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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지방 홀대

우정구 논설위원 매년 국정감사 때가 되면 지방 홀대 문제는 주요 이슈의 하나로 등장한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최근 5년간 17개 광역시도에서 집행된 RD 예산은 수도권이 34.7%다. 연구단지가 있는 대전을 포함하면 62.4%다. 대구 2.9%, 경북 3.4%였고, 비수도권에서 10%가 넘는 곳은 없다.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국회교통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서 진행 중이거나 예정인 1조원 이상 규모 신도시 조성사업은 53군데로 사업비만 214조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수도권 사업이 41개, 182조원이다. 비수도권은 12개 사업 32조원에 그쳤다. 국정감사에 지방 홀대 정책이 매년 문제로 제기되고 있지만 개선된 적은 거의 없다. 과거의 어느 정부든 국토균형발전을 주요 시책으로 삼지 않은 적은 없으나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는 오히려 더 커졌다. 인구분포만 보더라도 그렇다. 1960년대 우리나라 인구의 20%에 불과하던 수도권 인구가 지금은 절반을 넘었다. 국토면적의 겨우 12%인 수도권에 인구가 쏠리면서 이곳은 주택난, 교통난 등 도시화에 따른 문제로 몸살을 앓는다. 이런 문제가 왜 생겼는지 국회가 모를 리 없다. 그래서 매번 국감 때마다 지방 홀대 정책을 비판하고 꾸짖고 있으나 말뿐이다. 우리나라 시군구의 46%가 30년 내 사라지고 그중 92%가 비수도권에서 이뤄질 것이란 보고가 새삼 충격으로 다가온다. 지방 홀대가 여전한 줄 알면서도 매번 반복하고 생색만 내는 국회 국감이 올해도 이렇게 막을 내린다고 생각하니 답답할 뿐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0-24

이상득 별세, ‘포항정치의 대명사’로 남을 것

정치거목이자 포항지역 경제 발전을 견인해온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이 그저께(2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코오롱그룹 사장을 지내다 1988년 영일·울릉 지역구 국회의원(13대)으로 정계에 진출한 후 18대까지 포항남·울릉에서 6선을 하며 국회 운영위원장, 당 정책위의장·사무총장·최고위원,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지난 2007년 동생인 이명박 서울시장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상왕(上王)논란’을 피하기 위해 2009년 8월 정계를 떠나 ‘자원외교’로 국내경제에 이바지했다. 당시 보수정치인 평가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생이 대통령이 안 되었으면 국회의장까지 하실 분”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그는 여야 정치인 모두에게 친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나라가 외환위기 여파로 신음하던 1999년에는 당 정책위의장 자격으로 세계적인 신용평가기관장들을 두루 만나 국가 신용등급 조정에 큰 기여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IMF직전이었던 1998년 당선인 시절, 국회에서 여야충돌로 금융개혁법 통과가 어려워지자 당시 재정경제위원장이었던 그에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2002년 사무총장 재임시절에는 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위기를 맞자, 박근혜 당시 당대표 영입을 주도했고, ‘천막당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강덕 포항시장이 언급한 것처럼, 그는 포항지역 경제발전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포항지역 주요 건설사업에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영일만항 건설, KTX 포항노선 개설, 동해중부선 개설, 영일만대로 개통 등 그가 아니면 해낼 수 없었던 많은 업적을 남겼다. 포항시 공무원들은 “그가 국회의원이었던 시절 예산을 확보하기가 가장 쉬웠다”고 회고했다.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된 그의 빈소에는 26일 발인(서울 소망교회)을 앞두고 정·재계 저명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제 우리 곁을 떠났지만, 대구경북 지역민들에겐 ‘영원한 포항의 정치인’이라는 대명사로 남을 것이다.

2024-10-24

교통 SOC 확충은 지방 생존의 문제

임종득 국회의원(국민의힘, 영주·영양·봉화) 지난 20대 대선 이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경북지역 15대 정책과제를 설정했다. 국가 新발전전략 SOC망을 확충하고, 20년 넘게 멈추어 있던 ‘남북9축 고속도로 건설사업’을 반영했다. 인구소멸 위기에 처한 경북 북부지역과 강원 남부에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별다른 진척이 없다. 비수도권 지역 대부분이 인구소멸 위기에 직면해 있는 상황에서, 열악한 교통망 개선 사업을 통한 국토균형발전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기획재정부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통과하지 못해 답보 상태에 빠져있는 프로젝트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특히 비수도권의 경우 예타를 조건으로 내걸면 계속해서 후순위로 밀릴 수 밖에 없다. 철도, 도로 등 교통 기간시설은 공급이 수요를 견인하는 특성이 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이 계획되던 당시, 강남 구간은 개발되지 않은 논밭이었다. 개통 초기에는 당연히 수요부족에 시달렸지만, 2호선 역 주변 개발이 진행되며 수요가 증가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기반이 된 경부고속도로 건설 역시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혔는가. 지금의 예비타당성조사를 그때도 적용했다면, 아마도 경부고속도로는 결코 건설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구가 적고 경제가 활성화되지 못한 지역은 현실적으로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하기 힘들다. 사회자본 유입이 어려우면 인프라 부족으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이 지역을 떠나게 되고, 그래서 배후인구가 줄어들면 또 그만큼 예타 통과는 더욱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지금 국회에는 특정 SOC 건설에서 예타를 면제하자는 특별법이 여러 개 발의되어 있다. 법안이 통과된다면 수많은 재정 소요가 발생할 수밖에 없기에 재정 당국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특별법을 비판하기 전에 왜 이런 특별법이 나오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SOC 특별법안은 비수도권 지역이 생존을 위해 울부짖는 소리다. 저출산 고령화 가속화로 지방거주 인구가 감소하고 있는 마당이라 현재 예타 제도에서 평가하는 B/C값 중 B가 늘어나는 일은 갈수록 요원해질 것이다. 특히 철도나 고속도로는 초창기부터 막대한 돈을 들여야 하는 사업이라 애초에 B/C값을 높게 받기 어렵다. 하지만 B/C 0.11이었으나 지금은 연간 500만명이 이용하는 KTX 강릉선, B/C 0.39였으나 현재는 역사(驛舍)증축까지 하고 있는 호남고속철도, 양양을 중심으로 동해안 관광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서울-양양고속도로 등 경제성 평가만으로는 시작될 수 없었던 사업들이 많다. 예비타당성조사 제도가 도입되던 1999년과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수도권 집중화, 양극화는 더 극심해졌고 지방소멸 극복은 국가적 과제가 되어 있다. 지방의 교통 SOC 만큼은 지역이 직면한 현실을 고려해야만 하고, 스스로 발전 의지를 가지고 비전을 제시하는 지역은 정부와 정치권에서 힘을 실어줘야 한다. ‘남북9축 고속도로 건설사업’과 관련해 영천~양구 10개 지방자치단체장이 협의회를 구성했고, 1만50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국토교통부에 전달했다. 관련 부처는 애타게 부르짖는 지역주민들의 간절한 바람을 더이상 외면하지 말았으면 한다.

2024-10-24

나의 삼국유사와 선덕여왕릉

이정옥 위덕대 명예교수 대학원에 다닐 때였으니까 45년 전, 1979년이다. 햇수를 꼽아보니 아득한 세월이다. 한문원전강독 교재가 삼국유사였다. 삼국유사(5권 9편)에는 짧거나 긴 139개의 이야기가 있다. 5명의 학생이 매 주 두 명씩 돌아가면서 원문을 해석해서 읽고 발표하는 식의 수업이었는데 한 사람 당 4~5개 정도의 기사를 선택했는데 나는 주로 여성이 주인공인 기사들을 골랐다. 그 중 하나인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는 당에서 보낸 모란꽃씨가 향기가 없으리라는 것, 영묘사의 개구리 우는 것으로 백제군의 침입을 알아차린 일, 당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낭산 남쪽 도리천에 묻으라는 이 세 가지 얘기로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을 찬탄하는 이야기이다. 선덕여왕과의 첫 인연이었다. 한 학기 수업이 끝날 즈음, 삼국유사를 들고 경주 가서 그 현장을 찾아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으나 그때뿐, 삼국유사는 잊혀졌다. 표지가 너덜거리는 낡은 책은 서가 한구석에 틀어박혔다. 석사 후 바로 결혼했고, 몇 년 늦게 박사과정을 했다. 육아와 집안일에 출강에 박사과정은 무척 벅찼다. 박사논문을 쓰고 학위를 받자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다. 그저 ‘먹고 자고’가 소망일뿐이었다. 논문 쓰느라 소홀했던 아이들에게 온전히 나를 쏟기로 했으나 무위도식했던 나날이었다. 무료하게 방바닥을 뒹굴던 어느 날 책장 속 낡은 책이 눈에 들어왔다. 삼국유사였다. 벌떡 일어나 책을 꺼내드니 깨알같이 주석을 달아놓은 부분이 펼쳐졌다. 동시에 그 옛날 꿈꾸었던 욕망이 떠올랐다. 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었네…. 대강 옷 걸쳐입고 그 낡은 책 하나만 달랑 들고 차에 시동 걸어 무작정 경주로 달렸다. 경주에 들어서자 머릿속이 하얘졌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대학교 때 답사, 그 후론 온 적이 없었고, 게다가 지금은 혼자다. 막막해서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조수석에 얹혀 같이 온 삼국유사를 펼치니 딱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機三事)’. 그래 여기부터 시작하자. 표지판이 제대로 있었던지 모르겠다. 어찌어찌 사천왕사지 부근까지 갔다. 풀숲을 헤치고 기찻길을 가로 건넜다. 제멋대로 자란 풀이 우거진 조붓한 길옆으로는 키 큰 소나무가 완강히 버티고 있는 무덤들이 으스스했다. 무서움을 이기며 한참을 오르자 저 위 커다랗게 빛나는 왕릉이 보였다. 좁고 컴컴한 소나무숲을 지나서였는지 유난히 밝은 빛이 능 위에 쏟아졌다. 내 기억 속의 선덕여왕릉은 언제나 형광색 연둣빛으로 눈부시다. 선덕여왕릉을 시작으로 2년 넘게 경주에서 삼국유사 현장을 누볐다. 책을 쓰신 일연스님의 걸음걸음에 내 발자국이 닿아서였을까 1996년 경주에 개교하는 위덕대 교수가 되었다. 삼국유사 덕분이라 했더니 남편이 그 낡은 책에 하드양장의 표지를 입혀 삼국유사라고 금박으로 새겨 선물해 주었다. 25년 동안 위덕대에선 ‘경주의 삼국유사 현장기행’ 개발에 매진했다. 선덕여왕을 주제로 한 ‘여왕 코스’를 넣어 숱한 답사객들을 안내했다. 그 옛날 대학원생으로 선덕여왕님을 만났던 내가 지금은 선덕여왕경모회장이 되어 능제를 모시는 초헌관으로 뵙는다. 오는 10월 27일, 17번째 선덕여왕릉제의례가 선덕여왕릉에서 거행된다.

