다. 아이폰 시리즈에 추가된 기능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소유하기만 해도 금방 편리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내가 얼마나 많은 기기를 보유하고 있는지 헤아려본다.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펜슬, 에어팟과 노이즈 캔슬링이 되는 헤드폰, 초경량 노트북…… 요리하다가 ‘시리야, 8분 타이머’하고 외치면 정확한 시간에 알람이 울리고 펜과 노트는 물론이거니와 지갑을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다. 이런저런 기기를 용도에 맞게 사용하다 보면 문득 아, 얼마나 편안한 세상인가, 하고 감탄하게 된다.스마트해져 가는 세계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소비하게 되는 것들도 있다. 애플워치를 사고 싶은 이유는 친구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터치 한 번으로 집 안의 모든 것이 제어된다는 리모컨에 눈독 들이는 것은 인터넷에서 마주친 광고 때문이다. 많은 물건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발 빠르게 주시하지 않으면 늦었다는 소리를 듣는다. ‘말도 안 되게 편리하다’는 추천에 구입한 로봇청소기에는 뽀얀 먼지가 내려앉았고 ‘죽은 빵도 살려낸다’는 토스터는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다. 이 모든 소비가 정말 나의 의지는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작년 12월, 나는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동네로 이사 왔다. 이곳이 마음에 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저층 빌라들로 이루어진 단지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개성 강한 맛집과 카페들이 넘친다는 것도 좋았다. 커다란 마트나 병원처럼 편리에 의한 공간은 부족하지만 산책할 수 있는 거리가 잘 조성되어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우리 집이 꼭대기 층이라는 것이었다. 승강기가 없는 건물의 4층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편하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가게 되면 숨이 가빠오고 거기다가 손에 든 짐이라도 많은 날엔 팔다리가 바들바들 떨린다. 엘리베이터가 얼마나 훌륭한 발명품인지 여실히 깨닫는 요즘이다.재밌는 점은 승강기가 버젓이 존재하는 건물에서도 사람들은 일부러 계단을 이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건강상의 목적뿐만 아니라 자기 육체를 사용하여 걷는 감각을 느끼고자 할 때가 있다. 온갖 단점이 넘쳐나는 복층 구조가 ‘자취생들의 로망’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자명하다.인간은 실용적인 것으로만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무의미한 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고 있다. 그러니까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의 가사, ‘밤늦은 항구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리를 들어’보는 마음이 우리의 시간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어주는지 안다. 편리하고 실용적인 상품보다 다음날 시들어버리고 마는 꽃 한 송이가 주는 설렘도 느껴본 적 있을 것이다.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쓰면서 눈물 흘리는 일처럼 어리석은 일이 때론 우리 삶을 지탱하는 놀라운 힘이 될 때가 있다.물론 인간은 낭만만으로 살아갈 수도 없다. 낭만을 꿈꾸는 사람들은 그것이 삶으로 들어왔을 때 예상치 못한 부조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것은 쓸데없는 일에 힘을 쏟는 것이며 책임보다 무책임의 영역에 더욱 가깝다. 어슴푸레한 새벽에 만나게 되는 직장인의 무거운 발걸음에서 낭만을 발견하는 사람은 그날 아침 출근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너무 싫은 사람마저도 사랑해버리겠다는 포부를 외치는 사람은 상사의 무차별적인 폭언에 시달리면서도 직장을 그만두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말단 직원이 아닐 것이다. 문은강 ‘춤추는 고복희와 원더랜드’로 주목받은 소설가. 201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가로 등단했다. 현실에 발을 디디면서 살아가는 이들을 마주치면 낭만이라는 단어는 허무하게 휘발되고 만다. 먹고 사는 일은 낭만보다는 실용에 무게를 더 싣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때때로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쉽다. 세상은 숨 쉴 틈도 주지 않는 답답한 곳으로 느껴진다. 모든 것을 쓸모 있음과 없음으로 구분한다면 나 자신의 존재는 과연 유의미한 것인지 고뇌할 수밖에 없다.그러니까 살아간다는 건 낭만과 실용, 이 두 세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실에 발붙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것들에 타협하면서도 허상에 가까운 관념을 꿈꾸기 위해 갖고 있는 에너지를 아무렇게나 소비하는 것. 이러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분명히 어렵다. 낭만과 실용을 오가며 고민하는 것 자체가 감상적 태도로 현실을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폰과 꽃 한 송이 사이에서 갈등하는 오늘을 지나고 조금 더 선명하게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내일이 올 것이라고 기대해보기로 한다.

