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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싸늘해지는 민심, 국정쇄신은 언제 하나

심충택 논설위원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수행에 대한 지지율이 다시 하락해 10%대로 내려갔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번주들어 좀 숙지기는 했지만, 여권이 국정쇄신은 뒤로 한 채 당원게시판 블랙홀에 빠져 이전투구를 벌이자 민심이 이처럼 싸늘해지는 것이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26~28일 실시한 11월 넷째 주 여론조사 결과, 윤 대통령의 직무수행 긍정 평가는 19%에 그쳤다. 대구경북(TK)의 경우 긍정 평가가 40%로 타지역에 비해 높은 편이었지만, 여전히 부정 평가(47%)가 많았다. 보수지지층이 주류인 부산·경남(PK) 지지율은 22%였다. (자세한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한국갤럽은 “대통령과 명태균씨 간 육성 통화 공개 후 대통령 직무 평가가 취임 후 최저 수준이다. 대통령과 당 대표 간 불화가 당내 갈등으로 비화해 여당은 여느 때보다 불안정한 상태로 보인다”고 했다. 공감 가는 분석이다. 윤 대통령에 대한 민심이반이 가속하자 최근 주요언론들은 정부 레임덕 현상을 앞다퉈 보도하고 있다. 중앙부처 공무원들이 이미 차기 정권을 의식하면서 현 정부 주요 프로젝트에 참여하길 꺼린다는 내용이다. 정부가 사실이 아니라고 발끈했지만, 궁색한 변명으로 들린다. 대통령실은 어떻게 하면 국민지지를 다시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민심이반 원인은 한국갤럽 조사에 나와 있다. ‘경제·민생·물가’(15%)와 ‘김건희 여사 문제’(12%)가 부정평가 최상위 리스트에 올라와 있고, ‘윤·한 갈등’도 원인으로 지목됐다. 이들 현안 모두 용산이나 행정부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여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야 하고, 야당과도 소통해야 한다. 우선 여당만이라도 우군(友軍)으로 만들려면 최근 소수의 친윤계가 의도적으로 당원게시판 논란을 ‘침소봉대’하는 행위를 중지시켜야 한다. 김민전 최고위원이 지난달 25일 최고위원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한동훈 대표와 이름이 같은 8명이 당원 게시판에 윤 대통령 부부 비난 글을 썼다’는 이른바 ‘팔동훈’을 언급하면서 당 대표를 직격한 행위를, 그가 지난 9월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윤 대통령과 만찬을 함께한 점과 연관 짓는 사람들도 많다. 여권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친윤계 정치인이라면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며칠 전 한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김 위원장은 당원게시판 논란과 관련, 지난달 말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흔히들 얘기하는 ‘김옥균 프로젝트’를 실행하려고 하는 상황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한동훈 대표가 63% 지지로 당선된 사람인데 그 사람을 흔들어낸 다음에 여당의 위치가 어떻게 될지는 스스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지난달 7일 윤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후 여권이 정국 주도권을 잡기는커녕, 현안에 대한 출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여권이 지금 가장 급하게 해야 할 일은 국정쇄신이다. 그러려면 당·정이 원팀이 돼야 하고, 야당과도 대화테이블을 마련해야 한다.

2024-12-03

크리스마스 씰

우정구 논설위원 나이가 많이 든 어른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씰에 관한 추억이 있다. 6·25 전쟁 직후 어려운 경제 상황에 놓인 우리나라에도 결핵이 크게 유행하면서 크리스마스 씰은 결핵퇴치를 위한 자선사업의 한 형태로 범국민적 참여 운동이 벌어졌었다. 원래는 1904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한 작은마을 우체국장이 결핵으로 생명을 잃고 있는 유럽 어린이들을 위해 모금방식으로 시작한 것이 시초다. 성탄절 우편물에 작은 금액의 크리스마스 씰을 붙여 시작한 모금운동은 이후 크게 호응을 얻으면서 전 세계로 번져나갔다. 오늘날 크리스마스 씰은 결핵퇴치 운동의 상징이다. 우리나라는 6·25전쟁 직후 대한결핵협회가 결핵퇴치 운동과 함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결핵은 기원전 7000년 신석기시대 화석에서 흔적이 발견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앗아간 전염병으로 전해진다. 1882년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결핵균을 최초로 발견하고 퇴치에 나서고 있지만 여전히 인류의 목숨을 앗는 위험한 질병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작년에 800만명 이상이 결핵 진단을 받았고, 125만명이 결핵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또 결핵이 코로나19를 제치고 전염병 사망 원인 1위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한국에도 현재 1만6000여 명의 결핵환자가 있다. OECD 회원국 중 결핵 발병률이 1위며 사망률은 3위다. 크리스마스 씰을 통해 모금된 돈은 취약층 결핵환자 발견이나 환자수용시설 지원, 저개발국 결핵사업 등에 지원된다.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씰을 구입해 결핵퇴치 운동에 동참해 보는 것도 보람있는 연말을 보내는 방법이 될 것 같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2-03

조직경영의 리더십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당신이 배를 만들어 주고 싶다면 사람들을 불러 모아 목재를 가져오게 하고 일을 하나하나 지시한 다음 일감을 나눠주는 식으로 하지 말라. 그 대신 그들에게 저 넓고 끝없는 바다에 대한 동경심을 키워주도록 하라’생텍쥐페리의 말이다. 꿈이 있는 조직은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 리더는 부하직원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다. 리더십의 본질은 비전을 갖는 것이다. 비전은 누구나 공감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조직경영의 첫번째는 비전 설정이다. 버트 나누스는 비전을 ‘조직의 실제적이고 믿음과 매력적인 미래 조직의 정체성과 지향점을 이해 할 필요가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방향을 안내하기 위해 기술과 재능, 자원을 결합하여 시동을 거는 정략적인 아이디어’라고 묘사했다. 리더라면 비전을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하라는 것이다.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 정도전은 유배지 생활 9년 동안 나라의 비전과 구체적인 설계도를 그려서 왕을 찾아 옹립하고 건국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한다. IBM을 창시한 톰 왓슨은 회사가 오늘에 이르게 된 데는 첫 사업을 시작 할 때 성공한 미래 모습을 그리고 있어야 한다. 나의 꿈, 나의 비전 등 구체적인 그림이 있어야 하고 미래 모습을 어떻게 실행해야 하는지 상세 계획이 있어야 한다. 실행 모니터링과 부족한 부문에 대한 피드백을 해야 한다. 미래 모습으로 가는 길이 바른지 확인해가는 것이며, 비전은 조직의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 준다. 둘째,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다. 비전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일시적인 구호나 유행에 그쳐서는 안 된다. 필자는 광양제철소 혁신 스태프 근무시절 제철소 비전은 ‘자동차 강판 전문 제철소 구현’이고 목표는 3년 내에 일본 자동차 회사에 1톤을 납품하여 세계적으로 품질을 인증 받는 것이었다. 제철소장이 직접 설명회를 하고 전 직원들은 물론 시내 콩나물 파는 할머니도 제철소 비전을 알고 있을 정도로 공유되었고, 모두가 꿈꾸는 비전은 실현 될 수 있었다. 셋째, 조직에 기를 불어 넣는 것이다. 조직에 활력을 주기 위해서는 신뢰를 바탕으로 책임과 권한을 아래로 넘기는 임파워먼트와 스스로 참여하는 동기부여이다. 임파워먼트는 조직의 미션과 목표가 명확하고 의사결정을 실무 팀에서 하게 하여 신속하고 역동적인 조직을 만드는 일이다. 동기부여는 결과에 인정하고 보상하는 시스템이다. 직원을 잘 보살피면 사업은 성공한다는 말이 있다. 구성원을 신뢰하고 인증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시너지를 창출하는 것이다. 넷째,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혼자 생각보다 대화를 하면 두 배, 토론하면 여섯 배의 성과가 나온다고 한다. 비전을 실현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직에 두려움을 제거하고 긍정과 신뢰의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조직경영은 비전 설정과 공유, 조직의 활력과 소통하는 리더십이에서 성공의 단초가 열린다. 혼자 꿈꾸는 것은 꿈에 불과하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꿈과 희망을 주는 리더가 진정한 리더이다.

2024-12-03

매듭달의 비애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무던히 앞만 보고 달려온 듯한 올해도 벌써 끄트머리달로 접어 들었다. 늦더위와 늦은 단풍에 애써 자리를 내주지 않을 것 같던 가을도 첫눈을 경계로 여지없이 겨울로 바톤터치하며 낙엽으로 사그라들고 있다.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면서 한 해의 자취를 마무리하는 이른바 ‘매듭달’로 이어져 그 어느때보다 바쁘고 일들이 많아지는 연말이다. 연초부터 이래저래 계획한 일들과 잡다하게 벌려 놓은 일이며 연말까지 정리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보고·정산·결재·마감 등과 다가오는 새해에 대한 설계 등으로 누구라도 동분서주가 무색할 정도로 바빠질 것이다. 그만큼 한 해의 매듭과 새로운 날들에 대한 구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해의 마무리와 결산, 모임 등으로 부산해지고 일손이 많아지는 때 새로운 일들이 생겨나거나 예기치 못한 사고라도 터지게 된다면 난감하기만 할 것이다.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피해와 손실을 초래하고 주체하기 힘든 변고에 빠지게 된다면?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과 비난이 쏟아지고 단체적인 움직임에 시달리게 된다면? 믿기 어렵겠지만 이같은 일들은 현재 포항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안타까운 실제 상황들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철강업체인 포스코 포항제철소의 쇳물 생산공장에서 정상적인 조업 중 원인불명의 설비사고로 대형화재가 발생, SNS와 방송뉴스를 타고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고, 긴급복구 비상조업 중 2차적인 폭발성 화재로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설비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등 복원작업에 난항을 겪고 있다. 이에 바다 건너 불구경(?)을 하던 일부 시민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와 함께 모 단체에서는 불안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시민을 볼모로 집단소송 움직임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런 와중에 포스코노동조합이 임금협상 결렬로 12월 초 포항 본사 앞에서 파업 출정식을 개최하자 창사 56년 만의 첫 파업 위기에 직면한 포스코가 총체적 난국에 휩싸여 지역 경제계와 시민단체들의 우려와 상생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지고 있다. 3년 전 힌남노 태풍으로 인해 천문학적인 피해를 입은 포스코가 글로벌 철강시황 불황으로 최근 포항제철소 공장 두 곳을 폐쇄하고 공장 화재까지 잇따른 악재에, 노조의 쟁의행위권 확보로 파업 출정식까지 강행하는 등 극도의 불안과 심각한 위기가 지역경제 침체로 치명적 타격을 주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기만 하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듯이(脣亡齒寒)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서로 돕는 것(患難相恤)이 지혜와 상생의 덕목이 아닐까 싶다. 불난 집에 부채질하기 보다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으며, 상호존중과 상생협력으로 원만하게 협상하고 타결하여 난관을 함께 극복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름지기 매듭을 잘 맺고 풀어야 온전한 마디가 생겨나고, 더 큰 매듭과 마디로 더 큰 성장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미진하고 부족했던 일들을 아름답게 마무리해 따스한 온기 스미는 갑진년의 값진 매듭짓기를 기대해 본다.