2024-10-23

천장관절의 구조와 허리통증

박용호 포항참사랑송광한의원장 천장관절은 천골과 장골이 닿는 부분으로 우리가 흔히 골반이 아프다고 표현을 하면 천장관절이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위치상으로 봐도 허리뼈 5번 부근이라서 통증이 심한 경우는 디스크로 오인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디스크가 원인인 경우일 수도 있으나 MRI상 디스크가 조금 보인다고 전부 디스크 원인성 요통은 아니다. 영상장비의 발달이 일부 환자에겐 오히려 독이 되는 케이스로 허리 통증의 원인은 다각도로 판단하여 치료를 하는 것이 환자에게 좀 더 유리하다. 허리와 골반은 엄청나게 많은 인대들과 뼈가 얼기설기 엮여 있고 허리뼈에서부터 나온 신경이 다양하게 분지하면서 이곳저곳을 지나간다. 그곳을 다시 근육이 덮는데 이런 복잡한 구조에서 발생하는 통증을 단지 영상 진단에서 약한 디스크진단이 나왔다고 모든 통증을 디스크 원인성으로 판단하기엔 많은 무리가 따른다. 최근 미국에선 허리통증의 30% 가량이 천장관절이 원인이라는 논문이 다량 발표 되고 있는 것만 봐도 허리 통증을 단순히 디스크가 원인이라고 보긴 쉽지 않다. 무리 몸을 뼈로만 봤을 때는 머리뼈와 이를 받쳐주는 목뼈 그리고 흉추를 지나 허리뼈와 천골로 오게 되고 말단인 허리뼈와 천골을 지지하는 구조가 흔히 골반이라고 한다. 허리뼈와 골반뼈를 붙여서 지지하는 곳이 허리뼈 밑의 천골과 장골이다, 천골과 장골은 두 뼈만으로는 절대 인체를 지지할 수 없는 구조다. 이 부분을 붙여 놓기 위해 인체는 아주 많은 인대들로 결합시켜 놓았고 이 천장관절의 인대로 인한 결합은 인체에서 가장 강력한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강한 천장관절의 인대 자체의 손상은 거의 없다고 보고 만약 손상이 생긴다면 치료도 어렵다고 본다. 실제로 천장관절의 인대는 직접적인 심한 타박으로 손상이 생기지 않으면 심한 손상은 없다고 보면 되지만 부분적으로 약한 손상은 항시 발생하고 이렇게 되면 허리를 지지하는 힘이 약해져 허리의 통증이 발생한다. 약해진 천장관절의 문제는 30대 이후엔 대부분 아픈 쪽의 장골이 후방 회전을 하게 되면서 통증을 유발하는데 이때 앉아 있는 자세는 장골을 후방회전 시키기 때문에 좋지 않은 자세가 된다. 치료는 천장관절인대 부분만이 아니라 그로 인해 틀어진 허리뼈와 신경뿌리가 나오는 곳 그리고 후관절의 협착이 있는 부위 등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허리와 골반의 구조는 아주 복잡하기 때문에 보자마자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환자의 나이와 통증의 양상 등을 따져서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치료를 하게 된다. 치료를 해 나가면서 마무리가 되지 않는 통증들은 그동안 하지 않았던 구조물을 치료를 하게 되면 대부분은 좋아진다. 천장관절을 튼튼히 하기 위해선 앉아 있을 때는 늘어져 있는 것이 아닌 정자세를 취해 주어야 하고 서 있을 때도 장골이 전방회전 될 수 있게 허리에 힘을 주고 척추를 세운 후 턱을 당긴다. 바른 자세로 걷는 연습을 하고 이게 힘들다 싶으면 관련 근육들을 강화하는 운동을 해주는 것이 좋다.

2024-10-23

갑과 을은 가짜가 아닌가

장규열 고문 누가 갑(甲)이고 누가 을(乙)인가. 사람들을 만나 관계를 만들어 갈 때, 우리에게는 늘 만나는 과제가 있다. 업무적 성격을 가진 두 사람의 관계를 규정할 때는 특별히 그렇다. 갑의 위치에 서면 늘 앞자리에서 명령하고 주장한다. 을로 판명된 이는 늘 뒷자리에서 끌려다니면서 복종한다. 업무의 우선순위나 전문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갑과 을의 관계에 따라 모든 업무의 흐름이 결정된다. 갑을관계는 대개 조직 내외에서 직위, 연령, 경력, 사회적 지위 등에 따라 형성되며, 업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기준으로 여겨진다. 갑을로 표현되는 위계 중심의 관계는 전문성과 성실성보다 직위나 명목상의 위치를 우선시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자아낸다. 업무의 전문성보다 갑을관계가 우선시되는 조직에서는 의사결정의 흐름이 비효율적일 수 있다. 갑의 지시나 요구는 을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할 때가 많아 비판적 사고와 업무적 창의성을 억압한다. 을의 입장에서 전문적인 판단이나 실질적인 지식이 있더라도 갑의 의견에 반대하기가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된다. 의사결정 과정에서 질 높은 논의와 폭넓은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어 비합리적인 결정을 초래할 가능성이 생긴다. 갑을관계에 의존하는 업무 문화는 개인의 역량과 전문성을 무시하고 오직 외형적인 권력관계만을 우선시한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주며 각자의 성과가 적절히 평가되지 못하는 문제를 낳는다.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판단보다 직위나 명령에 의해 일이 진행되는 경우 결과적으로 회사나 조직 전체의 경쟁력을 저하시키게 된다. 직위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갑의 입장만 존중받는다면 을의 실질적 경험이나 전문적 소견은 무시되기 쉽다. 갑을관계는 조직의 안과 밖에서 스트레스를 증대시키고, 건강한 협력문화를 저해한다. 을의 위치에 서면 상급자의 권위에 의해 자신들의 의견이 쉽게 무시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건강한 소통과 발전적인 표현의 단절을 가져온다. 서로 존중하기보다 상하관계에서 오는 불균형적인 교류가 일상화되면 조직 내에서 갈등과 긴장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업무의 성격이 위계질서에 의해서만 규정될 때 조직에서 성과와 공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갑만 언제나 의사결정의 중심에 있다면 공정한 성과 평가나 승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업무적 능력과 실질적 성과보다 갑의 눈에 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인식되는 문화에서 성실하고 유능한 구성원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게 된다. 조직 내에서 진정한 리더십의 부재를 초래하고, 구성원들 사이에서 불신과 불만이 커지게 된다. 관습적인 갑을관계에 의존하는 우리의 전통적 업무문화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비즈니스 환경이 더욱 복잡해지고 전문화되어 가면서 신속하고 유연한 의사결정이 요구된다. 탄탄한 업무역량과 든든한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는 수평적 관계가 요청된다. 성실성과 전문성에 기반한 업무환경은 건강한 업무 분위기를 조성하고 조직 전체의 성과와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게 한다. 전근대적인 갑을문화를 극복하고 젊고 싱싱한 조직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2024-10-23

TK통합, 중앙 권한이양과 재정확보가 핵심

대구경북 행정통합 논의가 대구시, 경북도 등 4대 기관의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본격 추진되고 있다. 2026년 7월 대구경북특별시 출범을 목표로 광역의회 통과와 특별법 제정, 국회통과 등의 로드맵도 구체화 되고 있다. 홍준표 대구시장과 이철우 경북도지사, 이상민 행안부 장관, 우동기 지방시대위원장 등이 합의한 합의서에는 통합자치단체의 명칭을 대구경북특별시로 정하고, 수도인 서울특별시에 준하는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고 했다. 특별히 국가사무와 재정을 적극 이양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대구경북특별시는 이를 근거로 경제, 산업, 균형발전 등을 총괄 조정 집행하는 기관으로 규정했다. 대구경북 행정통합의 성공을 위해선 넘어야 할 과정이 험하고 과제도 산적하다. 그러나 그 중 통합의 실제적 효과와 주민 설득의 핵심적 요소를 꼽으라면 중앙정부 권한의 실제적 지방 이양과 재정 확보 방안을 들 수 있다. 중앙정부의 권한 지방이양은 헤일 수 없이 반복된 문제다. 지방소멸과 인구감소를 막고 국토균형발전을 위해서 중앙권한의 지방이양은 마땅한 일이고 서둘러 추진할 숙제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여론에도 불구, 정부의 권한 이양은 인색했다.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한 지 30년이 됐지만 어느 정부든 말과 실천이 달랐다. 중앙정부의 오랜 관행과 수도권론자의 반발을 넘어서는 것이 쉽지 않은 문제였기 때문이다. 대구경북특별시는 지방단위에서 추진되는 국가 행정조직의 대개조 사업이다. 소멸 위기에 몰린 지방의 생존을 건 국가 대개조 사업이란 점에서 반드시 성공적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크게는 국가와 민족의 장래가 걸린 사업이라 할 수 있다. 대구경북 통합이 성공해야 타 지역의 행정 통합에도 긍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 이철우 지사가 “중앙의 권한 이양과 재정 확보가 대구경북 통합의 관건”이라 언급한 것도 이런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대구경북 행정통합을 국가를 위한 대개조 사업의 출발점이라 생각하고 정부는 과감한 권한 이양과 지방재정권 확보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2024-10-23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클럽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영국을 포함한 유럽에서 축구의 인기는 재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사실 축구와 유명 축구선수는 유럽만이 아닌 남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에서도 사람들 열광의 대상이란 게 주지의 사실.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영국 사람들은 축구를 즐기고, 팀을 만들어 운동장을 뛰어다녔다. 지금으로부터 167년 전인 1857년 10월 24일. 잉글랜드에선 아마추어 축구클럽 ‘셰필드 FC’가 만들어진다. 단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클럽’이다. 셰필드 FC가 창단된 해에 우리나라는 조선의 왕 철종이 다스리고 있었다. 말하자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영국에선 축구클럽이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까지 축구팀으로서 활동하고 있는 셰필드 FC는 국제 축구연맹 창립 100주년이던 2004년 FIFA로부터 공로훈장을 받았다. 클럽 부문에서 훈장을 받은 건 레알 마드리드와 그 팀이 전부였다. ‘지구 위 최고(最古) 축구클럽’이란 상징성을 외부에서도 인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창단 후 독립적 활동을 이어가던 셰필드 FC는 셰필드 지역 리그, 요크셔 리그를 거쳐 1982년 노던 카운티 이스트 리그에 편입돼 잉글랜드 축구 리그 내부로 들어간 역사가 있다. 성적은 기대만큼 좋지 못했다. 하지만, 팀에 대한 지역민의 사랑과 관심은 어떤 명문 축구클럽 못지않다고 한다. 팬들의 애정을 얻지 못하는 축구팀은 그 존립을 위협받는다. 감독 선임에 얽힌 불협화음으로 한국 축구와 국가대표 축구팀이 사람들의 조롱을 받는 최근 상황이 위태로워 보인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셰필드 FC처럼 167년 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개선책이 시급하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10-23

더 멀어진 尹·韓, 파국으로 가선 안 된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간의 ‘10·21 면담’ 후폭풍이 거세다. 어렵게 성사된 자리였지만, 현안에 대한 매듭은 풀지 못하고 갈등의 골만 깊어졌다. 회동 후 양측 움직임을 두고, 결별 수순에 돌입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이날 한 대표와의 면담 후 추경호 원내대표를 따로 불러 저녁을 같이했다. 한 대표와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을 탁자 앞에 앉혀놓고 ‘차담’을 한 것과 비교해보면, 추 원내대표를 당 대표보다 우대한 것으로 읽히는 부분이다. 한 대표와 친한계는 감정을 자제하지 않았다. 한 대표는 22일 친한계 인사들의 요청으로 만찬회동을 가졌다. 만찬에는 20여 명의 의원이 참석했다. 한 대표와 친한계가 공식모임을 가진 것은 지난 6일 이후 두 번째다. 한 대표가 본격적인 당내 세력화에 나선 것으로 분석된다. 이제 국민관심은 ‘김건희 여사 특검법’처리에 쏠리고 있다. 민주당은 국감이 끝나면 바로 특검법을 처리하고,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쓰더라도 다음달 안에는 재의결 절차까지 마칠 예정이다. 국민의힘이 재의결 과정에서 한목소리를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한 대표는 윤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김 여사 특검법 통과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윤 대통령은 이에 대해 “나로서는 방법이 없지 않느냐.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며 김 여사와 관련한 논란을 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두 사람의 갈등이 감정싸움 양상으로 흐르면서 여권 전체가 심각한 위기국면을 맞게 됐다. 당정이 서로 불신의 늪에 빠지면 의료공백 사태와 민생 문제 등 산적한 현안을 절대 해결할 수 없다. 엉킨 실타래를 풀려면, 먼저 윤 대통령이 한 대표를 포용하면서 정치적 공간을 열어줘야 한다. 정당 대표는 필연적으로 민심에 민감하다는 것을 윤 대통령이 잘 알지 않는가. 한 대표도 ‘내 길을 가겠다’는 식으로 대처해선 안 된다. 그러다간 둘 다 공멸할 게 뻔하다. 윤 대통령이 성공할 수 있도록 끈기있게 도와주면서 설득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2024-10-23

