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을 문학이 죽어버린 시대라 하지만, 6·25를 전후한 무렵은 `문학이 살아 있던 때`였다. `청록파`가 태동했으며 김소월·박목월·청마·정지용이 큰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그 후 시는 점점 독자를 잃어갔다. `주지주의`라는 이상한 외국 이론이 들어오면서 암호문 같은 시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그 독소를 걷어내는데 30년 이상 걸렸고, 지금 비로소 `말이 되는 시`로 돌아오고 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가 생겼다. 소설이 이제 그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다. “신춘문예 당선작을 제대로 다 읽어본 적이 없다. 몇 번 시도했다가 포기했다”고 말하는 독자가 많다. “즐길 거리가 차고 넘치는데 왜 그런 골치 아픈 소설을 읽겠는가”라는 소리도 들린다. 시가 간신히 살아나니 이제 소설이 자결하려 한다. 그래서 “한국의 문학은 6·25 무렵에 머물러 있다”는 인식과 함께 `문학이 외면받는 시대`가 됐다. 그러다가 `문학진흥법`에 따라 `국립한국문학관`을 건립하겠다 하자, 여기저기서 “우리지역이 최적이다”하고 나선다.20여개 광역자치단체들이 나서는데 대구시는 이상화, 현진건, 이육사 등을 내세우며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강릉은 허균 허난설헌 김시습을, 원주는 박경리를, 춘천은 김유정, 파주시는 국내 최대 출판도시라는 점을, 전남 장흥은 많은 시인 소설가를 배출한 문향이란 점을, 인천은 근대문학관이 이미 있다는 점을, 서울 은평구는 많은 문인들과의 연고를 내세워 `문학테마파크`를 만들겠다고 한다.문학은 인기 없지만, 건립비와 유지비를 국가가 부담하는 문학관이라, 경합이 치열하다. 국문학 연구자들이 자료를 찾기 쉽고, 학생들의 학습체험장이 될 수 있고, 다양한 문학행사를 벌일 수도 있는 시설이다.국립한국문학관의 입지는 `접근성·문인 연고성·균형발전·역사성` 등이 고려돼야 한다. 여기서 대구광역시는 `역사성`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피난문학`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6·25때 수많은 문인들이 대구 향촌동에 운집했었다. 그래서 `골목역사투어`의 코스가 문인들의 고택, 다방, 음악실, 주막이다. 구상 시인과 함께 화가 이중섭도 왔고, 청마 유치환도 합류했으며 해방되던 해에 국내 최초로 죽순시인동인이 결성됐고, 1946년에는 `죽순`, `아동` 같은 문학지가 탄생했다. 또 1948년에는 한국 최초의 문학비인 `이상화 시비`가 세워졌다.한국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전후문학`이다. 그 고난의 시대를 문인들이 어떻게 살아냈던가를 살펴보지 않고는 한국문학을 논할 수 없다. 그 시대의 눈물겹던 곡절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작품들은 바로 `한국문학의 핵심`이다. 그 `자료의 현장`에 국립문학관이 서는 것은 궁합이 잘 맞는 일이다.
2016-05-10