2024-12-03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이기전(李己傳) <상편>

옆집 아이였다. 청록의 치마를 입은 아이는 빨간 사과 한 알을 들고 서 있었다. 빨간 사과를 내밀었다. 아이의 어깨에 두 손을 얹은 아이의 엄마가 고개를 살짝 숙여 기에게 인사를 했다. -저번 주 금요일 저녁에요. 아저씨께서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하실 때 제가 버튼을 잘못 눌렀어요. 엘리베이터 문이 닫혀버렸어요. 아저씨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하셨고요. 죄송합니다. 기는 사과를 받아들고 아이의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날 일이 마음에 걸렸나 봐요. 사과데이에 꼭 옆집 아저씨께 사과를 드려야 한다고 해서. 아이의 엄마가 이야기했다. 덧붙여 그녀는 주먹을 들어 사과를 한 입 베어 무는 시늉을 했다. -아. 기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아이에게서 받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아이도 환하게 웃었고, 기와 아이의 엄마는 다시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기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야. 니 희수라고 기억나나? 그 왜 있잖아, 학교 다니다가 전학 갔잖아. 전학 가서 얼마 안 지나서 자살했다고 소문났던 녀석. 위로는 누나만 세 명인 데다가 곱상하게 생겼었는데. 기, 니가 제일 친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가 니들 둘이 사귀냐 면서 놀렸지 않았나? 글마가 살아있더라. 한 달 전 고등학교 동기 모임에서 동기 한 녀석이 기의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앉으며 말했다. -소주 한 잔 따라봐라. 빈 잔을 기 앞으로 내밀었다. 기가 따라준 소주 한 잔을 입에 털어 넣고는 기에게 이야기했다. -우리 엄마가 용한 스님이 있다는 절을 하나 소개 받았다는 거야. 내가 하는 일이 요즘 조금 잘 안 되거든. 엄마도 애가 탄 거지. 하도 성화를 부리기에 따라나섰어. 별로 멀지도 않아. 국도를 따라가다 보니 금방이더라고. 차로 사십 분 정도 걸렸나. 절 이름이 망원사야. 망원사. 제대로 된 절도 아니야. 법당이라고 하나 있는 것도 그냥 슬레이트 지붕으로 덮어 놓았고, 스님이 지내는 방도 컨테이너를 개조해서 만든 방이었어. 스님이랑 나이든 공양주 한 분이랑, 그렇게 둘만 있더라고. 이런 데가 알고 보면 진짜로 용한 곳이라는 거야. 엄마 말이. 기는 언제쯤 희수가 등장할까 궁금했지만 녀석의 말을 굳이 중간에 끊고 싶지는 않았다. 빈 소주잔을 내려놓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녀석의 모습이 제법 진지해보였다. -손주들한테 만 원짜리 한 장 주는 것에도 손을 벌벌 떠는 양반이 글쎄 불전함에 오만 원짜리 두 장을 넣는 거야. 깜짝 놀랐지. 내가 이 할매가 왜 이러나 싶어서 우리 엄마 얼굴을 쳐다보았다니까. 이 정도 넣어야 그 스님을 볼 수 있다 카더라. 내가 쳐다보는 걸 우째 알았는지, 부처님 얼굴만 똑바로 보고 있던 엄마가 돌아보지도 않고 이야기하데. 그제야 이해를 했지. 조금 있으니까 공양주 할머니가 들어오라 하더라고. 컨테이너 방에 들어가서 스님이랑 마주 앉았어. 나는 입도 뻥긋 안 하고 엄마만 스님하고 이야기를 했지. 내가 뭘 하다 망했는지 지금은 뭘 하는지. 우리 엄마가 별 필요도 없는 이야기까지 다 말하는 거야.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스님은 그냥 주구장창 듣기만 하는 거야. 엄마가 지칠 때까지. 아이고,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 보니 숨이 다 차네. 이제 스님이 뭐라고 말씀 좀 해 주시오. 엄마가 이렇게 말 하고 나니까 스님이 입을 열더라. 딱 두 가지. 이제부터는 잘될 겁니다. 글 하나 써드릴 테니 머리맡에 두고 틈나는 대로 보십시오. 그러고 나서 화선지 한 장을 펼치고 붓으로 글을 쓰는 거야. 엄마는 아이고 글씨가 너무 이쁘데이, 너무 좋데이 하면서 연신 박수를 쳤지. 글씨는 나름 나쁘지는 않더라. 그런데 내용이 뭔지 아나? 그 왜 있잖아.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우짜고 하는 흔한 그거. 그건 기라. 확 하고 열이 올라오는데, 불전함을 뒤집어가 오만 원짜리 두 장 찾아 들고 나오려다가 참았다. 그래도 기가 찬 거는 기가 차는 거라서 스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지. 그런데 한참 보다 보니까, 낯이 익은 얼굴인거야. 어디서 봤지? 누구더라? 이렇게 고민하다가 엄마가 이제 가자고 해서 내려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이 났는데. 그 스님이 희수인거야. 와. 소름 돋데. 기는 녀석의 빈 소주잔에 소주를 부어주며 말했다. -그러면 그 스님이 자기 입으로 내가 희수다 하고 말한 것은 아니네? 녀석은 소주잔을 입에 대어 반쯤 마시다가 내려놓았다. -니, 내 말 못 믿나? 내가 사람 얼굴 하나는 정말 잘 기억하거든. 희수 맞다. 여전히 예쁘데. 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익은 돼지고기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녀석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믿지. 믿어. 혹시나 하고.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 그리고 내 기억에 희수는 교회를 다녔던 것 같아서. 기가 준 돼지고기와 구운 마늘을 상추에 올려놓고 쌈을 만들던 손을 멈추고 녀석이 말했다. -그래? 하긴 기, 니가 제일 잘 알겠지. 그라모 희수가 아닌가? 얼굴은 희수 맞는데. 희수. 고등학교 2학년 때 짝이다. 곱상하게 생겼었다. 눈이 컸다.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햇빛 보는 것을 싫어했다. 위로 누나가 세 명 있었다. 분홍 필통, 색지로 된 공책을 좋아했고, 여러 가지 색의 펜을 구별해서 쓰는 것을 좋아했다. 옆에서 보다보면 색칠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빨간 색의 보색이 뭔지 아니? 희수의 색칠놀이를 구경하던 기에게 희수가 물었다. 희수 덕분에 기는 보색이라는 게 무언지 처음 알았다. 희수 덕분에 처음 안 것은 보색만이 아니었다. 영어라고는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 밖에는 모르는 기와는 달리 희수는 팝송을 좋아했다. 쉬는 시간에 멍하니 앉아 있거나, 점심을 먹고 교실에 엎드려 있으면 희수는 워크맨에 이어폰을 꼽고, 한 쪽 이어폰은 자신의 귀에 다른 한 쪽은 기의 귀에 꽂아주었다. 이거는 보이 조지고, 이거는 신디 로퍼고. 희수는 ‘ㄱ’자로 굽힌 손가락들로 스포츠형 짧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팝송의 내용과 가수에 얽힌 사연까지 설명해주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제법 오래된 팝 가수들의 음악이지만 당시 기로서는 처음 듣는 멜로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기가 집에 돌아와 가방을 정리하다 보면 희수가 쓴 편지가 들어 있기도 했다. 주말에 뭘 했는지, 누나들이랑 본 영화가 어땠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희수가 쓴 자작시가 들어 있기도 했다. 기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기가 답장을 쓰지 않는다고 희수가 화를 낸다거나 답장을 써 달라고 조르는 일은 없었다. 기가 편지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날이면 희수는 들릴 듯 말듯 이야기했다. 편지는 내가 쓸 게. 너는 읽어주기만 해. 시청각 교육을 위해 단체로 극장에 가는 날이었다. 시내에 있는 극장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러 갔다. 각자 알아서 정해진 시간까지 극장으로 가야 했다. 희수가 기의 집으로 찾아왔다. 극장까지 가는 동안 버스를 타는 시간을 제외하고 희수는 기의 손을 놓지 않았다. 희수는 기에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줄거리와 여주인공인 ‘비비안 리’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지만 기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현기증이 몰려왔다. 희수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기는 희수의 손이 무척 부드럽고 따듯하다고 느꼈다. 정거장에 내려서 극장이 가까워지고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것이 보일 즈음에서야 둘은 손을 놓았다. 희수는 기를 쳐다보며 빙긋이 웃었다. 기는 꺼내어둔 사과를 종이 가방에 챙겨 넣었다. 망원사를 찾아 가볼 생각이었다. 희수가 아니어도 된다. 얼굴을 보고 싶었다. 희수가 아니더라도, 희수를 닮은 얼굴에 사과를 하고 싶었다. -네. 안녕하십니까. 청취자 여러분. 오늘은 시월 이십 사일입니다. 그리고 일요일이지요. 망원사로 향하는 차 안에서 기는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는 디제이가 사과데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 무슨 날일까요. 그렇지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미 주위의 누군가에게 사과를 드렸을 수도 있겠습니다. 예. 맞습니다. 오늘은 사과 데이입니다. 저는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무슨 무슨 데이라 불리는 날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몇몇 기업체나 장사꾼들의 상술 같기도 하고, 그 상술에 덩달아 동조하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사과 데이에 대해서만은 생각이 다릅니다. 저도 이날만큼은 꼭 챙기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우리나라의 사과 데이가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과 데이는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요? 아시는 분도 있으시겠지만 혹시라도 모르고 계신 분들이 있을까봐 제가 직접 찾아보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말씀드릴 수는 없지요. 일단 노래 한 곡 듣고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시월이지요. 시월의 어느 좋은 날에. 들려드립니다. (계속) 김강 소설가·내과의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12-03

트럼프의 귀환과 한미동맹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미국 우선주의’와 ‘힘에 의한 평화’를 역설한 트럼프가 돌아왔다. 그의 귀환이 한미동맹에 불러올 파장은 만만치 않다. 미국의 외교전략이 ‘바이든의 진보적 이상주의’에서 ‘트럼프의 보수적 현실주의’로, ‘이념을 중시한 가치외교’에서 ‘국익을 우선하는 거래외교’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미국의 뉴노멀(new normal)이 될 ‘트럼피즘(Trumpism)’에 대비해야하는 까닭이다. 한미동맹에도 ‘트럼프 리스크’가 우려된다. 이미 합의한 방위비분담금협정의 재협상 요구, 주한미군의 철수, 감축 또는 역할조정, 북미협상과정에서 ‘한국 패싱’ 우려, 미국의 핵 확장억제력 약화 등에 대한 대책이 시급하다. 동맹도 하나의 이익공동체로 인식하는 ‘거래주의자 트럼프’는 한국을 ‘머니 머신(money machine)’으로 간주, 엄청난 안보 비용을 요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 및 중국과의 협상과정에서 한국의 이익을 경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념·가치외교’에서 ‘국익·실용외교’로 전환하는 것이다. 트럼프가 지명한 국무장관 루비오, 국방장관 헤그세스, 안보보좌관 왈츠 등은 모두 ‘힘을 강조하는 미국 우선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미국의 힘을 이용하여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고자 하며, ‘동맹의 가치’보다는 ‘동맹의 비용’에 주목하여 미국의 부담을 최소화하려한다. 그들에게는 미중경쟁·북미협상·한미동맹 등이 모두 거래의 대상으로 인식될 뿐이다. 따라서 정부는 기존의 가치외교를 전면 재검토하여 실용외교로 전환해야 한다. 이념과 가치를 중시했던 이분법적 세계관과 흑백논리를 버리고, 국익과 거래가 작동하는 새로운 외교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시급하다. 바이든과 맞춘 코드를 앞으로는 트럼프와 맞춰야 하는데, 그의 거래외교를 바꿀 수 없다면 우리의 가치외교를 수정해야 한다. 한미동맹에 이견이 없어야 북미협상에서 우리가 소외되지 않는다. 북미협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 공간은 ‘경직된 흑백외교’가 아니라 ‘유연한 회색외교’에서 확보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국방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해야 한다. 갑을(甲乙)관계에 있는 한미동맹에서 ‘갑(미국)’의 정책변화에 따른 ‘을(한국)’의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우리의 방위력이 제고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미국의 입장에서도 한미동맹 유지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트럼프 정부에서 다시 방위비협상을 하게 된다면 자체방위력 강화는 물론, 적어도 일본 수준의 잠재적 핵능력을 확보할 수 있는 협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러한 국가안보전략의 성공은 분열된 국론의 통일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여야 정치인들은 거세게 불어오는 ‘트럼피즘’을 외면한 채, 한미동맹까지도 권력투쟁의 도구로 삼아서 정쟁을 벌이고 있다. ‘내부의 분열은 외부의 침략을 부른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2024-12-02

못 말리는 헬리콥터 부모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최근 중앙일보에 실린 과보호 부모에 관한 기사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등장하는 사례들은 ‘정말로 그런 일이 있을까?’라는 의구심과 함께 허탈감까지 부른다. 증권회사 부서장에게 신입사원의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온다. “내 자식이 고객 응대와 실적 목표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니 부서를 옮겨 달라”는 부탁을 했단다. 유통기업의 인사팀장은 직원의 아버지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는다. 핵심 내용을 요약하면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을 가겠다는 아들을 막아달라. 혹시, 회사가 힘들게 해서 아들이 퇴사를 고민하는 것 아니냐”라는 것. 지난 세기엔 사용되지 않던 단어 중 21세기 들어 새롭게 만들어진 조어(造語) 중 하나가 ‘헬리콥터 부모’다. 아이들을 키울 때 양육과 교육 모두에서 극성스러울 정도로 지나친 관심을 쏟는 부모를 지칭하며 사용된다. 회전하는 날개를 단 헬리콥터처럼 항상 아들과 딸의 머리 위를 끝없이 맴돈다는 의미. 몸이 아파 조퇴하는 아이를 대신해 담임교사에게 전화를 해주고, 대학생 자녀가 성적에 만족하지 못할 때 교수에게 연락해 점수를 높여달라고 떼를 쓰는 부모가 있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다. 그런데, 20대 중반을 훌쩍 넘겨 직장인이 됐음에도 다 큰 아들·딸의 연봉 협상과 부서 배치 과정에 개입하며, 성인 자녀를 서너 살 아이처럼 싸고도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는 건 놀랍고 더 나아가 측은하다. 세월의 변화에 따라 대부분의 부모가 한두 명의 자녀만을 가진 사회가 됐다. ‘금쪽같은 내 새끼’로 키우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과하면 낭패를 만난다. 자식 문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12-02