어두워질 때

배문경 수필가 단조로운 하루다. 밤을 견딘 그들의 하루가 시작되면 어제와 같은 오늘, 큰 변화 없는 하루가 이어진다. 아침에 출근하면, 한 톤 올려 인사를 하고 혈압 맥박 체온을 재며 활력 징후를 확인한다. 식사를 위해 그들은 식당으로 이동한다. 걸어오거나 휠체어를 타거나 침상에 누운 어르신도 있고, 워커바를 밀고 오는 이도 있다. 걷는 것 하나로 삶의 질이 달라진다. 식사가 오면 요양보호사들이 배식을 돕는다. 식사 후 약 드시는 것을 챙기는 것은 내 임무다. 식후 하루 세 번. 아프면 병원에 모시고 가고 다치면 연고를 바르고 드레싱을 해주며 불편한 부분을 살피며 타온 약을 드시게 하는 모든 일이 내 일과이다. 절반은 휠체어가 있어야 이동하고, 걸어도 건강한 걸음은 소수이다. 무엇엔가 의지하고 걷거나 그마저도 못 해 누운 채 하루가 가고 새날이 오기도 한다. 물리치료사와 재활치료를 하기도 하고, 일주일 두세 번 오락으로 즐겁게 해주는 분들이 와서 활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노래하고 악기로 재밌게 멈춰있던 그들의 공간에 시간의 흐름을 만든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 정해진 시간에 제공되는 식사, 반복되는 요양보호사의 발걸음. 그 속에서 노인들은 깊은 침묵과 마주하며, 시끄러운 음악과 큰 율동으로 즐거움을 주고자 애를 쓰는 그들을 통해 신나게 시간을 흘려보내기도 한다. 요양원은 어쩌면 죽음에 가까이 다가선 이들이 머무는 마지막 정거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살아있는 시간이 있다. 노인들은 그 시간 속에서 추억을 떠올리고, 남은 인생을 잃어버리지 않길 기도한다. 그나마 기억창고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좋으련만 입원환자의 90%가 치매다. 삶이란 고통과 기쁨이 엮인 직조물 같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고, 기쁨 속에서도 삶의 무게를 느낀다던 톨스토이의 말이 떠오르는 공간이다. 요양원의 노인들은 그 직조물의 한 가닥을 마무리 중이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작은 기쁨을 찾고 병마로 인해 몸은 쇠약해지고, 아픈 기억들이 종종 그들을 찾아오지만, 그 속에서도 그들은 아직 살아 있음을 느낀다. 통증 속에서라도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가족의 방문이거나 삶이 끝날 때 찾아오는 평온일 수도 있다. 요양원의 한구석, 작은 창가에 앉아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있다. 그녀는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음미하며, 소리 없는 기도를 드린다. 그녀의 기도는 더 이상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며 남은 가족을 위해, 그리고 이제 곧 만나게 될 형제들을 위한 기도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마치 오래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고요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와 감정이 깃들어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모든 생명은 끝을 맞이하지만, 그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불경 구절이 생각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노인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어쩌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다가오는 끝을 받아들이며, 남은 시간을 차분히 준비한다. 삶의 끝은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며 그들에게 죽음은 하나의 전환점이며, 다음 세계로 향하는 문이기도 하다. 요양원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창문을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쉰다. 그의 얼굴에는 지난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그 무게는 이제 그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평온함이다. 그는 죽음을 준비하면서도 그 사이사이에 놓인 순간들을 살아간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세상을 향한 작은 빛이 남아 있으며 그 빛은 죽음이 아닌, 지금에 대한 감사다. 지금을 노래하는 마음, 지금을 살라는 말이다. 그것은 요양원에서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노인들에게는 진정한 진리다. 그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저 오늘 하루를 느끼며, 그 속에서 소중한 것들을 찾는다. 기도로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 한 할아버지는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조용히 손을 모은다. 그의 기도는 길지 않지만, 그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기도는 그의 남은 시간을 더욱 값지게 만드는 힘이다. 하루를 마친 그들이 고요히 잠들어 있다.

2024-10-23

경찰관의 수신호에 잘 호응해주시길

나은호 영천署 동부지구대 경위 자동차전용도로를 주행하던 5톤 화물차량 운전석 쪽 앞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자칫 대형 교통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 한 경우가 있었다. 다행히 화물차량 운전자의 현명한 대처로 다른 차량과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고, 사고 차량은 2차선 도로 갓길에 정차하게 되었다. 당시 화물차량 적재함에는 약 4톤 정도의 액체비료가 들어 있는 상태여서 사고 차량 이동을 위해서는 보다 큰 견인 차량이 필요했다. 견인 차량이 사고 현장으로 올 때까지 순찰차를 사고 화물차량과 적당한 거리에 정차시켜 경광등 리프트를 작동하고, 경찰관 2명은 신호봉(경광봉)을 위ㆍ아래로 수신호를 하여 사고지점을 통과하는 후행 차량에 도로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음을 미리 알렸다. 2시간 남짓 수신호를 하는 동안 대부분 차량운전자는 경찰관의 수신호에 차량 속도를 낮추어 사고 장소를 안전하게 운행하였지만, 일부 차량운전자는 사고지점에 이르러 더 속도를 내어서 사고 장소를 지나치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분명 신호봉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감속 지시를 하는 경찰관을 충분히 보았을 것이다. 한편, 주취자가 주택가 이면도로 바닥에 쓰러져 있다는 신고를 접수하고 현장에 가서 마침 그곳을 지나는 차량 운전자에게 다른 길로 갈 것을 안내하니 ‘돌아가면 길이 멀다’며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주취자 보호조치는 인적사항, 주거지, 다친 곳이 있는지, 단순히 주취로 인하여 넘어진 것인지 등을 조사하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려서 다른 길로 갈 것을 당부했지만 요지부동 이었다. 나에게는 당장 불편함이 있어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경찰관은 공공의 안녕과 질서 유지 활동을 하므로 경찰관의 수신호에 주의를 기울이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 수신호에 잘 호응해주기를 기대해본다.

2024-10-22

올해의 혁신상, 글로벌로 통하는 혁신문화

정상철 미래혁신경영연구소 대표·경영학 박사 포스코가 제15회 월드스틸어워즈(WSA·World Steel Awards)에서 ‘올해의 혁신상’, ‘교육과 훈련’, ‘커뮤니케이션프로그램’ 등 3개 부문 수상자가 됐다. 금년 10월, 세계철강협회는 저탄소철강생산, 지속가능성, 전 과정 평가 등 포함 6개 부문으로 나누어 벨기에 브뤼셀에서 시상식이 진행됐다. ‘교육 훈련’ 부문에서‘QSS(Quick Six Sigma) 트레이닝 프로그램이 인정 받았다. 신입사원에서 경영진까지 모든 사원을 대상으로 비능률, 설비, 품질 등의 주제를 다루며, 생산성과 근무 환경의 문제를 찾아 개선할 수 있는 방식을 배운다. 학습 모듈은 철강 생산프로세스의 낭비 제거를 위해 낭비발굴능력과 개선 능력향상을 통한 생산성, 경쟁력 확보가 가능하여 세계철강협회 다른 회원사들도 적용할 수 있는 점이 높이 평가 되었다. 불황에도 흑자를 내는 기업 일본 토요타자동차의 생산방식이 전세계에 통하여 지금도 TPS(Toyota Production System)가 벤치마킹 대상이 되는 것처럼, 포스코의 QSS(제조현장 낭비제거)활동도 전 세계 철강사는 물론 일반 제조업에도 혁신 방법으로 적용할 수 있다. 국내 철강, 건설, 에너지 등에 적용하여 성공한 기업들이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세계철강협회가 인증 했듯이, 토요타자동차 생산방식에 웨이를 붙이는 것처럼 포스코 혁신도 웨이를 붙일 수 있도록 노력 할 필요가 있다. 생산 프로세스의 낭비를 발굴하고 개선하는 것이 일상화 되고 습관을 넘어 체질화 되어 일상 개선이 문화가 되는 것이 포스코웨이로 가는 길이다. 경영자의 비전 제시와 현재의 모습과 차이를 경영 목표로 세우고 전략과 전술로 비전이 실현되는 기업을 문화로 가는 혁신이라 할 수 있다. 문화 혁신은 조직 내 기존의 가치, 행동 방식, 규범, 관습 등을 개선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문화로 변화시키는 과정을 의미한다. 기업의 성과와 지속 가능한 성장을 지원하며, 직원들의 동기부여, 창의성, 협력 등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업 혁신 문화로 가기 위해서는 첫째, 리더의 강력한 의지다. 변화는 리더십에서 시작되며, 경영진이 먼저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고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 둘째, 명확한 비전이다. 조직 전체가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변화의 비전이 필요하다. 변화가 왜 필요한지 어떤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 명확히 해야한다. 셋째, 구성원의 참여다. 직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동의가 필수다. 변화는 위에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넷째, 지속적인 커뮤니케이션이다. 변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란을 최소화하고 구성원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개방적이고 투명한 소통이 필요하다. 다섯째, 인센티브시스템이다. 변화된 문화를 실현하는 직원들에게 적절한 보상과 인센티브를 제공해 동기부여 해야 한다. 조직 내 모든 구성원이 변화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리더의 의지와 체계적인 운영, 지속적으로 진화될 때 문화혁신으로 가는 지름길이 된다.

2024-10-22

감빛 회상에 젖어

강성태 시조시인·서예가 모처럼 여유로운 휴일 오후, 한가로이 고무신을 끌며 뒤뜰과 텃밭 주변을 거닐다가 문득 들려오고 눈길 가는 곳을 응시하게 됐다. 새들의 밀어 같은 재잘거림이 사방에서 들리고, 아직은 푸릇한 감나무 잎새 사이로 조금씩 익어가는 주홍빛 감이 보일 듯 말 듯한 곳에서 몇 마리의 새들이 포르릉 날갯짓하다가 나뭇가지에 앉아서 홍시가 된 감들을 쪼아대고 있었다. 수년 전부터 그렇게 찾아온 새들이 올해도 용케 찾아와서 먹이활동을 하고 있으니, 반갑기도 하고 기특하게만(?) 여겨졌다. 넌지시 그러한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폰카메라에 담기도 하는 등 내심 회상에 젖어 들기도 했었다. 새들이 날아들며 감홍시를 쪼아대고 들판에서 모이를 찾는 걸 보니 정녕 가을이 깊어 가는가 보다. 불과 한 달 전쯤만 해도 청청하기만 하던 산야의 초목이 누렇게 바래고 들판에서는 황금물결이 일렁이니, 농사력(農事曆)으로는 이 시기에 추수를 마무리하고 겨울맞이를 준비하는 때라고 할 수 있다. 즉, 단풍이 절정에 이르고 국화도 활짝 피는 늦가을로 접어들어, 낮으로는 가을의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지만 밤의 기온이 낮아져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 무렵이다. 유년시절의 가을은 언제나 감나무에서 시작됐던 것 같다. 고향집과 불과 50여미터 떨어진 할아버지 집 뒤로는 아름드리 감나무 10여 그루가 키재기 하듯 우람하게 자라고 있었는데, 불그스레하게 감나무 잎이 물들어 떨어지면 뒤란에 수북하게 쌓여서 마치 ‘낙엽 이불’처럼 푹신하고 매끄럽기도 했었다. 땔감이 넉넉하지 않으면 감잎을 쓸어 모아 불쏘시개로 쓰기도 하고, 부러진 감나무 가지는 한데 모아 쇠죽을 끓일 때 지피기도 했었다. 그리고 감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따는 일은 거의 다 필자가 도맡아 했었는데, 10여미터 감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마을 풍경을 내려다보며 거의 새들만 쪼아먹던 말랑말랑한 주홍빛 홍시를 통째로 입에 삼키는 그 맛은 그 어디에도 비길 수 없었던 것 같다. ‘별처럼 뜬 감꽃이 뒤란에 떨어지면/실에 꿴 감꽃 목걸이 걸고 으쓱이며 들썩이다/어느새 배고파지면 입에 넣던 꽃잎들//암록(暗綠)의 잎새 바람 간간이 불어와도/감꽃은 푸르탱탱 땡감으로 자라나/떫어도 움켜잡으며 비바람을 견뎠지//청록의 감잎들의 불그스레 수런대고/하늘빛 닮아가며 별빛 꿈을 꾸다가/마침내 가지마다 켜지는 주홍빛 선물인가’ ㅡ拙시조 ‘감빛 서정’ 전문 모든 것이 서툴고 어설퍼 야단 맞고 초조해하며 떨떠름하던 땡감 같은 시절이 지나면, 비바람 모진 서리 맞으며 잉태해온 주홍빛 속살이 말랑해져서 연시가 되거나 더욱 단단해져서 건시(곶감)가 되어 특유의 단맛과 빛깔을 띄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땡감마냥 푸르탱탱한 패기와 의욕으로 청년시절을 보내고, 하나씩 털고 버릴 것은 거두고 내면을 채워 숙성의 농밀함으로 익어가는 중장년의 여울에서 감빛 마냥 은은하게 빛나며 먼 하늘을 응시하지 않을까 싶다. 연신 홍시를 쪼아대며 사이좋게 나눠 먹는 새들이 정겹기만 하다.