2022-09-13

책 읽기의 미래, 미래의 책 읽기

독서하는 노인의 모습을 묘사한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 요즘 주변에서 더 이상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세대들의 등장과 그로부터 초래된 문해력의 위기에 대한 우려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곤 한다. 한 세대 내에서 일상적으로 쓰던 말들이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말들로 채워지는 것은 한 세대가 스러지고 다음 세대가 등장하는 당연한 시대의 변화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 위기에 대한 예감을 단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것은 이 위기가 자연스러운 변화라기보다는 인류가 지금까지 세워 올리고 영위해왔던 문명들이 본질적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진단에서 비롯된다.지금 우리에게 제기되고 있는 문해력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인류가 구축해온 문명들이 동시에 변곡점을 지나가고 있는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전세계적인 상황으로 당연히 책이라는 미디어가 이끈 문자와 서사의 문명의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적인 상황으로 한자라는 중국에서 기원한 문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한자 문명의 변화일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가지 층위의 문명들이 지금 여기 한국에서 어딘가 그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 새로운 문명을 향해 전이해가고 있는 상황이 지금 제기되고 있는 문해력의 위기의 문명적 기반이다.종이가 낱낱으로 흩어지지 않게 한 쪽 끝을 묶어 고정시킨다고 하는 간단한 아이디어에 불과했던 책이라는 미디어가 기반이 되어 쌓이기 시작한 인류의 지식은 지금 우리의 인간다운 문명을 보증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로 작용해왔다. 사실 이는 문자의 문명이라기보다는 서사의 문명이라고 불러야 할 것인데, 종이 낱장이 아닌 3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길게 이어붙여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지적 능력을 축적하고 확인하는 과정은 이뤄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처럼 빠르게 정보를 습득하고 반응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에 책 한 권을 읽고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내가 원하는 정보에 닿기 위해 서론부터 읽어야 하는 것 역시 비효율적이다. 지금 책이라는 미디어 문명이 겪고 있는 위기와 변화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동아시아적인 상황에 국한해서 한자 문명이 겪고 있는 위기는 조금 국면이 다르다.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개념들은 대부분 한자어로, 조선시대 이래로 내려온 개념들과 서구의 새로운 문명의 개념들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이 한자표기가 아니라 한글로만 표기되고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어떤 개념을 받아들일 때 그 한자어의 한자 의미를 떠올려 의미를 파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영어를 떠올려 파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이해할 때 ‘可能性’이 아니라 ‘possibility’를 떠올리면 오히려 이해가 더 분명해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 한자교육을 강화한다는 식으로 문명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다.하나의 책을 읽는 데는 자주 어려움이 발생한다. 툭툭 튀어나오는 어려운 단어들 때문에 사전을 계속 찾아봐야 한다는 문제가 비교적 사소한 것이라면, 책을 쓴 사람의 생각, 이른바 주제를 알아내기 위해 길고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긴 독해의 과정을, 서사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은 본질적인 어려움이다. 그 힘든 과정을 견뎌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는 판단의 변화가 바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문명의 변곡이 가지고 있는 요체이다. 내가 원하는 정보를 언제나 바로 접할 수 있는 시대에 그 길고 지루한 과정을 참아내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비효율성만큼 지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는 또 없는 것이다. 매클루언이나 플루서 같은 미디어 학자들이 진단하고 있듯, 문자와 책, 글쓰기 같은 문명들은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이제는 새로운 시대에 ‘책’, 혹은 ‘책읽기’에 대해 고민해봐야 할 시점이다. /홍익대 교수 송민호