인생이 게임과 같다면

삶이 게임과 같다면 어떨까? 최근 one hour one life라는 PC 게임을 즐겁게 플레이했다. 게임 내용은 신생아부터 시작해서 노인이 될 때까지 병에 걸리거나 굶어 죽지 않고 60살까지 무사히 살아남아야 한다. 게임 세계관 중 독특한 점은 현실 세계에서의 1분이 게임 시간 상 1년으로 계산된다는 것이고, 실제 게임을 플레이하는 한 시간 동안 게임 속 한 사람의 인생을 무사히 살아내는 것이 최종 목표이다. 게임을 처음 접속하면 나는 갓 태어나게 되고, 나의 엄마를 마주하게 된다. 엄마는 나의 이름을 지어주고 지어준 이름대로 한 가문의 계보에 등록된다. 3세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신생아 상태이기 때문에 엄마의 돌봄이 전적으로 필요하다. 엄마 품에 안겨 옷도 입고 따뜻한 불 옆에서 체온을 올리다보면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현실 세계에서의 3분, 게임에서 3살이 되면 나는 스스로 걸을 수 있게 된다. 3살이 되면 영문 채팅도 3글자 이상으로 칠 수 있게 되어 엄마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정 내부의 일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흙을 나누는 법, 땅을 고르게 펴는 법, 베리 씨앗을 심는 등을 배우게 되고 한 가족의 일원으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리 잡아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게임의 재미있는 점은 바로 계보를 잇는다는 것인데 엄마 외에도 이모, 할머니, 사촌 등 다른 플레이 유저들이 집 내부에 존재해서 여러 어른의 도움을 받아 성장할 수 있다. 생각보다 게임은 꽤나 디테일해서 제때 끼니를 챙겨 먹어야 하고, 밥을 먹기 위해선 여러 종류의 농작물을 심고, 동물을 기르고, 요리를 하며 집 안 내부를 청소하고 정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연대가 중요하기에 유저끼리 부족한 영어 실력으로 소통을 하며 각자의 구역에서 성실히 임무를 다해야만 한다. 그렇게 부지런히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나는 성인 여성이 되어 있고, 문득 밭을 갈다 아이가 태어났다는 메시지 창이 뜨며 품에 신생아가 안긴다. 이제 막 게임에 접속한 사람이 나의 자식이 된 것이다. 그 시점부터 또 다른 미션이 주어진다. 새로운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새로운 옷을 지어 입히고, 불가에 다가가 아이의 체온을 높여주고 굶어 죽지 않도록 신경 써서 음식을 먹여 주어야 한다. 그렇게 3분, 게임상 아이가 3살이 되면 내가 처음 엄마에게 배웠던 것처럼 아이에게 거름을 만드는 법,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는 법, 밭에 당근을 심어 자라게 하는 법, 꽃을 기르는 법 등을 알려준다. 잠깐 아이에게 생존법과 생의 노하우를 가르쳐 줄 뿐인데 나의 머리는 빠지고 등은 구부러지고 얼굴 주름이 눈에 띄게 깊어져 간다. 벌써 게임을 플레이한 지 한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이다. 스무 명이 넘어가는 가족 구성원들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는 동안 결국 게임오버 창이 뜨고,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 냈다는 엔딩을 마침내 보게 된다. 게임은 참 쉽고 단순하다. 그저 게임 나이로 60살이 될 때까지 시간을 보내다보면 어쨌든 엔딩을 보게 된다. 누군가 만들어 놓은 요리를 먹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사히 게임의 엔딩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목적이나 방향성이 없어 꽤나 심심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게임은 접속 유저들과 가족을 이루고 구조를 만들며 그 안에서 생존의 의미와 성장의 기쁨을 찾는 편이 훨씬 재미있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검은 엔딩 화면 아래에 있는 다시 태어나기 버튼을 누르면 다시 게임에 처음 접속했을 때처럼 누군가의 신생아로 태어나게 된다. 이렇게 계속해서 한 사람의 인생을 살아가며 한 가문의 계보를 잇는 게임으로, 플레이마다 달라지는 가문과 인종, 부모 등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결이 조금씩은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생활을 유지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고, 배운 것을 또 후손들에게 가르치며 게임 플레이에 더욱 능숙해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내 캐릭터의 삶은 단순해진다. 처음이라 어색하고 허둥댔던 것들이 이제는 익숙하게 전보다 더 잘해낼 수 있게 되고, 가진 생의 노하우로 더 나은 선택지의 길을 낼 수 있게 된다. 그렇담 삶도 게임과 같지 않을까. 나는 요즘 가보지 않은 길이 두렵다.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와 나이를 생각하다 보면 자꾸만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막연히 망설이기보단 현재 생의 노하우를 업그레이드 하고 있단 생각으로 내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충실하게, 동시에 즐겁게 여기다 보면 어느새 능숙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2024-12-02

로제와 윤수일의 예상 표절

프랑스의 문학비평가 피에르 바야르는 ‘예상 표절’이라는 개념을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표절은 후대의 작품이 선대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인데 비해 예상 표절은 앞선 시대의 작품이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작품을 모방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예지적인 직관을 가진 작가가 시간의 질서를 초월해 미래를 엿보기라도 한다는 걸까? 꿈에서 훗날의 일을 미리 보는 데자뷰 현상을 말하는 건 아닐까? 헛소리도 자꾸 듣다보면 묘하게 설득되듯 과거가 미래를 훔친다는 이 황당한 주장에도 그럴듯한 근거는 있다. 피에르 바야르가 제시하는 예상 표절의 첫 번째 원리는 ‘불일치’다. 문학과 문학의 영향관계에서 예상 표절을 의심해볼 수 있는 상황은 두 작품이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 앞선 작품에서는 불완전하게 나타나는 반면 후대의 작품에는 풍부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다. 앞선 작품에서는 그것이 작품의 나머지 전체와 심히 어울리지 않거나 그 작가의 다른 작품들, 나아가 당시의 시대상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희소한 장면인데 비해 후대의 작품에서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특징이자 작가를 대표하는 독자적 개성으로 완성된다면, 과거의 작품이 미래의 작품을 예상 표절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것이 모파상과 프루스트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한 텍스트이고 부차적인 텍스트인지를 먼저 살펴야 하는데, 모파상의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인 ‘죽음처럼 강한’에는 여인의 옷자락에 희미하게 묻은 향수 냄새로부터 과거의 기억들이 한꺼번에 되살아나는 기억 작용이 파편적이고 미숙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모파상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인데 비해 30년 뒤 등장해 20세기 최고의 소설이 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아주 능숙하고 풍부하게 나타나면서 이른바 ‘마들렌 효과’ 혹은 ‘프루스트 현상’으로 불리게 된다. 두 번째 원리는 ‘소급성’이다. 독자들은 프루스트의 대표작에서 모파상을 감각할 수 없지만 모파상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에서 프루스트의 울림은 들을 수 있다. 프루스트를 읽으면서 “이건 모파상 같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도 모파상을 읽으며 “이건 프루스트 같은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있다. 프루스트가 이미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훗날 프루스트가 등장한 이후 프루스트를 읽은 독자들의 독서 경험에 의해 모파상은 비로소 프루스트의 예상 표절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프루스트를 읽고 난 뒤 모파상의 텍스트는 프루스트적으로 변화한다. 뜬금없이 예상 표절이라는 개념이 생각난 건 요즘 전 세계를 흥겨운 난리판으로 만든 로제와 브루노 마스의 ‘아파트(APT.)’ 때문이다. 사람들은 로제의 아파트를 신축으로, 윤수일의 아파트를 구축으로 부르는데 피에르 바야르의 논리를 단순 적용하자면 윤수일이 로제를 예상 표절했다고 할 수 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로제의 아파트를 듣고 난 뒤 변화한 윤수일의 ‘아파트’를 생각해보라.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라는 첫 소절 다음에 “으쌰라 으쌰 으쌰라 으쌰”라는 추임새를 넣는 게 윤수일의 아파트를 즐기는 대중적 향유방식인데, 로제의 아파트를 듣고 나서부터는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다음에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가 입에서 자동으로 발사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수험생도 아닌데 수능금지곡처럼 귀에 맴돌아 큰일 났다. 프랑스 문학비평가의 기묘한 이론까지 떠오르게 할 만큼 노래의 인기가 대단하다. 물론 로제와 윤수일의 사례는 예상 표절이 아니다. 예상 표절의 중요한 두 원리인 불일치와 소급성 중에서 소급성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윤수일이 로제를 예상 표절했다는 가설이 근거를 얻으려면 윤수일의 ‘아파트’가 그의 다른 음악들과 불일치해야 한다. 하지만 ‘아파트’는 윤수일의 음악적 정체성인 록 사운드와 도시적 감수성을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으니 불일치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어느 것이 중요한 노래이고 어느 것이 부차적인 노래인지를 따져 봐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로제의 시대지만 로제의 등장 전까지 ‘아파트’는 오직 윤수일이었다. 어느 아파트가 더 중요한 아파트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나에게는 하늘이 두 쪽 나도 아파트는 무조건 윤수일이다. 노래방에서 로제는 43681번이고 윤수일은 340번이다.

2024-12-02

질문하고 확인하며

김규인 수필가 불황의 골은 깊고 정치가 양극단을 달린다. 우리가 어떻게 할지 모를 때는 문제의 핵심을 파고드는 질문이 중요하다. 질문이 중요한 건 누구나 잘 알지만 실생활에서 질문하는 건 드물다. 질문하는 건 눈치가 없거나 분위기를 방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남을 의식하며 남의 말을 듣기만 한다. 심지어 학교 교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사와 학생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 오가는 가운데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이제까지 우리 교육은 주입식으로 학생이 일방적으로 듣기만 했다. 질문하는 학생이 있기는 하지만 그 수가 적다. 그나마 최근에는 체험학습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소통이 늘어나도 그러한 분위기는 여전하다. 물음에 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답을 주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질문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빠른 변화와 불확실한 미래에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신에 맞는 답을 찾아야 한다. 얼마나 정리되고 정제된 질문을 하는가에 따라 자신이 받는 답도 달라진다. 인공지능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책을 읽거나 지식을 갖추어 질문의 질을 높여야 한다. 인공지능에 대해 어떻게 질문하고 얻어진 답을 자신에 맞게 해석하는 것은 자신이 할 일이다. 좋은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사람이다. 깊이 이해하기에 문제의 핵심을 간추려 인공지능에 핵심을 말할 수 있다. 그냥 피상적인 이해만으로는 질문하기는 어렵다. 간혹 피상적인 질문으로 답을 얻었다면 그 답 또한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도 못하는 답일 수밖에 없다. 질문하고 답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에게 인공지능은 그동안의 부진을 만회할 기회이다. 수업 시간에 대화도 없이 선생님이 설명한 내용을 주로 듣기만 하는 학생들이 충분한 이해를 하는 건 어렵다. 학교와 가정에서 인공지능을 사용할 수 있다면 호기심 많은 아이의 궁금했던 것을 많이 물어볼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보의 수집과 정리를 인공지능이 대신해 주어도 이를 최종적으로 옳은 자료인지 판단하고 활용하는 것은 사람이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그 내용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이러한 판단력을 기르고 좋은 질문을 위해서라고 독서는 필요하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하여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독서는 무엇보다 필요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세계적인 불황과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트럼프가 차기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이스라엘과 주변국과의 전쟁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는 혜안을 얻기 위해서라도 인공지능과 가까이 지내며 힘든 시기를 이겨내었으면 한다. 본인이 힘든 시기를 이겨내고자 할 때 그 길은 반드시 열린다. 때마침 불어온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독서 인구의 확대를 가져온다. 또한 청년들 사이에서 일어난 텍스트 핏은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 길이 없을 것 같은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스스로 찾아내야만 한다. 인공지능에 질문하고 책을 통해 확인한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면 한류의 꽃은 계속 피어날 것이다.

2024-12-02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우리 삶에서 전기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다. 냉장고, 에어컨, 스마트폰까지 모두 전기로 작동한다. 그런데 같은 전기를 쓰는데도 대구와 경상북도가 똑같은 요금을 내는 게 과연 공정할까? 최근 논의되고 있는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는 바로 이런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먼저, 전력 자립률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쉽게 말해, 한 지역에서 사용하는 전기를 얼마나 자급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경상북도는 원자력, 태양광, 풍력 등 다양한 발전 시설이 있어 지난해 기준으로 자립률이 216%에 달한다. 경북에서 생산된 전기가 지역 내 소비를 넘어 다른 지역으로 보내지고 있다는 뜻이다. 반면, 대구광역시는 발전소가 거의 없어 자립률이 13% 수준에 불과하다. 대구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전기는 경북 같은 다른 지역에서 끌어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송전 비용이 발생하지만, 현재는 이런 차이가 전기요금에 반영되지 않고 모든 지역이 똑같은 요금을 내고 있다.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는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지역에 따라 다른 요금을 적용하겠다는 정책이다. 경상북도처럼 전력 자급률이 높은 지역은 요금이 낮아지고, 대구처럼 자급률이 낮은 지역은 요금이 다소 오를 가능성이 있다. 물론 대구 시민들 입장에서는 요금 인상에 대한 우려가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에너지 소비를 효율적으로 조정하고, 전력망 부담을 줄이기 위한 공정한 변화이다. 경북 주민 입장에서도, 지금처럼 다른 지역의 송전 비용까지 부담하지 않아도 되는 점에서 합리적인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은 이미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를 도입해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 영국은 전력을 많이 사용하는 런던 같은 남부 지역의 요금을 높게 책정하고, 전력을 생산하는 스코틀랜드 북부 지역은 요금을 낮게 설정했다. 이로 인해 송전망 부담이 줄어들고, 지역 간 전력 소비의 균형이 맞춰지고 있다. 이 제도는 단순히 전기요금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다. 탄소중립 실현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북처럼 재생에너지 발전이 활발한 지역은 전기요금 인하로 재생에너지 투자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대구 같은 전력 자립률이 낮은 지역은 에너지 절약을 유도받게 되어 전체적인 탄소 배출량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대구 주민들이 느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에너지 효율화 지원 정책과 취약계층을 위한 보조금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지역 간 전력 격차를 줄이기 위해 ‘스마트 그리드’ 같은 기술을 도입하는 것도 중요하다. ‘지역별 차등 전기요금제’는 단순히 요금을 나누는 문제를 넘어 공정하고 지속 가능한 에너지 사용을 고민하는 기회이다. 경상북도 주민은 재생에너지 확대의 선두주자로, 대구광역시 주민은 에너지 효율화의 선구자로 변화를 이끌어야 할 때이다. 전기요금이 달라지더라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변화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함께 만드는 공정한 에너지 사용이 탄소중립이라는 거대한 목표를 이루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2024-12-02