2024-10-22

윤·한 회동 또 ‘빈손’… 민심이 두렵지 않나

그저께(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비공개로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회동은 예상대로 아무 성과없이 끝났다. 굳은 얼굴의 윤 대통령 모습과 맞은편에서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과 나란히 앉은 한 대표의 차가운 모습이 회동분위기를 여실히 드러냈다. 한 대표는 어제 오전 예정됐던 공개 일정도 취소해, 회동에 대한 실망감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회담 후 양측은 각자의 입장을 반영한 최소한의 대화 내용만 공개했다. 한 대표는 면담 후 직접 기자들에게 결과를 브리핑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곧장 귀가했고, 회동 결과는 박정하 당대표 비서실장이 대신 브리핑했다. 대통령실은 회동과 관련한 사후 브리핑을 하지 않았다. 회동결과를 공식발표할 만한 접점을 찾지 못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박 실장은 브리핑에서 “한 대표가 나빠지고 있는 민심에 따른 과감한 변화와 쇄신. 김건희 여사 리스크 해소와 관련한 3가지 해법(김 여사 대외 활동 중단, 대통령실 인적쇄신, 의혹규명 절차 협조), 특별감찰관 임명 진행, ‘여·야·의·정 협의체’ 조속한 출범 필요성을 전달했다”고 했다. 그리고 “개혁의 추진 동력을 위해서라도 부담되는 이슈들을 선제적으로 해소할 필요성이 있다”는 설명도 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한 대표의 요구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는 취지를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대통령실은 김 여사 문제와 관련해선 이미 공개 활동을 자제하고 있고, 대통령실 인사도 ‘확인된 잘못이 없지 않느냐’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20%대 초반 지지율이 말해주듯이, 지금 윤 대통령의 국정수행 리스크는 심각한 수준이다. 이번 회동에서 윤 대통령은 성난 민심을 전하는 한 대표의 요구사항을 ‘심사숙고해 보겠다’는 정도로는 수용해야 했다. 그래야 당·정이 시간을 두고 민심을 수습할 여지가 생긴다.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이 한층 거세질 야당의 대통령 탄핵 공세에 대처하려면, 당·정 결속을 통해 민심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24-10-22

포항수소제철소 내년 착공, ‘주민동의’가 관건

심충택 논설위원 지난주 최상목 경제부총리 일행이 포항 포스코 본사를 방문한 자리에서 향후 포스코그룹의 포항지역 투자규모, 그리고 수소환원제철 프로젝트에 대한 정부지원 내용이 공개됐다. 포항시민들로선 수소환원제철소 건설과 관련한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포스코는 이날 포항지역 주력산업인 철강과 이차전지 계열사에 대한 투자내용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2030년까지 철강 산업(수소환원제철 기술개발 등)에 29조원, 이차전지·수소 분야(포항 양극재 생산설비 증설 등)에 28조원, 인프라 분야(에너지사업 강화 등)에 16조원을 투입하겠다는 내용이다. 향후 5년간 진행될 매머드급 투자규모다. 최 부총리는 이에 대해 “포스코는 신기술을 통해 제철산업을 친환경산업으로 전환하면서 우리나라 산업구조 전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정부 범부처 투자지원체계를 본격 가동하겠다고 약속했다. 포스코로선 향후 국제경쟁력을 높이는데 날개를 단 셈이다. 최 부총리는 이날 포스코의 신기술을 지원하기 위해 녹색국채 발행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녹색국채는 탄소중립 사업에 들어가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발행하는 국채이며, 우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정부는 그동안 제도적으로도 수소환원제철 프로젝트 추진을 지원해왔다. 해상교통안전진단 면제, 환경영향평가 신속 추진, 매립 기본계획 반영절차 신속 추진을 통해 행정절차 기간을 11개월 단축했다. 이로 인해 수소환원제철소 착공 시기가 내년 6월로 앞당겨지게 됐다. 현재 남은 행정절차는 공유수면 매립허가와 산업단지 계획심의뿐이다. 정부는 지난 2월에는 포스코의 독자기술인 수소환원제철 기술(하이렉스)을 국가전략기술로 지정했었다. 하이렉스는 탄소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사용해 철을 제조하는 공법이다. 포스코는 지난 1월 26일 포항제철소에 하이렉스 사업을 총괄하는 ‘수소환원제철 개발센터’를 신설했다. 센터는 수소환원제철 기술을 연구하고, 설비 구축과 시험을 담당한다. 오는 2027년까지 시험설비를 준공한 후 기술 상용화 가능성을 검증할 계획이다. 포스코는 현재 고로 8기(포항 3기, 광양 5기)를 보유하고 있지만 탄소중립을 위해서는 하루빨리 고로를 수소환원제철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금 유럽연합(EU)과 미국 주도로 탄소배출 규제안을 강화하고 있어, 포스코가 고로를 탈피하지 못하면 결국은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수출길이 막히게 된다. 수소환원제철소 건설과 관련해 남은 현안은 부지로 사용될 영일만 공유수면 매립(135만㎡)에 대한 주민동의를 얻는 절차다. 포항지역 사회에서는 현재 세계에서 처음으로 건설되는 수소환원제철소에 대한 기대가 크지만 우려하는 점도 많다. 바다를 매립할 경우 해양환경 생태계가 파괴돼 어민을 비롯한 주민피해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포스코가 마련한 ‘공유수면 매립 주민설명회’도 어민들과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무산된 적이 있었다. 정부와 포스코는 공유수면매립 허가에 앞서 포항지역사회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해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2024-10-22

불효자 방지법

우정구 논설위원 불효자 방지법이란 부모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이 부양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부모를 상대로 패륜적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재산을 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법이다. 2015년 우리 국회에서 처음 발의됐지만 아직까지 법 제정에 이르지 못했다. 싱가포르에서는 경제력이 있는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지 않으면 부모나 국가가 고소할 수 있고, 위반한 자식에게는 징역형과 벌금형을 주는 불효자처벌법이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머지않아 이와 같은 법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재산 증여와 관련해 로펌을 찾는 부모들 가운데 상당수가 효도계약서 작성을 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한다. 효도계약서란 재산을 증여할 때 효도 관련 조항을 문서화하는 것을 뜻한다. 상속에 대한 부모들의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나타난 사회 현상이다. 자식에게 재산을 상속한 뒤 노후에 돌아올 경제적 불안감을 미리 대비하겠다는 의미다. 최근 보건복지부의 2023년 노인실태 조사에 의하면 “재산을 상속하기 보다 재산을 자신과 배우자를 위해 사용하겠다”는 여론이 24.2%가 나왔다. 복지부가 노인실태 조사를 처음 시작한 2008년 같은 질문과 비교할 때 보다 15% 포인트가 더 높아졌다. 상속에 관한 부모세대의 생각과 가치관이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 결과다. 불효자 방지법 제정이 시대 흐름에 따른 대세로 가고 있으나 효와 불효를 법으로 강제하는 것에 반대하는 여론도 없지 않다. 효자의 효(孝)는 노인(老)을 자식(子)이 섬긴다는 뜻을 가진 한자 글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부모 공경의 정신을 견지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도덕적 책무다. /우정구(논설위원)

2024-10-22

본격 논의되는 정년연장, 경제발전 동력으로

우리나라 정년연장의 논의는 저출산 고령화에서 출발한다. 정년만 두고보면 경영계와 노동계가 입장이 같을 수 없지만 지금 우리 사정을 보면 노사 모두가 정년연장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50년 우리나라 총인구는 1550만명 가량이 줄어든 3600만명 선에 머물 것으로 예측됐다. 멀리 볼 것도 없이 2025년에 가면 전체 인구의 20%가 65세이상 고령자로 구성된다고 한다. 노동인력의 급격한 감소로 우리 경제의 활력은 갈수록 떨어질 것이 뻔한 일이다. 정년연장은 각계에서 꾸준히 문제 제기해 왔으나 최근 행정안전부가 공무직에 한해 정년을 최대 65세까지 연장한다고 밝히면서 정년연장 논의가 불붙기 시작했다. 행안부는 현재 60세인 1964년생은 63세까지, 1969년생부터는 65세로 정년을 각각 연장한다고 밝혔다. 시설관리와 경비 등을 맡는 공무직에 한해 정년연장이 실시되나 정부 주도로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상당하다. 정부의 다른 부처나 지방자치단체서도 공무직의 정년연장이 추가로 이어질 것이 예상된다. 국민의힘도 정년을 63세로 높이는 논의를 시작했다. 여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이 정년연장을 주제로 여론조사를 실시해 보았더니 찬성 여론이 50%를 넘어 정년연장 논의 자체에 힘을 얻고 있다고 한다. 저출생 고령화가 가파르게 진행되는 우리나라에선 지금의 사회경제 복지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정년연장이 가장 좋은 선택의 길이다. 현 정부가 국민연금개혁을 추진하면서 국민연금 가입 상한 연령을 64세로 늦추고, 정년과 수급개시기가 맞지 않아 발생하는 소득공백 문제를 생각하면 정년연장은 더 미룰 수 없다. 정년연장 문제는 이제부터라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공공부문은 정년연장을 추진하고 민간부문에서는 기업의 부담이 적게 드는 쪽으로 검토돼야 한다. 정년을 조정하는 고용의 유연성을 기업에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일본 등 정년연장을 이미 실시한 선진국의 사례를 잘 살펴 정년연장이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는 전기로 삼아야 한다.