2022-09-12

그 길밖엔 없어 <Ⅹ>

허 형사는 아내가 죽던 날이 생각난 듯 왼손으로 턱을 괴었다.-그렇지요. 대부분 그렇다 하더라고요. 이게 현금을 바로 주니까 그런 일이 생기는 거죠. 상처 입은 사람들 손에 현금을 쥐여 주니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좀 그렇지요. 그게 어떤 돈입니까? 자기 가족들이 달고 있던 장기를 판 돈 아닙니까? 살아 있는 사람 마음을 긁기에는 충분하지요. 얼마 되지는 않지만.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 그렇게 만들지요. 하룻밤에 써 버리기에 딱 적당하니까요. 그래서 저는 현금으로 안 줍니다. 계좌로 쏘지요. 이게 그런 것이. 통장에 들어온 돈을 다시 뽑아 쓰는 게 의외로 힘들거든요. 하하.웃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우현은 어쩔 수 없었다.-웃어서 죄송합니다.우현이 말을 덧붙였다.-아니야. 이젠 괜찮아. 시간이 좀 지나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 웃어도 돼. 그건 그렇고. 뭐 들은 것 없어?허 형사가 물었다.-네? 올더앤베러 회장 사건 말입니까?-내가 우현 씨 만나서 물어볼 것이 다른 게 뭐 있겠어? 뭐라도 들은 게 있거나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말 좀 해줘.허 형사가 우현의 입을 바라보았다.-하아.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 일단 저에게 들어온 물건은 없습니다. 보통 물건이 들어오면 이식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바로 수술을 받거든요. 사건 후로 인공 장기 이식 수술을 받은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도 한 방법이지 싶습니다. 방금 말씀드렸지만 사건 이후에 제가 연결했던 수술들은 그 사건하고는 관계없는 것입니다. 괜히 엮지 마십시오. 또 보자. 뭐가 도움이 될까요. 수사 내용을 조금 알아야 제가 말씀드릴 것이 더 있지 싶은데요. 제게 말씀해주실 것은 없습니까?허 형사가 담배 한 개비를 새로 입에 물었고, 우현이 불을 붙였다.-음. 별로 진척된 것이 없으니까 우현 씨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지.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시체가 발견된 차량이나 그 주위가 범행 장소는 아닌 것 같아. 시간이 안 맞아. 인공 폐가 신제품이라 그 폐에서 보내오는 신호가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아도 대강의 거리를 알 수 있다 하더라고. 추정해보니 남해안 쪽 어딘가에서 범행을 했던 것 같아.우현이 붙여준 담배의 끝이 발갛게 타들어 가는 것을 보며 허 형사가 말했다.-그래요? 보통 GPS나 그런 것은 없는데.-그렇지. 그런데 이번에 그 폐는 신제품이라 작동이 잘 되는지 어떤지 모니터링을 하려고 달아 놓았다 하더라고. 기계가 작동을 멈추면 신호가 오지 않고, 기계가 켜지면 신호가 오고. 그렇지 않아도 저번 주에 제조회사에서 연락이 왔어. 다시 기계가 켜졌다고.허 형사가 담배 끝을 후 하고 불었고 우현은 물을 마셨다. 그리고 말했다.-그러면 끝난 것 아니에요? 신호를 따라가서 찾으면 되겠네요.-그게 아니야. 신호를 분석하면 대강의 거리는 나오는데 정확한 위치를 말해주지는 않거든. 거리로 보면 중국이나 일본이라네. 그런데 어디를 돌아다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거지. 신호 추적기 같은 것을 가지고 일본이나 중국으로 건너가 돌아다니면서 찾으면 몰라도. 말이 쉽지. 그걸 어떻게 하나. 어딘지 알아서? 설령 가까이 가더라도 누군지 알기 힘들다네. 대강의 위치만 아는 거지.허 형사가 코끝을 찡그리며 대답했다.-어쨌든 물 건너간 거네요.-그렇지.-으음. 제가 요즘은 국내 일만 하다 보니 그쪽으로 주로 누가 하는지 잘 몰라요. 다만 하나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일본이나 중국 쪽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거. 일본은 중고 물건을 잘 안 쓰는 나라고, 중국은 이 년 전부터 경계가 워낙 삼엄해서 물건들이 들어가기 어렵거든요. 공안들이 뜯어가는 것이 많기도 하고. 제가 중국 쪽 비즈니스를 접은 이유도 그겁니다. 오히려 그 정도 거리라면 러시아나, 몽골 뭐 이런 곳도 염두에 두실 필요가 있을 겁니다. 말하고 보니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네요.우현은 말을 하면서 허 형사를 살폈다. 우현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했고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아니야. 좋은 충고야. 일본, 중국이 어떤지는 나보다 우현 씨가 더 잘 알잖아. 고마워. 그런데 지난번 내게 보낸 문자 말이야. 무슨 뜻이야?우현의 말이 끝나자말자 허 형사가 물었다.-아. 네. 다른 뜻은 아닙니다. 제가 뭐라고 보냈는지 기억도 잘 안 나네요. 허 형사님이 제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나 싶어서 좀 강하게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허 형사는 아이스 커피의 얼음을 어금니로 부숴 먹었다. 뿌드득. 얼음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아닙니다. 문자로 보내다 보니까 좀 딱딱해졌었나 봅니다. 오해하기 딱 좋지요. 이래서 마주 앉아 애기를 나눠야 한다니까요. 그래서 제가 연락드린 것 아닙니까? 하하. 우현이 너스레를 떨었지만 허 형사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허 형사가 입을 열었다.-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가지고 있던 콩팥이 어디서 온 건데?-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언제 어디서 수술했는지도 기억이 안 납니다. 그냥 기억하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뿐입니다. 이미 지난 일을 뭘 알려고 그러십니까?우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허 형사의 눈을 피해 천장의 선풍기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이어서 덧붙여 말했다.-안 바쁘십니까? 저도 형사님과 오래 앉아 있으면 안 좋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커피값은 제가 내겠습니다.허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현은 계산대로 가서 계산을 했고, 허 형사는 커피숍의 문밖에서 우현을 기다렸다. 우현이 문을 열고 나오자 허 형사가 말했다.-잘 마셨어. 참고할 만한 이야기도 고맙고.-별말씀을. 그러면 저 먼저 가겠습니다.우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돌아서서 가려는 우현을 허 형사가 불러 세웠다. 그리고 물었다.-참. 우현 씨. 전에 그렇게 말했었잖아. 이식 수술할 때 의사 옆에서 보조를 직접 선다고. 말이 보조지, 자기가 거의 다 한다고 했지 않나?-아, 예. 그거요? 제가 그냥 허세를 좀 부린 거지요. 제가 감히 어떻게.-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그러면 뗄 줄도 아는 거지?-네?/김강 소설가

2022-0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