전남 강진 김영랑 시인의 기다림의 미학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첫눈이 대지를 온통 하얗게 뒤덮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첫눈이 폭설이라고 했다. 여기 경상도에서 누릴 수 없는 겨울 정경이다. 무덥던 한여름 태양의 열기와 꽃비에 젖은 봄이 있었던가 아득해진다. 전남 강진 출신 김영랑(본명 김윤식) 시인이 봄 그리워하는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불현듯 떠오른다. 1935년 무렵 김영랑은 우리 고유의 운율로 미묘한 심상을 그려낸 뛰어난 시인이었다. 그는 전라도의 토착적인 방언이 지닌 음악성을 살려내기 위해 방언의 소리와 리듬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시인이었다. 그의 시 ‘언덕에 바로누어’는 본래 제목이 ‘어덕에 바로누어였다. ‘어덕’은 경남과 충남 일부에도 쓰이지만 주로 전라남도 쪽에서 많이 사용되는 방언이다. 그의 초창기 시의 특색은 토착의 소리를 그대로 살려낸 음악성에 치중했고, 부드러운 가락에 영롱한 심상을 곁들인 거였다. 따라서 표준어로만으로 쓰면 그 의미 구조가 너무 투명해져 버려 재미가 반감된다. 여기서 김영랑이 의도적으로 방언을 쓴 까닭이 드러난다. 김영랑의 대표시라고 할 수 있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전문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즉 나의봄을 기둘리고 잇슬테요/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나는 비로소 봄을여흰 서름에 잠길테요/五月어느날 그하로 무덥든날/떠러져누은 꼿닙마져 시드러버리고는/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뻐쳐오르던 내보람 서운케 문허졋느니/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테요 찰란한슬픔의 봄을”(‘영랑시집’, 시문학사, 1935) 시간의 흐름 속 소멸의 미학을 노래한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읽을 때마다 이 시의 절절하고 유정한 시적미학에 나는 깊이 빠진다. 봄을 기다리는 시점은 아마도 지금과 같은 첫눈이 내린 겨울이 아닐까? 찬란히 핀 모란꽃이 낙화하는 꽃처럼 지고 난 시간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은 시인 이형기가 노래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분분한 낙화….”라는 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시는 시적 대상으로서의 ‘모란’과 시적 주제로서의 ‘나’ 사이에 일어나는 인연의 애달픈 별리라는 상실을 노래한 시이다. 화려한 봄을 잃어버리는 순간은 그냥 별리가 결코 아니길래 더욱 애달프다. 우리 인생에서도 가장 화려했던 봄날은 늘 과거에 묻혀 있다. 잊어버렸던 지난날의 추억이 소멸되는 순간에 느끼는 비애를 시의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 이 시에서 시적 의미를 고양시키는 중심은 바로 ‘기둘리고 잇슬테요’라는 전라도 강진 방언이다. 봄은 해마다 다시 회귀하지만 다시 찾아올 수 없는 사람의 봄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다. 그래서 아쉽고 슬픈 것이다. 그러나 다시 찾아오는 봄을 기다리는 이유는 바로 모란이 피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모란이 피어 있는 순간이 매우 짧듯이 화려한 인생의 봄 역시 결코 길지 않다. 그래서 이 시의 주체인 ‘나’를 서술하는 ‘기둘리다’. ‘(서름에) 잠기다’, ‘울다’ 가운데에서 열 번째 시행에 나오는 ‘우옵내다(울다)’를 주목해야 한다. 객체존대의 ‘-오-’는 주체존대의 ‘-시-’와 겹치는 ‘나’와 함께 ‘모란’도 울어 안타까움을 최고의 정점으로 끌어올린 셈이다. 시적 주체인 ‘나’와 시적 대상인 ‘모란’이 일체를 이루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떨어지는 모란을 보고 그 모란과 함께 다시 모란이 피어날 때까지 울면서 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三百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에서 ‘하냥’이 지닌 뜻의 절묘함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단어가 들어갈 자리에 표준어 ‘늘’, ‘항상’과 같은 부사로 대치해 보라. 전라도에서 사용되는 방언 ‘하냥’은 ‘함께’, ‘같이’라는 의미가 섞여있는 단순한 ‘늘’의 뜻이 아닌 주체인 ‘나’와 대상인 ‘모란’이 함께 같이 다시 꽃이 필 날을 가다린다는 시적 의미를 나타낸다. 시인 오세영은 “사투리 ‘하냥’은 그 뜻에 비추어 보거나 언어 음악성이라는 관점에서 ‘항상’, ‘언제나’ 혹은 ‘마냥’보다 훨씬 깊은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소리 그 자체에 아름다운 미학적 요소가 담겨 있다고 평했다. 이 시는 ‘하냥’ 덕분에 주체와 객체가 물아일체가 되어 상실의 봄을 기다리는 아픔을 노래하는 방언시의 절창이 될 수 있었다.

2024-12-02

종교개혁과 부르주아-인쇄술이 일궈낸 격변

“회개하고 회개하라! 누구나 회개하고자 기부금만 내면 모든 죄를 사할 수 있도다. 이곳 상자 속에 돈이 들어가는 순간에 들리는 ‘짤랑!’ 이 소리는 지옥의 불길에서 영혼이 솟아나게 하는 힘이도다!” 교황 레오 10세가 산피에트로대성당을 건축하는 데 든 빚을 갚지 못하자 면죄부를 팔면서 부르짖는 소리다. 당시 사제들은 오랜 종교 권력에 취해 하느님의 중재자로서, 내세관의 선도자로 자처하면서 기득권에 정신이 팔려 세태를 바로 읽지 못했다. 때마침 인쇄술의 발달과 동방으로부터 제지술이 이입되면서 성서가 인쇄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경의 교리를 독점하던 성직자의 엇나가고 왜곡된 해석은, 일반인에게도 읽히면서 편견과 오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상이 발전하면 민심도 눈을 뜨게 된다. 이때 세계사에 짠! 하고 등장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정문에 라틴어로 된 ‘95개조 의견서’를 내걸었다. 일종의 대자보인 이 글은 상상 이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글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마침내 인쇄가 되어 15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고, 16세기 구텐베르크의 혁신적 인쇄기술이 뒷받침되면서 유럽 전체로 불길처럼 번져갔다. 그는 하느님과 시민 사이에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배제되고, 단지 기도와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혁신적인 종교 교리가 사람들 마음을 움직였다. 루터가 기존 성직자들을 향해 도덕적 타락이라는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던 것이다. ‘교회는 지상의 질서와 하느님 사이에 있고, 사제는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는 기존 가톨릭 성직자의 입장을 정면으로 거부했다. 반면 루터는 만인사제설(萬人司祭說),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두가 사제란 뜻으로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할 때 구원의 가능성이 커진다고 주장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쳐졌던 장막이 거둬졌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사제나, 신부, 목사가 되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지금까지 독점했던 성직자의 행태를 지적하고 나섰다. 당시 루터의 종교개혁을 비약하자면 또 하나의 인간 해방이었다. 종교개혁 불길은 독일지역 제후들의 바람과도 맞아떨어졌다. 로마교회의 영향 아래 세금을 바치는 데 대한 불만이 팽배했던 이들은 독자적인 권력을 추구하고자 했다. 루터는 기세를 몰아 ‘독일의 귀족들에게 고함’이라는 서간문을 발간한다. 게르만의 귀족과 왕권 보호를 확립고자 하는 세력들이 적극적으로 옹호하면서 종교개혁의 성공이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한 것은 그가 혁명적인 교리를 주장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 사상을 당대의 역사적 사회사적 상황에 맞추어 새롭게 재해석했기 때문이다. 종교에 관한한 개개인의 독립성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개인의 자유가 존중되는 근대주의의 영향이었다. 마르틴 루터와 더불어 종교개혁에 앞장선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의 노력도 있었다. 그는 내세보다 현세의 실생활 존재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아담의 원죄를 대신해 울며 흐느끼는 것이 다가 아닌, 프로테스탄티즘, 대중적인 복음주의의 가치를 강조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지하세계를 약탈해 하와와 아담을 구해온 것으로 원죄에서 벗어났다는, 현실 세계에서의 삶에서 하느님을 위한 성찰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칼뱅주의는 전통적인 가톨릭 사상과는 확연히 다른 것으로서,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근대 자본주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칼뱅이 주장했던 ‘예정설’은 하느님 나라에 갈 사람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부(富)는 성실한 삶에서 자연히 따라오는 후속적인 것, 자신을 위해 부를 사용하기보다, 사회와 교회를 위해 축적한다. 신이 내린 재능을 증명하기 위해 돈을 번다. 부가 쌓여갈수록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증명서가 되고, 자신의 가치를 하늘에 드러내는 일종의 종교의식에 의한 사업추진이었다. ‘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가 부와 도덕 간의 대립을 부정하면서 부자들에게 천국의 문을 열어준 것과도 통한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파이를 늘려 골고루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부자가 사회에 가장 쓸모 있고 인정 많은 사람이란 의미다. 이러한 종교적 생활관은 이윤추구 자본주의 사회에 활력을 제공했다. 기업이 비대해지고, 중산층 권력의 부르주아가 나타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심이 사라지고 부의 권력화 세습화, 남에게 군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지만, 초기 자본주의는 이렇게 생겨났다. /박필우 스토리텔링 작가

2024-12-02

정치권의 치킨 게임, 책임은 안 지나

김진국 고문 미친 짓이다. 여의도에 정치는 없다. 상대를 죽이려는 전쟁만 있다. ‘치킨게임’이 있다. 자동차가 전속력으로 마주 달린다. 그대로 달리면 두 자동차 운전자가 모두 죽는다. 공포를 이기지 못한 운전자가 옆으로 피하면 ‘치킨’(겁쟁이라는 뜻)이 된다. 둘 다 버티면 목숨을 잃게 된다. 이런 미친 게임은 없어졌다. 학술용어로나 쓰인다. 그런 치킨게임이 여의도에서는 벌어진다. 정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기술이다. 타협과 양보가 미덕이다. 여의도는 완전히 거꾸로다. 공멸뿐이다. 문제는 국민이 피해자라는 사실이다. 치킨게임은 미친 짓을 한 사람이 책임진다. 정치인들의 치킨게임에서는 본인들이 멀쩡하다. 마주 달리는 건 정치인들인데, 피를 흘리는 건 국민이다. 무슨 나라 꼴이 이 모양인가. 솔로몬의 재판에서는 자기 욕심보다 아이의 안전을 걱정하는 사람이 진짜 부모다. 여의도와 용산에서 국민을 더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지 의문이다. ‘법대로’가 문제다. 상앙과 이사가 한국 정치를 장악했다. 대통령도, 야당 대표도, 여당 대표도 모두 법률가다. 법은 정치를 풀어가는 마지막 수단이다. 정치로 풀 것을 법에 넘기면 직무 유기다. 조금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오기다. 양보하느니 함께 죽겠다는 무모함이다. 법은 최소한이 규칙이다. 법으로 다 풀 수 없다. 정치가 필요하다. 그런데 서로 ‘내 권한’만 내세운다. 대통령은 국회 인사청문회가 청문 보고서를 채택하건 말건, 후보가 부적격이라고 하건 말건, 임명장을 준다. 대통령이 귓등으로도 안 들으니 절대다수 야당도 아무 고민 없이 무조건 부적격 판정을 내린다. 민주당은 국민의힘 의견을 들어보려고도 않는다. 법안을 결정하고, 청문회를 결정하고, 증인을 소환하는 일은 혼자서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을 설득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거부권을 행사하면 된다는 배짱이다. 미국 대통령은 배짱이 없어 야당 의원에게 전화하고, 백악관으로 초청해 밥을 먹나. 자신의 정책을 뒷받침할 법률과 예산도 통과하지 못한다. 애먼 국민만 피해다. 대통령의 공천 개입이 논란이다. 언제는 대통령이 당무에서 손을 뗐었나. 민주당 정부라고 달랐나. 어림도 없는 소리다. 여론도 무시한다. 지지율이 바닥을 쳐도 모르쇠다. 야당은커녕 국민에게 사과도 해명도 거부한다. 탄핵하려면 해보라는 배짱이다. 국민의힘 대표들을 줄줄이 쫓아냈다. 권위주의 시절 당총재를 능가한다. 민주당은 한술 더 뜬다. 이재명 대표 관련 사건을 수사한 검사들을 무더기로 탄핵 소추하더니, 이제 감사원장까지 탄핵한다고 한다. 입에 올리는 것도 조심하던 탄핵이 감초 다루듯 한다. 21대 국회에서 13건, 22대 국회 들어 11건을 소추했다. 탄핵은 헌법재판소가 결정한다. 그렇지만 국회가 소추만 해도 직무가 정지된다. 엄연한 사법 방해다. 감사원이 지난 정부가 벌인 일들을 감사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경제통계 조작, 사드 배치 지연, 북한 GP 철수 부실 검증, 탈원전정책…. 감사원의 국정 바로잡기에 제동을 걸려고 또 탄핵이다. 김건희 여사 문제는 핑계다. 방송통신위원장은 일을 하기도 전에 임명하자마자 바로 탄핵을 추진했다. 이제 직무대행까지 탄핵한다고 한다. 2인 방통위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국회몫 방통위원은 추천하지 않는다. 방통위를 마비시키려는 의도다. MBC 등 공영 방송의 운영체계를 민주당에 유리하게 유지하겠다는 욕심이다. 내년 예산안에서 대통령비서실·검찰·경찰·감사원 특활비를 모두 삭감했다. 정부 예비비도 절반인 2조 4천억 원을 깎았다. “헌법이 보장한 대로” 심사했다고 한다. 지난 정부가 임명한 공공기관의 임원들이 윤석열 정부 임기가 절반이 지나도 버티고 있다. 대통령이 오른쪽으로 가는데, 공공기관은 왼쪽으로 간다. 정부가 마비되면 대통령 책임이다. 법대로만 하면 책임이 없나. 민주당이 소추한 탄핵안이 줄줄이 헌재에서 기각됐다. 정부 기능이 마비된다. 치킨게임은 미친 짓이다. 그래도 그들은 자기 목숨을 건다. 국민을 걸고 치킨게임을 벌이는 정치인은 비겁하다. 무모한 탄핵이 기각돼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12-01