2024-10-22

‘짧지만 긴 여운 …’ 소설가 김강의 엽편소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

“영원히 네 곁에 있을 거야.” I가 명주의 단발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지만 명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주는 소파 반대편 벽면을 차지한 스크린을 쳐다보며 가만히 누워있었다. I도 명주를 따라 스크린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고 황량한 땅과 그 땅을 가로지르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내가 스크린 속에 있었다. 사내는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길 위에 돌아서 서 있었다. I는 사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하는 것인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인지 궁금했지만 명주에게 묻지 않았다. 명주가 DVD방 주인에게 말했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를 틀어주세요. 명주는 앞장서 방으로 들어갔고 I는 그런 명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방에서 나온 명주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DVD방 주인이 음료수와 재떨이를 가져다주고 나가자 명주는 I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가져다대고 좌우로 돌리며 비볐다. I는 모든 상황이 낯설고 당황스러웠으며 명주가 왜 이러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명주를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둘은 서로의 숨결을 잡아당겼다 불어 넣었다. 숨결은 체온 그대로를 서로에게 전했고 전해진 체온은 몸과 마음을 덥혔다. I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한 모금 깊이 빨아 당겨 담배 끝이 빨갛게, 회색으로 타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 명주의 입에 담배를 물리고 새 담배를 꺼내어 다시 불을 붙였다. 영사기에서 나오는 불빛이 연기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사내의 모자와 얼굴만이 흔들리는 연기 사이로 나왔다 들어갔다 반복했다. 사내는 아직 길 위에 서 있었다. 명주는 A 그리고 B와 함께 술을 마시고 오는 길이라 했다. 이것저것 말을 하다 보니 I이야기가 나왔다고. 명주, 네가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해야 해. B가 말했고 A가 고개를 끄덕였다고 했다. 그건 맞는 말이야. A가 다시 한 번 강조했고 A와 B는 I를 위해서 그리고 그들 모두를 위해 명주가 마음을 정해야 한다고 명주를 몰아붙였다고 했다. 아니 니들이 왜 그래? 명주가 다시 물었고 A와 B가 우리는 동기니까, 명주 너를 아니까, 하고 대답했다. 지들이 나에 대해, 우리에 대해 뭘 안다고. 좀 웃기지 않아? 넌 어떻게 생각해? DVD방에 가기 전 I와 만났던 찻집에서 명주는 A와 B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전하며 I에게 물었다. I는 명주가 동의를 구하는 것인지,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전하는 것인지, 아니면 A와 B가 했던 충고를 받아들여 마음을 정했고 그 마음을 지금 말하겠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너와 나는 아닌 것 같아. 이미 2주 전, I가 명주에게 고백을 한 그날 명주는 I에게 답을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말인 건지,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I는 글쎄, 하고 대답을 했고, 명주는 I의 컵에 담긴 물을 자신의 컵에 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너는 그 자리에 없었으니까. 내 말만으론 네가 그 상황을 다 알 수 없겠지. 어두운 찻집 안이었지만 명주는 얼굴이 붉었다. 그런데 나 왜 불렀어? I는 애써 차분한 척 명주에게 물었다. 아니 걔들이 그러니까 살짝 화가 나는 거야. 이상하게. 그런데 걔들한테 화를 내지는 못하겠고. 그냥 니 생각이 나더라고. 우리는 뭘까 싶기도 하고. 명주는 I의 얼굴을 지나쳐 I 뒤로 보이는 창밖을 살피며 대답을 했다. 명주는 자기 입에서 ‘우리’라는 단어가 두 번째 나왔다는 사실을 알까? I는 자신의 얼굴 옆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두고 있는 명주의 눈을 바라보았다. I는 들뜬 마음으로 나왔다. 명주가 먼저 연락을 해왔고, 찻집에서 만나자 했으니까.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너랑 나는 아닌 것 같다, 말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학생 회관 옆 벤치에서 나누었던 입맞춤이, 딱딱거리며 부딪혔던 앞니와 달고 따듯했던 명주의 타액이, 너 처음이구나 하고 웃으며 I의 뺨을 꼬집던 명주의 손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던 그날 밤이 I의 구애에 대한 명주의 성의 표시와 I의 객기가 만들어낸 한 차례 우연한 밤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영화보고 싶어.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놓으며 명주가 말했다. 영화? 지금 시내로 나가자고? I가 물었고 아니 그냥 DVD방에나 가자, 하고 명주가 대답을 했다. 좀 전에 마신 술이 깨버렸어. I, 네가 한 잔하고 싶다면 옆에 앉아 있어주기는 할게. 내가 나오라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해야겠지. 그런데 술이 깨고 나니 머리가 아프네. 어디든 들어가서 쉬고 싶어서 그래. I와 명주는 찻집을 나와 DVD방으로 올라갔다. 카운터 좌우로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DVD와 영화 포스터를 번갈아 살피고, 인기 대여순위 1위부터 30위까지 제목을 읽어 내려가던 I 뒤에 서 있던 명주가 주인에게 말했다. “요즘 나온 것 중 제일 긴 영화를 틀어주세요” 시작은 I가 집을 나오면서부터였다. 축제가 한창인 봄이었다. 학교 후문 가까이 방을 구했다. 시장에 가서 싸구려 레이온 이불을 샀다. 가스버너와 양은 냄비, 수저를 구했고, 라면 박스에 포장지를 입혀 책상과 밥상을 대신했다. 축제는 끝났지만 축제와 같은 밤은 계속되었다. I는 낮에는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학회실에서 시간을 보냈고, 저녁에는 기웃거리며 사람들을 만났고 술을 마셨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들, 새벽까지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끼어들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러다 흩어지는 모든 자리에 I가 있었다. 미처 하지 못한 말들,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말들이 남아 있는 밤이면 자취방을 지나쳐 후문으로 들어갔다. 학회실로 들어가 책상위에 놓인 모둠일기에 그 말들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갔다. 괜한 짓을 했어, 다음 날이면 후회를 하곤 했지만 써놓았던 글을 지우거나 일기장을 찢지는 않았다. 뭐, 어쩌라고.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모둠일기가 네 일기장이냐? 선배들이 가끔 I에게 던지듯 말을 했다. 그렇게 많은 답 글이 달리는 일기장 보셨습니까? I는 선배들이 던지는 말을 그렇게 받아쳤다. I가 써놓은 글 아래로 여러 말들이 달렸다. 밤새 써놓고 방으로 내려간 뒤 아침에 등교를 하면 답 글이 쓰여 있었고, 거기에 답 글을 쓰고 수업을 듣고 오면 다시 답이 달려 있었다. 몇 번을 그렇게 주고받다 보면 격한 단어가 오고 가기도 했고, 때로는 동지를 만난 듯 서로를 향한 밝은 마음이 전해지기도 했다. 어떤 경우든 마무리는 술자리였다. I는 하루하루가 좋았다. 그 하루들 중 하루였다. 학생회관 식당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I 앞에 명주가 와 섰다. 앉아도 돼? 명주가 물었고 I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와 크림빵 하나를 들고 앉은 명주가 무국에 말은 밥을 떠먹는 I를 바라보다 말했다. “참 단아해.” 하마터면 I의 입안에 있던 밥이 밖으로 튀어나올 뻔 했다. 네 글들 말이야. 글들이 단아하다고. 우연히 들른 학회실에서 책상에 놓인 I의 글들을 읽었다고 했다. 지난 1년간의 모둠일기를 모두 꺼내어 I 글만 찾아 읽었다고 명주가 말했다. I는 무어라 대답을 할지 고민했고 그러다 시간이 지났고 결국은 답을 하지 못했다. 크림빵을 다 먹은 명주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갔다. 명주는 약간은 허술해 보이는 듯한 행동들-이를 테면 강의실에 들어오다 강의실 문턱에 걸려 넘어지거나, 시험시간을 잘못 알고 들어와 앉아 있다든지, 종종 백팩의 지퍼를 열고 돌아다녀 동기들이 장난삼아 휴지나 빈 종이컵을 넣어도 모른 채 깡총거리며 달린다든지·로 인해 간혹 화젯거리가 되는 동기였다. 나사가 하나 정도 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명주는 비웃음이나 비아냥보다는 재밌다는 이야기, 유쾌하다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 아이였다. 그녀의 호탕한 웃음과 무슨 일이든 개의치 않는 시원한 대답들이 어우러진 탓이었다. 모두들 명주와 함께 있는 시간들을 즐거워했다. I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학생 회관에서 만난 이후로 I는 명주와 이전보다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복도를 지나치다 우연히 만나 인사를 하거나, 강의실에서 마주쳐 간단한 안부를 묻는 것은 이전과 같았지만 어감도 표정도 달랐다. 학회실 모둠일기에 글을 쓸 때에도 최대한 단아하게 쓰기 위해 노력했다. 잘 읽었어, 역시, 하고 명주가 답 글이라도 달아 놓는 날이면 I는 자신이 쓴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해 초여름, 햇볕 쨍쨍 내리쬐는 안동에 가본 적 있니? 라고 명주가 물었다. I는 대답 없이 명주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명주는 I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우리 내일 안동 가자. 내가 도시락 싸올게. 다음날 둘은 기차를 타고 안동에 갔고, 버스를 갈아타고 햇볕 쨍쨍 내리쬐는 하회마을에 들렀다. 조용했다. 낮은 담을 양쪽으로 한 좁은 골목길에서 둘은 어깨를 스치며 걸었다. I는 명주의 손을 잡아볼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명주에게 들키기 싫었다. 마을을 돌아 흐르는 강의 하얀 모래밭에 ‘명주와 I, 20세기가 끝나가는 더운 여름날 안동에 왔다 가다.’라는 글귀를 남겨둔 채 둘은 돌아왔다. 뒤풀이를 해야 한다고 명주가 고집을 부렸다. 이미 시간이 늦었다 말해야 했지만 I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명주와 I가 들어간 곳은 I가 즐겨 들르던 호프집이었다. 여기 계란말이가 정말 푸짐해. I는 먼저 나온 생맥주잔을 명주의 잔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명주는 그래? 하하핫, 하며 특유의 웃음을 보였다. 학과 이야기, 책 이야기, 안동에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동아리 이야기도 했다. 명주의 동아리는 봉사 동아리였다. 봉사라는 것이 말이야. 나는 그렇게 생각해. 아주 세련되거나 아주 지독한 자기애의 산물이 아닌가 하고. 물론 애초에 동기가 무엇이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살기 좋게 만드는,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일이지.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야. 그냥 그 근원에는 자기애가 숨겨져 있다는 말이지.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고 숨어서 하는 봉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자기만족, 뭐 그런 것이 근원적인 욕구가 아닐까. I는 뭔가 심오한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했고, 명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I의 이야기를 들었고 I는 명주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이건 서비스. 마른안주를 가지고 나온 호프집 사장이 보기 참 좋다, 라는 말을 테이블위에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I였다. 우리 사귈까? 명주는 생맥주잔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생맥주잔 바깥에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다 이내 무거워져 아래로 흘렀다. 달싹거리는 명주의 입술을 쳐다보던 I의 이마에서도 굵은 땀이 흘러내렸다. 명주가 입을 열었다. 하하핫, 너 긴장하는 구나. 땀 좀 봐. 명주는 냅킨으로 I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생맥주잔을 들어 I의 잔에 부딪히고는 맥주를 마셨다. 너와 나는 아닌 것 같아. 친구지. 좋은 친구. “웃기네.” 그날, 명주는 수박씨를 뱉어 내듯 말을 뱉었다. 그때 I는 고개를 숙여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있는 명주의 얼굴을 내려 보았다. I는 무엇이라 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했고, 고민을 하는 동안 시간이 제법 지나가버렸고 어떤 답을 하든지 우습게 되어버렸다. 결국 I는 답을 하지 못했다. 한동안 둘은 그렇게 있었다. 지하철 끊긴다며 명주가 일어났고 둘은 영화가 계속 비춰지는 스크린을 둔 채 그냥 나왔다. 둘이 함께한 마지막 시간이었다. 김강 소설가·내과의 그해 가을 I는 휴학을 했다. 겨울에 입대를 했고, 제대를 하고 학교에 돌아왔을 때 명주는 학교에 없었다. I는 명주와 함께 갔던 DVD방을 찾아가 그해 가장 길었던 영화를 찾아 달라 말했다. 주인은 알 수 없다는 말과 거기에 딱 맞는 표정을 지었다. I가 영화 속 한 장면을 주인에게 설명했다. 넓고 황량한 땅과 그 땅을 가로지르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사내가 한 명 있어요. 그 사내는 지평선 끝까지 이어진 길 위에 돌아서 서 있는데, 사내가 가야할 길을 가늠하는 것인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았어요. 아니에요. 지금 생각하니 그 사내가 서 있는 곳은 길의 끝이었던 것 같아요. 지나간 길을 뒤돌아보고 있었네요. 맞아요. 그랬어요. 끝 김강(52)은 소설가인 동시에 내과의사고, 포항에서 ‘도서출판 득수’를 운영하는 출판사 대표이기도 하다. 2017년 단편 ‘우리 아빠’로 심훈문학대상을 받으며 등단했고, 단편집 ‘우리 언젠가 화성에 가겠지만’ ‘소비노동조합’을 썼다. 지난해엔 장편 ‘그래스프 리플렉스’를 펴내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2024-10-22

“제주의 새들은 제주어로 울까”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최근 아르코에서 방언시 웹진을 만드는 ‘미디어 TEAT’을 지원하여 방언으로 작품을 쓰는 작가나 시인들에게 예산을 대폭 지원해 주고 있다. 지역 문인협회에서도 방언 시 공모와 시화전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2019년 제주도의 시인이자 작가인 현택훈이 쓴 ‘제주어 마음사전’(걷는사람)이 ‘아르코 문학나눔(2019)’에 선정되었다. 진솔한 제주어를 소재로 한 산문과 제주어를 소재로 한 시를 간곡히 담아낸 ‘제주어 마음사전’은 총 4부로 나누어져 있다. 제1부 ‘우리는 가매기 새끼들이었다’에는 “가매기(까마귀), 간세등이(게르름뱅이), 강셍이(강아지), 고장(꽃), 곤밥(흰밥), 곰세기/곰수기(돌고래), 곱을락(숨바꼭질), 구젱기(소라), 귓것(쉬신), 굴룬각시(내연여), 궨당(친척), 깅이(게), ㄱ·대(조릿대), 내창(하천), 넉둥베기(윷놀이)”와 같은 뭍의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제주어를 섞어 시와 산문을 소개하고 있다. 제2부 ‘엄마는 한라산 용강에 묻혔다’에서는 “뉭끼리다(미끌어지다), 도댓불(등댓불), 돌킹이(부채게), 동카름(동쪽 마을), 두리다(어리다), ㄸㆍㄹ르다(따돌리다), 랑마랑(~하기는커녕), 막은창(막다른 골목), 모살(모래), 몰멩지다(숫기가 없다), 물보라(서귀포시 지역 지명), 물웨(물외), 버렝이(벌레)”와 같은 자연과 지명 이름 등을 소개한다. 제3부 ‘제주의 새들은 제주어로 울까’에서는 “베지근ㅎㆍ다(궁물이 맛있다), 보그락이(잘 부풀러 오름), 본치(상처가 낫은 흔적), 부에(화), 벤줄(벤귤), 생이(새), 솔라니(옥돔), 숙대낭(삼나무), 숨비소리(해녀들의 가쁘게 물속에서 쉬는 숨소리), 아ㄲㆍㅂ다(귀엽다), 아시아시날(그끄저께), 얼다(춥다), 엥그리다(낙서하다), 오몽ㅎㆍ다(열심히 몸을 움직이다), 오소록ㅎㆍ다(으슥하다)”와 같이 제주사람들의 심성과 마음의 울림이 담긴 제주어를 소개한다. 제4부 ‘오늘 밤에 나는 또 누군가의 꿈에 가서’에서는 “요자기(요전), 우치다(흐리고 비가 내리다), 웨삼춘(외삼촌), 이루후제(이후에), 조케(조카), 창도름(막창자), 출람생이(총랑거리는 이), 카다(붕이 붙어 타다), ㅋㆍ찡ㅎㆍ다(가지른히 고르다), 타글락타글락(터덜터덜), 퉤끼(토끼), 폭낭(팽나무), 할락산(한라산), 할망바당(수심이 얕은 바다), 허운데기(머리털), ㅎㆍ끌락(아주 작다)”과 같이 제주 토박이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제주어를 소개한다. 이 책의 방언 자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물웨(물외), 퉤끼(토끼), 할락산(한라산)”과 같은 음운론적 변이형들은 제주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뜻의 짐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환산 이윤재 선생은 예측 가능한 음운론적 변이형인 전등어는 사전에 싣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그렇지만 “허운데기(머리털), ㅎㆍ끌락(아주 작다)”과 같이 표준어와 형태나 조어 자체가 다른 형태론적 병인형인 각립어는 가능한 한 큰사전에 실어 표준어를 풍성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록 표준어가 아닌 방언이지만 지역의 정서나 삶의 체험과 경험의 무늬가 남아 있는 방언은 매우 중요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특히 AI 시대, 대형 클라우드 정보 저장과 처리가 가능한 시대인 지금이야말로 이처럼 소중한 문화유산을 일일이 조사하여 저장해 두어야 할 뿐만 아니라 유용하게 활용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택훈의 제주 지명을 소재로 한 ‘솜반천길’이라는 시를 한편 보자.“물은 바다로 흘러가는데 길은 어디로 흘러갈까요 솜반천으로 가는 솜반천길 길도 물 따라 흘러 바다로 흘러가지요 아무리 힘들게 오르막길 오르더라도 결국엔 내리막길로 흘러가죠 솜반천길 걸으면 작은 교회 문 닫은 슈퍼 평수 넓지 않은 빌라 솜반천으로 흘러가네요 폐지 줍는 리어카 바퀴 옆모여드는 참새 몇 마리 송사리 같은 아이들 슬리퍼 신고 내달리다 한 짝이 벗겨져도 좋은 길 흘러가요 종남소, 고냉이소, 도고리소, 나꿈소, 괴야소, 막은소…. 이렇게 작은 물웅덩이에게 하나하나 이름 붙인 솜반천 마을 사람들 흘러가요” 제주도 내창(內川)은 대부분 건천인데 흘러가는 내가 아닌 중간 중간 물이 고인 소(沼)도 있다. 제주 특유의 자연환경에 이름 붙인 “종남소, 고냉이소, 도고리소, 나꿈소, 괴야소, 막은소”는 제주 자연이 남기고 제주 사람들이 명명한 제주어다. 제주사람들의 깊은 애정과 심성이 맑게 흐르는 물처럼 담겨 있다.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지역 방언은 독특한 지역의 지식정보와 사람들의 마음이 새겨진 디지털 정보뭉치이다.