내수경제 살려야

우정구 논설위원 내수경제(內需經濟)를 줄여 내수라 부른다. 국가와 민간에서 시행하는 소비와 투자 등을 총칭하는 경제 용어다. 한 국가 내에서 판매나 소비를 목적으로 만들어 낸 상품을 우리는 내수상품이라 부른다. 내수가 큰 국가들은 수출이 잘되지 않아도 국내시장만으로 국내기업의 생산제품을 소비해 낼 수 있다. 산업구조와 국가의 경제체력이 튼튼한 나라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세계적 불황이 오더라도 내수가 경제를 뒷받침 해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민간내수 규모가 작년기준 8437억달러다. 세계 15위 정도로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그러나 GDP 대비 내수시장 규모는 OECD 국가 중 낮은 편이다. 수출주도형 성장을 한 탓이다. 우리의 주요 수출국인 미국이나 중국 등의 경기가 나빠지면 우리나라 경제가 바로 직격탄을 맞는 이유다. 한국은행이 예상을 깨고 기준금리를 또다시 인하했다. 금융통화위원회는 금리 인하 배경에 대해 “성장의 하방압력이 증대되고 있어 기준금리를 인하해 경기 하방 리스크를 완화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국내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금리를 내려 시중에 돈이 돌게 하고 소비와 투자를 살려 보겠다는 뜻이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3분기 가계동향에 따르면 실질소득은 전분기보다 2.3% 늘었으나 소비지출은 1.4% 증가에 그쳤다. 경기침체 불안감으로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의미다. 내수 부진속에 트럼프발 관세 폭탄으로 수출전망도 밝지 않다. 내수경제를 살리기 위한 당국의 똑똑한 대책이 절실한 상황이다. 내수침체로 가장 고통받을 사람은 서민층이기 때문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2-01

착한 사람 증후군

김규종 경북대 명예교수 며칠 전 대구의 어떤 도서관에서 ‘영화로 가족 갈등 풀기’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고해(苦海)의 세상에서 우리에게 심각한 정신적 갈등을 경험하게 하는 대표적인 인간관계는 가족이다. 가장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원초적인 분노와 불만, 짜증 같은 파괴적인 감정을 가족 구성원에게 노골적(露骨的)으로 표출하기 때문이다. 가족 갈등을 다룬 영화 ‘스트레이트 스토리’(1999),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 ‘혼자 사는 사람들’ (2021) 세 편을 골랐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각자의 갈등과 상처, 충돌과 대결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살핌으로써 우리의 삶과 연결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강연 말미(末尾)에 마련한 질문 시간에 60대로 보이는 여성의 물음이 인상적이었다. 요약하자면, 그분은 남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다. 타자의 고충이나 곤경을 외면할 수 없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뒤로 한 채 열일 젖혀두고 남을 돕느라 진이 빠져버린 사람들이 적잖다는 얘기다. 중년 여성들 가운데 이런 사람이 많이 포진해 있다. 친정이든 시댁이든 혹은 친구든 이런 증상을 가진 사람은 여리고 착한 심성 때문에 ‘안 돼요, 못하겠어요, 나도 힘들어요, 시간 없어요’라는 말을 감히 꺼내지 못한다. 그들 심성 깊은 곳에는 이른바 ‘착한 사람 증후군’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의 말이나 부탁을 잘 들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버린 경우를 ‘착한 사람 증후군’이라 한다. ‘착한 사람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형제자매가 아프거나,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경우, 강압적이며 도덕적인 행동을 강요한 부모 아래서 성장한 이들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 말씀 잘 듣는 착한 어린이로 자라다가 성장한 다음에도 타자의 육체적 고통이나 물질적 괴로움을 외면하지 못해 ‘타의적(他意的)’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불만이나 불편을 꾹꾹 눌러 참으며,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쉽게 상처받으며 한번 받은 상처도 오래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남을 위해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참아가며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이 습관처럼 그들 몸에 배어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까지 늘 그래 왔는데, 갑자기 바꿀 수는 없지, 하며 자신의 괴로움을 뒤로 한 채 남들의 요구와 부탁에 하루-한 달-한해를 탕진해온 것이다. 나는 그분에게 세상의 중심에 당신을 세우시라고 말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 있는 존재지만, 관계의 핵심에 있는 사람은 남이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사라진 세상은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하늘에 빛나는 해와 달과 별도 우리가 그들을 보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사람은 남들에게 전연 무관심하다. 부모 자식, 형제자매, 친구도 그렇다. 나를 중시하고, 나를 사랑하며,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착한 사람 증후군’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다.

2024-12-01

ISO 인증의 지름길, VM 활동

장광일 포스코 인재창조원 교수·컨설턴트 우리나라 속담에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필자가 기업 컨설팅 시 현장진단 후 그 결과를 최고 경영층에 보고할 때 이 말에 대해 공감한 적이 많다. 설비 문제점에 대해 말로 논리 있게 설명할 때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던 사장은 설명 없이 문제가 적나라한 사진 한 장을 보여 주면 바로 반응하여 어떻게 하면 사진 속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물어보는 사례를 종종 보았다. 이처럼 사진 한 장의 위력은 대단했다. 문헌에 따르면 ‘귀로 들은 것은 사흘 뒤 10%만 남지만, 눈으로 본 것은 60%가 남는다고 한다’. 인류의 역사는 ‘눈에 보이는’ 만큼 발전해 왔다. 인간은 시력을 보완하기 위해 렌즈를 발명하였고, 시야를 확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개발하여 멀리 있는 사물을 볼 수 있는 망원경을, 아주 작은 것을 볼 수 있는 현미경을 발명하였다. 이런 도구는 비약적인 인류문명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제는 현실을 넘어 가상의 세계로 눈의 영역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동물들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환경에 적응하며 독특한 시각 능력을 발전시켜 왔다. ‘360도 시야로 위험을 빠르게 감지하는 메추라기’, ‘독립된 눈의 움직임으로 포식자를 피하고 먹이를 찾는 카멜레온’, ‘인간보다 8배의 시력으로 멀리 떨어진 작은 먹이를 쉽게 찾는 매’, ‘어두운 밤에 사냥하는 뛰어난 야간 시력을 가진 올빼미’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필자는 최근 ISO 9001 인증 심사원 자격 취득을 위해 학습을 하면서 ISO(국제 표준화 기구·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의 모든 제반 사항이 필자가 기업에서 컨설팅하고 있는 ‘바람직한 VM( Vi sual management) 현장 만들기’ 활동과 일치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눈으로 보는 관리란, 회사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이 눈으로 업무의 추진 상황이나 현장의 설비가 정상인지, 이상이 있는지를 즉시 판단하여 이 상에 대해 그 대책을 세우는 것이다. ISO 인증을 통해 중소기업이 글로벌 강자로 부상할 수 있지만, 필자는 인증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표준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현장에 적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고, ISO 그 핵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VM활동 기본의 실천이다. ISO는 제품, 서비스 및 시스템의 품질, 안정성 및 효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중요한 위치에 있으며, 다른 시각에서 보면 세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투명 시스템이라는 점에서 ISO는 기업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회사를 투명하게 경영하기 위해서는 기업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현장을 잘 볼 수 있는, 즉 눈으로 보는 관리가 실현된 현장을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사람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눈이라고 하는 감각기관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눈으로 보는 관리(VM활동)를 도입, 추진하여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도약하길 기대해 본다.

2024-12-01

포괄적 협약과 강력한 협약을 넘어서

유영희 작가 플라스틱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걸레 대신 손쉽게 뽑아 쓰는 물휴지도 플라스틱이고,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일회용 컵과 빨대도 모두 플라스틱이다. 포장재 원료도 모두 플라스틱이다. 플라스틱은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하지만 후유증도 크게 남긴다. 플라스틱 빨대가 바다로 흘러 들어가 입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거북이 사진을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1회용 플라스틱 용기만 따져봤을 때 충남대 장용철 교수팀이 그린피스와 공동연구한 결과를 보면, 2020년 1회용 플라스틱 용기 생산량은 87만 톤이었는데 이런 추세로 가면 2030년에는 647만 톤이 될 것이라고 한다. 2022년 발표한 환경부와 한국환경공단의 자료에 의하면, 2021년 한국의 플라스틱 총생산량은 대략 1천2백만 톤이다. 노현석 부산환경운동연합 활동가의 기자회견을 보니, 세계적으로 매년 4억 톤 이상의 플라스틱 제품을 생산하는데, 이중 약 9%만 재활용될 뿐이고, 1200만 톤 이상이 바다로 흘러간다고 한다. 플라스틱의 문제가 이렇게 심각하다 보니, 플라스틱 생산을 줄이자는 국제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2022년 유엔 소속 국가들이 모여 ‘국제 플라스틱 협약’을 결성했다. 작년까지 모두 4회에 걸쳐 플라스틱 생산량 줄이기 협약을 논의했고, 그 마지막 다섯 번째 회의가 11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리고 있다. 이 회의에는 유엔 소속 170여 개국의 정부 대표단과 시민사회 단체들, 그리고 산업계가 참석하는데, 우리나라는 환경부, 외교부, 산업부, 해양수산부 등 다양한 부처에서 대표단을 구성했다. 문제는 지금까지 회의 성과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플라스틱 문제 해결을 둘러싸고는 크게 대립하는 쟁점은 플라스틱의 원료가 되는 ‘폴리머’의 생산을 어떻게 규제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플라스틱 국제 협약 우호국 연합’(HAC)에 속한 유럽과 한국은 폴리머 감축에 찬성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등 산유국이 중심인 ‘플라스틱 지속가능성을 위한 국제연합’(GCPS)은 생산규제보다는 재활용과 폐기물 관리를 주장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한국의 입장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이다. 플라스틱 감축을 주장하는 우호국에 속하면서도 사실은 산유국의 입장과 비슷하다. 김완섭 환경부 장관은 지난달 25일 부산 벡스코에서 기자간담회를 통해 “획일적인 플라스틱 감축보다는 단계별 접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포괄적 방식으로 협의하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환경단체는 강력한 협약을 주장한다. 플라스틱 감축을 구체적인 수치로 설정하고, 플라스틱 재사용을 체계화하며, 관련 산업 종사자와 지역사회가 피해 보지 않게 공정한 변화를 보장하라는 것이다. 플라스틱 생산을 줄이면서 관련 산업 종사자가 피해를 보지 않으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아무래도 포괄적 협약에서 주장하듯이 단계적, 다각적 접근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강력한 협약에서 주장하듯 구체적인 단계도 수치로 설정하고 재사용도 강제해야 한다. 애매한 표현으로는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2024-12-01

경주, 세계를 품다… 2025 APEC 성공의 길

주낙영 경주시장 내년 10월말, 경주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의 주무대가 된다. 전 세계 주요 국가의 지도자들이 모이는 이번 국제회의는 경주를 단순한 개최 도시를 넘어 세계와 소통하는 중심 도시로 도약시킬 기회가 될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경주시 대표단은 지난달 14일부터 24일까지 페루를 방문해 제31차 APEC 정상회의 준비상황과 운영실태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정상회의가 열린 리마컨벤션센터(LCC)와 국제미디어센터 등 주요 시설을 점검하였고, 각료회의 등 연계행사가 열린 아레키파와 우루밤바를 방문하여 지방도시가 이를 어떻게 지원했는지 실질적인 조언과 교훈도 얻었다. 페루는 APEC 21개 회원국 중 유일하게 세 번이나 정상회의를 개최한 나라로서, 이번 정상회의 기간 3일을 아예 국경일로 지정하여 총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현장방문과 주요 인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귀중한 경험과 노하우를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해 준 페루 외교부 관계자들께 감사를 드린다. 이번 페루 방문에서는 경주시가 자체 개발한 환경기술인 ‘GK-SBR 공법’을 소개하는 기회도 가졌다. 이 공법은 2022년 환경부로부터 신기술 인증을 받은 첨단 하수처리 기술로서, 비용 대비 처리 효율성이 높은 녹색환경 기술이다. 이 기술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그 효용성을 널리 인정받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콜롬비아 등에 이미 수출되고 있으며 페루 리마시 공원관리청장이 경주를 직접 방문하여 이 기술을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협의가 진행 중에 있다. 이번 방문에서 리마, 아레키파, 우루밤바 시장을 직접 만나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결과, 경주의 앞선 환경기술이 페루 등 남미의 환경 문제 해결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긍정적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해외에 나가보면 한국의 이미지와 평가가 매우 높은데 내년 경주 APEC 정상회의는 한국의 첨단기술과 문화역량을 세계에 과시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내년 행사에는 각국의 정상들뿐 아니라 각료들, 특히 세계적인 CEO들을 많이 초청하여 경제올림픽으로 치르고자 한다. 이번에 페루에서 만나 뵌 윤석열 대통령도 이 점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경제적 실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APEC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셨다. 이에 경주에서는 단순히 회의뿐 아니라 대규모 투자통상박람회가 열릴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의 첨단기술과 제품을 보여주는 산업전시관을 짓고 특히 경주에 본사를 두고 있는 (주)한수원은 이번 행사를 SMR과 K-원전 홍보의 호기로 적극 활용할 계획이다. 또한 다채로운 문화예술 공연과 전시도 연중 열어 K-컬처의 뿌리가 경주임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이처럼 2025 APEC 정상회의는 경주가 단순한 ‘관광 도시’ 이상으로 국제적 협력과 교류의 중심지가 될 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세계 정상들이 경주에 모였을 때, 경주는 회의 장소 이상의 역할을 하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도시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2025 APEC 정상회의는 경주에 경제적 성과뿐만 아니라 도시 브랜드 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과거 베트남의 다낭과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이 APEC 회의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얻은 것처럼 경주의 이름도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될 것이다. 또한 역사문화도시를 넘어 미래지향적이고 첨단산업을 갖춘 국제도시로 성장하는 중요한 발판이 될 것이다. 경주시는 2015 세계물포럼 등 대규모 국제행사를 성공적으로 개최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 정상회의 준비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마침 APEC 지원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더 많은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역대 가장 성공적인 행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일이다. 2025 APEC 정상회의는 단순히 일회성 국제행사가 아니다. 경주가 지속 가능한 발전과 미래를 선도하는 글로벌 도시로 나아가는 중요한 이정표다. 세계와 교류하며 가능성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에서 시도민 모두가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성과를 만들어 나가야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도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력이 필요하다. 이제 세계는 경주와 경북을 통해 대한민국을 보게 된다. 친절, 질서, 청결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실천함으로써 선진 대한민국의 품격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책무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역사적 도전이자 보람이기도 하다.

2024-12-01

들어내지 못한 말이 있지

이희정 시인 인테리어 기본 요건은 자리를 바꾸고 요소를 덧대는 게 아니라 들어내는 것이라고, 더 좋은 관계를 바란다면 관계에서 나와야 할까 그렇다고 고라니처럼 고속도로로 뛰어들어선 안 된다 분갈이 하는 아저씨는 흙을 더 채우는 게 아니라 뿌리에 있던 흙을 털어내고 있었다 숨 쉬게 한다고 했다 언니가 없으면 독방을 차지할 거라 기대했지만 나 먼저 들어낼 줄은 나도 몰랐듯이 들어내도 나가지 않는 게 있고 다 알면서 들어낼 수 없는 것도 있다 고라니가 잘못 뛰어든 곳은 고라니가 들어낸 길이었을까 들어내지 못한 길이었을까 ―이규리, ‘들어내다’전문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2014)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언어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 어떤 언어는 나를 떠나가고, 어떤 언어는 내가 놓아버리고, 어떤 언어는 내 곁에 남는다. 그것이 누구로부터, 무엇으로부터, 그 누구로부터든 말이다. 여기 이규리 시인의 ‘들어내다’는 시의 언어를 담보로 고라니의 언어를 빌렸다. 다시 말해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는 것을 시(詩)라고 부를 때, 고라니가 증언해야 하는 길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이 시의 미덕은 별 어려운 말도 없이, 어려운 비유도 없이,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것에 있다. 시가 진행되면서 ‘들어내는 것’과 ‘들어내어지는 것’의 인식의 도약이 이루어진다. “고라니가 잘 못 뛰어든 곳”이라는 다소 이질적인 사건이 외려 평범한 차원으로 치환되는 발견과 함께 이규리 시인의 삶의 태도 또한 최선의 언어가 된다. 때로 우리는 어떤 관계에서 나와야 할 때가 있지 않은가. “분갈이 하는 아저씨가 뿌리를 숨 쉬게 하기 위해 흙을 털어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 때일지라도 “고라니처럼 고속도로를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시인의 언어이다. 이를테면 “독방을 차지할 거란 기대와 달리 외려 자신이 들어내어 질”때 적절한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들어내어진’ 고라니의 언어들이 갈 수 있는 선택지가 고속도로가 될 수도 있다는 위험성에 있다. 가령 이규리 시인의 ‘시의 인기척(난다, 2019)’이란 산문에는 이런 정황을 예시하는 구절이 있다. “평소 순한 짐승이 난폭해지는 건 환경이 맞지 않다는 증거다. 그 난폭성을 내부로 돌리는 자학 또는 자해란 보통 선량한 사람이 선택하는 방법이다.” 또 이런 대목은 어떤가. “목줄을 놓친 개 주인과 목줄을 놓아버린 개 주인은 다르다. 진실 공방은 무의미하다. 자의와 타의, 거짓과 진실은 서로 바꿔치기기가 가능하다” 다시 최선을 다해 들어내 보기로 하자면 “어떤 회복은 원상복귀가 아니라 절단과 정리”가 맞을 것이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마음을 다치지 않으면서도 실은 냉철하고 매운 언어로 들어낼 수 있는 인테리어의 언어가 있을 법도 하다. 다독이면서 온화하고 속 깊은 성찰을 부드럽고 매운 화법 안에 담아내는 이규리 시인이라면 어떤가. “들어내도 나가지 않는 게 있고, 다 알면서 들어낼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언어는 몸을 갖고 있어서 말과 행동은 유리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당신과 나에 대해 최선을 다한 시인의 언어라면, 그것은 사람을 대하는 진정 어린 삶의 태도에 있지 않을까. 마치 시인의 언어는 도마뱀의 꼬리처럼 쉬이 잘려 나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고 몸인 것처럼 말이다. “고라니가 잘못 뛰어든 곳은 고라니가 들어 낸 길이었을까 / 들어내지 못한 길이었을까”

2024-12-01

“경북 영주여, 아침밥상을 책임져라!”

신광조​​​​​​​사실과 과학 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 나의 취미는 김삿갓이나 김시습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달처럼, 별처럼 흘러간다. 영주는 내가 좋아하는 부석사로, 자주 들러도 질리지 않는 곳이다. 만추 여행은 혼자 떠나는 게 제격이다. 산천을 해찰하다가, 근처 시장 주막집이나 옛맛 내는 식당에 앉아 배낭에 넣어둔 시집을 꺼낸다. 그리고 그 지역 시인의 시를 읽고 노래도 부른다. 얼마 전엔 풍기 오일장에 송이 냄새를 맡고 싶어 다녀왔다. 평안도 출신이 창업해 2대째 50년을 이어온 ‘서부냉면’에도 들렀다. 서부냉면은 돌아가신 할머니가 손으로 맷돌로 메밀을 갈아 썼는데, 지금은 며느리가 물려받은 맷돌을 전기로 돌리고 있다. 진한 육수는 닭과 소고기를 사용한다. 전국 어디든 소고기가 맛나지 않은 곳이 없지만, 영주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고 뛰어노는 소들에게서 얻은 소고기가 가장 뛰어나다. 면발은 쫄깃하고, 곁들여 나온 열무김치는 담백하다. 무엇보다도 양념이 과하지 않아 순수한 맛이 돋보인다. 나그네의 허전함을 달래 줄 게 무엇이 있겠는가? 증류주의 강자라 불리는 ‘안동소주’를 한 병 주문한다. 깔끔한 맛이 여운도 안남기고 목젖을 타고 넘어간다. ‘그리운 부석사’라는 정호승의 시집을 꺼내 읽는다. 경상도 출신이지만 시만 보면 사삭스러운 전라도 출신 같다. “…./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눈물 속에 절하나 지었다 부수네….” 어둠이 깔리자 발걸음을 부석사로 옮긴다. 절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풍경(風磬) 소리는 사랑에 빠진 연인의 밀어다. 저 풍경은 불에 달군 쇳조각을 망치로 두드린 후, 차가운 물에 식혀 삼가는 마음으로 세상에 내놓았던 작품이었을 것이다. 그 소리에 마음을 가다듬는다. 영주는 ‘삼홍삼백’이라 불릴 만큼 특산물이 풍부하다. 특히, 고기와 사과, 감의 삼홍과 인삼, 쌀, 인견의 삼백이 유명하다. 땅이 기름지기 때문이다. 술에 취하니 이른 아침 출근하는 남편의 식사를 준비하느라 가슴 졸이는 아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세상에서 사람의 건강에 가장 좋은 식품은 계란이다. 완숙보다는 반숙 이하가 좋다. 비릿하다면 들기름을 한 스푼 넣어 먹으면 된다. 여기에 사과 한 알, 사과가 싫으면 토마토를 삶아 같이 드시면 만사 오케이다. 그래도 허전하면 영주 쌀로 만든 인절미나 시래기나 시금치 된장국을 곁들이면 좋다. 달걀 2개씩만 매일 먹어도 의사들의 얼굴이 노래진다. 상자 안에 가두어 키운 닭보다 자연 방목한 닭이 낳은 달걀이 훨씬 좋다. 다만, 자연 방목 닭을 키우는 건 쉽지 않다. 족제비나 살쾡이 같은 외부 동물 침입이 문제인데, 진돗개를 훈련 시켜 경비를 서게 하면 된다. 곤충산업까지 함께 육성하면 세계 최고 달걀을 생산할 수 있다. 영주 노인들의 부업이나 취미로도 적합하다. 큰돈 벌이는 아니어도 손자들 학용품 사줄 정도는 된다. 야트막한 야산을 활용해 저밀도로 닭을 키우고 전국에 달걀을 아침 식사용으로 배달하는 거다. 국민들에게 선물하면 전 국민이 건강해지고, 사과 판매량도 늘어난다. 복날 여름에는 풍기 인삼과 달걀을 낳는 토종닭도 함께 드린다. 영주시민들의 땀방울로 전 국민이 건강 걱정 없이 살아간다.

2024-11-28

비혼 출산… 당신 생각은?

우정구 논설위원 모델 문가비가 낳은 아들의 친부가 영화배우 정우성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비혼 출산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비혼 출산이란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아기를 출산을 하는 것을 이르는 말로 한국사회에서는 아직은 익숙지 않은 용어라 할 수 있다. 2023년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혼외 출생아 수는 1만900명인 것으로 조사됐다. 전체 출생아 수의 4.7%다. 100명 중 4∼5명이 아버지가 없는 아이들이다. 1981년 관련통계를 작성한 이래 가장 많은 수치라고 한다. 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인 OECD 국가의 평균 혼외 출생률 41.5%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아주 미미하다. 2020년 기준 비혼 출생아 비율은 프랑스가 62.2%로 가장 높았고, 영국 49%, 미국 41.2%, 호주 36.5% 등으로 조사돼 있다. 한 여론조사에서 비혼 출산에 대한 사회인식은 2008년에는 78.6%가 반대 의사를 보였고 2020년에는 69.3%가 반대한다고 했다. 반대 의견이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부정적 인식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젊은층을 중심으로 비혼 출산에 대한 인식의 변화 조짐이 보인다. 통계청이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20~29세 청년층에서는 결혼하지 않아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비율이 42.8%로 나타났다. 부부를 가족의 기본단위로 보는 우리사회 인식의 변화란 점에서 주목할만한 결과다. 우리는 비혼 자녀에 대한 부정적 사회인식과 복지와 같은 사회적 시스템이 OECD 국가 수준에 못미치고 있다. 배우 정우성의 케이스로 본 비혼 출산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우정구(논설위원)

2024-11-28

상식이 실종된 사회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특정 사회나 문화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기본적이고 공통적인 지식이나 가치관을 상식(常識)이라 한다. 이는 개인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이해와 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바람직한 상식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먼저 각 사회의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 등 교육과 학습을 통해서 올바른 지식을 습득하고, 소속집단 내에서의 합의와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서 공동체의식도 함양해야 한다. 물론 시대적 변화에 따라 상식의 양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상식이 통하지 않는, 상식이 실종된 사회라는 우려가 높다. 특히 정치인들의 파렴치하고 몰상식한 행태는 사회전반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온갖 가짜뉴스와 감언이설로 국민들을 현혹하고 선동하여 확증편향에 빠진 맹신적 추종자들이 정치적 팬덤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곧 사회의 양극화를 초래하고, 이념대립과 진영논리가 상식을 파괴하고 법치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극단적인 정치세력의 편향된 논리는 법조계, 교육계, 언론계, 종교계, 예술계 등 각 분야를 잠식해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 막힌 사회를 만들고 있다.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고위층이나 지식층 인사들의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언행이 사회전반에 가치관의 전도와 인식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판에 난무하는 적반하장, 내로남불, 후안무치는 이제 버젓이 상식인 양 횡행하고, 사회정의와 질서의 보루인 사법부도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재판절차와 판결로 양식 있는 국민들을 경악케 하고 있다. 법학교수였던 자가 법을 무시하는 언행을 예사로 하고, 성직자란 자들의 최소한의 도의도 갖추지 못한 행태도 비일비재한 사회현상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상식의 혼란과 위기가 오는 것은, 지나친 개인주의와 정치·사회적 분열로 공통된 가치와 규범을 약화시키는 경우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잘못된 정보가 상식처럼 퍼져서 혼란을 가져오는 경우를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공공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이기주의적 행동과 경제적·정치적 불평등으로 상식의 기반이 되는 신뢰와 공감을 훼손하는 것도 원인이 된다.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를 위해서는, 우선 교육과정을 통해 공감능력과 도덕적 판단력을 기르는 학습을 강화해야 하고, 법과 제도를 통한 공정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어 상식이 작동할 기반을 마련해야 하며,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문화를 확산해야 한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미디어 환경과 허위 정보에 대한 강력한 대응도 필요하고, 지역 단위에서 공동체의식을 키우고 공통된 가치관을 공유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무엇보다 국민 각자가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건강한 상식을 가질 때 보다 밝고 안정되고 풍요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바로 서고, 언론과 종교가 제 구실을 하며, 법치가 확립 되어야 한다. 그런 선순환의 회로가 잘 작동해야 선진사회로 간다.