2024-10-21

중세 유럽의 풍운아 카를 5세

합스부르크 적통이자 오스트리아와 이베리아반도를 오롯이 손 안에 넣은 억세게 운 좋은 카를 5세지만 그는 전쟁으로 일생을 보내야 했다. 신대륙에서 끊임없이 들여오는 황금도 바닥을 드러내면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석양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합스부르크와 에스파냐 제국은 지독한 가톨릭제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예수회를 만들어 반개혁을 단행하면서 원론적 신앙에 깊게 파고들어 개신교에 대항하는 수단을 병행했다. 로마교황의 지원을 등에 업고 있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매형이다. 어린 시절 카를과 폴로 경기를 함께한 친구이기도 했다. 카를 5세의 가톨릭 교권이 강성해지자 이를 우려한 로마 교황 클레멘스 7세가 프랑스를 지지하면서 카를 5세가 적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카를은 그를 지원하는 자들의 부(富)를 마음껏 활용했다. 아우크스부르크 금융가 큰손들과 고모 마르가레테의 힘을 이용해 제후들을 자신의 편으로 돌리는 데 성공한다. 카를 5세는 1520년 10월 22일, 그들의 지원을 받아 도이칠란트 황제 카를 5세로 아헨 대성당에서 즉위식을 마친다.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오스트리아를 방어했고,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며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았다. 누나의 남편을 차마 죽이지는 않았다. 대신 자신의 적 프랑스를 도와준 로마는 그냥 둘 수 없었다. 오랜 전쟁으로 불만이 가득했던 3만명의 가톨릭 군사는 격렬한 기세로 로마로 진격했다. 스위스 교황 근위대 5000명이 하늘을 믿고 목숨을 건 방어에 임했으나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때 일부 근위병만이 교황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한다. 가톨릭 점령군은 3일간 로마를 약탈했다. 남자들은 닥치는 대로 죽였으며, 금은보화를 찾아 고문하고, 여자들은 강간했으며, 건물은 불태웠다.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하는 인간에 의해 로마가 폐허가 되는, 가톨릭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세계는 카를 5세의 기세를 꺾을 자가 없었다. 그는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튀니지를 함락하고 서부 지중해 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이슬람이 서구 유럽으로의 진출을 차단한다. 프랑수아 1세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로선 역부족임을 실감해야 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면서 두 앙숙 간의 오랜 갈등은 막을 내린다. 감수성이 남달랐던 프랑수아 1세는 예술가들의 후원자로 찬사를 받는다. 그에 의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를 세상에 선보이게 했고,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작품들을 모아 지금의 프랑스 루브르 재산으로 만든, 문예부흥에 앞장선 왕으로 찬사가 따른다. 카를 5세는 유럽을 호령하는 전대미문의 제왕이 되었지만, 또 다른 도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톨릭 수호자를 자처한 두 제국의 황제답게 종교개혁의 물살을 타는 개신교의 확산을 막아야 하는 신성한 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톨릭이 신교를 탄압하면서 이에 맞서는 전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농민반란 등 크고 작은 전쟁이 수십 년 지속되면서 제국의 에너지는 소진되고 있었다. 긴 병에 효자 없듯, 오랜 전쟁에 애국자 없다. 결국 1555년 개신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휴전을 맺는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해’로 구교는 신교를 인정하면서 타협했다. 카를 5세, 매부리코에 길쭉한 턱과 아래턱이 튀어나온 합죽이인 까닭에 사람들로부터 그리 좋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입을 온전히 다물 수 없어 파리가 입속으로 들락거리자 콧수염을 길러야 했고, 턱으로 인해 늘 침을 흘려 소화기에 문제가 많았으며, 말년엔 통풍마저 찾아왔다. 그도 인간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삶에 회의가 일었고, 결국 56세가 되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용한 여생을 택한다. 아들 펠리페 2세(당시 식민지 필리핀은 펠리페에서 붙인 이름이다)에게 플랑드르 부르군트 공국과 에스파냐, 그리고 식민지 통치권을 넘기고,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를 넘겨준다. 그리고 2년 뒤 억세게 운이 좋은 카를 5세도 1558년 9월에 말라리아에 걸려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1세는 마냥 좋아할 수 없었다. 서쪽으로 끊임없이 진출을 노리는 오스만제국의 쉴레이만 1세와 치열하게 전쟁을 해야 했다. 헝가리로 진군하는 오스만제국군을 맞아 패하면서 도나우강 동쪽을 넘겨주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를 온전하게 가톨릭 국가로 만드는 데는 성공한다. 이로써 중부유럽의 기독교세계 수호자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지역에 그들의 정통 가톨릭을 굳건하게 뿌리내림으로써 훗날 갈등의 씨를 뿌려놓았다. 악을 행하면서 질서를 파괴하고, 스스로 파탄에 빠지면서 새로운 질서로 회복하는 악순환은 역사 이래 이어져왔다. 영혼의 부작용으로 태어나는 ‘악으로부터 도덕’이다.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스토리텔링 작가

2024-10-21

문학이 온다

21년 전 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문예창작과에 왔다. 원태연, 용혜원의 글과 판타지 소설 몇 권이 문학인줄 알았다. 첫 수업에서 교수님으로부터 시를 배웠다. 너는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이런 세상이 있구나! 살면서 아무것도 되어본 적 없는 너는 시 안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날 너는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동기들이 술 마시러 가자고 해도 학교 옥상으로 도망가 노을과 별의 시간까지 홀로 시를 썼다. 그러면 교수님도 너를 기다렸다. 어둑한 복도에 홀로 불 밝힌 연구실에 가 시를 보여드리면 애써 쓴 문장들에 빨간 줄이 사정없이 그어졌다. 할퀸 상처처럼 아팠지만 너는 그 상처가 좋았다. 그렇게 찢어진 마음에서 돋은 새살이 시가 됐다. 매년 겨울이면 ‘신춘병’을 앓았다. 우체국도 믿을 수 없어 원고를 품에 안고 추운 광화문 거리를 돌아다니며 신문사에 직접 투고했다. 원고를 내고 나면 가슴에 품어 키우던 새가 날아간 것 같았다. 새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엔 뼛속까지 아린 추위가 파고들었다. 심사평과 본심진출 명단에 이름이 없다는 건 너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불 뒤집어쓰고 있으면 눈물이 흘렀다. 너는 그걸 10년 넘게 했다. 너는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갔다. 사랑하면서 두려웠기 때문이다. 공부를 더 하면 혹시 시를 잘 쓸까봐,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 외롭게 쓰면 결국 손에서 시를 놓칠까봐. 그렇게 계속 쓰다 보니 재주가 없는데도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문예지 신인상을 받아 등단했다. 시를 잘 쓰고 싶어 평론을 썼더니 운 좋게 평론으로도 등단했다. 이십대에는 시가 돈이 되지 않아도 행복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오솔길의 왕이 된 것만 같았으니까. 서른 살이 되자 너는 돈이 되지 않는 시를 계속 붙잡을 수 없어 달아났다. 달아날수록 시는 너를 더 잡아당겼다.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돈보다 시가 좋았다. 그래서 결국 돌아왔다. 집안 어른이 네게 말했다. 요리학원에 가서 음식을 배워 장사라도 하라고. 친구가 말했다. 문학이 돈이 되냐고, 너도 이제 네 앞가림을 해야 하지 않겠냐고. 후배가 말했다. 형도 하상욱처럼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선배가 말했다. 시는 아무도 안 읽으니까 맛집 소개하는 글이나 쓰라고. 시인이라고 하니 모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 환호하며 요청했다. 시 한 수 읊어달라고, 삼행시 좀 지어달라고. 그때마다 너는 문학을 한다는 게 괜히 죄스럽게 느껴졌다. 문학을 무용한 일이나 음풍농월쯤으로 여기는 세상의 무지와 폄하, 냉대와 오해에 마음을 다쳤다. 하지만 그럴수록 너는 문학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졌다. 뭘 이룰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뭐라도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이병철 문학평론가이자 시인. 낚시와 야구 등 활동적인 스포츠도 좋아하며,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지금 너는 대학에서 강의를 한다.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시집과 평론집 등 열 권의 책을 낸 너는 문학연구자이자 시인, 평론가로서 쌓은 나름의 경력보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문학을 향유하는 삶이 훨씬, 확실히 ‘이룬 것’이라고 믿는다. 비록 비전임 계약직 교원이지만 상관없다. 문학이라는 캄캄한 동굴 안에서 네가 더듬거리며 지나 온 시간들이 이제야 조금씩 환해진다. 저 멀리서 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자신들이 걸어 나갈 길을 밝히면서, 네가 걸어 온 길에도 빛을 비춰주는 까닭이다. 세대는 달라도 문학이라는 영원 안에서 모두 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수업 시간을 너는 사랑한다.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날, 오전에 너는 한 고등학교에서 윤동주의 시와 삶에 대해 강연했다. 수상 소식을 들은 저녁에 너는 네가 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한강 작가와 일면식도 없으면서 마음의 균형이 무너져 어쩔 줄 몰랐다.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지 너도 모른다. 고작 삼류 시인이자 무명 평론가지만 지금껏 문학을 놓지 않고 해왔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도 붙들고 온몸으로 나아가리라는 것, 너보다 더 문학을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문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뭉클했겠지. 감격에 겨운 너는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에서 구사한 독특한 2인칭 화법을 빌려 이 글을 쓴다. 너는 이제 더 이상 ‘문학’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 오해 받지 않고 무시당하지도 않는 문학이 온다. 이미 왔다.

2024-10-21

고단함을 잊는 법

현생의 고단함을 느낄 때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어릴 적 걱정 없이 즐거웠던 때로 잠시나마 돌아가 본다. 모래밭에 손을 묻고 두꺼비집 노래를 부를 때나 꽃이나 풀을 돌맹이로 짓이기며 소꿉놀이에 쓸 저녁 반찬을 만들 때, 나는 힘껏 내려가 있던 입꼬리를 다시금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옅게 웃어 보일 수 있다. 삭막한 사무실 책상에 앉아 현생이 괴로울 땐 이렇게 작은 구멍 하나를 만들어 잠시나마 어린 시절 추억 속으로 빠져본다. 그리고 퇴근 후나 주말이 되면 어린 시절 만끽했던 자유로운 일상을 꼭 즐기리라 다짐하며 다시금 타자기에 손을 올린다. 주말이 되면 어릴 적 즐겨 먹었던 불량식품들을 찾아 일부러 초등학교 앞 작은 문방구에 들린다거나, 계절마다 엄마가 조각조각 잘라주던 제철 과일들을 먹기 위해 마트로 장을 보러 간다. 어린 시절 사소한 습관부터 작은 기억까지 다 복기해보며 따라하다보면 삶의 지루함과 어려움에서 조금이나마 멀리 벗어나 볼 수 있다. 이렇게 나처럼 어린 시절의 향수로 물건을 구매하는 키덜트 족은 대략 십년 전부터 주요 소비자층으로 자리 잡았다. 키덜트족이란 키드(kid:아이)와 어덜트(adult:어른)의 합성어로 어른이 지만 여전히 어린 시절의 분위기와 감성을 추구하는 성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퇴근길에 뽑기 기계 앞에서 동전을 한 가득 손에 쥐고 인형 뽑기에 열중하다 집에 가는 길에 작은 인형 하나 손에 들려 있다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기쁨과 만족감이 든다. 돈을 얼마를 썼거나 인형에 큰 의미가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이상하다고 여기거나 철이 없다고 느끼진 않는다. 그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오늘 나의 현실적인 문제들로부터 벗어나 마음이 만족하다면 되는 것이다. 나와 같은 키덜트 족은 옷이나 특정 상품을 구매할 때에 물건의 사용 가치를 재고하는 것이 아닌 어린 시절 즐겨 보던 만화나 기억속 함께 커왔던 캐릭터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심리적 만족감을 채운다. 가격 대비 마음의 만족인 가심비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상품의 가격이나 쓸모, 가치 보단 주관적 마음의 만족감을 더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이다. 더 나아가 fun(재미)과 consumer(소비자)를 결합한 펀슈머는 단순히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닌, 물건을 구매할 때에 재미를 추구하는 소비자를 뜻한다. MZ세대 중심에서 시작된 펀슈머는 가격 대비 재미를 쫒는 이른바 ‘가잼비’를 추구하며 소비 과정에서 재미와 즐거움의 경험을 중시한다. SPC 삼립의 대표 스터디셀러 제품인 정통 크림빵은 60주년 기념으로 기존 사이즈 대비 약 7배 정도 큰 사이즈로 ‘크림대빵’을 출시한 바 있다. 성인 두명의 얼굴을 가릴 정도로 점보 사이즈로 출시되었던 대왕 크림빵은 보자마자 웃음을 자아낼 정도로 커다란 사이즈에 이색적이었고 처음 출시됐을 때엔 품귀 현상까지 생겨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출시가 대비 약 2배 넘는 가격으로 거래되었을 정도였다. 윤여진 2018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보다 미래가 기대되는 젊은 작가. 이어 대왕 시리즈라 불리는 8인분의 양이 담긴 세숫대야 냉면, 팔도 도시락 8인분이 합쳐진 대왕 팔도 점보 도시락, 공간춘 대왕 짬짜면 등이 출시되어 가잼비와 가심비를 더한 상품들을 마트나 편의점에 심심찮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상품들 모두 출시 전부터 화제성이 있었으며 출시되자마자 중고 거래 사이트에서 웃돈이 붙어 거래되었을 정도라니 익숙한 상품에 웃음 요소를 더한 상품이 현재까지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덕분에 나는 더욱 즐겁게 마트나 편의점, 문방구 등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재미를 찾고 추억에 젖어 현실의 고단함을 조금 잊어볼 수 있게 된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소비 습관을 보며 철없어 보인다고 고개를 저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이 단순한 행위로도 작은 기쁨을 맛볼 수 있고 생의 즐거운 면을 조금이나마 추구할 수 있다면 다시금 어린 시절 반짝였던 두 눈과 튼튼한 다리를 가지고 이곳 저곳 쏘다녀볼 수 있다. 오늘은 또 어떤 새롭고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고단함을 잊는 법은 이렇게 단순하고 쉽다. 덕분에 새로운 한 주를 다시금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시원해진 가을 바람을 맞으며 운동화 끈을 꽉 매고 다시금 뚜벅뚜벅 걸어가본다. 이렇게 걷다 보면 고단함보다는 일상이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2024-10-21

‘원전+재생e’

남광현 대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기상청 기후통계분석 결과를 보면 지난 8월에 이어 9월도 기상 관측이래 가장 무더웠던 9월로 기록되었다. 1973년 기상관측망이 전국적으로 확충된 이후 올해 9월이 가장 높은 월 평균기온(24.7℃), 폭염일수(6일), 열대야 일수(4.3일)로 기록된 것이다. 더욱이 1973년 이후 9월에 폭염일수 자체가 기록된 연도는 올해가 유일하다. 이런 최악의 폭염을 겪고도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말보다는 ‘올해가 어쩌면 앞으로의 여름 중 가장 시원했던 때였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말이 더 와닿는다. 폭염이 한창이던 8월 29일 헌법재판소는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약칭, 탄소중립기본법)’ 제8조 제1항이 헌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이 조항에서 2030년까지만 감축목표(2018년 대비 35% 이상 감축)를 규정하고 이후 2050년 탄소중립 목표 시점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감축목표가 없어 미래세대에 과중한 부담을 이전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11.4% 감축율로 타 전환(45.9%), 건물(32.8%), 수송(37.8%), 농축수산(27.1%), 폐기물(46.8%) 부문보다 매우 낮았던 ‘산업부문’도 이제 급격히 높여야 한다. 이에 정부는 기존의 주력 에너지인 석유, 석탄 등 화석연료를 급격히 줄이면서도 안정적 에너지 공급을 위해 원자력발전과 재생에너지의 혼합을 약칭한 ‘원전+재생e’ 전략을 전환(발전)분야 핵심 감축대책으로 제시했다. 전환분야의 ‘원전+재생e’ 대책은 산업분야가 미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격한 온실가스 감축으로 글로벌 경쟁력이 저하되는 것을 막고 새로운 감축기술을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상당한 시간을 벌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로봇, 미래모빌리티, 디지털헬스케어, 반도체, ABB 등 전력 수요량이 매우 높은 5대 미래신산업을 집중 육성하고자 하는 대구시도 ‘원전+재생e’ 대책은 필수불가결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2030년까지 전력의 50%를 신재생에너지로 생산하는 목표를 세우고 태양광 발전을 대폭 확대해 왔다. 2020년 여름, 캘리포니아는 극심한 폭염으로 전력 수요가 급증했지만, 태양광 발전이 저녁 시간대가 되면서 급격히 감소했고 ‘캘리포니아 롤링 블랙아웃’이라는 대규모 정전 사태가 발생했다. 태양광 발전의 변동성 때문에 전력 수요를 충족하지 못했고, 예비 전력이 부족해 일부 지역에서 계획적인 정전을 해야만 했다. 이후 이런 대규모 정전 사태를 막기 위해 태양광 발전에서 잉여 전력을 배터리에 저장해 부족 시 공급하고 원자력으로 전력수급의 변동성을 보완하고 있다. 이렇게 원자력이 기저부하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신재생에너지가 추가적으로 탄소 배출 감소와 에너지 다각화에 기여하는 효율적인 ‘에너지 믹스 모델’ 즉 ‘원전+재생e’ 대책은 프랑스, 캐나다, 일본 등 많은 선진국이 채택하고 있다. TK신공항조성과 반도체, ABB 등 첨단기업을 유치하여 ‘미래신산업 혁신’을 이루면서 ‘2050 탄소중립’이라는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려는 대구는 ‘원전+재생e’라는 ‘에너지 믹스 모델’이 필요하다.

2024-10-21

비정상 소리

강길수 수필가 차의 타이어나 하체에 무엇이 끼었는지 살펴본다. 이상 없다. 엔진룸에도 달라진 건 없다. 한데, 달릴 때 뒤쪽에서 ‘웅….’하고 나던 비정상 소리의 정체는 무엇일까. 주유 램프가 들어와 주유하고 나니 상태가 나아진 듯했다. 집에 와 주차하려 후진하며 브레이크를 밟을 때, 왠지 뒤에서 뭔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도 났다. 평지여서 사이드 브레이크는 안 채웠다. 다시 차 쓸 날이 왔다. 불안해 뒤 트렁크를 또 열어, 차가 서면 관성으로 부딪힐 게 있는지 살폈다. 없다. 보닛을 열고 엔진룸을 더 자세히 보아도 정상이다. 부족해 보이는 부동액만 보충했다. 나갈 시간이 되어 시동 걸려고 키 1단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계기판에 빨간 사이드 브레이크 등이 들어왔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그저께 텃밭에서 돌아오는 길 십여 킬로를, 그걸 건 채 차를 몰았다는 결론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출발할 때, 빨간 표시등을 본 기억이 없다. 운행 중 노란 주유등이 들어오는 건 보면서도, 옆 빨간등은 못 봤다는 것은 말이 안 되니까. 조수석에 앉았던 아내에게 물어도 못 본 것 같다 했다. 추론을 해본다. 만약 표시등이 출발 때나 운행 시 안 들어왔다면, 가능성은 하나뿐이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덜 푼 것이다. 뒷바퀴에 브레이크가 약하게 걸리니까, 주행 시 뒤쪽에서 ‘웅….’ 소리가 났을 테고. 또, 달리면서 마찰열로 브레이크 디스크와 패드 온도가 오르니 밀착도가 높아져 사이드 브레이크 등이 들어온 것이 된다. 그러고 보니, 그제 집으로 출발하려 사이드 브레이크를 왼발로 풀 때 뭔가 달랐던 느낌이 떠올랐다. ‘맞아. 그랬어! 덜 푼 거야’하고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귀납적, 연역적으로도 내 추론이 어긋나 보이지 않으니,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음에서 찜찜함이 다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니, 헷갈린다. 지금, 우리나라 사정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치지 않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미국의 대선 같은 국제정세와 북한의 한반도 2국 선언과 대남 전쟁 위협, 러시아 파병 등 시시각각 나라 상황이 변하고 있다. 따라서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 국가의 살길과 나아갈 길을 찾아내야 할 정치권은 ‘방탄 국회’와 ‘대통령 탄핵’이란 비정상 소리만 붕붕거린다. 정상 국민이면 누가 봐도 ‘야당 대표 방탄 국회’가 국정을 볼모 잡고 있다. 또, 터무니없는 ‘대통령 탄핵’이란 괴질에 걸려 혹세무민하는 정치판이다. 부정선거란 망국적 괴물이 나라를 삼켜가도, 해결에 나서는 현역 정치인은 거의 없다. 이달 4곳 보궐선거 역시, 대수의 법칙을 부순 부정선거란 통계적 증거를 G 박사는 제시하고 있다. 도대체 정치꾼들에게 나라, 국민, 정의, 진실, 사랑 같은 개념들이 있기나 한가. 국민은 부정 당선된 가짜일지도 모르는 정치꾼들의 거들먹거림에 헷갈리고, 분노하며, 절망한다. 부디 정치권이 스스로 나라 문제를 찾아 해결해 나가는 길, 진실과 정의가 바로 서는 길로 회심(回心)하여 제 몫을 다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4-10-21

누구를 위한 ‘방탄 정치’인가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정치학 여야의 ‘방탄 정치’가 격돌하고 있다. 여당은 야당의 ‘이재명 방탄’을 비판하고, 야당은 여당의 ‘윤석열·김건희 방탄’을 공격한다. 양자의 공통점은 상대의 잘못을 더욱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덮으려는데 있다. “자기 눈에 든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든 티끌은 잘 본다.”는 점에서 똑같은 ‘바보들의 행진’이다. 방탄 정치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입법권력을, 그리고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은 집행권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상대를 비판,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오류를 덮으려고 한다. 국리민복(國利民福)을 위한 방탄이 아니라, 권력자의 개인적·당파적 이익을 위한 방탄이라는 점에서 후진적 정치의 전형이다. 이재명 방탄을 위한 민주당의 정치행태는 민주주의와 법치를 위협한다. 수사 검사에 대한 탄핵소추와 재판담당 판사에 대한 탄핵겁박은 보통이고, 대통령 탄핵의 분위기 조성을 위해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청문회까지 열었다. 검찰수사 조작방지법·표적수사금지법·법 왜곡죄법 등을 입법하겠다면서 판·검사들을 협박한다. 특히 이른바 ‘쌍특검법’(김건희 특검법 및 채 상병 특검법)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관계없이 계속 밀어붙여서 탄핵분위기를 고조시키고자 한다. 민생을 챙겨야 할 국정감사까지도 이재명 방탄과 대통령 부부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기회로 활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편 정부·여당의 방탄 정치는 검찰의 수사·기소권과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이 그 핵심수단이다. 야당의 ‘쌍특검법’에 대한 여당의 방탄 정치는 국민여론과 배치된다.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 주가조작 및 공천개입 의혹 등을 수사하기 위한 특검법에 대한 국민여론(전국지표조사, 9월 25일)은 찬성 65%, 반대 24%이며, 특히 보수의 텃밭인 TK에서도 찬성 58%, 반대 36%이다. 또한 채 상병 특검도 찬성 69%, 반대 21%(엠브레인퍼블릭, 7월 8일)로서 찬성여론이 압도적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부인의 방탄을 위해 검찰수사팀을 교체하고 김건희 특검법에 두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으며, 자신이 개입 의혹을 받고 있는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서도 세 차례 거부권을 행사했다. 게다가 검찰은 영부인의 명품백 수수와 주가조작 의혹에 무혐의처분 함으로써 공정성을 의심받고 있고, 청탁금지법은 있으나마나하는 법이 되었다. 공정과 상식을 역설한 대통령이 자신과 부인의 방탄을 위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이해충돌’이 아닌가. YS와 DJ는 정치9단이었음에도 대통령 재임 중 권력으로 자녀들을 방탄하지 않고 모두 구속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하기 바란다. 정치지도자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으로 결자해지(結者解之)해야 한다. 이미 지은 죄가 방탄한다고 해서 없어지지는 않는다. 죄가 없다면 무죄판결을 받을 것이요, 죄가 있다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이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니 쪽팔리게 방탄하지 말고 지도자다운 모습을 보여라.