2024-11-28

봉좌마을 분옥정(噴玉亭)

윤영대 전 포항대 교수 포항시 북구 기계면의 봉좌산 기슭에 있는 분옥정도 지난 8월에 보물로 지정되었다기에 찾아봤다. 기계읍을 흐르는 기계천 옆길을 따라오다 보면 울창한 기계숲 맞은 편에 분옥정(噴玉亭)이란 표석이 있다. 다리를 건너 사과밭 사이 도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서면 폐교된 기남초등학교 자리에 농촌체험센터가 있고 한참 올라가면 아담한 마을 끝에 분옥정이 자리하고 있다. 안내문을 읽고 고택 마당으로 들어가니 400년 된 노송과 모양 좋은 향나무가 맞이하고 한시비(漢詩碑)를 지나 들어간 넓은 잔디밭에는 일암정(逸菴亭)이 있고 오른쪽에 낡은 정자가 있어 개울까지 내려가 봐도 현판은 걸려있지 않았다. ‘옥(玉)을 뿜어낸다’는 보물 정자-분옥정을 찾았는데 현판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나와서 안내판을 읽고 개울가에 있다는 정(丁)자형 건물을 찾아보니 아까 보았던 그 정자다. 둘러보니 마루 밑에 땔감이 수북한 보물 같지 않은 낡은 정자다. 이건 보물이 아닌데…. 하고 갸웃거리며 나오는데 마침 주민 한 분이 지나가기에 물어봤다. 그랬더니 이 유적지를 지키는 유사(有司)라면서 친절하게도 열쇠를 가져와서 정자의 문을 열고 안내한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내가 찾던 현판이 걸려있었다. 분옥정과 청류헌(聽流軒) 화수정(花樹亭) 용계정사(龍溪精舍) 4개가 가지런히 걸려있고 지금 분옥정 현판은 모각(模刻)이고 진품은 국학진흥원에 보관 중이라고 알려 준다. 낡은 정자 기둥을 쓸어보며 좁은 계곡 건너 바위벽을 보니 붉고 노란 낙엽이 엉겨 붙어 예쁜 각시옷처럼 곱다. 다시 계곡으로 내려가서 발목까지 덮히는 낙엽들을 밟으며 맑은 개울물에 손 씻고 층층이 쌓여진 퇴적암의 긴 연륜을 헤아려본다. 바위틈에서 계곡물 떨어지는 모습이 옥구슬 떨어지는 모습처럼 보였을까? 봉좌산 쪽으로 몇 걸음 올라가니 바로 위에 세이탄(洗耳灘)이라는 표석이 있다. 조선 후기의 유학자 돈옹(遯翁) 김계영이 난세와 결별하며 ‘귀를 씻는다’는 뜻으로 반석에 새겨놓은 개울이다. 무지개 모양 나무다리 밑으로 내려가니 넓은 바위 위에 고인 물에 낙엽이 쌓여 있다. 낙엽을 쓸어내고 살펴봐도 긴 세월 동안 계류에 마모된 세이탄의 음각은 찾을 수 없었지만 시끄러운 속세의 소리에 귀를 씻었듯 나도 두 귀를 씻어봤다. 이제 마음도 씻고 귀도 씻었으니 마음도 맑아지려나…. 우리 역사와 전통의 산물인 문화유산은 겨레의 정체성과 국민 생활을 간직한 사적(史蹟)들이니 노후한 건물들을 좀 더 깨끗하게 보수 관리하여 정신적 관광지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저녁 햇살이 봉좌산 위에 걸려 석양이 덮여오는 분옥정을 나오며 조용한 용계지 못 옆길에 차를 세우고 둑으로 올라가니 우람한 거목 두 그루가 수 백년 연륜을 허물벗 듯 갈라진 둥치를 못가에 드리우며 까만 철새들의 날개짓을 품어주고 있다. 기계면은 파평 윤씨, 기계 유씨, 영월 신씨의 삼태사(三太師)를 배출한 지방이기도 하다. 세조묘가 있어 몇몇 고인돌과 함께 유구한 역사를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겠다.

2024-11-28

울릉군의 딜레마…울릉도 나리분지 파크골프장 건설

김두한 기자 경북부 최근 파크골프가 시니어들의 최고 운동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시니어 층의 증가추세는 울릉도도 마찬가지다. 2023년 말 기준 60세 이상 연령대가  40.80%에 달하고 있다. 당연 시니어들의 여가 선용 및 운동문화가 중요해 졌다.  많은 예산, 넓은 부지, 적잖은 운동 비용이 소요되는 골프를 대체한 파크골프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전국의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파크골프장 유치를 하는 가운데 울릉도 역시 시니어 관광객 유치와 지역 시니어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시설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울릉도에 파크골프장이 만들어지면 육지의 골프 1회 비용만 갖고도 울릉도 여행과 파크골프(그린피 비싸도 1만원)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특히 파크골프가 시니어들만의 전유물이라기 보다 울릉도만의 특성을 잘 살려 설계,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자리매김시킬 수 있다면 울릉도 관광객 유치에도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산천어 축제로 유명한 화천군이 대표적이다. 그곳은 요즘 전국의 파크골프 동호인들로 북적이고 있다. 파크전국부부대회, 체육회장기, 시즌오픈 전국파크대회 등 각종대회도 줄을 잇는다. 일찍이 파크골프장을 조성, 짜임새  있게 관련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운영한 결과다. 수치상으로도 그 성과는 대단하다.   5월 28일부터 막이 오르는 이대회는 6월13~14일까지 예선전과 결승전을 치르기 때문에 화천군에 머무는(15일~16일간) 외지인이 엄청나다.  그들이 화천서 먹고, 자고 , 놀고 관광하고 하는 부수효과는 기대 이상이다.   최근 경주에서 울릉도여행을 패키지로 한 파크골프대회가 개최됐었는데, 여기에도 350여 명이 참가했다.  포항 등지에서 개최되는 파크골프대회도 늘 조기마감되는 등 현 추세대로라면 파크골프  인기는 고공진행이다.  이를 눈여겨 본 모 선사가  울릉도 나리분지에 18홀 규모의 파크 골프장을 조성하려 뛰어들었다.  여객선을 통한 관광객도 유치하고 울릉 지역 경기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기획했다. 선사 측은 나리분지가 울릉도 상수원 원수지임을 감안,  수질이나 상수원 오염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농약사용 경우 허가취소)에서 파크골프장 건설을 추진했다. 하지만 최근 서류를 반려받았다. 사실상 불허통보다. 반려 이유는 나리분지에 파크골프장이 조성되면 울릉주민 식수원인 북면 추산 용출소 상수원이 오염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리분지 주민들이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했지만 인허가 벽을 넘지는 못했다. 파크골프장을 유치했던 선사는 “울릉도에 파크골프장이 들어선다면 연중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을 것 같은 판단이 들어 이 사업을 추진했다"면서 "행정소송 등을 통해 인허가를 다투어 볼 생각도 있었지만 현재 선박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엄청 힘들어 포기했다”고 밝혔다.  울릉주민들 사이에선 오래전부터 울릉도에 골프장을 하나 개장했으면 하는 이야기들을 늘 해왔다. 그동안 타 시군에서 골프장이 관광객 유치에 폭발적 원동력이 되는 것을 수없이 보며 학습한 효과도 있다. 제주도은 그 단적인 예다.  알다시피 제주도 골퍼 관광은 연중 무휴다. 골프장 수 또한 엄청나다. 하지만 울릉은 골프장을 만들만한 땅이 없기도 하거니와 설령 부지를 구한다 해도 육지보다 훨씬 더 들어가는 공사비 등으로 엄두를 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온 안이 우선 파크골프장이라도 하나 갖자는 것이다.  그 장소가 나리분지든, 다른 곳이든 간에  일단 하나만이라도 물꼬를 터 봤으면 한다.  물론 인허가를 반려한 울릉군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또 반려하기까지 신중에 고민을 거듭했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정 나리분지가 안된다면 군이 나서 다른 장소라도 찾아 주었으면 한다.  적당한 장소만 있다면 투자자도 분명 나설 것이다.  울릉공항 개항이 다가오는 만큼 향후 울릉도 투자는  관광, 숙박, 볼거리와 놀거리, 스포츠 인프라 등으로 엄청 늘어날 것이다.  산지로 이뤄진 울릉도에 나리분지를 제외하면 솔직히 제대로 된 투자를 하기가 곤란하다. 그런 면에서 상수원도 보호하고 울릉도 관광 인프라도 살리는 묘책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물론 양립은 쉽지가 않다. 하지만 깊이 고민하고 머리를 맞대면 안될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가금씩 외국에 나가 유명관광지나 관광인프라를 가보면 어떻게 저런 곳에 인허가를 받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때가 한두번 아니었다.  나리분지도 이제는 성역으로 두기보다 함께 가는 길을 찾을 때가 됐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 최고의 청정지역, 살아 있는 활화산 속의 나리분지 내  파크골프장에서 채를 한 번 휘둘러 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김두한기자kimdh@kbmaeil.com

2024-11-28

법조와 AI

장규열 고문 ‘법원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모두 그렇게 말하면서도 늘 여운을 남긴다. 같은 사건을 놓고 가진 이념의 향배에 따라 다르게 생각하고 판이하게 판단한다. 엄연한 팩트도 보는 입지에 따라 다른 게 보이고 정반대로 해석되기 일쑤다. 객관적이며 공평한 판단은 법조계에서도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사실과 법리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한다지만, 우리는 사건을 맡은 판사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성향의 판결을 내려왔는지 궁금하다. ‘사실’은 벌어진 일의 실체일 것이며 ‘법리’는 이미 적혀있는 법조문을 적용하는 일이 아닌가. 쌓여있을 판례와 법조문 간의 관련성 등을 객관적이며 균형있게 참고하여 마지막 결론을 내릴 터이다. 이념과 시류, 여론과 주장에 흔들릴 위험이 있는 사람보다 정교하고 치밀한 분석이 가능할 인공지능(AI·Artifical Intelligence)에게 맡기는 게 낫지 않을까. AI는 이념적 편향이나 감정적 판단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므로, 법조문과 판례를 바탕으로 객관적이며 균일한 판단을 내리지 않을까. 방대한 판례와 법적 데이터를 빠짐없이 신속하게 분석하여 적절한 사례와 타당한 규정을 제시할 수 있어, 법조 판단의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킬 것이다. AI가 이렇게 수다한 법적 결정을 적절하게 처리할 수 있다면 법률 자문이나 변호사 비용이 내려가 보통 사람들도 쉽게 법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법조에 AI를 활용함에는, 몇 가지 과제도 있다. 법적 판단은 사실 관찰과 법조문 해석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사회적이며 도덕적 관련성을 반영해야 할 때가 많다. AI가 인간적 맥락을 이해하면서 판단할 수 있을까. AI가 오판을 한다면, 책임소재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 터이다. AI는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훈련될 것인데, 데이터의 편향 가능성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도 문제다. 판단은 단순히 사실을 발견하고 규정을 집행할 뿐만 아니라, 사건 관련자의 인간적 측면을 고려해야 하는 어려움을 AI가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아직은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념적으로 극심한 편향성이 문제로 드러난 이상, 법조계가 AI를 유용한 판단도구의 하나로 도입하여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고려했으면 싶다. 다만, 사람을 완전히 대체하기보다 법조인과의 협력을 통해 공정하고 균형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것이 현실적인 접근이 아닐까. AI는 판사, 검사, 변호사의 업무를 돕는 역할로 시작해 점진적으로 더 많은 역할을 맡게 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어 보인다. 사실판단과 법리적용보다 이념의 성향과 여론의 향배에 따라 법조의 판단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행태는 국민이 보기에 그리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법원의 최종판단이 존중되려면, 투명하고 공정한 심리와 결정과정이 보통사람들의 공감과 동의를 얻어야 할 터이다. 인간의 주관적이며 감성적인 편견과 정치적 이념성향을 최소한으로 제어하면서 정의로우며 공명정대한 결정에 이르러야 할 터이다. AI의 장단점을 모두 고려하여 법조에 적극 활용하는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2024-11-27

‘적자 인생’ 사는 노인들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늙은 남성들 사이에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이야기가 떠돈다. “친구고 뭐고 다 소용없어, 늙으면 가장 필요한 게 돈과 마누라야.” 돈과 아내. 지목된 이 두 가지 가운데 돈과 관련된 걱정스런 뉴스 하나가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60대 이상 노인들의 상당수가 적자 인생을 살고 있다는 소식이다. 61세 이후 생애주기 적자폭은 갈수록 늘어난다. 61세에 178만4000원이던 적자 규모는 70세가 되면 1612만1000원, 75세엔 2015만2000원으로 늘어나고, 85세 이상 노인들의 적자 규모는 2420만2000원에 이른다는 게 통계청의 설명이다. 일을 해 벌어들이는 소득과 생활 유지를 위해 사용되는 돈의 차액 폭이 갈수록 커지는 이런 현상이 이른바 ‘빈곤한 노인’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행 60세인 정년을 연장하고, 퇴직 후 일자리 찾기를 도와야 한다는 사회적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도 이런 세태를 반영한 게 아닐까. 나이를 먹을수록 병원비 사용은 가파르게 상승하고, 60대면 아직 자식들 뒷바라지가 채 끝나지 않은 경우도 흔하다. 거기다 일을 하지 않는다고 개인의 소비가 0이 될 수는 없는 게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세상이 좋아졌으니 이제 한국 사회에서 밥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만, 우리 주변엔 하루 종일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주우러 다니거나, 추운 날씨임에도 1~2시간 무료급식소 앞에서 줄을 서는 노인들이 없지 않다. 여러 이유와 조건 탓에 적자 인생을 사는 노인들을 효과적으로 조력할 방안을 국가적 차원에서 고민할 때가 왔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11-27

손자의 도시락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요즘 초등학교에선 소풍이나 운동회라는 행사가 없어진 것 같다. 학년별로 과학관이나 테마파크로 가는 체험활동이라는 프로그램이 대신하는가 보다. 손주들이 학교 가면 소풍도 따라가고 운동회도 꼭 가봐야지 기대했는데 많이 아쉬웠다. 체험활동 가는 손자에게 도시락이라도 싸주고 싶었다. 손사래를 치며 말리는 며느리를 설득했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 내가 바빠 손수 만든 김밥을 싸주지 못한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 밤늦게야 집에 오니 다음날이 소풍이라는 거였다. 미안한 마음에 미리 알려주지 않았냐며 오히려 역정을 냈다. 새벽에 문 여는 김밥집이 있다는 이웃의 정보를 얻어 김밥을 사 도시락으로 넣어준 적이 있다. 아직도 그날이 생각날 정도로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날의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손자에게라도 갚고 싶다. SNS에서 예쁜 도시락을 폭풍 검색해서 하나 골랐다. 문어유부초밥 만들기. 유부초밥에 토핑으로 비엔나소시지를 문어 모양으로 만들어 얹는 거였다. 이거다. 김밥 만들기보다 오히려 간단하고 예쁘고 귀여워 손자가 좋아할 것 같았다. 필요한 재료를 메모해서 남편과 함께 마트에 장보러 갔다. 소시지, 유부초밥세트, 검은깨, 치즈 등과 작고 동그란 구멍을 낼만한 도구도 샀다. 소풍날 늦지 않게 가져다주려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겠다 싶어 장봐온 재료로 미리 연습을 했다. 동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어렵지 않을 것 같았는데 웬걸, 만만치 않았다. 소시지가 커서인지 문어 다리 모양은 너무 뭉툭해서 볼품없었다. 문어 눈이 될 검은깨 박기가 제일 어려웠다. 파스타면에 올리고당을 묻히면 쉽다는데, 면은 부러지고 깨는 튀어나온다. 입 모양으로는 치즈에 빨대로 도넛 모양 구멍을 내는데 자꾸 갈라진다. 아무리 연습해도 모양이 나질 않았다. 더 작은 소시지와 도구가 필요했다. 24시간 영업하는 식자재마트에 달려갔다. 다시 사온 소시지는 좀 나았다. 영상 속의 문어와 근사한 모양이 나온다. 소시지 두 봉지 중 연습용으로 한 봉지를 다 쓸 정도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밥을 미리 안쳐두고 잠시 눈을 부쳤다. 서너 시간 잤나, 새벽 5시 알람에 눈을 떴다. 간밤의 연습대로 문어유부초밥 만들기에 돌입했다. 문어 다리 모양은 얼추 나왔는데, 눈이 될 검은 깨박기는 여전히 어려워 잘 박히지 않았다. 구멍이 작으면 들어가지 않고 더 크게 뚫으면 연방 튀어나오고야 만다. 이러다간 안되겠다 싶어 손톱으로 껍질을 뜯어 손가락으로 깨를 쑤셔박는다.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영 진도가 나질 않는다. 초조한 맘에 손은 더 무디고 더뎌진다. 문어유부초밥만으로 도시락을 다 채우기엔 시간이 모자라겠다 싶었다. 집 부근 김밥집에 전화해 달걀꼬마김밥을 주문했다. 등교 시간 전에 맞춰 겨우 가져다줄 수 있었다. 며칠 후 만난 손자에게 도시락 맛있었냐고 물었다. 응 맛있었어. 그런데 도시락을 열었더니 문어 눈은 없어지고 입도 떨어지고 까만 김띠도 풀어졌어. 그래도 딱 한 개는 괜찮았어. 애들이 모두 보고 와~~ 했어. 헛수고는 아니었겠지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2024-11-27

흉추와 오장육부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인체의 신경계는 크게 중추신경계와 말초신경계로 나뉜다. 중추신경계는 뇌와 척수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 몸에서 느끼는 감각을 수용하고 조절하며 또 운동, 생체 기능을 조절한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인 뇌는 머리뼈의 안쪽에 위치하고 척수는 척주관 안에서 안전하게 보호된다. 말초신경은 중추신경계에서 나와 온몸에 가지 모양으로 분포하는 신경계를 말한다. 말초신경계는 우리 몸으로부터 감각, 근육 자극과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반사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중추신경으로 전달하고, 중추신경의 운동자극을 다시 우리 몸으로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한다. 말초신경계는 다시 체성 신경계와 자율신경계로 나눈다. 우리 몸을 무의식적인 반사활동을 통해 조절하는 신경계가 자율신경계이고 이는 다시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으로 나눠진다. 교감신경은 흉추 1번에서 요추 2번까지 나오면서 교감신경절을 형성한다. 부교감신경은 3, 7, 9, 10번 뇌신경과 천추에서 나와서 교감신경과 함께 우리 몸의 상태를 조절한다. 이 두 신경의 균형이 깨지면 몸에 다양한 이상 증상이 생기고 이를 자율신경 실조증이라고 한다. 교감 신경은 우리 몸의 오장육부와 연결이 있다. 이에 자율신경 실조증과 같은 질환도 흉추를 잘 치료하면 치료가 가능하다. 흉추에서 나오는 교감 신경은 각 가지마다 기관지 폐 심장 췌장 위장 간 콩팥 등과 연결되어 있다. 한의학은 수천년부터 이 분지되는 곳을 배수혈이라 해서 치료의 중요한 포인트로 삼았을 정도로 흉추는 우리 몸의 건강과 관련 중요한 곳이다. 기침이 잦으면 기관지와 폐가 분지하는 흉추 1번과 3번 그리고 좌우 근육을 치료를 해주면 도움이 된다. 체끼가 있으면 보통 등을 두드리거나 밟아 달라는 것도 흉추 6번 7번이 위장 췌장 등과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침을 맞고도 체끼가 남아 있는 경우 이곳에 부항으로 사혈을 해주면 더 빠른 효과가 난다. 이뿐만이 아니라 잠을 못자거나 속이 답답한 화병 갱년기 등의 증상도 이곳을 통해 치료를 할 수 있다. 흉추 신경절 깊은 곳의 신경을 자극을 해야 해서 가정에서는 쉽지 않고 초음파를 볼 수 있는 한의원에서 시술이 가능하다. 한약으로도 치료가 가능하다. 한약을 먹지 못하는 사람은 흉추 신경절의 시술을 통해 내장의 불편을 바로 잡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집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건강관리 법으로는 부항을 구입해 흉추와 척추 기립근에 부항을 하는 것이다. 흉추와 좌우 근육을 눌러 아픈 곳에 부항을 떠주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 너무 오래 뜨면 피부자극으로 수포가 생길 수 있으니 10분 이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마사지 기계나 지압이 가능한 도구로 직접적으로 등이 아픈 부분을 꾸욱 눌러 줘도 도움이 된다. 꾸준히 해야 효과가 나니 운동과 병행해서 하루 5분 정도 투자를 해보자. 척추가 바로 서면 오장육부가 건강해지고 오장육부가 건강해지면 정신이 건강해진다. 등을 굽히고 생활하면 흉추에서 나오는 신경들이 압박되어 소화기 문제와 기타 문제가 발생한다. 항상 바른 자세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펴고 턱을 당겨 앉고 걷는 습관을 기르자.

2024-11-27

흔적은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땅이 되고

정미영 수필가 길을 걷다가 강아지가 단풍잎을 향해 뛰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단풍잎은 바람에 살랑거리며 강아지 주변을 맴돌았고, 강아지는 잎사귀가 장난감인 듯, 꼬리를 흔들며 뛰어올랐다. 그 작은 생명이 온 마음을 다해 순간을 살아가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미소가 번졌다. 그것도 잠시, 얼마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지인이 키우던 개가 생각났다. 개의 이름은 나미로 11살이었는데 사람 나이로는 78세였다. 나미는 지인이 키우던 두 번째 개였다. 한 번 상실의 아픔을 겪고는 두 번 다시 개를 키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삶에 들어온, 작은 기적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미는 그녀의 친척이 키우던 개였다. 친척이 병에 걸려 더 이상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그녀의 집으로 오게 되었다. 다시 반려견과 살게 되어 너무 좋았단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나이가 많은 나미와 얼마 못 가서 이별하게 될까봐 두려웠다고 했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언젠가는 생을 마감할 것이므로, 자신의 품에 있을 때 많이 사랑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정말로 나미를 정성껏 돌봐주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사랑해 주었다. 나미도 진심을 느꼈는지, 그녀의 곁에서 한없이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녀가 세상에 지쳐 돌아오면 조용히 다가와 손을 핥아 주었고, 그녀의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믿고 싶지 않은 가슴 아픈 일이 생겼다. 그녀 집에 온지 2년 하고 반년이 되었을 때쯤이었다. 나미를 데리고 병원에 가서 건강 검진을 했는데, 수의사 선생님께서 나미가 구강암에 걸렸다고 했단다. 친척도 몰랐던 이야기여서 그녀는 많이 놀라고 당황스럽고 슬펐다. 병원에서는 나미가 항암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으면 완치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기적을 바라며 항암 주사를 맞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나미가 건강해지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안타깝게도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 생겼다. 항암 주사를 맞는 개들에게는 2개에서 3개씩 부작용이 올 수 있단다. 그런데 나미에게는 개가 걸릴 수 있는 모든 부작용이 와버렸던 것이다. 나미는 점점 기운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잘 먹던 사료도 안 먹고 좋아하던 소시지도 먹지 못했다고 했다. 나미를 지켜보던 그녀의 시간은 외로움과 아픔의 순간들로 가득 차올랐다. 그 작은 몸이 항암 치료의 부작용에 힘겨워하던 모습은 그녀를 절망감에 물들게 했다. 나미의 삶이 점점 자신의 곁을 떠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그녀는 눈물로 하루를 적셨다. 나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그날, 그녀는 나지막이 속삭였단다. 이제 그만 고통 없는 곳으로 가라고, 먼저 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 말을 마치자마자 나미는 눈을 감았다고 했다. 내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집 안 구석구석에는 나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미가 좋아하던 담요는 아직 소파 위에 있었고, 간식 그릇은 부엌에 그대로 있었다. 그녀는 쉽게 흔적을 지울 수가 없단다. 아니, 지우고 싶지 않다고 나에게 고백했다. 추억들이 햇살처럼 쏟아져 내릴 때가 있단다. 기뻤던 순간, 슬펐던 순간이 자신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선택할 여지가 없이, 무방비로 떠오르는 순간이 있기에 아직은 흔적을 간직하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나미를 돌봤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미에게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흔적들은 그녀에게 단순한 기억 이상의 것이었다. 사랑이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내 나름대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랑이란 어떤 대상이 내 옆에 머무르는 시간이 아니라, 그 존재가 내 삶에 남긴 흔적과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나미가 남긴 흔적들은 지금도 그녀의 삶을 감싸고 있다. 그녀의 인생길에 허방이 많을지라도 추억이 응축된 사랑의 흔적들은 디딤돌이 될 것이다. 그녀가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땅이 되어 주리라.

2024-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