2024-10-21

제2의 서울 ‘TK특별시’ 출범절차 시작됐다

대구시와 경북도, 행정안전부, 지방시대위는 어제(21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대구경북(TK)행정통합 합의문에 서명하고 본격적인 출범 준비절차에 들어갔다. 통합시는 2026년 6월 지방선거 직후 출범시키는 게 목표다. 합의문에는 행안부가 최근 대구시·경북도에 제시한 6개 중재안이 포함됐으며, 경북도가 지속적으로 요청한 ‘북부권 발전 대책’도 명시됐다. 경북도는 행정통합이 성사되면 북부권에 정부 행정기관과 공공기관 등을 유치해 새로운 행정타운을 형성시킨다는 구상이다. 쟁점이 돼 온 통합자치단체(대구경북특별시) 법적 지위는 서울특별시에 준하는 위상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행정통합 성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TK특별시의 기능(경제·산업육성, 균형발전, 광역행정 종합계획 수립 및 총괄·조정·집행 등)을 강화했다. 시·군 자치권은 통합 후에도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특별시 청사는 기존 대구시청, 경북도청(안동), 포항청사를 그대로 활용하기로 했다. 청사 소재지에 따른 관할 범위는 별도로 설정하지 않았으며, 소재지별 지역 특성을 고려해 기능을 적절하게 배분할 예정이다. 특별시를 설치하기 위한 주민동의 절차와 관련해서는 충분한 의견 수렴을 전제로 대구시의회와 경북도의회가 찬반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대구시와 경북도는 범정부추진단과 함께 특별시 출범을 위한 후속 절차를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대구경북 권역별 설명회와 토론회 등을 거쳐 특별법안이 완성되면, 시·도의회 동의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민투표를 선호하는 상당수 경북도의원들에 대한 설득작업이 필요하다. 더 큰 고비는 특별법안의 국회통과다. TK지역이 서울특별시와 같은 법적지위를 가지는 데 대해 타지역 국회의원들이 흔쾌히 손을 들어줄지는 의문이다. 다만, TK행정통합이 소멸위기를 겪는 비수도권 지방정부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고, 부산·경남과 호남권, 충청권에서도 통합논의가 있는 만큼 특별법 국회통과가 그렇게 비관적이진 않다.

2024-10-21

‘우주 패권’ 향해 달리는 중국

홍성식 (기획특집부장) “2028년에 시작해 7년간 우주정거장 운영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사람을 태운 탐사선을 달에 보낼 것이다. 이 프로젝트와 더불어 국제 달 연구기지도 건설할 계획이다.” 중국과학원 부원장 딩치뱌오의 호언장담이다. 미국과 ‘우주 패권’을 다투는 중국의 천문학적 투자와 인력 집중이 주목된다. 중국은 다가올 2050년엔 미국에 앞서는 우주 강국을 만들겠다는 장기 계획을 공공연히 말한다. 실제로 중국은 1주일에 한 번씩 우주를 향해 위성을 발사할 정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상황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다. 효율적인 위성 통신망 구축을 위해 추진 중인 ‘천범성좌 계획’에 의하면 중국은 올해 108개의 위성을 쏘아 올린다. 향후 2025년에는 648개, 2030년까지는 총 1만5000개 위성을 궤도에 안착시킬 예정이라고 한다. G60 성좌계획으로도 지칭되는 이 프로젝트는 전 세계 광대역 네트워크 범위를 제공하고, 6G 연결로 전환하기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지구를 넘어 우주로까지 확대되는 양상은 두 나라의 미래 경쟁력에 주목하는 여타 국가들의 주요한 관심사로 떠올랐다. “태양과 지구의 상호 역학작용을 풀고, 외계 생물체 탐색에 나설 예정이다. 10년 안에 세계 최고의 우주 망원경을 궤도로 내보낼 것”이라는 중국의 발표는 당연지사 우주 패권을 두고 다투는 미국을 긴장시킬 듯하다. 현재 미국은 차기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 트럼프건, 해리스건 미국 최고 지도자 자리에 설 사람은 ‘누가 우주의 주인인가?’를 놓고 중국과 다퉈야 하는 숙제까지 안을 게 분명해 보인다. /홍성식(기획특집부장)

2024-10-21

고령자 근로시대에 맞는 고용정책 나와야

고령화 사회에 접어든 우리나라는 이미 5명 중 1명은 60대 이상 고령자다. 60세 이상 고령자가 늘면서 그들의 취업도 자연스레 증가세에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60세 이상 취업자는 최근 5년간 30% 이상 증가했고, 비중도 22%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작년 기준으로 제조업에 근무하는 60세 이상 근로자 수가 20대 제조업 취업자 수를 앞질렀다. 60세 이상 근로자가 20대보다 앞선 것은 지난해 처음 있었다고 한다. 고령화 사회가 진행되면서 고용시장도 급변하는 분위기다. 게다가 청년층의 제조업 기피 현상 등이 지속되면서 60세 이상 고령자 취업은 앞으로 더 증가할 것으로 전망이 된다. 또 산업계 역시 실질적 고용가치가 있는 60세 이상 고령자 채용을 선호하는 조사 결과도 많이 나오고 있다. 지난 8월 대한상의가 설문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정년퇴직한 고령 인력채용 이유”에 대해 응답한 기업의 59%가 “기술과 경험이 풍부해 뽑는다”는 대답을 했다. 이는 청장년 인력을 채용할 수 없어서(27%) 보다 높은 응답률이어서 기업들의 고용관 변화를 읽을 수 있다. 또 최근 대구상의가 400여 개 기업을 대상으로 60세 이상 근로자 고용현황 및 인식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론이 도출되었다. 제조업, 비제조업 구분없이 응답 기업의 80%가 60세 이상 근로자를 고용하고 있는 것으로 대답했다. 또 고용 이유에 대해서도 “숙련된 기술과 풍부한 경험”을 가장 많이 꼽았다. 60세 이상 근로자 채용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에 대한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 지금도 60세 이상 근로자를 고용한 기업에 대해 고용지원금 등의 특혜를 주고 있으나 좀 더 다각적이고 큰폭의 지원책 마련이 필요하다. 특히 중소기업에게 많은 인센티브를 주어 부족한 제조인력을 고령자로 대체할 수 있게 하는 방법도 강구해야 한다. 대구상의 조사에서도 “고령자 계속 고용장려금을 확대해 달라”는 요구가 가장 많이 나왔다. 60세 이상 근로자의 계속 고용이 중소기업의 인력운용의 실질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만큼 정부가 고령자 근로시대에 맞는 지원책 마련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2024-10-21

여론조사가 항상 민심은 아니다

김진국 고문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진 여론조사가 나왔다. ‘여론조사 꽃’의 10월 둘째주 조사에서 윤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가 19.2%였다. ‘잘못하고 있다’는 무려 4배가 더 많은 80%였다. 지난주 한국갤럽조사에서는 지지율이 22%로 나왔으니, 큰 차이가 없다.(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여론조사꽃’ 발표는 표본오차가 ±3.1%다. 6% 정도 차이는 차이도 아니다. 그렇지만 ‘10%대’라는 상징이 주는 충격은 어마어마하다. 여당에서조차 “10%대면 심리적 탄핵 상태”라는 말이 나온다. 여론조사 사이에 차이가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차 범위를 명시해 놓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 그게 ‘여론조사 꽃’이어서 뒷말이 나온다. ‘여론조사꽃’은 김어준 씨가 TBS(교통방송) 뉴스 진행을 그만두고, 유튜브 방송을 시작하면서 만든 여론조사 업체다. 여러 번 구설수에 올랐다. 지난 총선 때 부산 해운대 갑 여론조사를 해 민주당 홍순헌 후보가 50.9%, 국민의힘 주진우 후보가 41.8% 나왔다며, 홍 후보와 전화를 연결해 응원했다. 일주일 뒤 선거 결과는 주 후보 53.7%, 홍 후보 44.61%였다. 일주일만에 뒤집힌 걸까. 지난 16일 부산 금정구청장 선거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여론조사꽃’은 민주당 김경지 후보가 40.9%로 국민의힘 윤일현 후보(37.7%)를 오차범위 안에서 앞섰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선거 결과 윤 후보가 61%를 얻어 김 후보를 무려 22%포인트 차이로 이겼다. 열흘 사이에 이렇게 뒤집혔을까. 영부인 김건희 여사와 주고받은 문자를 공개해 파문을 일으킨 명태균 씨도 여론조사를 무기로 삼았다. 그가 여직원에게 전화로 여론조사 수치 조작을 지시하는 듯한 녹음이 공개됐다. 그는 선거 때 수시로 윤 대통령 부부와 전화와 문자를 했다고 주장했다. “(나를 구속하면) 한 달이면 (윤 대통령이) 하야하고 탄핵일 텐데 감당되겠나. 감당되면 하라고 할 것”이라고 큰 소리쳤다.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이 구속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자, 김 여사가 보낸 문자를 공개했다. “우리 오빠 용서해 줘, 무식하면 원래 그래, 지가 뭘 안다고”. 그러면서 김 최고위원이 방송에 나오면 매일 새로운 문자를 공개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김 최고위원은 바로 방송출연을 중단했다. 이 명 씨가 윤 대통령 부부에게 접근하고, 귀를 잡은 수단도 여론조사다. 여론조사가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오늘 만난다. 가장 큰 논점이 김건희 여사 특검이다. 지난주 한국갤럽 조사에서 63%가 찬성했다. 이게 여론의 압력으로 작용한다. 원전을 할 건지 말건지, 국민연금을 몇 %나 올릴 건지, 온갖 사회적 이슈를 여론조사로 물어본다. 그런데 정말 제대로 조사한 여론인가. 심지어 명 씨는 “나한테오면 3개월이면 대통령 만든다”라고 큰소리쳤다. 정당 공천도 여론조사로 결정한다. 다른 요소가 있어도 여론조사가 결정적 힘이다. 오차 범위 안의 차이라도 승패가 갈라진다. 총선 때 여론조사는커녕 가장 정확하다는 출구조사도 맞힌 적이 없다. 그런데도 정확한지 여부는 불문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정몽준 후보는 여론조사로 단일화했다. 국회의원 후보는 물론 대통령 후보까지 여론조사가 결정하는 세상이다. 후보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 사람은 다수에 잘 휩쓸린다.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다른 사람이 하는 건 나도 해야 직성이 풀린다. 명품 가방을 다른 나라보다 비싸게 팔아도 오픈런 하는 이유다. 선거 때는 여론조사에만 관심이다. 여론조사에서 우세를 보이면 ‘밴드웨건 효과’가 나타난다. 열세 후보 지지자는 지레 투표를 포기하기도 한다. 사표(死票)를 만들지 않으려는 심리다. 그럴수록 여론조사가 엄정해야 한다. 낮은 응답률, 균형이 맞지 않은 표본은 가중치를 조정한다. 이걸 ‘마사지’라고 부른다. ‘마사지’가 조작의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석 달이면 대통령을 만드는 바람몰이가 되어서도 안 된다. 이런 조작술에 민주주의를, 나라의 운명을 맡겨놓을 수는 없다. 김진국 △1959년 11월 30일 경남 밀양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현)경북매일신문 고문 △중앙일보 대기자, 중앙일보 논설주간, 제15대 관훈클럽정신영기금 이사장,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부회장 역임

2024-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